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쓸모 없는 논쟁과 잡담

담마다사 이병욱 2011. 2. 28. 10:52

 

 

 

쓸모 없는 논쟁과 잡담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서 느끼는 현상중의 하나는 올린 글에 대한 반응이다. 주로 댓글형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시하는데, 동감한다는 글과 공감하지 않는다는 글, 그리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립적인 글이다. 글의 내용이 대부분 불교와 관련된 것이라 댓글을 올리는 네티즌 역시 거의 대부분 불자이다.

 

토론사이트에서

 

그런데 올린 글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며 토론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주로 두가지 로 분류 되는데, 하나는 대승불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고, 또 하나는 초기불교를 신봉하되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이다.

 

대승불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이른바 영혼과 관련된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과 동떨어진 것으로서 외도의 가르침으로 의심을 받기 쉬운 것이다. 사람이 죽을 때 마치 옷을 갈아 입듯이 몸만 바꾸고 영혼은 계속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런 논쟁은 초기불교의 확산에 따라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 알려지면서 논쟁거리도 되지 않을 정도가 되었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초기불교를 신봉하되 윤회를 부정하는 회의론자이다.

 

이들의 특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입맛대로 취사선택하여 자신의 깜냥으로 판단하여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들이 크게 의지하는 것이 염처경과 같은 사념처와 관련된 경이다. 그래서 염처경외에 신통이나 삼세양중인과, 재생연결식, 심장토대등을 설명한 아비담마 논장이나 주석서를 부정한다. 오로지 자신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만 믿겠다는 것이다.

 

이들 회의론자들과의 토론이 가장 활발하게 벌어지는 곳이 인터넷토론사이트인데 대표적으로 초기불교관련 카페일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어느 네티즌이 카페에 올린 글을 보았다.

 

 

논장과 주석서에 교학적으로만 통달했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수행체험으로 꿰뚫은 성스러운 제자라야 비로소 옳은지 그른 지를 알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범부인 우리는 확언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함부로 논장과 주석서에 대한 비판을 하기도 어려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은 범부가 수행체험으로 알아보지도 않고, 이러한 징검다리 없이 자기식으로 니까야를 이해하는 것은 니까야 곳곳에 자기식 해석이 난무할 소지가 거의 100%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http://cafe.daum.net/chobul/)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판하려면 먼저 경장은 물론 논장과 주석서를 통달해야 하고, 또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스스로 실천하여 열반이라는 경지에 오른 제자들이라면 모를까, 장님이 꼬끼리 뒷다리 만지기식으로 자신의 알량한 깜냥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재단하려 하는 것은 매우 경솔한 행위라는 것이다.

 

쓸모 없는 논쟁

 

이와 같은 논쟁을 부처님은 미리 알고 계셨을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이와 같은 논쟁적인 이야기들을 삼가야 한다. ‘너는 이 가르침과 계율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나는 이 가르침과 계율을 잘 알고 있어. 이 가르침과 계율에서 네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지? 나는 바른 수행을 하고 있지만 너는 잘못된 수행을 하고 있어. 너는 앞에 말해야 할 것을 뒤에 말하고. 뒤에 말해야 할 것을 앞에 말하고 있어. 나는 핵심을 말하지만 너는 그렇게 못해. 네가 오랫동안 생각해낸 것도 거꾸로 된 거야. 너의 이론은 논박거리다. 네가 졋기 때문에 너의 이론을 살려보든지 아니면 할 수 있으면 밝혀 보시지.’라고 말하는 논쟁적인 이야기를 삼가야 한다.

(상윳따니까야 : 56 삿짜 상윳따9,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마치 토론사이트의 논쟁을 지켜 보고서 한 마디 하는 것 처럼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매우 현실적인 가르침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와 같은 논쟁은 의미가 없다고 하였다. 왜일까. 이어지는 법문은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아무런 유익함이 없으며,

거룩한 삶에 적합하지 않으며,

경계에서 멀리함으로 이끌지 않으며,

욕망의 집착을 놓음으로 이끌지 않으며,

건전치 않은 요소를 소멸함으로 이끌지 않으며,

평화, 지혜, 깨달음 그리고 열반으로 이끌지 않기 때문이다.

(상윳따니까야 : 56 삿짜 상윳따9,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부처님은 단호하게 열반으로 이끌지 않는 논쟁은 이익이 없고, 쓸데 없는 짓아라 하였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제자들은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여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

왜 나는 이런 말을 하는가?

 

이것은 유익하며

거룩한 삶의 근본에 적합하며,

경계에서 멀리함으로 이끌며,

욕망의 집착을 놓음으로 이끌며,

건전치 않은 요소를 소멸함으로 이끌며,

평화, 지혜, 깨달음 그리고 열반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상윳따니까야 : 56 삿짜 상윳따9,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부처님은 쓸데 없는 논쟁에 시간을 허비 할 것이 아니라 사성제에 대하여 이야기하여야 한다고 말씀 하셨다. 사성제는 궁극적으로 열반으로 이끄는 거룩한 진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성제 이외의 이야기는 잡담(雜談)’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잡담이란

 

토론사이트에서 열반으로 이끄는 네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으면 단지 시간과 정력만 낭비하는 잡담이 되기 쉽다. 그런데 부처님은 잡담을 하는 것에 대하여 불선업을 짓는 것이라 하였다. 잡담이 왜 불선업을 짓는 것일까.

 

우리리나라 천수경에 10악 참회를 보면 기어중죄금일참회(綺語衆罪今日懺悔)가 있다. 이를 해석한 것을 보면 아첨하는 말을 한 무거운 죄를 오늘 참회합니다라고 되어 있다. 기어(綺語)에 대한 해석을 비단결처럼 세치 혀를 놀려 아첨하거나 입에 발린말로 풀이 한 것이다. 하지만 초기불교 경전인 니까야의 해설을 보면 이와 다르다.

 

 

무엇이 바른 말인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이간질을 하지 않고, 악담을 하지 않고, 잡담을 하지 않는 것이다.

(디가니까야 : 22 마하사띠빳따나경 18-21)

 

 

팔정도에서 정어를 보면 거짓말, 이간질, 악담과 더불어 잡담하지 말 것을 이야기 한다. 이처럼 초기 경전 도처에서 잡담이라 표현 하고 있는데, 아상가 교수는 그의 불교tv 강의에서 이를 영어로 가십(gossip)이라 표현 하였고, 영문판 위키피디아를 보면 아이들 채터( idle chatter)’라고 표현하였다.

 

 

 

 

사진  : http://www.pbase.com/philip_sidran/image/91341807

 

 

  

이는 잡담또는 가벼운 이야기등을 말하고 또 다른 말로 표현 하면 쓸데 없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말하는 수다도 잡담에 해당 될 것이다. 하지만 독송용천수경에서는 이를 입에 발린말이라는 뜻의 아첨으로 표현하였을 뿐 아직까지 잡담으로 표기 된 것을 보지 못하였다.

 

잡담이 해로운 이유

 

그렇다면 잡담이 왜 해로운 것일까.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명백히 밝히셨다.

 

 

만일 누군가 나에게 쓸데없는 잡담을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기분 나쁜 일이며 유쾌한 일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내가 남에게 쓸데 없는 잡담을 한다면, 그것은 그에게 기분 나쁜 일이며 유쾌한 일이 아니다. 나에게 기분 나쁘고 유쾌한 일이 아닌 것은 남에게도 기분 나쁘고 유쾌한 일이 아니다. 나에게 기분 나쁘고 유쾌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남에게 행하랴!”

(상윳따 니까야: 55  소따빳띠 상윳따 7)

 

 

만일 누군가 나를 죽이려 하고, 내 것을 도둑질 하려 하면 기분 나쁠 것이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쓸데 없는 잡담을 걸어 온다면 기분나쁘고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라는 말이다.

 

잡담대신 법담을

 

인터넷 토론 사이트에서 벌어지는 무의미한 이야기는 잡담에 지나지 않는다. 열반과 사성제와 같은 법담(法談, Dhamma talk)을 하지 않고, 자신의 알량한 깜냥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재단하려 든다면, 이는 결국 입으로 짓는 구업(口業)’을 짓는 것임과 동시에 불선업을 짓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011-02-2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