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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에는 감동이 없다” 보통불자의 두가지 제안

담마다사 이병욱 2011. 1. 31. 12:16

 

 

 

 

한국불교에는 감동이 없다 보통불자의 두가지 제안

 

 

 

요즘 인터넷불교신문에서 뜨겁게 다루어지고 있는 기사 가운데 하나가 한국불교 중흥을 위한 대토론회관한 이야기 일 것이다. 매월 한 번씩 일년동안 열린다는 이 토론회는 지난 1 27일 첫 스타트를  끊었다고 한다. 이 토론회에서 발제자 중의 한 사람은 현재의 한국불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직격탄을 날렸다고 한다.

 

 

한국불교에는 감동이 없다

 

 

 

 

 

 

한국불교 중흥을 위한 대토론회

한국불교중흥을 위한 1월 토론회에 발제와 토론자로 나선

원담스님, 주경스님, 성문스님, 곽병찬 한겨레신문 편집인, 조성택 교수(왼쪽부터).

사진http://www.bulgyofocus.net/news/articleView.html?idxno=62527

 

 

 

한국불교에 감동이 없다고 한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만법귀일 일귀하처’와 같은 추상적 법문위주로 대표되는 한국불교가 자비봉사와 같은 감성적 측면 없기 때문이라 한다.

 

이는 현실과 동떨어져 깊은 산중에서 오로지 깨달음만을 위하여 수행정진하는 현재의 승가제도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발제자는 사무량심과 같은 감성적인 불교를 개발하여야 불자들 뿐만 아니라 국민들을 감동시킬 것이라 한다.

 

 

 

한국불교의 현재적 성찰과 나아갈 방향.docx

한국불교의 현재적 성찰과 나아갈 방향.pdf

 

 

 

 

스님들과 언론인, 교수등으로 이루어진 1차 토론회의 내용을 보면 총론적 성격이 짙다. 앞으로 전개될 토론에서 각론적으로 다루어진다면 현재 인터넷등에서 제기된 각종 한국불교의 문제점이 거론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제도권에 속해있는 스님들이나, 언론인, 교수들이 한국불교의 곪아 터진부분을 과연 과감하게 지적할 수 있을까. “한국불교에는 감동이 없다라는 식의 직격탄이 나오긴 하지만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하여 또 다른 직격탄을 날릴 수 있을까. 아마도 제도권에 속해 있는 한 그런 주장을 하기 힘들 것이다.

 

()에 대한 재해석을

 

하지만 제도권에 속해 있지 않고 자유로이 비판할 수 있는 네티즌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한국불교에 감동이 없는 이유를 보통불자가 본 관점에서 지적하면 우선 두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승가라는 용어의 재해석에 대한 것이다.

 

불자들이 법회에 참석하면 반드시 지켜야 할 의례중의 하나가 삼귀의이다. 불법승(佛法僧) 삼보에 귀의 한다는 삼귀의가 우리나라에서 한글로 번역된 것을 보면 승()스님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승의 해석에 대한 명백한 오류라고 본다. 승가가 어떻게 스님들만의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 더구나 사미승을 포함하여 모든 스님들은 전부 귀의의 대상일까. 그 중에 깨우친 스님들도 있지만 단지 무늬만 스님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승가는 비구비구니를 포함한 우바새(남자재가불자)’우바이(여자재가불자)’들도 포함된 사부대중의 승가를 말한다. 설령 범위를 좁혀서 비구와 비구니의 승가를 말한다 할지라도 귀의의 대상은 성스런 승가를 말한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부처님이 가신 그 길로 를 이루신 성자들을 말한다.

 

그런데 그런 성자들은 반드시 출가자에 한정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하면 도와 과를 이룰 수 있어서 성스런 부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불법승 삼보 중에 승이라함은 사부대중의 상가가 되어야 하고, 그 것도 성스런 상가를 말한다. 그렇다면 한국불교에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로 끝나는 삼귀의는 부처님당시 처럼 상가에 귀의합니다라고 변경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을 과연 일년동안 열린다는 토론회에서 제도권에 속한 스님들이나 교수, 언론인들이 지적해 할 것이다.

 

승에 대한 재해석에 대한 문제점을 해결해야 한국불교가 한 단계가 업그레이드 되고, 불자들 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 감동을 줄 것이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이는 1960년대 가톨릭 2차공의회가 전세계에 감동을 주고 비약적인 발전을 주었듯이 한국불교가 또 한번 중흥을 맞게 될 것이다.

 

진짜를 찾았다!”

 

둘째, 초기불교를 과감하게 도입하자는 것이다.

 

원래 전래도입은 다른 말이다. 전래는 문화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불교도 마찬가지이었다. 중국에서 초기에 불교는 전래 된 것이었다. 수 천년의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문명국가이었던 중국이었지만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전래로 인한 것이었다.

 

중국으로 불교의 전래는 주로 서역이나 인도승려들이 직접알려 주었다. 또한 그들은 원전을 한문으로 번역하여 불교가 중국의 주도적인 문화로 자리잡는데 있어서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불교가 중국에 정착하고 난 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중국인들은 불교를 직접 배우기 위하여 인도로 떠났다. 그 때 배워 온 불교는 전래라 하지 않고 도입이라 부른다. 이는 불교문화가 중국에 정착되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자신감의 발로라 보여진다. 마찬가지로 한국불교 역시 남방불교국가에서 테라와다불교를 배워 오고 있는데, 이는 전래가 아니라 도입이라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남방수행방법과 초기불교가 대유행이다. 이는 남방불교국가의 전법사들이 전래해 준 것이 아니다. 한국불교에서 한계를 느낀 우리나라의 출가자와 재가자들이 스스로 배워와 도입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불자들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테라와다불교전통은 전래라기 보다 도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도입을 해 놓고 보니 우리나라 불교의 현실과 너무나 다른 것을 느낀다. 이에 대하여 어떤 네티즌은 속았다!”라는 직설적인 표현을 쓰기도 한다. 이때 속았다라는 의미는 한국불교에 속았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진짜를 찾았다!”라고 말한다.

 

한국불교와 테라와다는 원융할 수 있을까

 

이처럼 한국불교와 테라와다불교는 극명한 시각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적대적 관계로 보기 보다 상호보완적 관계로 보자고 하는 것이 학계의 의견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선사들은 테라와다불교를 소승이라 하여 폄하하고, 일종의 대승불교 우월론에 입각하여 애써 무시하려 든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테라와다불교의 수용은 대승불교의 전통을 고수해 온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훼손하기보다는 오히려 한국불교의 외연을 넓히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의 전래 이래 다시 전래해 온 부파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대·소승을 아우르는 새로운 한국불교를 만들어 갈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고영섭)

 

테라와다불교의 간명하면서도 일관된 가르침은 한국불교의 바람직한 미래상을 정립하는 데에 일종의 시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임승택)

 

(불교평론, 한국불교와 상좌불교의 만남의 역사와 과제 / 마성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985)

 

 

 

학계에서는 한국불교와 테라와다불교의 원융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양자택일의 문제라 본다. 이유는 중국불교의 아류로 특징지워지는 한국불교와 초기불교의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는 테라와다 불교는 서로다른 불교이기 때문이다.

 

깨달음과 열반

 

실제로 번역된 빠알리 삼장을 접하면 한국불교와 다른 점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깨달음과 열반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어느 불교평론가는 이렇게 말하였다.

 

 

무슨 말인가 하면 불교 수행의 목적은 놀랍게도깨달음이 아니라열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깨달음이 불교의 목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수행의 목적이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깨달음의 삶을 실천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한국불교가 수행의 목적을 잘못 정의하고 있다는 지적과 맥락이 같은 말이다.

(“깨달음은 불교의 목적이 아니다
홍사성 "한국불교 수행목적 잘못 정의"http://www.mediabuddha.net/detail.php?number=6785&thread=23r02)

 

 

 

깨달음이 불교의 목적인가.docx

 

깨달음이 불교의 목적인가.pdf

 

 

 

불교평론의 열린논단에서 평론가는 선불교로 특징지워지는 한국불교가 깨달음지상주으로 흘러 가는 것에 대하여 경계하고 있는데, 이는 초기불교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볼 수 있는 열반과 다른 것이라 한다. , 초기불교에서는 깨달음에 대하여 열반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보는 것임에 반하여 한국불교에서는 선()적 깨달음을 지상목표로 둔다는 것이다.

 

또한 보리즉열반이라 하여 깨달음과 열반을 같은 것으로 여겨서, 화두참선으로 인한 깨달음만 얻으면 모든 것이 다 끝나는 것처럼 여기는 것 또한 한국불교의 병폐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였을 경우 오로지 깨달음만을 위하여 평생 선방을 돌아 다니고, 마치 로또복권의 기적을 바라는 듯한 수행풍토를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상구보리만 하다 일생을 다 보내게 되었을 때 언제 중생을 교화하는 하화중생을 할 수 있을까. 로또 복권을 꿈꾸듯이 오로지 선적 깨달음만 추구하는 한국불교가 산중으로 그 것도 깊은 산속으로만 숨어 들어가는 듯한 양상을 보였을때 도시에서 사찰은 볼 수 없고, 더구나 매년 두차례의 안거기간 중 스님들이 참선수행에 열중하고 있을 때 사람사는 곳에 불교가 없다면 이는 깨달음 추구라는 이유로 중생교화를 뒷전에 둔 직무유기라 볼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로또복권식의 화두참선으로 인한 선적 깨달음이 불자들은 물론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보통불자의 주장

 

한국불교는 중흥되어야 한다. 중흥이라는 의미는 다시 한 번 일어선다는 뜻이다. 과거 이 나라 이 땅이 불국토이었듯이, 다시 한 번 부처님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낡은 패러다임은 벗어 던져야 한다. 현재의 방식으로는 국민들은 물론 불자들에게도 감동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첫단계가 오로지 스님들만의 불교를 극복해야 한다. 이 것이 승에 대한 재해석이다. 그렇게 하여 사부대중의 불교가 되었을 때 첫 번째 감동이 올 것이다.

 

다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현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새로 도입된 테라와다불교의 전통을 한국불교와 원융하는 것 보다 테라와다불교 그 자체를 도입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이유는 대승불교와 테라와다 불교는 완전히 다른 불교이기 때문에 양자택일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테라와다불교의 도입이라함은 초기불교의 도입과 같은 맥락이다. 일반적으로 초기불교의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이 테라와다불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초기불교를 접한 불자들은 진짜를 찾았다라고 말하며 감동하고 있다. 이렇게 테라와다불교 즉, 초기불교를 도입하였을 때 두번째 감동이 올 것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 주제에 대하여 대토론회에서 거론하기 힘들 것이다. 스님들이나 언론인, 교수들은 제도권에 속해 있기 때문에 또 제도권의 이해 관계 때문에 선뜻 주장하기 힘든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그 어떤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보통불자는 과감하게 주장할 수 있다.

 

 

 

 

2011-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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