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탐욕으로 먹었더니, 음식과 수행

담마다사 이병욱 2011. 2. 4. 15:29

 

 

탐욕으로 먹었더니, 음식과 수행

 

 

 

하루 일과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강렬한 인상을 주었을 때이다. 매우 즐거웠을 때 그 기분은 더 강한 대상이 나타날 때 까지 꽤 오랫동안 지속 된다. 고통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몸과 마음의 상태가 고통스러우면 다른 것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오로지 이 고통에서 어떻게 하면 탈출할 수 있을까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탐욕으로 먹었더니

 

사람을 보는 방법중의 하나가 성을 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탐진치 삼독 중에 가장 천박한 것이 성냄인데 이는 매우 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람을 보는 또 한 가지 방법은 음식을 먹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밥을 먹을 때 미친듯이 퍼 넣는다든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음식을 다 비운 경우가 이에 해당 될 것이다. 이 경우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탐욕으로 밥을 먹고, 성냄으로 마시기 때문일 것이다.

 

탐욕과 성냄으로 음식을 먹을 때 탈이 나도록 되어 있다. 탐욕으로 먹다 보면 과식하게 되고, 진귀한 먹거리를 찾아 맛집을 전전 하게 될 것이다. 한편 성냄으로 음식을 취하다 보면, 알콜에 의존하게 되고, 술이 술을 마시고, 나중에 술이 사람을 마시는 결과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 결과 몸이 버틸 수 없게 되어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

 

평소에 잘 먹지 않던 인스턴트음식을 먹은 것이 화근이었다. 이른바 정크푸드라 불리우는 인스턴트 음식의 맛에 끌리어 탐욕과 성냄으로 먹은 결과 그 댓가는 혹독하였다. 설사에다 오한까지 겹쳐 그야말로 몸은 초토화되었다. 모든 것을 비워내기 위하여 금식을 하였고, 오한을 이겨내기 위하여 꼼짝없이 드러누워 있어야 했다. 한 순간의 실수로 모든 것이 물거품 되듯이 음식관리 실패로 인한 댓가 치고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고통이 일어났을 때

 

불교에서 고통(dukkha, 둑카)의 의미는 매우 광범위하게 쓰인다. 일반적으로 고통이라 함은 육체적고통과 정신적고통을 의미한다. 이는 고통에 기인한 고통또는 고통 그 자체라 하여 고고(苦苦, dukkha-dukkha)’라 한다.

 

한편 변화에 기인한 것을 괴고(壞苦, viparinama-dukkha)’라 하고, 이는 고통(suffering)이라는 말 대신 불만족(unsatisfaction)’이라 사용한다. 또 형성됨에 기인한 고통을 행고(行苦, sankhara-dukkha)’라 하는데 이는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하더라도 결국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에 괴로움으로 인식한다.

 

몸이 아픈 것은 육체적 고통이다. 육체적고통이 심하면 그 보다 약한 고통은 수면아래로 내려가게 된다. 그래서 온통 육체적 통증만을 느끼게 된다. 한시바삐 육체적 통증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이 일어 나게 되는데, 이때 통증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육체적고통이 정신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흔히 죽겠다라는 표현을 쓴다.“배가 아파 죽겠다든가, 오한이 나서 추워 죽겠다든가 하는 표현이다. 배가 아픈 것은 육체적 통증이지만 거기에 죽겠다를 플러스 하면 정신적 통증까지 느껴 이중 삼중으로 통증을 느끼게 된다.

 

이럴 경우 유일신교를 믿는 사람들은 주여! 주여!” 하고 외칠지 모른다. 대승불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열심히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며 염불할 지 모른다. 그러나 사념처수행을 한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고통스런 현상에 대하여 관찰 할 것이다.

 

수행처에서 흔히 하는 말 중에 하나가 고통은 손님과 같다고 한다. 고통이 없을 경우 몸에서 일어나는 가장 강렬한 현상은 호흡이다.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이 가장 강한 자극이기 때문에 호흡에 집중하여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지만, 호흡보다 더 강한 자극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좌선중에 다리가 저리다든가, 몸이 가렵다든가하는 현상이 발생하였을 때 그 곳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모든 일어난 현상들은 결국 일어났다고 사라지고 마는 것이기 때문에 집중하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몸에 아플 때 그 아픈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라보듯이 관찰하는 것이다. 그 어떤 아픔도 영원히 지속되는 법이 없기 때문에 결국 사라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고통이야말로 알아차릴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손님이라 한다.

 

음식과 수행

 

음식을 잘 못 먹음으로 인하여 복통을 일으키고, 그 결과 오한까지 겹쳐서 이중삼중으로 육체적 고통을 겪었을 때 그 근원적 뿌리는 탐욕에 기반을 둔 것이라 볼 수 있다. 탐욕을 부리면 성냄과 어리석음 또한 동반되어 따라 나오는데 이는 수행이 덜 되어서 일 것이다. 그렇다면 음식을 잘 먹는 것도 수행일 수 있을까. 초기경전에 따르면 음식을 절제하는 것도 수행으로 본다.

 

 

먹는 것에 적당량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주의 깊게 살피면서 음식을 취해야한다.

음식을 먹는 것은 즐기기 위해서도 아니며,

취하기 위한 것도 아니며,

육신의 아름다움이나 매력을 위해서도 아니며,

다만 이 육신을 계속적으로 지탱하기 위한 것이며,

나아가서 청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맛지마니까야: 107, 가나까목갈라나경 1-11,

Ganakamoggallana Sutta, MN 107, http://www.accesstoinsight.org/tipitaka/mn/mn.107.horn.html)

 

 

가나까목갈라나경에서 부처님은 수행의 단계를 설명하였는데,

 

첫 번째 단계가 계행을 지키는 것,

두 번째 단계가 감각기관을 절제하는 것,

세 번째 단계가 음식을 절제하는 것,

네 번째 단계가 명상으로 번뇌를 맑히는 것,

다섯 번째 단계가 마음챙김과 선명한 알아차림에 머무는 것,

여섯 번째 단계가 다섯 가지 장애를 정화하는 것,

일곱 번째 단계가 네가지 선정에 머무는 것

 

이라 하였다.

 

이 중 세 번째 단계가 음식을 절제하는 것인데 단계적 수행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음식을 함부로 먹는 막행막식은 수행자의 자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수행자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먹고 음식을 먹긴 먹되 알아차리면서 먹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맛 있는 음식을 찾아서 맛집을 순례한다든가, 탐욕과 성냄의 음식을 먹는 것은 비불교적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음식은 단지 육신을 지탱하기 위한 조건으로 먹는 것이고, 음식으로 인하여 몸을 청정하게 유지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나치게 과식하고, 맛 있는 음식만 찾아 다니고, 탐욕으로 먹고, 성냄으로 먹는 생활이 지속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는 몸을 더럽히고 결국 위장 속의 겁화를 일으킬 것임에 틀림 없다.

 

탐욕이 치성하였을 때

 

불교 용어 중에 겁화(劫火)’가 있다. 주기적으로 불에 의하여 세상이 파괴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 겁화가 일어나면 하나의 띠끌도 남김 없이 색계 초선천까지 모조리 파괴 된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또 세상이 시작 되는 것이다. 이런 겁화가 일어나는 요인은 무엇일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탐욕이 치성하면 겁화가 일어난다고 한다.

 

세상이 스스로 파괴되는 이유는 인간의 탐욕이 극에 달했을 때 불로서 남김 없이 태워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성냄이 치성하였을 때 물로서 색계 2선천까지, 어리석음이 치성하였을 때 바람으로서 색계 3선천까지 형성된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 없이 쓸어 버린다고 한다. 이처럼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극에 달했을 때 종말이 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불교의 세계관이다.

 

마찬가지로 한 존재가 과식을 하여 탐욕과 성냄으로 음식을 취했을 때 뱃속의 겁화가 일어나 모든 것을 쓸어 내려갔을 때 소박한 음식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가급적 기름기있는 것은 먹지 않고 주의 깊게 살피면서 식사를 한 결과 몸은 한결 청정해진 것 같다. 가급적 이런 자세로 계속 유지해 간다면 몸의 청정 뿐만아니라 마음의 청정까지 이룰 수 있는 느낌이 든다. 부처님이 수행에 있어서 점차적인 단계에 음식에 대한 항목을 넣었는지 속을 비워내고 나니 알 수 있을 것 같다.

 

차창가에 비친 한강변의 고층 아파트

 

차창가에 비친 한강변의 고층 아파트 단지는 하나의 거대한 인공구조물과 같다. 밤에 보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구조물을 보면 욕망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강변의 빌딩과 아파트 구조물에서 뿜어 나오는 불빛과 질주하는 자동차를 보면 탐욕의 절정을 보는 것 같다. 여기에 종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가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작용을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욕망을 부추기는 것이 없다.

 

부처님은 고통의 원인이 되는 갈애와 집착을 내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알아차리라고 하였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알아차리지 못한 결과 엄청난 고통을 겪고 산다. 복통이 난 것도 음식을 절제하지 못해서 이고, 거대한 아파트 구조물도 욕망을 절제하지 못해서 일 것이다. 그 결과 문명이 발달되면 될 수록 인간의 탐욕으로 인하여 겁화가 발생될 가능성이 높다. 겁화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 외 다른 길이 없다.

 

 

 

 

2011-02-0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