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신도에서 수행자로, 신앙의 불교와 법의 불교

담마다사 이병욱 2011. 2. 10. 11:34

 

 

 

 

신도에서 수행자로, 신앙의 불교와 법의 불교

 

 

 

재가불자가 되려면

 

불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초기불교경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묘사 되어 있다.

 

 

“부처님, 재가신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마하나마, 붓다(부처님) 담마(가르침) 상가(승가)에 귀의하면 재가신도가 된다.”

 

(상윳따니까야 : 55 소따빳띠 상윳따 37)

 

 

부처님이 까삘라왓뚜의 사꺄족이 사는 마을의 니그로다 승원에 계실 때 어느 사꺄족의 마하나가 물어 본 말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붓다, 담마, 상가를 믿고 의지하면 불교도가 된다고 말씀 하셨다. 이어 마하나마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부처님, 재가신도가 어떻게 해야 계행을 갖추는 것입니까?”

 

“재가신도는

생명을 죽이지 않으며,

주지 않는 것을 훔치지 않으며,

삿된 음행을 하지 않으며,

거짓말하지 않으며,

취하게 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이렇게 재가신도는 계행을 갖춘다.”

 

(상윳따니까야 : 55 소따빳띠 상윳따 37)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를 믿고 의지하기로 다짐한 재가불자에게 불살생등 지켜야 할 계행에 대하여 알려준다.

 

이렇게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다섯가지 계행을 지키는 삶을 살아감으로서 불교도가 됨을 초기불교경전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이보(二寶)인 경우

 

우리나라불자의 99.8%는 재가불자이다. 그런 재가불자들은 무엇을 의지하며 신행생활을 할까. 거의 대부분의 불자는 ‘불법승’ 삼보에 의지하여 또 피난처로 삼아 신행생활을 한다고 답변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사는 곳에 사찰이 없다보니 실제로 느끼는 것은 불법승 삼보 가운데 ‘부처님(붓다)’과 ‘가르침(담마)’ 이렇게 이보(二寶)만 남게 된다.

 

그런데 그 이보 중에 부처님은 지금 살아계시지 않기 때문에 남는 것은 가르침만 있게 된다.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이 항상 계시다는 ‘법신상주’를 주장하지만 초기불교 가르침에 따르면 부처님은 안내자로서의 부처님이다.

 

부처님당시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지금이나 부처님은 안내자이었다. 안내자로서의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경전에 잘 묘사 되어 있다.

 

 

“마찬가지입니다. 브라흐민이여, 최상의 목표인 열반이 있고 열반에 이르는 길이 있고 안내자인 내가 있습니다. 어떤 제자들은 나의 충고와 가르침을 듣고 열반을 성취하고 어떤 제자들은 성취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내가 어찌하겠습니까? 여래는 다만 길을 보여줄 뿐입니다.”

(맛지마니까야 :107 가나까목갈라나경)

 

 

브라만 가나까목갈라나가 부처님께 여쭌 질문에 대하여 부처님은 자신은 안내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을 제시 하지만, 그런 안내를 받고도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충고를 받아 들여 제대로 가는 사람이 있듯이 부처님은 열반으로 길을 안내하는 ‘가이드’일 뿐이지 직접데려다 줄 수는 없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지금 부처님이 계시지 않더라도 가르침에 길이 제시 되어 있다면 부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상주하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결국 경전을 접하면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가르침은 매우 중요하다.

 

일보(一寶)인 경우

 

삼보중에 가르침만 남아 있다면 실제로 일보(一寶)만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가르침 하나만 있는 것도 의지처가 될 수 있을까. 초기경전에 따르면 충분히 가능하다. 초기경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아난다 존자님, 부처님이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이사람이 그대들의 의지처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의지해라.’고 지명하신 제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의지처로 지명한 제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맛지마니까야 :108 고빠까목갈라나경)

 

 

마가다국 대신인 브라만 왓사까라가 아난다존자에게 의지처로 지명한 제자가 있는지 아난다 존자에게 물어보자, 아난다 존자는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한다. 온전히 깨달으신 부처님의 자질을 가진 제자는 단 한사람도 없다는 뜻이다.  이어서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그러나 아난다 존자님, 의지처가 없다면 무엇이 화합의 이유입니까?”

 

브라흐민이여, 우리에게 의지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의지처가 있습니다. 가르침이 우리의 의지처입니다.”

 

(맛지마니까야 :108 고빠까목갈라나경)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의 가르침(담마)이 의지처라고 말하였다. 가르침이 의지처라고 말한 뜻은 부처님은 후계자를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후계자가 남겨지지 않았음에도 상가공동체가 잘 굴러 갈 수 있음을 말하는 데, 이는 매 우뽀사타날에 빠띠목카를 외우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부처님이 후계자를 남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계속 굴러가고 있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공동체인 상가 역시 부처님이 제정한 빠띠목까에 따라 화합하여 잘 유지되어 오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처님은 사람보다 가르침에 의지하라고 말씀 하였다. 비록 지금 이 시점에서 붓다와 담마와 상가 중에 오직 접할 수 있는 것은 담마 뿐일지라도 가이드로서의 부처님은 가르침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가르침에 따라 열매를 맺어 공양 받을 분은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불자들이 접할 수 있는 것은 안내자로서의 부처님과 가르침이 담겨 있는 경전을 봄으로서 이보를 접할 수 있으나,  현실세계에서는 오로지 가르침이라는 일보를 믿고 의지하고 피난처로 삼고 있는 셈이다.

 

스님과 사제

 

현실에서 삼보를 접하기는 힘들다. 설령 삼보를 접한다 할지라도 승에 대한 해석이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한글화된 삼귀의를 보면, ()’스님들로 바꾸어 놓았다. 그 결과 상가공동체가 귀의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스님들이 귀의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어떤 이는 이에 대하여 초기불교의 상가는 비구와 비구니의 상가이기 때문에 재가불자가 포함되는 상가는 말도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승을 스님들로 바꾸어 버린 것은 지나치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어떤 이는 한국불교의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난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스님들의 불교, 스님들 위주의 불교가 낳은 횡포이자 하나의 코메디 같은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신도인가 수행자인가

 

승을 스님들로 바뀌어진 한국불교에서 불자들은 ‘신도’라고 부른다. 믿고 따르는 무리인 것이다. 유일신교의 ‘신자’와 매우 유사한 개념이다. 그런 신도는 신앙의 불교인 대승불교의 산물로 보인다.

 

불교에는 두가지가 있다. 북방불교와 남방불교인데, 일반적으로 북방불교를 신앙의 불교라 부르고, 남방불교를 법의 불교라 부르기도 한다. 그에 따라 북방불교를 신봉하는 불자들은 신도가 되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런 현상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는 유일신교의 체제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다.

 

유일신교에서는 신과 신자들과의 매개체로서 신부나 목사가 있는데, 신앙의 불교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우리나라 절에서 행해지고 있는 법회의식을 보면 복잡한 의례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신앙의 불교로서의 면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불자를 신도로 부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현상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법의 불교인 초기불교는 다르다.

 

 

 

사진http://www.miller-mccune.com/health/think-on-this-meditation-may-protect-your-brain-4193/

  

 

왜 오온을 설하셨을까

 

부처님은 오온을 설하셨다. 경전의 도처에 오온과 12처, 18계에 대한 이야기가 무수히 나온다. 부처님은 왜 하필이면 이렇게 오온을 강조 하였을까. 이는 다름 아닌 개념을 타파하기 위해서이었다. 모든 현상을 분해하여 놓고 보면 나, 나의 것, 나의 자아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었다. 따라서 영혼도 당연히 없게 되고 세상을 창조하였다는 초월적 존재도 없게 된다. 단지 있다면 개념의 산물인 ‘명칭’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이처럼 부처님은 개념을 부수기기 위하여 분해하여 설명하였고, 이는 불교의 최종목표인 열반으로 가는 길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제자’라 부른다. 따라서 부처님의 제자는 출가자와 재가자의 구분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초월적 신과 신도와의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하는 ‘사제’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삼귀의에서 상가를 스님들로 바꾸어 넣은 것은 신앙 불교의 산물이고, 이는 다름 아닌 사제역할을 하기 위한 것으로 오해 하기 쉽다.

 

유일신교와 경쟁을 하현실에서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라면 모두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신도라고 불리우기 보다 수행자라 불려야 하고, 신도가 아닌 수행자로서 살아 가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그런 삶을 살아 간다는 것은 유일신교와 치열한 경쟁을 하며 살아가는 현실에서 불자로서의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하다. 그런 재가불자가 실질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가르침이다.

 

 

 

Asajjhāyamalā mantā                  아삿자야말라 만따

anuṭṭhānamalā gharā                  안웃안타나말라 가라

malam vaṇṇassa kosajja           말랑 완나싸 꼬삿장

pamādo rakkhato mala              빠미도 락카또 말랑.

 

독경하지 않으면 경전이 녹슬고,

계속적인 손질이 없으면 집이 녹슬고,

게으르면 아름다움이 녹슬고,

태만하면 깨어있는 마음이 녹슨다.

(법구경 241게송)

 

 

 

2011-02-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