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금욕과 깨달음

담마다사 이병욱 2011. 1. 22. 23:44

 

 

금욕과 깨달음

 

 

 

 

불가에서 여성은 열등한가

 

~구니가 백년을 해봐라!”이 말은 운문사 승가대 학감으로 있는 일진스님이 한 말이다. 불교TV사이트(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_contents.asp?ls_StSbCode=CATPR_01&PID=P613&DPID=59310)에서 본 내용은 이렇다.

 

스님이 대학을 다닐 때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오대산 적멸보궁으로 기도를 하러 갔다고 한다. 그런데 혼자서는 못 간다는 규정이 있어서 도반 몇명이서 같이 갔다고 한다.

 

오대산 중대에서 하루 밤을 머물고 아침 일찍 적멸보궁을 향해 가는 도중에 역시 적멸보궁을 향해 뛰어 올라가는 건장한 체격의 비구스님 몇명이 지나 가면서 비구니 스님들에게 한 말이 ~구니가 백년을 해봐라!”이었다는 것이다.

 

그 때 까지만 해도 비구와 비구니 스님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기도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와 도서관에서 지료를 찾아 보았는데 주로 초기불교경전을 이용했다고 한다.

 

그 결과 하나의 논문을 완성하였는데 그 논문의 제목은 불가에서 여성은 열등한가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논문이 나오자 해인사의 지대방에서 큰 토론이 벌어졌다고 한다. 한편에서는 어떤 비구니가 쓸데 없는 소리를 해!” 하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구나하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고 30여년전의 일을 회상한다.

 

여자가 남자보다 더 훌륭할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부자나 가난한자, 고귀한 자나 미천한자 할 것 없이 출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위가 그 사람의 태생을 결정짓는다고 경전에서 말씀 하셨다. 마찬가지로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심지어 부처님은 여자가 남자보다 더 훌륭할 수 있다고 말씀 하셨다. 경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백성의 왕이시여,

어떤 여인은 남자보다 더 훌륭하네.

지혜롭고 덕성스럽게 자라

진실한 아내로서 시어머니를 공경하네.

 

이런 여인이 낳은 아들은

영웅이 될 것이니.

그런 훌륭한 여인의 아들은

왕국을 지배할 수 있다네.

(상윳따니까야: 3 꼬살라상윳따 2:6)

 

 

이처럼 여인들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왕국의 왕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것은여자가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따라서 남자와 여자가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비구니 스님도 마찬가지 일것이다.

 

초기불교 경전에 비구니 스님에 대한 배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 중 앞서 언급한 ~구니가 백년을 해봐라!”이야기와 매우 유사한 내용이 있다. 그 내용중의 일부를 옮겨 보았다.

 

 

그 경지(아라한의 경지)는 도달하기 어려워서

성자만이 얻을 수 있다네.

두 손가락만큼의 지혜를 가진

여성으로서는 얻을 수 없네.

(상윳따니까야: 5 빅쿠니상윳따 2)

 

 

비구니에 대한 노골적인 비하의 게송이다. 비구니는 지혜가 두 손가락정도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아라한의 경지와 같은 깨달음은 결코 이룰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악마 마라가 한 말이다.

 

부처님 당시 사왓띠에서 소마라는 비구니가 걸식을 마친 뒤 숲속에 들어가 명상에 들어가려 하는데, 이를 방해하기 위하여 마라가 한 말이다. 그 때 소마는 악마의 방해인 줄 알아채고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을 했다.

 

 

마음이 잘 집중되어 있다면,

지혜가 꾸준하게 나아가고 있다면,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다면,

여성인 것이 무슨상관이랴!

 

나는 여자다또는 나는 남자다

또는 나는 그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악마일 뿐이다.

(상윳따니까야: 5 빅쿠니상윳따 2)

 

 

게송에서 여자와 남자, 또는 신분의 귀천을 따져 묻는 다는 것은 수행을 방해 하는 마라의 소행과도 같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남녀, 노소, 빈부, 귀천의 구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구니가 백년을 해봐라!”와 같은 이야기는 마라의 말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진스님은 그 때 당시의 혈기왕성한 비구스님들이 좋은 법문을 해 주셨다고 말한다. 이처럼 깨달음에 비구와 비구니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재가불자는 깨달을 수 없을까

 

깨달음은 반드시 출가지만 이루는 것일까. 재가자는 깨달음을 이룰 수 없는 것일까. 재가불자가 깨달음을 이루기 위하여 경전을 읽고, 다리를 꼬고 명상에 든다고 할지라도 깨달음은 출가자만 이룰 수 있는 고정관념이 있다면 틀림없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올 것이다.

 

 

재가불자가 백생(百生)을 해봐라!”

 

 

재가불자들은 세속에서 감각적욕망을 추구하며 살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기복과 방편으로 일관한 한국불교가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을 때 한국불교가 천년을 해봐라!”와 같은 말을 들을 것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도처에서 재가불자도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내용이 매우 많다. 이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반드시 출가자에 국한 된다는 것은 아니고 재가불자도 담마를 공부하고, 수행을 하면 를 성취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출가자가 도와 과를 이루기 위한 더 좋은 환경, 더 유리한 환경에 놓여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구와 비구니의 차별이 없듯이 출가자와 재가자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비구(bhikkhu, 빅쿠)와 비구니(bhikkhuni, 빅쿠니)와 더불어 우배새(upãsaka, 우빠사까)와 우바이(upāsika, 우빠시까)는 상가를 구성하는 요소라 하여 사부대중(cattāri-parisadāni)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가자와 재가자를 구분하는 것은 계율일 것이다.

 

율장을 공개하면 안된다는데

 

재가자가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받으면 재가불자가 되는데 이를 우바새, 우바이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재가불자는 출가자를 받들고, 그들에게 생활의 필수품을 보시하고 그 지도를 받아 재가생활을 영위하면서 수행한다.

 

한편 비구외 비구니는 구족계(upasampadā)를 받은 수행자를 말하는데 지켜야 할 계율이 수백개에 달한다. 재가불자의 오계는 잘 알려져 있지만 출가자의 계는 출가자가 아니면 알 수 없다. 그런 궁금중에 대하여 어느 스님은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승가의 청정과 유지를 목적으로 한 출가자만의 내부 규정을 보는 것이

재가신도들의 수행과 신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

.

 

재가신도로서 부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일에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은

불자의 바른 자세는 아니다.

( 법보신문율장 공개해야 하나 ,2007 12 20)

 

 

재가자가 출가자의 계율에 관심을 가지거나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율장을 인쇄할 때 출가자 이외는 읽지말라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사분율에 따르면 대계(비구, 비구니계)를 받지 않은 사람 앞에서 계를 설하지 못하도록 정해 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비구나 비구니의 계는 오직 승가만이 할 수 있는 일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재가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은 아니라는 것이다.

 

스리랑카에서 율장을 공개하는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내용인지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들의 심리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불교인터넷신문의 칼럼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책 한권이 눈에 띠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출가 스님들이 지켜야할 계율서인 율장이었다. 의아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중 한 신도에게 당신은 출가한 스님이 아닌데 왜 율장을 손에 들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신도의 대답이 ‘스님들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기 위해서이다. 스님은 우리의 귀의 대상이다. 율장에는 스님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자세히 적혀있다. 율장을 공부함으로 인해 우리는 스님을 잘 모실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이제열 법사의정법당간을 세우자’ 2. “재가자에게 율장 못보게 하는 것 잘못” , http://www.mediabuddha.net/detail.php?number=6140&thread=24r26)

 

 

스리랑카에서는 재가자도 율장을 공부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스님이 어떤 존재인지 알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스님을 잘 알아야 잘 모실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재가자 계율을 알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

 

남방에서 여성 신도가 스님과 동행을 하거나 영화 구경을 시켜주거나 주례를 부탁하거나 사주 관상을 봐달라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재가불자들이 계율을 생명으로 삼고 있는 남방의 스님들이 계율이 위배되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역할도 하기 때문에 율장을 공개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계율이 있는 것일까. 그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이를 불교평론의 논문에서 간접적으로 볼 수 있었다.

 

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스리랑카의 켈라니아대학(University of Kelaniya)의 교수인 유키 시라마네(Yukie Ramona Siramane) 의 논문 금욕으로 깨달음을 얻는가... ‘에 따르면 비구외 비구니의 계율에 대하여 일부분 알 수 있다.

 

 

금욕으로 깨달음을 얻는가.docx

 

 

논문에서 특히 깨달음과 관련하여 계율을 설명하고 있는데, 비구계 227계 중의 21계는 음행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이는 깨달음의 길로 가는데 있어서 음행이 가장 장애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특히 네가지 바라이중에 세가지 음행과 관련이 있을 정도로 청정범행을 닦는데 있어서 음행을 장애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교의 최종목표인 열반을 성취하기 위하여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기 위하여 수행과정에서 성관계를 포함한 감각적 쾌락을 포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 하였다고 한다.

 

 

비구들이여, 여자의 육체만큼이나 남자의 마음을 빼앗는 어떠한 색()도 알지 못한다. 여자의 육체는 남자의 마음을 완전히 빼앗는다. 비구들이여, 여자의 목소리만큼이나 남자의 마음을 빼앗는 어떠한 소리[]도 알지 못한다. 여자의 목소리는 남자의 마음을 완전히 빼앗는다.”

(불교평론, 금욕으로 깨달음을 얻는가,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88)

 

 

따라서 진리의 길을 가기위해 모든 것을 바치기로 한 비구나 비구니에게 율장에서 금욕의 강조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를 어기면 승단에서 쫒겨나는데 이를 바라이라 하고 이 말의 의미는 패배라 한다. , 음행을 하여 계를 어겼을 때 감각적욕망의 패배자가 되는 것이다. 그 바라이 1조란 무엇일까. 비구니에 관한 것은 다음과 같다.

 

 

바라이 제1 : 상대가 동물이라 할지라도 이성과 의도적으로 관계를 가진 비구니는 번뇌에 패배당한 자로서 바라이를 범한 것이다. 다른 비구니와 함께 살 수 없다.
(불교평론, 금욕으로 깨달음을 얻는가,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88)

 

 

비구에 대한 것은 계를 받은 비구가 계를 버리지 않고 (출가 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고 고백하지 않은 상태에서 음행을 하면 그 대상이 짐승의 암컷일지라도 이 비구는 쫓겨난 죄를 지었으니….”라고 시작 되는데, 비구와 비구니에 대한 차이는 고백에 관한 것이다.

 

비구는 바라이 죄를 저질렀을 때 구족계를 받은 비구 앞에서 계를 포기하겠다고 하며 포기 의사를 분명히 밝혀야 하지만, 비구니는 그런 선언이 없이 승단을 떠 날 수 있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감각적욕망은 언제 없어질까

 

감각적욕망의 극복이 없이 불교의 목표인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 깨달음의 단계를 초기불교에서 4가지 단계로 나눈다. , 수다원(sotāpanna, 소따빤나), 사다함(sakadāgāmi, 사까다가미), 아나함(anāgāmi, 아나가미), 아라한(arahatta, 아라핫따) 이렇게 네가지로 구분 되는데, 각 과위마다 정신적발달단계가 다르다. 이를 흔히 열가지 족쇄(結, sayojana, 삼요자나)라한다.

 

이는 범부를 윤회의 바퀴에 붙들어 매어 두기 때문에 족쇄로 보는 것이다. 그 족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 ② 회의적 의심(vicikicchā), ③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 sīlabbata-parāmāsa), 감각적 욕망(kāma-rāgā), 적의(paigha), 색계에 대한 집착(rūpa-rāga), 무색계에 대한 집착(arūpa-rāga), 자만(māna), 들뜸(uddhacca), 무명(無明 avijjā)

 

 

여기에서 수다원의 경우 1번에서 3번까지 즉, 유신견과 회의적 의심과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의 족쇄가 풀린 것을 말한다. 그러나 나머지 일곱가지는 족쇄로서 남아 있다. 그렇다면 사다함은 어떤 정신적 단계일까.

 

사다함은 네번째의 감각적 욕망과 다섯번째의 적의(성냄)가 옅어진상태를 말한다. 이는 완전히 제거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1번서 부터 5번까지를 거친족쇄(orambhāgiya-sayojana)라 하여 오하분결(五下分結)’이라 한다. 한편 6번부터 10번까지를 미세한족쇄(uddhambhagiya-sayojana)라 하여 오상분결(五上分結)’이라 한다.

 

이처럼 거친것과 미세한 것으로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아나함이 되면 거친것이 모두 없어지고, 아라한이 되어야 미세한 것 마저 없어져 10가지 족쇄가 완전히 풀려 더 이상 윤회하지 않고 해탈하여 열반한다고 한다.

 

여기서 중여한 사실은 거친족쇄로 분류 되는 감각적 욕망이 아나함이 되어야만 없어진다는 사실이다. 그 이전 단계인 수다원에서는 남아 있고, 사다함에서는 단지 옅어질 뿐이어서 감각적 욕망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수다원단계에서 감각적욕망이 일어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단지 그 욕망에 휩쓸리면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것은 안다는 것이 범부와 달라서 알아차림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나함과를 성취하였을 때

 

논문에서 다룬 내용은 금욕으로 깨달음을 얻는가...’ 에관한 내용이다. 재가불자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데, 가장 첫번째 단계가 수다원이다. 그렇다면 재가불자가 금욕생활을 하지 않고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내와의 생활을 즐긴사람이나 금욕 생활을 닦은 사람이나 모두 같은 성과를 얻기 때문에 적어도 열반을 얻는 세 번째 단계까지만 보면 깨달음의 전제 조건일 수 없다는 것이다.

(불교평론, 금욕으로 깨달음을 얻는가,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88)

 

 

세 번째 단계라면 아나함을 말한다. 아나함은 거친족쇄 5가지가 모두 풀린성자를 말한다. , 감각적욕망에서 족쇄가 풀린자이다. 따라서 아나함이 되면 더 이상 아내와 생활을 즐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전인 수다원과 사다함의 경우 감각적 욕망이 남아 있기 때문에 설령 그런 과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부부관계는 유지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 좋은 예가 법구경 에 나온다.

 

 

  그러자 담마딘나도 남편이 변한 것을 느꼈다. 전 같으면 남편이 밖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담마딘나는 창문 곁에 서서 남편을 마중했고, 그때마다 위사카는 애정 어린 눈으로 아내를 바라보며 미소를 보내어 아내를 기쁘고 흐뭇하게 해주곤 했다. 그러나 이제 위사카에게 있어서 그런 미소 같은 것은 별 의미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집에 돌아와도 아내에게 미소를 보내지도 않았고, 별다른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법구경 421번 게송, 인연담에서)

 

 

법구경 421번 게송에 대한 인연담인 담마딘나 빅쿠니이야기이다.

 

어느 날 남편 위사카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집에 돌아 왔는데, 평소와 다른 언행을 발견한 것이다. 남편이 아나함과를 성취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감각적 욕망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남편은 재산을 모두 아내가 가지라고 말하고, 심지어 재혼까지 해도 좋다고 말한다.

 

이처럼 아나함과를 얻기 전까지 감각적 욕망은 남아 있기 때문에 재가자도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수다원이나 사다함의 단계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나함이상이 되면 모든 감각적 욕망이 소멸 되었으므로 부부로서 생활을 하지만 관계는 갖지 않는다든가, 출가하여 상가의 일원이 되는 것이 초기경전에 표현 되어 있다.

 

초기경전에서 본 재가불자의 금욕과 깨달음의 사례

 

금욕생활을 하는 출가자나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재가자나 모두 금욕이 전제조건이 되지 않는다고 논문에서 말한다. 그런 예를 경전에서 볼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비사카(Visakha, 최고의 여성 재가 제자)

 
비사카는 15세 혹은 16세에 결혼하였다. … 후에 아들 열 명과 딸 열 명을 두었으며 이들 모두 같은 수의 자식을 두어 4대가 이어졌다.

 

비사카는 놀랍게도 120세까지 살았다. … 코끼리처럼 강건하여 하루 종일 싫증내지 않고 일하며 대가족을 돌보았다. 틈만 나면 스님들께 매일 공양하고 사원을 찾았으며 음식··거처·침구·약이 모자라는 스님이 없는지 살폈다. 무엇보다도 열심히 반복해서 설법을 들었다. … 설법을 들으러 갈 때에도 값비싼 결혼 예물을 하고 갔다. … 부처님께서 승가를 후원하는 여성 재가자 중에 최고라는 평가를 하였다.

그러므로 7세의 나이에 깨달음의 첫 단계에 도달하고 나서 결혼하고 아들 딸 10명을 낳을 정도로 육체적인 쾌락을 누리고 살았다.

 

비사카는 분명히 금욕 생활을 하지 않았다. 일래과를 얻으면 일곱 번의 생 이내에 열반을 얻는 것이 보장되며 아래 단계로 떨어지는 법이 없다. 확실하게 열반의흐름에 들어간 것이다.

 

이 곳에서 더 나아가 최종 목적을 향해 계속 전진하면 최종 목적에 도달하는 데에는 얼마나 수행에 전념하는가에 따른 시간만이 관건이 된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첫 단계를 얻은 비사카는 최고의 여성 재가 제자인 만큼 부처님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최종 목적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지, 그녀의 수행에서 금욕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

2) 나쿨라 부부

 

나쿨라피타(Nakulapita)와 나쿨라마타(Nakulamata)는 부처님이 중요한 재가 제자로 평가한 사람들로서 문헌에서는 서로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의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팔리어 경전에서는 부부 모두가 세존을 향한 신뢰를 바탕으로 절대적인 믿음에서 생겨난 신성한 수준의 부부애를 지니고 있다며 둘 사이의 관계를 모범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노부부가 부처님을 만났을 때, 부부는 어린 나이에 결혼했지만 평생 단 한 번도 신의를 저버린 적이 없으며 마음으로나 실제로나 외로운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한 순간도 서로에게 정절을 지키지 않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서로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 속에서 부부는 다음 생에도 함께 태어나기를 바란다며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부처님에게 묻고 그에 따른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남편 나쿨라피타가 심한 병을 앓을 때 나쿨라마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 혼자 남겨 둔다는 생각 때문에 힘들어하지 말아요. 그렇게 세상을 떠나는 것은 괴로운 일이예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그러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 내가 베 짜는 재주가 있으니 아이들은 키울 수 있을 거예요. 당신과 16년을 정결하게 살았으니 남편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거예요. 부처님과 스님들 뵙는 일도 그만 두지 않고, 오히려 전보다 더 자주 찾아뵐께요. 내가 벌써 수행의 덕 속에 굳게 머물러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잖아요. 그리고 결국 진리 속에서 확고한 자리를 찾았으니 마지막 해탈을 꼭 얻게 될 거예요.”

나쿨라마타의 말을 통해서 서로를 행한 부부애가 흠잡을 데 없고 결혼 생활을 통해 아이도 얻었지만 16년 동안 금욕 생활(gahatthakan brahmacariyan samacinnam)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내가 벌써 수행의 덕 속에 굳게 머물러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잖아요. 그리고 결국 진리 속에서 확고한 자리를 찾았으니 마지막 해탈을 꼭 얻게 될 거예요라는 말은 나쿨라마타가 예류과를 얻었음을 알게 한다.

 

부부가 너무나도 사랑하고 내생에도 다시 만나기를 바랄 만큼 서로에게 애착이 있지만 정신적인 성과를 얻으면 금욕 생활로 이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3) 케마(Khema)

 

케마 이미 예류과를 얻은 빔비사라 왕의 아름다운 왕비였다. 왕이 부처님의 든든한 후원자였기 때문에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를 왕에게 많이 들었으면서도 부처님이 아름다움과 육신의 쾌락의 허무함을 설법한다는 말을 듣고는 부처님을 만나 보려고 하지 않았다. 왕이 가까스로 설득해서 부처님 계신 곳으로 데리고 가게 되었다.

 

비단과 백단으로 된 황실 옷을 입고 간 왕비는 조금씩 부처님이 설법하시는 법당으로 관심이 끌렸다. 왕비의 마음을 읽은 부처님은 신통력으로 왕비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을 만들어 설법하는 동안 부처님 뒤에서 부채질을 하게 했다. 왕비는 여인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다.

 

부처님은 그 여인의 젊은 모습에서 중년, 다시 치아는 다 빠지고 백발은 성성하고 피부에 주름이 잡힌 노인의 모습이었다가 목숨을 잃고 땅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차례로 바꾸어 보여주었다. 아름다움의 허망함을 깨닫게 하신 부처님은 왕비가 깨달음의 첫 번째 단계에 도달했다는 게송을 주었다.

 

부처님은 설법을 계속하여 왕비가 황실 옷을 입은 그대로 아라한과를 얻었다는 말로 설법을 마무리하였다. 왕비는 왕의 허락을 얻어 비구니 승가에 들어갔다. 나중에는 비구니 승가에서 가장 뛰어난 두 비구니의 한 명으로 부처님께 인정받았다


(
불교평론, 금욕으로 깨달음을 얻는가,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88)

 

 

 

 

 

 

사진

http://wisdomquarterly.blogspot.com/2008/07/female-foremost-in-wisdom.html

 

 

 

논문에 따르면 당시 왕이나 왕비가 예류과(수다원)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적 쾌락을 누리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깨달음을 얻자 자연스럽게 세속생활을 정리하고 상가에 들어가 수행에 전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이야기들을 보면 부부사이의 금욕이란 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데 있어서 필요조건은 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현대 재가불자들의 금욕과 깨달음 사례

 

이처럼 금욕과 깨달음과 관련하여 재가불자들의 삶을 초기경전에서 보았다. 그렇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재가불자에게 있어서 금욕과 깨달음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논문에서 몇 가지 사례를 발표 하여 놓았다.

 

 

사례 1


두 아이를 둔 66세의 주부는 30년 전 어느 명상 센터에서 안거하는 중에 최초의 뜻깊은 종교 체험(예류과)을 했다. 종교 체험을 할 무렵은 정식 명상 센터에 있었기 때문에 8재계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때는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책임을 다하며 완벽히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하였으며 보통의 계인 5계를 지키고 있었다.

 

모든 면에서 아내와 어머니의 책임을 다하면서도 종교 체험 후 ‘4, 5이 지나자높은 단계의 계를 지키며 금욕 생활을 시작했다. 8재계 전체(향수나 보석 등을 하지 않는다, 점심 이후로는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않는다 등이 8재계에 들어 있다)를 지킨 것은 아니지만 부부 관계를 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다.

 

이 문제 때문에 처음에는 남편과의 사이에 긴장이 있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해해주었다. 요즘은 더 높은 단계의 성과를 고대하며 조화로운 결혼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2) 사례 2


두 아이를 둔 엄마인 56세의 교사는 19년 전에 최초의 뜻깊은 종교 체험을 하였다. 그는 집에서 최초의 체험(예류과로 묘사하였다)을 하였다. 집안일을 잘 해내서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하고 있었지만 이 무렵에는 ‘5계보다는 높은 수준의 계를 지키고 있었다.

 

이 체험을 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 다른 모든 면에서는 정상적인 재가 생활을 하면서도, 부부 관계를 금지할 뿐만 아니라 점심 이후에는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는 등 많은 육체적 쾌락을 금지하는 8재계를 지키고 있다.

 

종교 체험을 했을 때 이미 남편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나빠져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도 남편과는함께 살지는 않지만 같은 지붕 아래 살면서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3) 사례 3


상업 지구의 고위 관리인 40대 초반의 기혼 여성은 11년 전에 최초의 뜻깊은 종교 체험(예류과)을 했다. 집에서 이 체험을 했는데 5계를 지키면서 완전히 정상적인 재가인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체험 후 4년이 지날 무렵 자연스럽게 남편과의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지금은 8재계 전체를 지키는 것은 아니지만 금욕 생활을 하고 있다. 불교를 이해하고 있는 남편과의 조화로운 사이에 금욕은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열반을 얻으려고 꾸준히 노력하면서도 자신의 경력을 추구하는 등 다른 모든 면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재가인의 삶을 계속하고 있다.

(
불교평론, 금욕으로 깨달음을 얻는가,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88)

 

 

이들 사례의 공통점은 재가수행자들이 성적으로 왕성한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금욕생활을 택했다는 사실이다.

 

부처님이 계율을 정한 이유

 

논문에서 말하기를 재가불자의 삶에 있어서 금욕이 깨달음의 전제조건이 되기 어렵다는 것이고, 또한 금욕생활이 깨달음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구나 비구니들에게 주어지는 극도의 금욕에 관한 계율은 결코 평가절하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계율을 제정하였다고 한다.

 

 

1) 승가의 청정을 위하여
2)
승가의 안주(
安住)를 위하여
3)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들을 멀리 하기 위하여
4)
(
) 비구들의 안주를 위하여
5)
현세의 번뇌를 끊기 위하여
6)
내세의 번뇌를 미리 끊기 위하여
7)
새로운 사람들을 귀의시키기 위하여
8)
이미 귀의한 사람들의 신심을 증장시키기 위하여
9)
정법이 오래도록 안정되게 머물게 하기 위하여
10)
계율을 소중히 하기 위하여
(불교평론, 금욕으로 깨달음을 얻는가,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88)

 

 

계율이라는 것이 단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를 닦는 과정에서 감각적욕망과 마음과 몸의 본질을 깨달으면 자연스럽게 금욕의 과정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번째 단계인 아나함과를 얻으면 완전한 금욕으로 전환한다고 한다.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육체적 욕망을 완전히 초월하였기 때문에 성에 대한 열망에 불을 붙일 불씨가 남아 있지 않다. 모든 아라한은성적 능력이 있는 성 무능자이다.’”

 

 

 

2011-01-22

진흙속의연꽃

 

 

 

 

 

금욕으로 깨달음을 얻는가.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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