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와 초기불교, 원융인가 선택인가
이분법적 논리
대승과 소승, 오래 전부터 이와 같은 ‘이분법적인 구도가 있었다. 지금도 이런 논리를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TV나 라디오의 법회나 강좌시간에 대승과 소승을 가르고, 또한 소승은 ‘열등’한 것이고 대승은 ‘수승’한 것이라는 이분법적인 논리가 그것이다.
대승불교 국가로 분류되는 우리나라의 경우 불자가 될 때 거의 대부분 대승불교의 교리와 함께 시작한다. 그런 대승불교의 핵심가르침은 ‘대승보살사상’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수 많은 불보살이 만들어졌고, 또한 불자들의 신행역시 이와 같은 불보살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위주의 불교이다. 그렇게 전승되어온 대승불교의 경전을 보면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비하하고 있다. 이른바 대승은 수승한 것이고 소승은 열등한 것이라는 논리이다.
대승보살사상을 전파하기 위하여 새로운 경전이 계속해서 만들어졌는데, 그 경전들의 내용을 보면 한결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초기불교경전에 대하여 ‘소승법’이라 하여 비난과 비방, 심지어 극언을 서슴치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중에 가장 절정이 유마경이 아닐까 생각한다.
능멸당하는 10대제자
BBS불교방송의 경전공부시간에 유마경이 강의 되고 있다. 유마경에서는 과연 어떤 내용이 표현 되어 있을까. 놀라웁게도 부처님의 10대제가 능멸되고 있는 장면이다. 그 중에 병이 난 유마거사에게 문병간 ‘수보리존자’가 유마거사로 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장면이 나온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지 못한 당신에게 복덕이 되기는 커녕 지옥, 아귀, 축생의 경계에 떨어질 것이다. 그대에게 보시하는 것은 복전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그대에게 공양을 올리는 사람 역시 3악도에 떨어질 것이다.”
불교방송사이트에서 녹취한 내용이다. 문병간 수보리존자에게 유마거사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하고 있다. 소승법을 배우는 부처님의 제자들은 지옥과 같은 3악도 반드시 떨어질 것이고, 그런 그들에게 공양하는 사람들 역시 3악도에 떨어질 것이라는 극언을 퍼 붓고 있다. 바로 이런 장면이 대승경전의 곳곳에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이사상(不二思想)’이라는 용광로
대승불교국가로 분류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부처님의 원음이 담긴 초기불교경전과 논장, 주석서등이 보급되고, 그에 따른 부처님의 수행법이라 일컬어지는 사념처수행방법이 인터넷시대와 함께 급속하게 보급됨에 따라, 대승불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대승불교와 초기불교의 원융을 이야기한다. 과연 대승불교와 초기불교는 원융할 수 있을까.
원융이란 무엇일까. 둘이아니라 하나됨을 의미한다.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과 같은 ‘불이사상’의 논리이다. 그런 불이사상은 마치 용광로와 같다. 모든 것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논리로 모두 녹여버린다. 이는 공사상의 논리와도 일맥상통하여 그 어떤 진리나 가르침도 모두 용해 되어 버린다.
불이사상이라는 용광로에 대승과 초기불교가 함께 어우러졌을 때 과연 초기불교는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불이사상에 따르면 번뇌가 곧 깨달음이고 열반이라는데 이는 교학과 수행을 하자는 것인지 말자는 것인지 애매모호하다.
모든 것이 하나로 귀일 되는 논리에 따르면 애써 공부를 하거나 수행을 할 의지를 꺽어 버린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원융이란 초기불교의 정체성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는 것이다. 반대로 초기불교로 원융하였을 때 대승불교는 정체성을 버려야 한다. 이처럼 서로다른 불교가 원융하였을 때 그 불교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180도 다른 불교
대승불교와 초기불교의 교리를 비교해 보면 너무나 다른 점에 놀라게 된다. 초기불교의 최종종착지인 ‘열반’에 대해서도 대승불교와 약간 다른 것이 아니라 ‘180도’ 다르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현상’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이고, 더러운 것이라고 하였지만, 대승불교의 열반개념은 그와 정반대이다. 즉, 대승불교의 열반개념은 항상하고, 행복하고, 진짜 나가 있고, 깨끗한 것이라는 상락아정을 주장한다. 이런 ‘상락아정’과 초기불교의 ‘무상 고 무아 더러움’이 어떻게 원융할 수 있을까.
이런 다름은 초기불교의 최고 지향점인 열반에 대한 대승불교의 인식에서도 드러난다. 불교방송의 유마경 경전공부시간에 강사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본래 자성청정하기 때문에 생사도 번뇌도 알고 보면 진여의 마음을 아주 여의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중생의 분별심 그 자체도 본래 맑고 깨끗한 그 마음 즉, 열반을 떠나서 존재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마음 바탕이 그대로 열반이기 때문에 다시 얻어야 할 열반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본래부터 부처이기 때문에 마음만 한번 바꾸면 곧 바로 부처가 되므로 그깨끗한 마음바탕이 곧 열반이기 때문에 따로 열반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두 ‘부정’하는 말이라 볼 수 있다.
불교도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폄하하는 이야기는 방송뿐만이 아니다. 어느 스님은 불교평론에서 초기불교에 대하여 시대에 뒤떨어진 이론으로 폄하하였다.
인류사회는 근대를 거쳐 20세기, 21세기를 맞아 인문, 사회, 자연과학 등이 고도로 발달되어 있다. 이런 시대를 맞아 불교는 연기론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역사이론을 펼치는 단계가 되어야 하는데 현대불교가 역사성과 사회성을 외면하고 연기론적 범주에만 머무는 것은 불교의 퇴보라고 생각한다.
(깨달음과 역사 / 현응스님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917)
과학문명이 발달한 21세기의 시점에서 본 초기불교의 교리가 연기법적인 범주에 머무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한 글이다. 그래서 시대에 맞게 불교의 교리도 발전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고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시절의 불교 공부법을 답습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일까 대승불교시대에 오면 보살사상이 만들어지고 이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할 새로운 경전이 편찬된다. 이때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소승법’이라 하여 모조리 비판하게 된다. 그 비판의 무기는 ‘공사상’이다.
공의 논리에 따르면 그 어떤 성인의 가르침이나 진리도 모두 ‘공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런 공사상이 발전되고 발전되어 중국에 이르렀는데, 중국의 역사와 문화와 현실주의가 결합하여 ‘불성사상’이 출현한다.
이런 불성사상은 오로지 중국에서만 볼 수 있는 ‘중국화된 불교’의 전형이고 이는 선적 깨달음을 추구 하는 선종으로 발전된다. 그런 불교를 우리나라에서 받아 들여 초기불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불교를 우리가 신봉하고 있는 것이다.
조교(祖敎)와 혜자(慧子)
선불교에 대하여 불교방송의 불교강좌에서 동국대 정병조 교수는 ‘조교(祖敎)’라는 말을 하였다. 조교는 무엇일까. 조사스님의 종교를 말한다. 더 정확하게 육조혜능선사로 부터 시작된 ‘선종’을 말한다.
정병조교수가 말한 조교는 불교와 다름을 일컬어 말한 것이다. 그래서 독자적으로 혜능의 어록이라 일컬어지는 ‘육조단경’이라는 경전이 만들어졌고, 부처님의 근본가르침 보다 조사스님들의 어록위주의 가르침을 중시하여 조교라 칭한 것이라 보여진다. 우리나라 불교는 이러한 중국불교전통의 맥을 잘 유지하고 있다.
불교와 조교는 다른 종교이다. 이는 대승불교와 초기불교와 다르듯이 초기불교와 조교역시 다르다. 조교는 법맥이 실질적으로 조사스님인 혜능으로 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불자들이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혜자(慧子)’인 것이다.
‘양자택일’의 문제
불교와 조교가 다르듯이, 불자와 혜자 역시 다르다. 중국화된 불교의 전형인 조교을 신봉하는 우리나라 불교에서 이질적인 초기불교를 수용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만일 초기불교를 받아 들인다면 조교의 정체성을 유지하였던 불성이라든가 선적 깨달음을 버려야 한다. 그런 버림 없이 어떻게 초기불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원융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홍사성님은 그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보리즉열반(菩提卽涅槃)’이라는 관념은 지나치게 비약적인 데가 있다. 자칫하면 깨달음 지상주의 또는 환상이 생겨날 소지가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다소 돌아가는 번거로움이 있더라도 ‘깨달음을 통해 열반에 이른다’고 설명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왜냐하면 불교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깨달음 자체’가 아니라 ‘깨달음을 통한 열반의 성취’에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불교의 목적이 아니다”
홍사성 "한국불교 수행목적 잘못 정의"http://www.mediabuddha.net/detail.php?number=6785&thread=23r02)
오로지 선적깨달음만을 추구하는 조교와 열반을 추구하는 초기불교는 방향이 다른 것이어서 목적지 또한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조교와 초기불교가 원융하려면 둘 중의 하나는 목적을 버려야 한다. 조교위주로 원융된다면 열반이라는 업을 짓지 말아야하고, 초기불교위주로 원융한다면 더 이상 선적 깨달음에 집착해서 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교와 초기불교는 원융할 수 없고 이는 ‘양자택일’의 문제라는 것이다.
테라와다불교와 대승불교는 정반대의 입장차
이러한 조교 즉, 한국의 대승불교와 초기불교의 차이점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논문의 맺음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상좌불교와 대승불교 사이에는 거의 정반대로 보이는 입장의 차이가 있다. 그렇다고 대승불교가 실제로 남전 상좌부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에드워드 콘즈는 대승불교 신앙의 전형들 중 약간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in)나 경량부(經量部, Sautrāṇtika)에 대한 반대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보았다.64) 어쨌든 근본불교와 대승불교의 사상적 차이로 말미암아 현재의 상좌불교와 대승불교의 실천적 특성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마성스님, 상좌불교와 대승불교의 실천적 특성 비교)
마성스님은 논문에서 초기불교의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는 테라와다불교와 대승불교는 정반대의 입장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대하여 구체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테라와다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점
No |
항목 |
테라와다불교 |
대승불교 |
1 |
이해와 믿음 |
1)맹목적인 믿음보다는 교리에 대한 이해를 강조 2)‘개인의 도’와 ‘지혜의 도’에 초점 |
1)이해보다 믿음이 우선 2) ‘대중의 도’와 ‘신앙의 도’에 초점 |
2 |
점수와 돈수 |
1)점진적(漸進的) 수행을 고수 2)분석적 방법을 채택 |
1)급진적(急進的) 수행을 최상으로 여김 2) 직관적 방법을 채택 |
3 |
번뇌와 보리 |
1)번뇌의 측면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경향 2)현실세계에 초점을 맞춤 |
1)보리의 측면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경향 2)이상세계에 초점을 맞춤 |
4 |
무의례와 의례 |
1)의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음 2)이성에 토대를 둠 |
1)의례를 매우 중요하게 여김 2)감정에 토대를 둠 |
출처 : 마성스님, 상좌불교와 대승불교의 실천적 특성 비교
꽃공양을 올리는 스리랑카불자
우리나라의 육법공양
표를 보면 모든 면에 있어서 테라와다불교와 대승불교가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로 다른 불교
이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원융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서로 핵심적인 교리를 포기한다고 해서 원융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이처럼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서로 다른불교’임에 틀림없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한국불자들에게 있어서 대승불교와 초기불교는 원융이아니라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다.
2011-02-0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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