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종교가 뒤바뀐 나라, 4대강 예산과 템플스테이
“불교계가 뿔났다”최근 언론매체마다 보도한 내용이다. 3년 연속 ‘날치기’로 처리된 내년 예산 중에 ‘템플스테이’와 관련된 예산이 대폭적으로 삭감 됨에 따라 조계종에서 산문폐쇄를 검토하고, 정부와 여당 인사들의 출입을 막는다는 강경한 성명서가 발표 되었기 때문이다.
출입금지
▲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주지 토진 스님)는 12월9일 일주문에
정부와 여당 관계자의 조계사 출입을 금하는 현수막을 내걸었다.(법보신문)
출처 :http://www.beopbo.com/news/view.html?section=1&category=112&no=63818
이를 두고 현 총무원 집행부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과연 ‘몇 일’이나 가겠는가 하는 냉소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한다. 총무원이 지난 봄에 벌어진 ‘봉은사 직영전환’ 문제로 정치권과 야합하여 정부에 비판적인 스님을 몰아 내는데 앞장서는가 하면, 사대강 사업등과 같이 목소리를 내야 할 때는 침묵 하고 있다가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템플스테이 예산이 대폭 깍이자 정부에 대하여 초강경 모드로 전환 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조계종의 종단정치
조계종 총무원은 우리나라 불교를 대표하는 단체이다. 그런데 종종 정치적인 행보를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종단정치’를 한다고 한다. 그런 종단정치는 뿌리는 어디서 연유 하는 것일까.
조계종은 지난 90년대 두 번의 큰 사건을 겪었다. 94년의 ‘종단개혁’과 청사만 점거 하면 쿠데타는 성공할 것이라 믿었던 98년의 참담하고 참혹한 ‘종단사태’를 말한다. 그 중 94년 종단개혁의 산물이 총무원장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권한을 분산 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총무원장을 ‘직선’으로 선출하고, 국회격인 중앙종회의 권한을 대폭적으로 강화 하였다. 그 결과 불교에서 종단정치라는 말이 생겨 났을 것이다. 그런 종앙종회의 구성원은 대부분 ‘종책모임’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종책모임이란 무엇인가.
종책모임은 조계종에서만 볼 수 있는 ‘계파모임’이다. 마치 국회의 정당모임과도 같은 성격이다. 그래서 성향이 비슷한 종회의원스님들끼리 종책을 만들어 연대하는데, 현재 화엄회, 보림회, 무차회, 무량회 같은 모임이 있다.
이런 종책모임을 통하여 종책을 개발하기도 하지만 ‘종단정치’도 한다. 투표로 총무원장을 선출하는 것과 같은 ‘정치행위’이다. 그래서 정치권과 처럼 ‘합종연횡’이 빈번히 이루어진다. 그 결과 종권을 잡은 종책모임은 ‘여권’이 되고, 패배한 쪽은 ‘야권’이 된다. 이런 종단정치는 94년 개혁의 산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현 총무원장 스님은 투표라는 형식을 거쳤지만 4개 종책모임의 추대로 선출되었다. 그 결과 주요 보직은 4개 종책모임이 ‘나누어 먹기’ 식으로 배분 되었다. 그래서 현 총무원 집행부를 가장 정치색이 짙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일까 여권과 밀착되어 장로정권의 요구 대로 눈에 가시와 같은 개혁성향의 스님들이 모두 물러나는 결과가 되었다.
이처럼 정치성향이 농후한 현 총무원 집행부가 템플스테이 예산을 깍았다는 빌미로 정부와 여당을 상대로 상대도 하지 않겠다고 산문을 걸어 잠그고 대화를 거부 하고 있다.
장로대통령의 소명의식
장로 정권이 들어선 이래 예산이 ‘3년 연속 날치기’ 통과 되었다고 한다. 그 중 두 번이 4대강 사업과 관련해서이다. 그렇다면 장로대통령은 왜 4대강 사업에 집착할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그의 종교적 신념 또한 무시 할 수 없다.
그는 틈만 나면 언론매체를 통하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소명의식’을 강조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하여 반대 하는 야당과 시민단체, 종교단체등 야권에 대하여 모두 ‘정치적’이라거나 ‘정략적’인 것이라 하여 일축 하였다.
오로지 자신이 생각 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일종의 종교적 소명의식은 마치 종교적 ‘순교자’를 연상시킨다. 이 세상에 진리는 오직 하나 밖에 없고, 이 세상에 선(善)한 것은 오로지 자신 뿐이라는 종교적 소명의식이 국회에서 정치가 실종되는 현상을 낳게 되었다.
종교적 최선과 정치적 차선
정치와 종교는 다르다. 정치는 상대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여’가 있고 ‘야’가 있다. 또 정치는 ‘타협’이다. 상대가 있기 때문에 대화를 하고 밀고 당기는 협상을 하고 그 결과물을 내 놓는다. 따라서 정치는 ‘최선’이 아닌 항상 ‘차선’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장로대통령에게 차선은 없고 단지 ‘최선’만 있을 뿐이다. 자신의 생각이 항상 최선이기 때문에 4대강 사업도 밀어 붙이는 것이다. 그것은 명백히 종교적 소명의식의 산물이다. 만일 장로가 아닌 보통신자의 대통령이었다면 정치의 본질인 타협과 차선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종교인이기 때문에 차선은 필요 없는 것이다. 이 말은 대화와 타협이라는 민주주의 근본원칙을 부정하는 것이다.
종교는 최선을 추구한다. 따라서 종교인에게 있어서 차선이란 있을 수 없다. 종교인이 차선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그의 종교적 신념을 버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세계 어느 종교이든지 진리는 하나라고 하며, 자신의 종교가 최선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조계종 집행부를 보면 종교단체임에도 불구 하고 금년 들어 일어난 봉은사 직영전환이나 장로정권에 비판적인 스님들을 모두 몰아 낸 것은 대단히 정치적이다. 이처럼 장로정권에 휘둘리어 불자들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는 가 하면, 세상사람들의 웃음거리로 전락 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현 장로정권에 유착하다 이제 이해 관계가 틀어지니 뒤돌아 앉아 ‘투정’ 부리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종교가 종교다워야 하는데, 종교가 정치를 하려다 보니 종교본연의 임무인 최선을 추구 하기 보다, 정치권에서나 사용함직한 타협의 산물인 차선책을 쓴 결과 인 것이다.
정 반대의 길로 가는 정치와 종교
정치나 종교 모두 다수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추구하는 방법은 다르다. 정치는 상대가 있기 때문에 여와 야로 갈리고, 그에 따라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최선이 아닌 차선을 추구 하는 집단이다.
그러나 장로 대통령은 4대강 사업에서 보는 것과 같이 국회의원들을 ‘거수기’로 만들어 날치기를 강행하고, 야당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그가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정치인 대통령이라기 보다 ‘장로대통령’인 것이다.
한 편 조계종의 총무원은 종교단체임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하지 않고 정치를 하고 있다. 종교인으로서 진리에 대하여 타협을 거부 하는 최선의 모습을 보여야 하나, 반대로 이해를 따지는 정치인처럼 차선을 추구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정치와 종교가 뒤 바뀐 나라에 살고 있다.
2010-12-1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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