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집을 짓지 않기 위하여, 열두가지 인식의 전환
삶은 문제의 연속
삶은 항상 문제의 연속이다.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또 새로운 문제가 발생된다. 어느 경우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미결인채 남아 있기도 하다. 또 문제가 중복되기도 하여서 설상가상으로 ‘업친데 덥친격’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문제속에 살다 보면 늘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심초사하다 보면 고통과 괴로움과 불만족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로 부터 도망갈 수도 없다. 이미 벌어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숨어 버리는 것은 ‘삶의 패배자’로 간주 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삶의 승리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성공한 삶이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특히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풀리지 않은 불가항력적인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사람들은 아주 쉽게 문제를 어떤 초월적 존재에게 떠 넘겨 버린다. 유일신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창조주’에게, 대승불교를 신봉하는 사람은 자신이 좋아 하는 ‘불보살’에게 의지 한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까.
초월적존재나 불보살에게 문제를 떠 넘긴다고 해도 결국 문제는 도로 자신에게 돌아 오게 되어 있다. 한낱 개념으로 만 존재하고, 명칭으로만 불리우는 초월적 존재에게 의존한다는 것은 마치 자신이 그린 그림에 빠지는 것과 같다.
한 화가가 귀신그림을 그려 놓고 그 그림에 빠져 휘둘리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를 ‘환화(幻化)’라고 하는데, 불교tv에서 김종욱 교수가 설명하였다. 실체가 없는 것을 현재 있는 것처럼 만들어 내고 거기에 스스로 구속당하는 것을 말한다.
신도 없고 윤회를 만드는 자도 없다
자신의 마음속에 신을 만들어 놓고 철저하게 거기에 종속당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청정도론에 따르면 “업을 의지하여 업으로 부터 과보가 생길 뿐 신도 없고 범천도 없고 윤회를 만드는 자도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다는 것일까. 그 것은 오로지 ‘원인과 조건’만 있을 뿐이라 하였다. 즉, 원인과 조건에 따른 순수한 법들이 일어날 뿐이라는 것이다. 이를 게송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업으로부터 과보가 생기며
과보는 업이 그것의 근원이다.
업으로부터 다시 태어남이 있고
이렇게 해서 세상은 계속된다.
(청정도론, 제19장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
세상이 계속되는 이유를 업과 그에 따른 과보로 보는 것이다. 업을 지으면 자신의 세계를 계속 만들어 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 만든 세상에 갖혀 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그 문제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세상은 계속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까. 세상과 모든 인연을 끊고 산 좋고, 물 맑고, 공기좋은 곳으로 가서 살아야 할까. 비록 세상이라는 오염원으로 부터 멀어졌다고 할지라도 여섯가지 감각기관을 다스리지 못하면 문제 투성이의 속세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설령 눈과 귀등 다섯가지 감각의 기관의 문을 닫아 놓았다고 할지라도 마노(마음)의 문을 통하여 들어오는 생각은 어떻게 할 것인가.
슬픔과 한탄, 괴로움과 불쾌감을 없애주는
생각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한다. 스스로 일어난다고 한다.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알아차리는 방법 밖에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라고 하였다. 그것이 사념처 수행이다. 이런 사념처 수행의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몸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느낌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마음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담마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서 머문다.
사념처 수행을 하면 어떤 이득이
이렇게 사념처 수행을 하면 어떤 이득이 있을까. 경에서는 청정한 삶으로 인도하고, 슬픔과 한탄, 괴로움과 불쾌감을 없애 주고, 궁극적으로 ‘열반’에 이르게 해 준다고 하였다. 그래서 항상 지금 여기에서 알아차려야 하는데 경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앞으로 갈 때에도 돌아 설 때에도,
앞을 볼 때에도 옆을 볼 때에도,
팔다리를 굽힐 때에도,
가사를 입거나 들고 갈 때에도,
발우를 메고 갈 때에도,
음식을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볼 때에도,
대변과 소변을 볼 때에도,
걷고,
앉고,
잠들 때에도,
잠깰 때에도,
말할 때에도,
그리고 침묵할 때에도 선명한 알아차림을 가지고 행동한다.
(상윳따니까야 :47 사띠빳따나 상윳따)
밥을 먹을 때 뿐만아니라 똥을 누거나 오줌을 쌀 때도 알아차리고, 심지어 잠들 때, 잠깰 때도 알아차리라 한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침묵할 때 조차 알아차리라고 한다. 이처럼 항상 깨어 있다면 그 어떤 개념이나 명칭이 들어와서 주인행세를 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 “신도 없고 범천도 없고 윤회를 만드는 자도 없다. 원인과 조건에 따라 순수한 법들이 일어날 뿐이다.”라고 표현 하였다.
형성된 모든 것들이 단지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라는 것을 안다면, 원인 없이 존재하는 신이나 창조주는 거짓이 되고 만다. 또 우리의 몸과 마음이 순간 순간 변화하여 상속하는 정신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면 ‘나(我)’라거나 ‘나의 것’, ‘나의 자아’ 영혼 따위가 있다는 ‘유신견’이 버려질 것이라 한다.
열두가지 인식의 전환
이렇게 모든 현상이 원인과 결과에 따른 조건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안다면 항상하지 않은 것을 항상하다고 하고, 무아에 대하여 자아가 있다는 전도된 인식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괴로움을 행복이라 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깨끗하다고 하는 견해의 전도도 버릴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무상 고 무아 부정’에 대하여 ‘상락아정’이라는 전도된 인식을 버렸을 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데 그에 대한 구체적 내용을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①무상을 관찰하여 영원하다는 인식을 버린다.
②괴로움을 관찰하여 행복하다는 인식을 버린다.
③무아를 관찰하여 자아라는 인식을 버린다.
④역겨움을 관찰하여 즐거움을 버린다.
⑤탐욕의 빛바램을 관찰하여 탐욕을 버린다.
⑥소멸을 관찰하여 일어남을 버린다.
⑦놓아버림을 관찰하여 가짐을 버린다.
⑧부서짐을 관찰하여 견고하다는 인식을 버린다.
⑨사라짐을 관찰하여 쌓음을 버린다.
⑩변함을 관찰하여 항상하다는 인식을 버린다.
⑪표상 없음을 관찰하여 표상을 버린다.
⑫원함없음을 관찰하여 원함을 버린다.
(청정도론, 제19장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
위의 12가지는 인식의 문제이다. 인식의 전환으로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있고, 궁극적으로 진정한 행복인 ‘열반’에 이를 수 있는 길이라 한다. 그런 인식 중에 "괴로움을 관찰하여 행복하다는 인식을 버리라"는 항목이 있다.
세상보기를 물거품처럼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 하지만 그 행복자체도 괴로운 것이라 한다. 왜냐하면 지금 불행한 사람은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지금 행복한 사람은 더 큰 행복을 바라기 때문에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하다는 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 곧바로 괴로움을 가져 올 것이고, 이는 즐거운 느낌이 오래 지속되지 않아 즐거움을 괴로운 것이라 인식하는 것과 같은 뜻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삶의 과정에서 부딪치는 온갖 문제와 그에 따른 고통, 괴로움, 불만족 심지어 즐거움과 행복마져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면 갈애로 인한 새로운 세계를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단지 원인과 조건에 따라 법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였을 때 더 이상 재생의 원인이 되는 알음알이(식)는 일어나지 않아 새로운 우주를 건설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한다.
비가 올 때 수포덩어리가 계속해서 생겼다가 곧바로 무너지듯이 세상보기를 물거품처럼 본다면 어떠할까.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마치 물거품을 보고
마치 신기루를 보듯
이와 같이 세상을 뚫어 보는 자
그를 죽음의 왕은 보지 못한다.
(법구경 170번 게송)
사진 http://nunoslab.egloos.com/3567731
형성된 모든 것들이 단지 일어나고 사라질 뿐, 세상이 영원하다거나, 행복하다거나, 나가 있다거나, 깨끗한 것이라는 전도된 인식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현상을 관찰하였을 때 그 어떤 알음알이(식)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집을 짓지 않고 자신의 세계 또한 만들어 내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2011-02-1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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