진흙속의연꽃

법성(法性)과 불성(佛性), 그리고 주시 하는 자

담마다사 이병욱 2010. 12. 7. 10:47

 

 

 

 

 

법성(法性)과 불성(佛性), 주시 하는 자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을까

 

일을 하면서 종종 법문을 듣는다. 주로 불교tv를 통해서이다. 일을 하면서 귀로는 법문을 듣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일의 특성상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과정이 있는 가 하면 마치 밭가는것 과 같이 단순작업을 할 경우도 있다. 법문을 들을 때는 물론 단순작업을 할 때이다.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작업의 경우 법문을 들어도 법문이 귀에 들어 오지 않는다. 이 것을 보면 한 순간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다. 그렇다면 단순작업을 할 때 법문이 귀에 들어 오는 것은 어떤 현상일까.

 

흔히 학생들이 라디오나 mp3를 켜 놓고 음악을 들으면서 공부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제대로 집중을 할 수 없어서 공부의 능률이 오르지 않을 것이다. 한 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음악을 들으면서 공부 한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그러나 단순 반복 작업을 할 경우 그 것이 가능하다.

 

고도의 집중을 요하지 않는 단순반복작업은 일을 하는 중간에 음악이든, 법문이든 들으면 귀에 들어 온다. 그러나 법문의 경우 전 내용을 기억 할 수 없고, 가장 인상적인 일부의 내용만 기억이 날 것이다. 그런 법문 중에 귀에 띄는법문은 다시 듣기로 듣는다. 그리고 녹취하여 글을 쓰는데 사용 한다. 그렇게 할 경우 그 법문은 약 10번 가량 되새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선사들의 법문은 녹취하여 글의 소재로 사용 할 수 있을 정도로 감동적인 법문은 매우 희귀하다.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한 생각 일어나면 번뇌이고 망념이다.”불교tv에서 어느 선사의 법문 제목이다. 10대 중반 어려서 출가하여 역시 10대 때 득도 하였다고 자막에 소개 된 선사의 법문을 들어 보면 주로 마음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업과 마음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말하면서 업의 앞잡이가 되어 생사윤회를 거듭 한다고 말하며, 죽고 새로 태어 나는 것을 마치 새옷을 갈아 입듯이 몸만 바꾸는것으로 이야기 한다. 또 선사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이 인연이다. 모든 것은 인연따라생기고 인연따라 멸한다는 인연따라 법문이다. 이 인연법에 따르면 모든 만남과 헤어짐, 길흉화복도 모두 인연따라 생기는 것으로 본다.

 

이처럼 우리나라 선사들이 즐겨 사용 하는 단어가 업, 마음, 인연과 같은 말이다. 이런 용어를 사용 하여 주어진 법문시간을 다 사용하지만 다 듣고 난 후에 남는 것이 별로 없는 듯한 느낌이다.

 

좋은 말, 마음에 남는 말, 주요한 말들을 노트 하려 하지만 쓸 것이 없다면 그다지 감명 깊은 법문이라 볼 수 있다. 선사들이 법문 시간을 다 채워 가면서 업과 마음과, 인연법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만 왜 그다지 가슴에 남는 법문이 되지 않을까.

 

아마도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삶의 과정에서 겪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담겨 있는 무상, , 무아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음이 주된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선사들은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할까.

 

한 물건, 그 분, 동그라미

 

선사들은 법문에서 업과 마음, 인연과 더불어 빼놓지 않고 말하는 것이 진여또는 불성과 같은 말이다. 자신의 마음을 자꾸 비워 나가다 보면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이 드러 나는 데,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치 갓 태어난 아기의 마음과 같은 본래의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이 것을 본래면목, 진여, 불성, 법성, 참나등으로 부른다. 본래 공사상으로 부터 유래된 그 용어들은 자신의 마음과 함께 항상 존재 하는 것으로서 존재 그 자체라고도 말하고, 선사들은 여러 형태로 이름을 지어 부른다. 그 중에 한 물건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다.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

 (선가귀감)

 

 

이처럼 한 물건은 한 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본래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존재 그 자체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설명할 수 없어서 그냥 한 물건으로 보는 것이다. 그 한 물건이란 또 어떻게 표현 되고 있을까.

 

 

東山演師祖曰,            동산연사조왈

釋迦彌勒 猶是他奴.     석가미륵 유시타노 

且道, 他是阿誰.          차도  타시아수


동산의 법연 선사가 말하였다.
“석가도 미륵도 오히려 그의 종이다.

자아, 말해보라.

그는 대체 누구냐?
(
무문관 45)

 

 

석가모니 부처님도 앞으로 오실 미륵 부처님도 그의 종이라 한다. 그렇다면 대체 그는 누구 일까. 이에 대하여 무문관강설(무산본각 지음)’에서 저자는 그 분을 불성이라고 표현 하였다.

 

언어가 끊어지고 분별이 통하지 않는 그런 경계를 그저 그 분, 한 물건, 불성, 진여, 참나, 자성, 본래면목, 법성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른다. 그런 경계를 맛 본 이들이 중국의 조사에만 있었을까.

 

중동의 사막지대 부족이었다면 그를 야훼 또는 알라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명칭으로 창조주라 불렀을 것이다. 고대 중국이었다면 상제로, 우리나라 무속인들이라면 장군님이나 동자님으로 불렀을 것이다.

 

석가도 미륵도 마치 종처럼 부려먹는 그는 또 동그라미로도 표현 된다. 월호스님은 불교tv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들어 법문하였다.  

 

 

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고불미생전 응연일상원

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           석가유미회 가섭기능전

 

옛 부처님 나기 전에 의젓한 동그라미

석가도 모르는데 가섭이 어찌 전하랴

(직지심경 134, 월호스님의 생활법문 <행복창조>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1&PID=P597)

 

 

부처님이 출현하기 이전에도 존재 하고 있었던 그 것동그라미(一相圓, 일상원)’로 표현한 것이다.  그 동그라미를 석가모니 부처님도 몰랐는데 가섭과 같은 부처님의 제자 역시 알았을 리 없다는 이야기이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자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 부처님 조차 몰랐던 바로 그 것은 밝고 신령스런 한 물건’, ‘그 분’, ‘그 것’으로 표현 되는데, 중국불교에서는 법성이나 불성으로 표현 된다. 그래서 최근 bbs불교방송의 마음으로 듣는 음악 프로를 들으면 방송의 마지막 멘트에 다음과 같은 말을 매번 듣기에 이르렀다.

 

 

“당신과 내안의 신성한 빛, 거룩한 불성(佛性) 앞에 경배 올립니다”

 

 

불성이 왜 밝고 신성한 빛이고, 인격체처럼 거룩하고 더구나 경배의 대상이 될까. 불교도들의 경배의 대상은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로서 삼보가 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느데,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전혀 보이지 않는 불성이 나오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불교tv 사이트에서 법문과 강좌를 찾아 보았다.

 

성본스님의 선불교 특강에서

 

이미 종영된 프로중에 성본스님의 선불교에 대한 강좌가 있다. 그 강의에서 중국에서 발생한 선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중국인의 현실긍정사상과 노장의 무위자연사상을 결합하여 만든 것이 선사상이다.”

(성본스님의 선불교 특강,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5&PID=P455)

 

 

중국선종연구로 선학 분야의 권위자로 잘 알려진 동국대 선학과 교수이기도 한 성본스님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인도의 불교를 이해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논리적인 인도불교를 현실적인 사고 를 가진 중국인들이 이해 하는 데 어려움이 많아 도시(圖示)적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는데, 그런 방법중의 하나가 공사상을 하나의 원()으로 표현 한 것이다. 변상도 같은 것이다. 

 

또한 중국의 충효사상을 바탕으로 중국인들의 현실에 맞도록 만든 경전이 우란분경과 같은 위경(僞經)’이다. 이런 위경에 대하여 성본스님은 사람이 만든 경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위경은 가장 중국적인 경전이라는 것이다.

 

중국인들의 현실긍정사상과 노장의 무위자연사상이 결합하여 선사상이 만들어 졌듯이, 이 선사상을 토대로 하여 만들어진 경전이 능엄경, 원각경, 금강삼매경과 같은 위경이라고 스님은 설명한다.

 

앞서 언급한 직지심경의 동그라미(일상원)은 공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진여 또는 불성이라 볼 수 있다. 그런 불성 또한 중국인의 현실중시 사상의 바탕하에 오로지 중국에서만 출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법성(法性)과 불성(佛性)

 

그런 불성을 부처님도 모르고 부처님의 제자돌 몰랐기 때문에 무문관 45칙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도 미래의 미륵 부처님도 그의 종이라고 표현 하였다. 인도불교에서도 나오지 않는 불성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김종욱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공과 묘유를 뛰어 넘어 여여하고, 진여이고, 여실한 것을 제법실상이라 하는데, 이 것의 성품이 사물에 드러나면 법성(法性)이라 하고, 인간에 드러나면 불성(佛性)이라 한다.

(김종욱 교수의 불교로 이해하는 현대철학,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5&PID=P509)

 

 

법성과 불성은 모두 공사상을 기반으로 함을 알 수 있다. 비우고 또 비워서 진공(眞空)’이 되면 그 진공 속에 존재 그 자체가 드러나게 되어 있는데 이를 묘유(妙有)’라 한다. 강한 부정으로 대긍정이 되어 산은 산이 아니었던 것이, 산은 역시 산이다와 같은 식으로 되는 것이라 본다.

 

이처럼 존재 그 자체를 진여(眞如, 진실로 같다), 여여(如如, 같고도 같다), 여실(如實, 진실로 있는 그대로 이다)로 표현하는데 이 것을 실상(實相)이라 한다.  따라서 모든 법의 실상을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하고, 이를 다른 말로 법성(法性)이라 한다. 그런데 성품 ()’자가 들어 가면 중국식 불교의 전형이라 는 것이다.

 

인도불교에서 사용된 여래장(如來藏, tathāgatagarbha)의 경우 ()’자는 부처가 될 가능성을 말하지만, 중국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에서의 성품은 이미 다 갖추어져 있다는 이야기이다. 바로 이런 부분이 중국인들의 현실주의 적 성향이 강하게 반영 된 것으로 본다.

 

그런 성품이 사물에 드러나면 법성(法性)’이 되고, 인간에게 드러나면 불성(佛性)’이 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들 성품이 인격화되면 무엇이라 부를까.

 

일어 나는 모든 것을주시하는 자

 

일반적으로 대승불교에서 법성이 인격화 된 것을 법신(法身)’으로 본다. 산스크리트어로 이를 바이로차나(Vairocana)’라 한다. 법보종찰인 해인사에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는 데 그 부처님이 법신불인 것이다. 그렇다면 불성이 인격화 된 것은 무엇일까. 그 것은 아마도 진아(眞我)’일 것이다.

 

진짜 나라는 의미의 진아를 순수한 우리말로 표현 하면 참나가 될 것이다. 그래서 일까 불교방송의 마음으로 듣는 음악프로에서 불성과 참나에 대한 낭송문을 보면 어떻게 인격화 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 중 참나에 관한 낭송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자비로 지켜 보는 의식이 있으니  
항상 거기에 있어 왔고,
언제나 현존 하는 것이 참나이다.
그 것은 몸도 아니고, 생각도 아니고,
감정도 아니고, 대상도 아니고,
세상도 아니고, 보이는 것도 아니다.
참나는 영원히 현존하여 보는 자이고,
일어 나는 모든 것을 주시하는 자이고,

.

.

(bbs불교방송의 마음으로 듣는 음악, 정목스님의 낭송문)

 

 

 

 

 

 

 

바이욘(Bayon)

캄보디아의 유적.

 보살 로케스바라가 자비로운 미소로 내려다 보고 있다.

The face of the Bodhisattva Lokesvara looks
with a benevolent smile.

출처 : http://www.tropicalisland.de/cambodia.html

 

 

 

 

bbs불교방송에서 정목스님이 전국의 불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낭송하던 참나에 대한 것이다. 불성의 다른 이름인 참나는 항상 거기에 있어 왔기 때문에 존재 그 자체이고, 그 참나는 그렇다고 해서 몸도 아니고, 보이는 것도 아니고, 세상도 아니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 참나는 영원히 존재하며, 늘 우리의 일상을 지켜 보는 이라 말한다.

 

공사상이 참나로

 

항상 지켜 보는 이는 지역이나 민족 또는 문화에 따라 하느님, 비로자나, 야훼, 알라, 창조주, 장군님, 동자님, 한 물건, 그 분, 주님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워 질 것이다. 그 중에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도 해당 된다고 볼 수 있다.

 

관자재보살의 산스크리트어 명칭이 아발로키테스바라(Avalokitesvara)’인데, 영문판 위키피디아의 해설(Avalokitesvara,  http://en.wikipedia.org/wiki/Avalokite%C5%9Bvara)에 따르면, 에스바라(esvara)라는 말은 세상을 주시하는 주인님(lord who gazes down at the world)’이라는 뜻이 되어, 원인 없이 존재 하는 존재 그 자체가 인격화 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산스크리트어로 세상이라는 로케(loke)’와 주시하는 주인님이라는 뜻의 에스바라(esvara)’가 결합되면 로케스바라(lokesvara)’가 되는데, 이는 세상을 주시 하는 주님이 된다.  정목스님이 방송에 낭송 하였던 참나가 영원히 현존하여 보는 자이고, 일어 나는 모든 것을 주시 하는 자로 표현 한 것을 보면 로케스바라와 크게 다르지 않게 여겨진다. 

 

이처럼 공사상이 발전 되어 방송에서 급기야 이 세상에서 일어 나는 모든 것을 주시하는 참나(불성)에게 경배하자는 방송이 되기에 이르렀다.

 

선사들은 왜 자신의 이야기만 할까

 

한국의 대승불교에 있어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 자리는 별로 없다. 대신 그 자리에 관세음보살이나 불성등이 차지 하고 있어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 자체는 보이지 않는다.

 

무문관45칙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석가도 미륵도 그 분의 종이고, 더구나 부처님은 물론 부처님의 제자들도 몰랐다는 일상원(동그라미)앞에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은 통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일까 선사들은 한 물건과 일상원(동그라미)에 대하여 갖가지 해석을 가한다. 대표적으로 월호스님을 들 수 있다. 선학박사로 잘 알려져 있는 월호스님은 불교tv의 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한 물건이라는 것이 이름을 지을 수 없고 모양을 그릴 수 없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어떠한 이름을 붙일 수 있고 또 어떠한 모양으로 그릴 수도 있다. 따라서 눈앞에 드러난 현상계가 모두 불성이고, 내 몸뚱아리를 포함하여 전 우주가 ‘본마음’ ‘참나’에서 나온다

(월호스님의 생활법문 <행복창조>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1&PID=P597)

 

 

아마도 이 말이 현재 한국불교의 선사들이 하는 법문의 내용을 이해 하는 데 있어서 핵심을 짚어 주는 말이라 볼 수 있다. 선사들이 경전에 근거하여 법문하기 보다 왜 자신의 이야기 위주의 법문을 하는 지에 대한 증거가 될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된다고 말한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깨달은자가 이야기 하면 모두 불설(佛說)’이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일까 대승불교에서는 대승논사들이 수 많은 대승경전을 편찬 하였고, 중국에서는 중국인들의 현실중시 사상에 맞는 수 많은 위경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그런 전통은 선사들의 법문에서 좀처럼 경전의 문구를 인용함이 없이 자신의 이야기위주의 법문을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굳이 부처님이 설한 84천 법문에 근거하여 이야기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더구나 석가나 미륵도 그 분의 종이고, 석가도 모르고 석가의 제자도 몰랐던 그 동그라미기에 더욱 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의존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지 모른다.

 

그 한 물건이라는 것이 이름을 지을 수 없고, 모양도 그릴 수 없다면 역설적으로 그 한 물건을 본 사람은 어떠한 이름도 붙일 수 있고, 어떠한 모양도 그릴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는 것이 월호스님의 말이다. 왜 한국의 선사들이 거리낌 없이 무애행을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 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부처님 보다 불성을 경배하고 오로지 마음에 대하여만 이야기 할까. 선사들이 말하는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마음 만능주의

 

한국불교에서 선사들은 예외 없이 마음에 대하여 한 마디씩 한다. 법문에서 업과 마음을 빼 놓으면 법문이 성립이 되지 않을 정도로 한국불교에서 있어서 마음은 약방의 감초이자 만병통치약과 같다. 좋지 않게 이야기 하면 업타령과 마음타령을 하다 보면 주어진 법문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런 마음은 항상 일체유심조로서의 마음이다.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다. 따라서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내고, 또한 모든 것을 파괴하기도 한다.

 

이런 마음 만능주의는 두가지 마음으로 분류 된다. 하나는 불성과 같은 순수하고 원래 부터 있었던 존재 그 자체로서의 마음이고, 또 하나는 오염된 마음이다. 원래 하나이었던 마음이 오염됨에 따라 세세생생 윤회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한 생각 일으키면 번뇌이고 망념이라고 말한다.

 

번뇌와 망념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항상 삼매에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눈을 뜨는 순간 형상을 취하게 되고 온 갖 번뇌 망념이 떠 오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무념(無念)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현실을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진짜 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일까.

 

한 생각을 일으킨다거나 마음을 쉰다거나 하는 것은 마음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 만능주의가 나오게 되었다. 그렇다면 진짜 내가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을까.

 

마음은 내 것일까

 

삶을 살아 가면서 삼매에 들지 않는 한 여섯가지 감각기관은 항상 여섯가지 감각 대상에 부딪치게 되어 있다. 그 과정에서 마음이 생겨 나는 것이다. 마음은 결코 저절로 생겨 나지 않는다. 또 생각을 일부로 만들어 마음을 일으킬 수도 없다.

 

마음은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발생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초기불교의 관점이다. 따라서 내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마음 만능주의를 주장하는 마하야나와 크게 다르다. 그렇다면 마음만능주의는 왜 생겨난 것일까.

 

그 것은 이세상과 자아가 영원하다는 상견(常見)에 바탕에 둔다고 볼 수 있다. 상견이 일어나는 원인은 자아가 있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을 마음먹은 대로 내 뜻대로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진짜 그럴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영원한 자아가 있다면 몸이 병들지도 않을 것이고,

육신에게 이렇게 되라 또는

이렇게 되지 말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22 칸다, 상윳따 니까야 59, 마하왁가 1)

 

 

부처님이 설한 5부 니까야 중에 가장 고층(古層)에 속한다는 상윳따니까야에 나와 있는 말이다. 만일 영원한 자아가 있다면 내몸과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불면증에 걸려 잠이 오지 않을 때 몸과 마음이 내 것이라면 잠이 와야 할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이 몸이 진정 내것 이라면 죽음도 극복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느 것 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행위를 하기 위한 의도 마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도둑놈이 도둑질이 나쁜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도둑질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몸과 마음이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구의 것일까. ‘조건 발생으로 본다. 도둑질을 하는 것도 축적된 성향에 기인한다. 지은 업대로 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지은 잠재성향과 축적된 성향등의 조건이 맞았을 때 한 생각이 일어나 행동에 옮기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몸도 내 것이 아니고, 느낌도 내것이 아니고, 지각, 형성, 의식도 내것이 아니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색수상행식이 내 것이 아니라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감동적인 법문은

 

오늘 날 한국불교에는 두 가지 불교가 공존하고 있다. 기존의 마하야나와 최근 도입된 초기불교이다. 그런데 그 가르침의 내용을 보면 너무 상반된 것이라 불자들은 커다란 혼란을 느낀다.

 

한 편에서는 법신상주와 실유불성, (), (), ()를 이야기 하고, 또 한 편에서는 무상, ,무아와 열반을 이야기 한다. 한 편에서는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내고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마음 만능 주의를 이야기하고, 또 한 편에서는 그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고 일시적인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마음으로 보고 마음집중과 마음챙김, 알아차림을 강조 한다. 이런 혼란은 시간이 지나면 수습 될 것으로 본다. 불자들이 많이 알고, 많이 깨우치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쪽이 주류를 차지 하게 될 것이다.

 

선사들의 법문은 그다지 감동을 주지 못 한다. 법문을 들음으로 인하여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이 세상을 새롭게 보는 안목이 생길 정도의 법문이라기 보다 하나의 믿음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에 가깝다. “한 생각 일어나면 번뇌고 망상이다라거나 “당신과 내안의 신성한 빛, 거룩한 불성 앞에 경배 올립니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 것은 중국에 불교가 전래될 당시 인도불교의 논리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이해 하지 못한 데서 발생된 것으로 보여진다. 대표적으로 옛 부처님 나기 전에 의젓한 동그라미, 석가도 모르는데 가섭이 어찌 전하랴라는 직지심경의 문구는 부처님이 동그라미를 선사들 보다 몰라서 만들어진 문구라기 보다, 오히려 선사들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몰라서 나온 문구로 보여 진다.

 

그러나 부처님의 말씀을 접하면 마음이 혁명적으로 바뀔 수 있다. 초기불교 경전에서도 “무엇이든지 생긴 것은 모두 소멸한다”와 같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티끌 없는 진리의 눈이 열렸다”든가 하는 장면을 많이 보게 된다. 또 무상하고 수시로 변하는 것을 두고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라고 인식하며 무상, , 무아의 통찰지가 열렸을 때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게 되어 욕망과 해탈하게 되었다라는 초기경전의 문구를 많이 접한다. 그럴 경우 초기불교 경전에서 다음과 같은 ‘정형구’를 볼 수 있다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 하지 않는다.”

 

 

이 것은 존재에 대한 갈애와 비 존재에 대한 갈애를 극복한 것이다. 이 세상과 자아는 영원한 것이라는 존재에 대한 갈애가 남아 있다면 영원에 대한 집착을 할 것이고, 반면에 비 존재에 대한 갈애는 죽으면 끝이라는 단멸에 대한 집착을 할 것이다. 이 모두가 자아를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섯무더기의 모임으로 보고 단지 나라는 것이 오온의 상호작용내지 조건 발생으로 본다면 상견과 단견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단지 있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 되기 때문이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여실지견(如實之見, Yathā-bhūta-ñāna)’이라 한다.

 

그러나 대승에서 말하는 여실(如實)’은 초기불교와 다르다. 대승에서 말하는 여실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여여(如如), 진여(眞如)와 같은 것이어서 진실로 있는 그대로이다라는 뜻이다. 이 여실은 제법실상과 같은 것이고, 결국 법성과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현상을 존재 그 자체로 보기 때문에 (), (), ()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초기불교에서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형성된 모든 것들은 변하기 때문에 무상(無常)하고 슬프고() 실체가 없는 것(無我)이라는 것을 통찰 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보았을 때 모든 고통에서 해방 될 수 있다고 부처님은 말씀 하셨다. 바로 이런 법문이 감동스런 법문이 아닐까.

 

 

 

 

2010-12-0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