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목에 꽃이 피었다! 산천초목의 성불과 드 높은 담마(Dhamma)
행운목에 꽃이 피었다. 꽃이 피리라고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꽃대’가 보이기 시작 한 것이다. 그리고 몇일 후 꽃대가 마치 “쑤~욱” 내미는 것 처럼 ‘기적’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행운목을 가져다 놓은 것은 만 3년 되었다. 새로 임대한 사무실의 한쪽 공간을 채우기 위하여, 장식하기 위하여, 생명이 있는 것을 놓음으로 인하여 활력을 주기 위하여 꽃집에서 사온 것이다.
행운목을 사 올 당시 차의 앞 좌석에 들어 갈 정도로 작았으나 만 3년이 지난 지금은 차에 들어 갈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자랐다. 그렇게 자라기 까지 물을 준 것 밖에 없다. 그리고 도중에 분갈이 한 번 한 것이 전부이다. 그런 행운목에서 꽃을 피워 낸 것이다.
행운을 가져다 주는 나무
흔히 행운목은 ‘행운을 가져다 주는 나무’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꽃이 피면 ‘커다란 행운’이 찾아 온다고 해서 행운목이라는 이름이 붙여 졌다고 한다. 그런 행운목을 영어로 ‘럭키트리(lucky tree)’라 한다. 그러나 인터넷 검색결과 그런 이름은 없었다. 대신 행운목의 국제적 명칭은 ‘Dracaena’로 부른다.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Dracaena는 ‘드러시너’로 발음된다. 이런 행운목은 약 40여종이 있고, Ruscaceae과의 다육식물로 분류 된다. 즉, 물을 저장할 수 있도록 적응된 다육질의 두꺼운 조직을 지닌 식물을 말한다.
행운목의 원산지는 대부분 아프리카이지만 남아시아에 약간 있고, 열대의 중앙아메리카에도 한 종이 있다. 이런 행운목과 매우 유사한 종이 있는데 그 것을 ‘산세비에라(Sanseviera)’라 하며 최근에 드러시너(행운목)의 유사어로 사용 되어 지고 있다.
드러시너 리플렉사
Dracaena reflexa
“Song of India” 라 부르는 행운목의 한 종류
사진 : http://en.wikipedia.org/wiki/File:Dracaena_reflexa.JPG
도시의 들개 마냥
행운목에서 꽃이 핀 것은 처음 보았다. 이제까지 수 많은 꽃을 보았지만 사무실에 있는 행운목에서 꽃이 피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 것은 내 사무실에 있는 내 나무에서 꽃이 피었다는 의미와도 같은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흔히 하는 말 중에 남자는 가정과 직장이 없으면 ‘방황’하게 되어 있다라는 말이 있다. 이런 현상은 여성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어떤 연유로 인하여 직장을 그만 두게 되었을 때 누구나 방황하게 된다. 마치 ‘도시의 들개’ 마냥 일거리를 찾아 돌아 다녀 보지만 어느 곳에서도 받아 주는 곳이 없다면 절망하게 된다. 더구나 혼자 몸이 아닌 상황에서 ‘생활인’으로서 역할을 하려면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다.
별로 가진 것이 없고, 많이 배우지 못하고, 배경도 없고,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기란 여간 고단스럽지 않다. 설령 직장인으로 계속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자리에 붙어 있기 위하여 비굴해지기 쉽다. 그리고 지워가 높아질 수록 중상모략, 권모술수가 난무하여 자리에 붙어 있기도 쉽지 않다. 그런 구조는 대게 ‘주인’과 ‘종’의 관계로 볼 수 있다.
지금 지위가 높고 아무리 잘 나가는 직장인이라도 결국 퇴출로서 끝나는 것이 직장인의 비애이다. 주인이 아닌 종으로 살아 가는 사람들의 공통적비애가 항상 퇴출로 끝나는 것이다.
현재의 사무실에 정착하기 전까지 많은 방황이 있었다. 일자리, 일거리를 찾아 이리 저리 돌아다니기도 하고, 공동사무실을 전전 하다 작으나마 임대 사무실을 가지게 되었을 때 드디어 종이 아닌 주인으로서 생활이 시작 된 것이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있듯이 무슨 일이든지 3년을 하면 자리가 잡힌다고 한다. 그렇게 3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일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노는 것이 아니라, 일이 있으면 일을 하고 없으면 글을 쓴다. 그런 와중에 행운목에서 꽃이 핀 것이다.
왜 불성이 출현하게 되었나
행운목에서 꽃이 핀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어느 식물이든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지만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내것이라고 집착 하였을 때 그 의미는 더 특별해진다.
선사들이 하는 말 중에 ‘산천초목성불’과 “두두물물 부처 아닌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산천초목도 성불이 가능하고, 바위와 같은 것도 부처가 될 수 있을까. 중국화된 불교에서는 이를 가능한 것으로 본다.
불교tv에서 동국대 김종욱 교수의 강의 (제27강 하이데거 철학과 불교 - 진여眞如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_contents.asp?ls_StSbCode=CATPR_05&PID=P509&DPID=47923) 에 따르면 인간만이 성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다. 산천초목. 심지어 바위도 성불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이해 하려면 불성(佛性)과 법성(法性)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불성은 철저하게 중국화된 개념이다. 그런데 이런 불성의 원형은 ‘여래장 (如來藏, tathāgatagarbha)’이라는 것이다.
여래장은 인도에서 발생된 개념이다. 이런 여래장은 ‘여래’와 ‘장(藏)’의 합성어로서 ‘여래가 될 가능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 한량 없는 시간이 흐른 후에 언젠가는 성불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극히 현실주의자들인 중국인들은 이를 참지 못하고 현생에서 성불이 가능하다고 말하며 만들어낸 개념이 ‘불성(佛性)’이다.
여래장사상이 중국으로 건너간 다음에 여래장이라는 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대신 가장 중국적 용어인 불성으로 대체 된 것이다. 그런 불성은 불(佛)과 성(性)이라는 두단어 결합어이다. 이 때 ‘불(佛)’은 여래장의 여래와 같은 것이고, ‘성(性)’은 여래장의 ‘장’이 대체 된 것으로서 ‘불’은 공통이지만 ‘장’이 ‘성’으로 바뀐 것이다.
이 때 ‘성’은 불교 개념이 아닌 지극히 중국의 ‘전통사상’개념이라 볼 수 있다. 즉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불성은 불이라는 인도적 개념과 성이라는 중국적 개념의 ‘합작어’로 본다. 이는 중국에 불교가 ‘토착화’ 되었음을 의미한다.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부처를 뜻하는 ‘불(佛)’만 가지고는 중국인들에게 와 닿지 않았다. 이런 불을 ‘성품화’ 하였을 때 ‘현실성’으로 받아 들인 것이다. 이런 현실주의로서의 중국인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인간만이 불성이 있는 것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산천초목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것이 법성이다. 법에도 성품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법성은 인도불교에는 없는 이야기이다. 중국식의 확대 해석이라 볼 수 있다.
인도식 불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인도식 불교는 인간만이 성불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육도윤회를 하는 존재로서 인간만이 성불 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육도윤회 하지 않는 무정물인 초목이 어떻게 성불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중국에서는 초목도 성불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은 산천초목이 법의 성품을 본래부터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여 법성으로 보기 때문이다.
산천초목의 성불이 어떻게 가능한가
김종욱교수의 강의에 따르면 인간으로서의 고유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부처’가 되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뜰 앞의 잣나무는 어떨까. 뜰 앞의 잣나무는 그 만의 것이 잘 드러나는 것이 ‘잣나무 다움’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잣나무가 부처가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 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성의 완벽한 구현’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잣나무는 가장 잣나무 다울 때, 인간이 가장 인간 다울 때 부처가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이 부처가 되는 것이나 잣나무가 부처가 되는 것이나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유성의 발현으로 본다면 ‘바위덩어리’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바위가 가장 바위 다울 때 부처가 되는 것으로 본다. 이처럼 초목은 물론 바위덩어리에 이르기까지 “두두물물 부처가 아닌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 화엄철학이 보편화 되었을 때 나오는 것으로서 중국화된 불교의 특징이다.
이런 중국불교 철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행운목에 꽃이 피었다는 것은 행운목도 성불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행운목이라는 고유성이 발현 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운목이 부처가 될 수 없다고 생각 하는 것은 우리식으로 ‘분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행운목에서 꽃이 핀 것을 단지 꽃이 핀 것으로 생각 할 뿐, 행운목 그 자체의 고유성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인간다움과 고유성이란 무엇일까.
열매를 맺는다는 것
바위가 바위 다울 때, 행운목이 행운 목 다울 때 고유성이 잘 발휘 되며, 이를 중국불교에서는 성불했다고 표현 한다. 식물처럼 생명은 있지만 정신작용이 없는 ‘무정물’이 꽃을 피워 열매을 맺었을 경우 고유성이 잘 발현 된 것이다.
습생이나 난생, 태생과 같은 정신이 있는 ‘유정물’일 경우 생식을 하여 자손을 남긴 경우 또한 고유성이 잘 발휘 되어 중국식으로 성불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떠 할까.
사람도 태생이므로 사랑을 하여 자손을 남겼다면 그 가 할 바를 다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축생과 다름 없을 것이다. 인간이라면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성이 있을 것이다. 이를 북방대승불교에서는 ‘성불’이라고 표현 할 것이고, 초기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해탈과 열반’의 실현이다.
식물에서 꽃이 피어 열매을 맺듯이 인간 또한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다. 이를 세속적으로 표현 하면 사랑을 하여 자손을 얻는다이겠지만, 출세간적으로 표현 하면 도(道)와 과(果)로 나타낼 수 있다.
꽃이 피는 과정을 ‘도’로 본다면 열매를 ‘과’로 보는 것이다. 과를 빠알리로 ‘팔라(phala)’라 하는데, 실제로 이 ‘팔라’라는 용어는 빠알리어로 ‘열매(fruit)’라는 뜻이다. 그런 열매는 어떤 것일까.
초기불교에서 도(道, magga)를 이루어 깨달음(果, pahala)을 이룬 존재들을 사쌍팔배(四雙八輩) 의 성자라 한다. 사쌍은 네쌍의 인간들을 말하는데, 쌍으로서 첫번째 도에 선 자와 과에 선 자를 한쌍으로 만들어 네쌍의 인간들이 있는 것을 말한다. 팔배는 여덟단계의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인간으로서 첫 번째 도에 선자를 하나로 만들고 또 과에 선자를 하나로 만들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여덟사람이 있는 것을 말한다.
초기불교에서 열매는 네가지 성자 (ariya-puggala)즉, 수다원(sotāpanna, 소따빤나), 사다함(sakadāgāmi, 사까다가미), 아나함(anāgāmi, 아나가미), 아라한(arahatta, 아라핫따)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 도와 과에 대한 설명은 개략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도(道)란 그에 상응하는 과(果)에 들어서기 직전의 한 순간의 체험을 말한다. 과는 도의 결과 즉시 뒤따르는 의식의 순간을 의미한다. 즉 도를 깨달음을 얻는 순간의 체험이라 한다면, 과는 그 순간적인 체험의 다음 순간에 얻어지는 깨달음이라는 결과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여덟 가지를 출세간의 도과라 하고 이들의 마음을 출세간의 마음(lokuttara-citta)이라 한다.
(마하시 사야도의 12연기 주석)
부처님이 베푼 드 높은 담마
물만 주었을 뿐 아무 것도 해 준 것이 없는 행운목에서 꽃을 피웠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늘상 보는 꽃들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깊은 눈길을 주지 않지만 꽃이 핀 행운목은 이미 ‘내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에 관심 있게 지켜 보는 것이다. 그런 꽃도 때가 되면 시들 것이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10일이 지나면 시들고 마는데, 다행스럽게도 행운목은 한 달 가량 유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다. 그러니 이 무상한 것들이 어떻게 영원하기를 바라겠는가?”라는 말처럼 결국 시들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꽃을 피웠다는 것은 자신의 할 바를 다한 것이다. 초목성불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런 의미에서 행운목도 성불 한 것이다. 이렇듯 초목도 자신의 할 바를 다 하는데 사람이라면 역시 할 바를 다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라면 초기경전에 나와 있는 말씀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Vanappagumbe yathā phussitagge 와납빠굼베 야타- 풋시딱게
Gimhānamāse paṭamasmiṃgimhe, 마-나마-세 빠타마스밍 기메
Tathūpamaṃdhammavaraṃadesayi 따투-빠망 담마와랑 아데새이
Nibbānagāmiṃparamaṃhitāya, 닙바-나가-밍 빠라망 히따-야
Idampi buddhe ratanaṃpaṇtaṃ 이담삐 붓데 라따낭 빠니-땅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무더운 여름철이 시작 되면,
키 높은 나무 위에 피어난 꽃처럼,
부처님이 베푼 드 높은 담마는
열반으로 인도하고 최상의 행복을 준다네!
붓다는 이 세상 제일가는 보배!
이러한 진리로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숫따니빠따 제2장 작은 법문의 품, 보배의 경-Ratana sutta 12게송에서)
보배경(보석경, ratana sutta)
음악동영상중 12번 게송
음성
宝石经与吉祥胜利偈 黄慧音 宝石经(27분, 2회, 38Mbyte)
宝石经 黄慧音 佛教歌曲网 (27분, 2회, 38Mbyte)
부처님이 베푸신 담마를 철저하게 배우고 닦고 연마하고 수행하면 이는 궁극적으로 닙바나로 인도 하고 최상의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가르침이다.
2010-12-1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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