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일체중생을 어머니로, 생매장 동영상과 불살생 계율

담마다사 이병욱 2011. 2. 24. 09:16

 

 

 

 

일체중생을 어머니로, 생매장 동영상과 불살생 계율

 

 

날씨가 풀려 야외로 나들이 간다면 도로에서 마주치는 것은 구제역방지를 위한 바리케이드이다. 도로를 막아 놓고 양쪽에서 뿜어대는 구제역방지를 위한 약품샤워를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데, 이런 장면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삭막하기 그지 없다.

 

생매장 동영상

 

구제역동영상을 보았다. 구제역이 발생한 지역에서 1,000마리가 넘는 돼지를 생매장하는 장면이다. 불교등 5개 종교단체에서 만든 이 동영상을 보면 지옥이 따로 없다. 구덩이에 포크레인으로 마구 몰아 넣는가 하면, 구덩이속에서는 돼지들의 비명이 괴기스럽게 들리는데, 이는 살려달라!”고 절규하는 것과 같은 소리이다.

 

그런 동영상을 비위가 약한사람이나 노약자, 임신부, 심장이 약한 사람등은 보지 말것을 자막으로 써 놓고 있다. 하지만 동영상의 자막에는 이 동영상이 널리 퍼져서 인간이 저지른 잘못을 널리 알리자고 또한 쓰여 있다. 그런 동영상을 공유하면 다음과 같다.

 

 

 

 

생매장 돼지들의 절규

 

 

 

 

살인과 살생

 

불교에서는 살인을 하지말자가 아니라 살생을 하지말라고 가르친다. 사람을 포함하여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불교의 핵심에 해당되며 오계중에 가장 먼저 강조되는 사항이다. 이처럼 불살생에 대하여 철저하다 보니 불자들은 벌레 하나 죽이는 것도 마음의 가책을 받을 정도이다. 하물며 축생들이 죽는 것을 보면 마치 사람이 죽는 것 같이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불교만의 독특한 내생관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와 달리 불교에서는 윤회를 믿는다. 죽고 난 뒤에도 생이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선업공덕을 많이 지으면 천상에 나고, 불선업을 많이 지으면 지옥과 같은 악처에서 난다는 것이 일반적인 가르침이다. 따라서 인간이 죽어서 소나 돼지같은 축생으로 태어 날 수 있다는 것이다. 남방불교국가인 미얀마에 다음과 같은 속담이 있다고 한다.

 

 

“범천에서 빛나더라도 돼지우리에서는 꿀꿀 거리네”

 

 

 

 

 

 

범천(Brahma)

사진  http://1stholistic.com/prayer/Hindu/hol_Hindu-brahma.htm

 

 

 

범천은 색계 초선천으로서 청정범행을 닦은 자들이 가는 천상세계이다. 그 곳에서 무량겁이라는 수명대로 살다가 선업공덕이 다하면 아래 세상으로 떨어지는데 대게 악처이다.

 

오로지 행복만 있는 범천에서 빛나는 삶을 영위한 범천중생이 수명이 다 돼어서 죽었을 때 곧바로 돼지로 태어남을 비유한 속담인데, 이는 악업이 남아 있는 한 선업공덕이 다 했을 때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악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돼지도 선처에 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지금 인간들도 죽어서 어디에 태어 날지 모른다. 다행히 악업 보다 선업공덕을 많이 쌓았다면 선처에서 나겠지만, 대부분 선업 보다 불선업을 많이 지었기 때문에 인간이하의 세계 즉,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와 같은 4악도에 태어 난다는 것이 일반적이라 한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악처에서 선처로 나는 경우이다.

 

돼지와 같은 축생이 인간이나 천상과 같은 선처에 나는 것이 과연 가능한일일까. 하지만 청정도론에서는 가능한 일이라 한다. 왜냐하면 지은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만일 업이 남아 있지 않다면 결코 다음 생을 받지 않을 것이다. 업이 남아 있지 않은 존재는 부처나 아라한이다.

 

부처나 아라한은 악업은 물론 선업도 짓지 않기 때문에 업이 없다. 이런 마음의 작용을 ‘무인작용심(kiriyā-citta)’이라 한다. 이는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말하는데 업으로 확정되지 않고 또한 업의 결과로 생산하지 않는다. 그래서 선(, kusala)이나 불선(不善, akusala)으로 판단할수 없는 무기(無記, avyākata)로 분류되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돼지가 악처에서 탈출하여 어떻게 인간이나 천상과 같은 선처에 나는 것이 가능할까. 청정도론에서는 이에 대하여 악처에서 비난할 바가 없는 업을 쌓은 자에게 앞서 설한 방법대로 비난할 바가 없는  업이나 업의 표상이 마노의 문으로 나타난다.” 고 하였다.  비록 악처에서 고통받는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그 악업이 다 했을 때 남아 있는 것은 과거 전생이 지었던 선업이 일부나마 남아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본다.

 

일체중생을 어머니로

 

지금 돼지들이 집단으로 생매장을 당하여 고통스런 죽음을 당했을지라도 그 비난할 바 없는 업을 쌓았다면 다음 생에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따라서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중생인 것이다.

 

윤회를 인정하고 윤회를 믿는 불자들은 일체중생을 언젠가 나를 한 번쯤 낳아 준 어머니로 생각할 수 있다. 지금 고통받고 있는 돼지나 소가 한량없는 윤회의 과정에 있어서 나의 어머니이었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불교의 불살생 계율이 왜 나오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삼계에 안주할 곳이 없다!

 

악업이든 선업이든 업을 짓는 한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난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런 세계는 크게 삼계로 나눌 수 있는데, 이는 욕계, 색계, 무색계를 말한다.

 

모든 존재가 때로는 선처에서 났다가 공덕이 다 소진 다면 악처에 태어 나고,  그 곳에서 비난할 바 없는 업을 지으면 다시 선처에 나곤 하는데, 이를 어떤 이는 우물에서 물을 긷는 두레박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안주 할 곳이 없다. 축생으로 태어 났다면 생매장 되어 죽을 수 있고, 사람으로 태어 났을지라도 맞아 죽을 수도 있다.

 

 

뉴스에 불과 열여섯먹은 아이들이 지나가던 또래를 마구 두들겨 패 죽였다는 끔직한 기사를 보았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군대에서 구타로 인한 사망사건, 길거리에서 단지 쳐다 본다는 이유로 살해 하는가 하면 순간적인 감정으로 인한 우발적 살인 사건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여러이유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과거 뿐만아니라 현재도 진행되고 있고, 더욱 암담한 것은 미래에도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안주할 곳이 없게 된다.

 

비록 수명대로 삶이 보장 되는 천상의 삶일지라도 죽어서 돼지로 태어나 식용으로 쓰일 살코기 제공용으로 사육되어 죽음의 콘베이어벨트에 올라 탈 수 있고, 구제역이라는 병이 걸려 집단으로 생매장을 당할 수 있다. 이렇게 삼계는 안주 할 곳이 못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어느 때 부처님은 사왓띠에 계셨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인간 가운데 저 언덕 너머(열반의 세계)로 간 사람은 매우 적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오르락내리락 한다. 잘 설해진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건너기 어려운 죽음의 영역을 지나 저 언덕에 도달하리.”

(상윳따니까야: 45 막가상윳따 34)

 

 

2011-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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