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세상은 우연히 생겨났을까, 우연발생론과 무상유정천(無想有情天)

담마다사 이병욱 2011. 3. 2. 11:50

 

 

 

세상은 우연히 생겨났을까, 우연발생론과 무상유정천(無想有情, asañña-satta)

 

 

불교와 기도

 

불교에도 각종기도가 있다. 예불이나 불공이라는 고유의 좋은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찰에서는 기도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새벽예불도 새벽기도라 하고, 사시불공도 사시기도라 하고, 심지어 관음재일의 관음기도, 지장재일의 지장기도동 모든 불공과 예불에 기도를 붙여 사찰의 일과가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나는 것 같다. 그런데 불교에서 기도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바람직할까. 창조주나 절대자, 원인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재천과 같은 초월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불교에서 기도라는 용어가 과연 바람직할까.

 

초기불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도라는 용어는 매우 비불교적이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함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바라는 기도는 결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란 절대자나 초월적 존재, 초자연적세력과 대화하는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바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바라는 대로 된다고 한다. 의사가 되기를 원하면 의과대학에 들어가 의사면허를 따 의사가 되고,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바라면 음악학교에 들어가 열심히 노력하면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다. 이처럼 바랬기 때문에 지금 현재의 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죽어서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면 역시 천상에 태어 날 수 있다는 것이다. 천상에 태어나기 위하여 부처님은 보시와 지계를 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는 근기에 따른 가르침이다. 어느 정도 가르침을 이해 하면 부처님은 사성제를 설하였다고 경전에 수 없이 나온다.

 

사성제란 바라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알아차려 고통과 고통의 원인과 고통의 소멸,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성제의 고와 멸을 확장하면 12연기가 된다. 12연기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윤회의 종식에 있다. 사성제가 고통의 종식에 관한 것이라면, 12연기는 윤회를 끝내는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이는 모두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에 근거한다.

 

고통과 윤회를 종식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한 마디로 바라지 말라는 것이다. 바라는 것을 한자어로 갈애라 한다. 갈애는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간절히 바랬기 때문에 이 세상이 만들어졌다.

 

간절히 바래서

 

사람들은 왜 보게 되었을까. 사람들은 왜 듣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아눌라스님의 인터넷음성법문을 들어보면 보기를 원했기 때문에 보게 되었고, 듣기를 바랬기 때문에 듣게 되었다고 한다. 눈을 예로 든다면 보기를 원해서 눈이 생겨났고 그에 따라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감각기관은 모두 같지 않다는 것이다.

 

개는 후각이 발달하여 인간보다 수십배 더 냄새를 잘 맡을 수 있고, 박쥐는 눈이 퇴화 되었지만 청각은 인간보다 수천배 발달하여 어두운 동굴을 자유자재로 날라 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쓰면 쓸수록 발달하고, 쓰지 않으면 퇴하하는 것을 주변에서 또는 학습으로서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죽어서 간다는 내생도 자신이 바라는대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이런 세계가 인간세계를 포함하여 지옥에서 부터 무색계의 비상비비상처 천상까지 모두 31곳인데, 이는 모두 자신이 지은 행위에 따른 결과로서 태어나는 것으로 본다. 이런 세계를 삼사라(samsara)’ 하며 다른 말로 윤회계라 한다. 그리고 윤회계에 사는 모든 존재를 중생이라 부른다.

 

윤회계를 유전하는 중생들은 크게 몇 가지의 견해를 가졌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영속론이 있다. 이 세상은 전지전능한 절대창조신에 의하여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믿고, 자아와 세상이 영속하다고 보는 견해이다. 다음으로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단멸론’,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숙명론’, 이 세성은 우연히 생겨났다는 우연론등이 있는데, 부처님은 이런 견해를 모두 삿된 생각으로 보았다. 그래서 이와 같은 사견(邪見)’을 연기법으로 부수었는데, 그 중 우연론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무상유정천 (無想有情, asañña-satta)

 

자아와 세상은 우연히 발생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우연론이다. 이런 우연론은 어떤 근거로 나오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디가니까야 범망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무상유정(無想有情)이라는 신들이 있다.

그들은 인식이 생겨나면 그 무리로부터 죽게 된다.

(디가 니까야, 범망경 梵網經- Brahmajāla Sutta, D1, 2.31)

 

 

여기에서 무상유정천 (無想有情) 이라는 천신이 등장한다. 무상유정천은 어떤 곳일까. 이럴 때 논장과 주석가 필요하다. 니까야만 읽다 보면 부처님이 설법하신 내용의 개요를 파악하기 힘들다. 특히 새로운 용어가 나왔을 때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면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이 되기 쉽다. 그래서 논장과 주석서를 니까야 못지 않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주석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무상유정(無想有情)’으로 번역되는 아산냐삿따(asañña-satta)는 인식이 없는 중생이란 뜻이다. 이들은 마음(citta)이 아예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인식과정(vīthi-citta)도 없다. 전생에 인식에 대해 극도로 혐오하여 인식이 없는 경지를 얻고자 선정을 닦았기 때문에 무상유정천(無想有情天)에 태어나며 인식이 생겨나는 순간 그 무리로부터 죽게 된다고 한다.

 

 

무상유정천에 태어나는 중생은 살아 있을 때 인식하는 것 즉, 감각기관에 부딪친 대상을 아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여 인식이 없는 세상에 태어나기를 바랬기 때문에 그런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상유정천은 문자 그대로  상이 없는(無想, asañña) 중생이라는 뜻이다. 이런 중생의 모습은 어떠할까.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12연기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에 따르면 마치 목각인형과도 같다고 표현하였다. 오온 중에 만 있을 뿐 수상행식이 없기 때문에 마치 인형이나 동상처럼 물체만 있을 뿐 아무런 정신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사진 : http://gadgetsin.com/diy-wooden-doll-kit-paint-your-own-dolls.htm

  

 

세상도표를 보면

 

이런 중생이 사는 세계가 무상유정천인데, 색계 사선천에 있다. 이를 세상도표에서 확인 하면 다음과 같다.

 

 

            세상(Bhumi,부미)

세 상

영 역

수 명

무색계

(無色界)

 

4

 

31

비상비비상처천 (非想非非想處天,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

84,000 대겁

30

무소유처천 (無所有處天, ākiñcaññāyatana)

60,000 대겁

29

식무변처천 (識無邊處天, viññāañāyatana)

40,000 대겁

28

공무변처천 (空無邊處天, ākāsānañcāyatana)

20,000 대겁

색계

(色界)

 

16

(四禪)

 

 

27

정거천

(淨居天)

 

색구경천 (色究境天, akaniṭṭhā)

16,000 대겁

26

선견천 (善見天, sudassī)

8,000 대겁

25

선현천 (善現天, sudassā)

4,000 대겁

24

무열천 (無熱天, atappā)

2,000 대겁

23

무번천 (無煩天, avihā)

1,000 대겁

22

무상유정천 (無上有頂天, assañña-satta)

500 대겁

21

광과천 (廣果天, veha-pphalā)

500 대겁

(三禪)

 

20

변정천 (遍淨天, subhakihā)

64 대겁

19

무량정천 (無量淨天, appāmāasubhā)

32 대겁

18

소정천 (小淨天, parittasubhā)

16 대겁

이선

(二禪)

 

17

광음천 (光音天, ābhassarā)

8 대겁

16

무량광천 (無量光天, appamāāsubhā)

4 대겁

15

소광천 (少光天, parittāsubhā)

2 대겁

초선

(初禪)

 

14

대범천 (大梵天, mahā-brahma)

1 아승지겁

13

범보천 (梵輔天, brahma-purohitā)

1/2 아승지겁

12

범중천 (梵衆天, brahma-pārisajjā)

1/3 아승지겁

욕계

 (欲界)

 

11

육욕천 (六欲天)

 

11

타화자재천 (他化自在天, paranimmita-vasa-vatti)

16,000천상년

10

화락천 (化樂天, nimmāna-rati)

8,000 천상년

9

도솔천 (兜率天, tusitā)

4,000 천상년

8

야마천 (夜摩天, yāmā)

2,000 천상년

7

삼십삼천 (三十三天, tāvatisa)

1,000 천상년

6

사대왕천 (四大王天, cātu-māha-rajikā)

500 천상년

인간

5

인간 (人間, manussa)

정해지지않음

악처 (惡)

 

4

아수라계 (阿修羅, asura)

정해지지않음

3

축생계 (畜生, tiracchāna)

정해지지않음

2

아귀계 (餓鬼, peta)

정해지지않음

1

지옥 (地獄, niraya)

정해지지않음

출처 ; 아비담마길리잡이, 진흙속의연꽃편집, 2011/03/02

 

 

불교에서 말하는 세상은 가장 아래의 지옥에서 부터 가장 수명이 긴 비상비비상처까지 모두 31개의 세상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세상은 수명이 다하면 지은 업이 남아 있는 한 마치 두레박 처럼 31개의 세상을 오르락 내리락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윤회계(samsara)’라 하며, 이들 세상에 사는 존재를 모두 중생이라 한다. , 부처님의 성스런 가르침을 실천하여 아나함과를 얻어 불환자들이 태어나는 정거천은 예외이다.

 

삶과 죽음을 거꾸로

 

세상도표에서 무상유정천은 색계 4선천에 속해 있고, 그 수명은 500대겁을 수명대로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00대겁이란 얼마나 긴 시간일까. 일반적으로 중생의 탐욕이 치성하여 불에 의하여 세상이 수축되고, 다시 팽창하여 성주괴공하는 시기를 1대겁으로 잡고 있다. 따라서 500대겁이라면 색계 초선천까지 파괴되는 성주괴공이 500번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토록 긴시간을 수명대로 살다가 죽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무상유정천에 사는 존재가 죽으면 의식이 살아난다. 무상유정천에 있었을 때 마치 식물인간처럼, 목각인형처럼 전혀 인식이 없는 상태로 살았지만 죽음과 동시에 의식이 되살아 나서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무상유정천에 사는 존재는 우리가 말하는 삶과 죽음을 거꾸로사는 것이다. 그들은 죽어야 사는 것이고, 사는 것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의 삶을 살아 간 것이다. 그런 중생들이 인식이 생겨나면 죽게 되는 것이다.

 

왜 우연론자가 되었을까

 

무상유정천에 살았던 중생들이 죽어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태어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중 어떤 자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 태어났다. 그는 태어나서 출가하여 애를 쓰고, 노력하고 마음의 삼매를 닦게 된다. 하지만 그는 재생연결의 인식이 생겨 난 것은 기억하지만 그 이상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 결과 그는 무엇이라 말했을까. 범망경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아와 세상은 우연히 발생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나는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디가 니까야, 범망경 梵網經- Brahmajāla Sutta, D1, 2.31)

 

 

그는 자아와 세상이 왜 우연하게 발생되었다고 착각하였을까. 그 것은 그가 무상유정천에 있었을 때 인식이 없는 상태로 살다가 인간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아와 세상이 우연히 생긴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이와 같은 우연발생론자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비구들이여,

이같이 취하고 이와 같이 거머쥔 확정적인 견해들을 (가진 자들의) 태어날 곳은 어딘지, 다음 생애는 어디로 인도될 것인지 여래는 꿰뚫어 안다.

(디가 니까야, 범망경 梵網經- Brahmajāla Sutta, D1, 2.34)

 

 

우연발생론자나 영속론자, 단멸론자들이 생각하는 확정적인 견해 즉, “~는 이것 밖에 없다는 견해는 결국 삼사라를 윤회 할 수 밖에 없다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그 결과 태어남이 있게 되고, 늙음과 죽음과 근심, 탄식, 육체적고통, 정신적고통, 절망을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이다.

 

윤회계를 벗어나려면

 

그렇다면 윤회계를 벗어나서 정견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여섯 가지 감각접촉이 일어나는 감각장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이들 모든 (견해들)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꿰뚫어 안다."

 

(디가 니까야, 범망경 梵網經- Brahmajāla Sutta, D1, 3.71)

 

 

 

부처님은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부딫쳐 일어나는 좋다” “싫다” “좋지도 싫지도 않다라는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것을 강조한다. 여기에 어떤 갈애가 개입되었을 때 견해가 되어 버리고, 자신이 지은 견해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난 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자들은 자아와 세상이 영원하다는 견해를 가지며 그 세상에 나기를 바라서 천상에 태어나지만 이는 연기법을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태어남, 늙음과 죽음과 근심, 탄식, 육체적고통, 정신적고통, 절망을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언가를 바라는 기도는 자신이 살기에 적합한 세상을 만들 뿐, 결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해탈과 열반을 결코 실현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면에서 무언가를 갈구하고 바라는 기도는 대단히비불교적’행위라는 것이다.

 

2011-03-0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