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는 보복을 부르고, 아덴만의 여명작전과 충신장(忠臣藏)
아덴만의 여명작전
주말 저녁의 뉴스는 ‘아덴만’의 사건으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우리 해군이 소말리아 해적을 소탕했다는 뉴스이다. 이를 동영상과 함께 보여 주었는데 우리군의 완벽한 작전에 따른 승리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인질구출 과정에서 ‘사망자’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설령 그것이 적군의 편이라도 사람이 죽은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 것도 한 두명이 아니라 무려 8명이나 죽은 것이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아덴만의 여명작전’이라 말하고 심지어 어느 매체에서는 “아덴만의 쾌거”라고 말하였다. 또 대통령도 나서서 우리군에 대하여 치하와 격려를 보냈다고 한다. 과연 아덴만에서 해적소탕작전을 우리측의 완벽한 승리로 볼 수 있을까.
아덴만
사진 http://pcij.org/stories/every-6-hours-pirates-seize-a-filipino-seaman/
이스라엘의 하마스정벌
뉴스에 따르면 소말리아 해적과 우리 군의 전력을 비교하면 게임이 되지 않는다. 온갖 첨단무기를 탑재하고 있고 길이만 해도 150미터에 달하는 4,500톤급 ‘구축함’에다 최첨단 공격용헬기, 거기에다 최정예 대원으로 무장한 한국군과 고작 소총 하나에다 거의 바닥난 실탄으로 버티던 해적과의 싸움은 하나마나한 전투라고 볼수 있다. 이런 싸움은 마치 지난 2008년도에 벌어졌던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싸움을 연상시킨다.
2008년도 말 하마스가 도발할 당시,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비교대상이 되지 않을 정도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전투기와, 미사일, 장갑차등 최첨단 무기를 사용하여 구식무기로 저항한 하마스의 본거지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감행하여 민간인을 포함하여 1,000명에 가까운 사망자를 내었다.
이를 두고 국제사회의 비난이 매우 거세게 일어났는데, 이스라엘의 편을 들던 미국과 막 출범한 ‘장로정권’만이 이스라엘의 공격에 대하여 정당성을 부여 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복수하겠다는데
우리 군이 아덴만에서 승리하였다고 해서 모든 것이 원만하게 진행될까. 소말리아 해적들은 우리 군이 무서워서 해적질을 그만 둘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뉴스에 따르면 소말리아 해적들은 우리에게 ‘복수’를 맹세했다고 전한다. 우리선박을 나포 하면 선원들을 죽이겠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를 예측이나 하고 작전을 감행 한 것일까. 해적들은 동료의식도 없기 때문에 소탕하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난 것이라고 보는 것일까. 그러나 소말리아 내부사정을 보면 그들이 단순한 해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부족과 국가가 관련 되어 있고, 또한 국제적으로 연계 되어 있어서 해적질이 하나의 산업이자 비즈니스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소말리아 해역에서 수 차례 해적에 의한 선박의 납치가 있었지만 이제까지 단 한 차례의 사상자도 없이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는데, 유독 현 정부에 들어와서 전투까지 벌어지며 사망자가 나오고 있고, 더구나 해적들은 보복을 다짐한다. 보복이 보복을 부르는 악순환의 연속이 된다면 이를 진정한 승리라 볼 수 있을까.
승리는 보복을 부르고
승리는 원한을 부르게 되어 있다. 더구나 완전한 승리를 목표로 한다면 더욱 더 그 원한은 깊어 질 것이다. 일시적으로 이긴 자는 승리의 찬가를 부를지 모르지만 패배자는 눈물을 흘리며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초기불교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Jayaṃ veraṃ pasavati 자양 웨랑 빠사와띠
dukkhaṃ seti parājito 둑캉 세띠 빠라지또
upasanto sukhaṃ seti 우빠산또 수깡 세띠
hitvā jayaparājayaṃ. 히트와 자야빠라자양.
승리자는 원수를 얻고
패배자는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승리도 패배도 모두 버리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자.
(법구경, 게송201)
싸움이나 전쟁에 대한 불교적 가르침은 승리도 바리지 않고 패배도 거부하는 것이다. 또한 완전한 승리와 완전한 패배 바라지 않아 서로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양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취해야 한다.
반면에 서구적인 사고 방식, 특히 유일신교적인 사상을 가진 집단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행위가 절대적으로 선(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악은 반드시 응징하여야 하고, 씨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일신교의 절대선(絶對善)
유일신교에서의 진리는 절대적이다. 따라서 다른 곳에 진리가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 선도 유일신교에서는 ‘선 그자체’이고 ‘절대선’이어서 다른 곳은 모두 악일 수 밖에 없다. 절대선을 주장하면 다른 곳에서 아무리 선을 주장한다고 할지라도 ‘악’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일신교는 절대진리, 절대선, 절대미를 주장한다. 절대를 주장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인정하는 않겠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진리 그 자체인 ‘절대진’과 선 그 자체인 ‘절대선’, 아름다움 그 자체인 ‘절대미’를 추구하는 유일신교에서 그 반대 개념인 ‘위악추’는 반드시 제거 해야 될 대상이다.
이처럼 독선적 진리로 무장한 집단이 이스라엘인데, 그들이 국제사회의 비난을 무릎쓰고 전력에 있어서 게임이 되지 않는 하마스를 무참하게 정벌하는 것은 바로 거짓과 악함과 추함을 근절하기 위한 종교적 신념이 바탕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왜 이처럼 초유의 사태가 아덴만에서 일어나게 되었을까. 그 것은 ‘장로정권’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본 때를 보여 주겠다?
이전 정권에서 소말리아 해적에 대한 대응은 ‘평화적’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결려도 꾸준한 대화와 협상등으로 인내를 가지며 모든 문제에 접근하여 대부분 평화적으로 해결 되었다. 하지만 장로정권이 들어서고 난 이후 대응방식을 보면 이스라엘의 대응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현 정권의 종교적 신념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악은 반드시 응징해야 하고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것은 자신이 절대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하는 행위는 악으로 보아서 멸절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종교적신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장로출신 대통령의 종교적 신념의 소산으로도 보인다. 그래서일까 이번 아덴만의 여명작전에 대통령은 치하와 격려를 하였다고 한다. 또한 8명에 달하는 인명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TV와 라디오에서는 이를 매우 후련하고 통쾌하다는 듯이 보도 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협상을 통하여 인내를 가지고 충분히 해결 할 수 도 있었다. 이는 과거 정권에서도 그렇게 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때를 보여 주겠다”는 발상으로 인명을 살상하면서 까지 작전을 감행한 사람들에게 훈장을 주어야 할까. 소말리아 해적들이 즉각 보복을 선언하고 나선 마당에 이를 아덴만의 쾌거나 우리측의 승리로 볼 수 있을까.
그들은 영웅일까
아마도 이번 사건으로 인하여 또 다른 사건을 불러 일으킬 수 있고, 전쟁이 전쟁을 불러오는 악순환에 빠질 뿐만아니라 해외에 나가 있는 우리교민의 목숨도 보장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번 아덴만의 해적소탕작전은 끝이 아니라 지금 부터 시작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사건이 분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논란거리를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뉴스에 따르면 이번 사건 관련자들은 모두 영웅들임에 틀림 없다. 그렇다면 조만간 이들에게 승리에 대한 ‘훈장’과 ‘포상’이 수여 될지도 모른다. 또 그들을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기 위한 메스컴의 보도가 뒤따를 것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인하여 새로운 불씨를 만들었다면 과연 훈장감이라 볼 수 있을까.
이번 사건으로 인하여 보복을 받고, 더구나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 상사원, 선교사, 관광객등의 생명과 재산이 보장 받지 못한다면 과연 이번 사건은 올바로 대처 한 것일까. 좀 더 인내 하고, 협상하고, 죽음 없이 해결 할 수는 없었을까. 복수와 보복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꼬리가 시작 되는 것은 아닐까. 역사적으로 좋은 예가 있다.
츄신구라(忠臣藏, 충신장)
일본 도쿠가와 막부시절 5대 쇼군인 ‘토쿠가와 츠나요시(德川綱吉, 1646년~1709)’가 있었다. 그가 집권하던 시절을 ‘겐로쿠시대’라 하여 일본특유의 ‘서민문화’가 발달하던 때라 한다. 그런 츠나요시는 유학에 정통하였는데 유교의 덕목을 정치에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겨 ‘동물살상금지령’을 내렸는데, 그 때 당시나 후대에 그에게 붙여준 별명은 ‘개장군(이누쿠보, 犬公方)’이었다고 한다.
츠나요시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고 한다. 한편에서는 색욕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은 무능력한 쇼군으로 보는 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일본의 도쿠가와시대의 중흥의 기초를 마련한 매우 유능한 쇼군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처럼 평온한 겐로쿠시대에 하나의 커다란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일본역사에서 유명한 ‘츄신구라(忠臣藏, 충신장)’이다. 일본 가부키극의 고전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츄신구라는 어떤 사건일까.
또 다른 보복을 막기위하여
츄신구라사건은 1701과 1703년에 일어났는데, 47명의 사무라이들이 억울하게 죽은 자신의 주군을 위하여 ‘복수’극을 펼친 사건이다.
원수를 갚기 위하여 무려 2년간이나 치밀하게 준비하여 마침내 상대방을 완벽하게 제거함으로서 복수를 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때 당시의 일본의 무사도문화에서 주군을 위하여 복수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47명의 사무라이들에 대한 처벌이 문제가 되었다. 길가의 버려진 개도 살육하면 처벌 받는다는 ‘동물살상금지령’을 만들어 놓은 5대 쇼군 츠나요시는 고민에 빠진다. 당시의 관습에 따르면 주군을 위하여 보복이나 복수 하는 것은 주군에 대한 아름다운 충절로서 무사들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중의 하나 이었으나 문제는 상대방의 또 다른 보복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에 있었다.
개와 같은 동물을 포함하여 사람까지 생명이 있는 것들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던 츠나요시는 결단을 내린다. 주군의 복수에 가담하였던 47명의 사무라이 전원에게 ‘할복’을 명한 것이다.
생명을 중시하는 츠나요시는 왜 47명의 사무라이 전원에게 할복하라고 하였을까. 그 이유는 또 다른 보복을 막기 위해서이었다. 보복에 보복이 꼬리를 무는 악순환을 자르기 위한 조치가 47명 전원에게 할복하라는 것이었다.
츄신구라 동영상
그런 츄신구라에 대한 동영상을 인터넷에서 볼 수 있었다. 2004년 일본후지TV에서 방영된 도쿠가와 츠나요시, 개라고 불리운 남자(德川綱吉 イヌと呼ばれた男.)가 바로 그것이다. 이에 대한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려져 있어서 공유하였다.
도쿠가와 츠나요시, 개라고 불리운 남자 1
도쿠가와 츠나요시, 개라고 불리운 남자 2
출처
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no=31179&table=lovestory
보복과 복수의 악순환에서
승리는 원한을 부르게 되어 있다. 한편 패배자는 비통해 한다. 그러면서 복수의 칼날을 갈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 “승리도 패배도 모두 버리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자”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덴만의 여명 작전에 대하여 ‘아덴만의 쾌거’라 하며, 해적을 13명이나 사살한 것에 대하여 통쾌하게 보도 하는 것이 요즘 TV와 방송의 보도 행태이다.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복수를 하겠다”고 로이터 통신에서 보도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보복과 복수의 악순환이 시작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생포한 포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어떻게 처벌해야 할지도 난제라 한다.
최첨단 무기를 이용하여 게임도 안되는 상황에서 인질을 구출하기는 하였으나 그 것이 승리라고 볼 수 없는 것은 이제부터 새로운 전쟁의 시작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비단 아덴만에서 선박나포로 보복을 당하는 것 뿐만아니라 우리나라 동포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보복이 벌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아덴만의 주역들이 방송과 메스컴에서는 영웅일지 모르지만 또 다른 보복을 불러오는 행위를 하였다면 새로운 문제거리를 만들어 냈다고 볼 수 있다. 이전 정권에서는 한명의 희생자도 없이 시간이 걸리더라도 원만히 해결하였는데, 현 장로정권에서는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초유의 작전을 펼친 결과라 볼 수 있다.
드라마 츄신구라에서 주군의 원수를 갚은 47인의 사무라이에게 ‘전원할복’을 명함으로서 보복에 또 다른 보복을 가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버렸는데, 우리나라는 이제 새로운 보복에 직면하고 있다.
2011-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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