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해탈과 열반의 기쁨, 테라가타와 테리가타

담마다사 이병욱 2011. 3. 8. 11:39

 

 

해탈과 열반의 기쁨, 테라가타와 테리가타

 

 

 

출가식에서

 

대승경전의 정수를 반야심경이라 한다. 불과 260여자에 달하는 반야심경에서 비일비재하게 접하는 문자가 ()’자나 ()’자나 ()’자이다. 이와 같은 알듯 모를듯 한 문자를 접하면 불교가 한 없이 어렵게만 느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렵고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글자가 아마도 공()일 것이다. 그런 공의 종류는 몇가지나 될까.

 

불교TV사이트에서 본 장면 중에 출가식이 있었다. 마치 결혼식에서 신랑신부의 앞날을 축하 해 주듯이 어느 여성 출가자의 출가장면을 축하 해 주는 프로이었다.

 

모두 세명의 스님이 나와서 당부의 법문을 하였는데, 그 중 어느 원로스님은 공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마치 연설하듯이 설한 그  공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여러 종류가 있었다.

 

 

내공, 외공, 내외공, 공공, 대공, 제일공, 유위공, 무위공, 필경공, 무시공, 산공, 성공, 자상공, 제법개공, 불가득공, 무법공, 유법공, 무법유법공 이렇게 18공을 알아야 공의 체와 작용을 알 수 있습니다.”

 

 

공사상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데 무려 18개나 되는 공을 알아야 공을 제대로 알 수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불자들이 알고 있는 공은 반야심경에 나타나는 공일 것이다. 그런 공은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모두 공한 것이다. 그래서 사성제, 십이연기등으로 대표되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 역시 공의 논리에 따르면 모두 공한 것이 되고 만다. 이런 가공할 공의 논리에 따르면 그 어떤 진리나 성인의 가르침 역시 공한 것이 되고 만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공의 논리이다.

 

이후에 전개 되는 공사상은 너무나 복잡하고 난해하고 너무 방대해서 중관, 유식, 여래장, 불성사상등 평생 배워도 다 이해 하지 못할 대승불교와 밀교, 선불교등 온 갖 불교사상이 바로 이 공사상으로 부터 출현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어느 스님은 공사상에 대하여 공공공...” 하다 보면 멍멍멍.. “하는 것으로 들린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공한 것과 절대적인 것

 

공사상이 이렇게 그 어떤 진리나 성인들의 가르침을 공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듯이 유일신교 역시 절대(absolute)’라는 용어 앞에서 그 어떤 진리도 극복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유일신교에서는 진선미를 추구한다. 그것은 절대진, 절대선, 절대미로 표현된다. 따라서 그들은 진선미 그 자체로 보는 자신들의 창조주와 닮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타 종교의 진리나 성인들의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하여도 절대진리 앞에서는 위선에 불과하고, 절대선 앞에서는 쳐내야 할 일 뿐이고, 절대미 앞에서는 모든 것이 추한 것이 되고 만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공사상이나 절대사상은 진리나 성인의 가르침을 모두 부정한다는 의미로 보았을 때 서로 일맥상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은 이세상 보다 저세상을 동경한다는 것이다.

 

극락과 천국

 

허무주의가 있다. ‘()’자와 ()’자가 결합된 허무주의는 무엇일까. 불교 tv TV사이트에서 본 동국대 김종욱 교수의 강의에 따르면 허무주의는 이 세상을 부정하고, 저 세상을 동경하는 것을 허무주의라고 하였다. 그런 허무주의는 영어로 니힐리즘(Nihilism)이라 하는데, 이는 라틴어 니힐(nihil)에서 왔다고 한다. 그 때 니힐은 ()’를 뜻한다고 한다.

 

이 세상을 부정하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밖에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이 허무한 것이라면 저 세상은 무언가 꽉 차 있는 세상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반야심경의 말미 후렴구에 해당하는 게송에서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를 해석하면 가세, 가세, 어서 가세, 저 열반 언덕으로가 될 것이다.

 

불교에서 추구하는 열반을 하나의 저 언덕 즉  저 세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열반을 상락아정(常樂我靜)’이라 하였다. 항상 행복하고 참나가 있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이다. 그런 곳을 다른 말로 극락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대승불교의 극락과 같은 개념이 유일신교에서 천국일 것이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유일신교 역시 허무주의을 벗어 나지 못할 것이다.

 

설명할 수 없는

 

초기불교에서는 저 세상을 말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저 세상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해 놓지 않았다. 다만 저세상, 저 언덕이라고 말한다면 그 것은 윤회계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지은 업이 남아 있는 한,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나 끊임없이 떠 도는 것을 윤회라 한다. 그런 세상은 천상이 될 수 있고, 지옥도 될 수 있다. 하지만 부처님이 설한 열반은 극락이나 천국과 같이 영원하고 행복하고 참나가 있는 깨끗한 세상이 아니다. 부처님 설한 열반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이를 전문용어로 무기 (無記, avyākata)라 한다. 무기란 무엇일까, 주석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무기(無記)로 옮기는 아비야까따(avyākata)는 ‘설명되지 않은 답하지 못하는 결정하지 못하는’의 의미다. 즉 선과 불선으로 판단할 수 없는 심리현상을 뜻한다. 마음(citta)과 마음의 작용(cetasika)에서 무기는 과보의 마음(vipāka-citta)과 작용만 하는 마음(kiriya-citta)이다. 과보로 나타났을 뿐이므로 무기이고, 단지 작용만 하므로 역시 무기인 것이다.

 

 

열반은 왜 설명할 수 없는 것일까. 이는 한 존재의 소멸을 뜻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은 업이 없어서 더 이상 재생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때 세상은 만들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세상은 모두 자신이 만든 세상인데, 그 세상을 만들지 않는 다는 것은 더 이상 업을 짓지 않아, 생을 마감했을 때 동시에 자신의 우주도 파괴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세상도 없고 그 것을 인식하는 나도 없는데, 그 세상이 행복하다느니 깨끗한 곳이라는니 하는 말들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작용만 하는 마음

 

그런 열반을 성취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태어날 업을 짓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업으로 확정되지도 않고, 업의 결과도 생산하지 않는 마음을 내어야 한다.

 

그런 마음을 초기불교에서는 작용만 하는 마음이라 하고, 이를 한자어로 무인작용심또는 작용심’, 그리고 빠알리어로 끼리야 찟따(kriya-citta)라 한다. 이런  작용만 하는 마음은 여섯감각기관이 여섯감각대상에 부딪쳤을 때 아무런 업을 생산하지 않는 마음이므로 부처나 아라한의 마음이라고도 한다. 이 작용만 하는 마음을 좀 더 쉽게 표현한다면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라 볼 수 있다. 이를 좀 더 파생하면 그렇네” “그렇구나” “그렇군이 될 것이다.

 

해탈과 열반의 기쁨

 

부처나 아라한의 마음이 되었을 때 더 이상 업을 지을 일이 없어서 다음 생에 태어 날 이 없어서 윤회가 종식되는데, 이를 열반이라 한다. 그런 열반은 반드시 죽어서 실현 되는 것은 아니라 한다.

 

불교TV사이트에서 스리랑카의 아상가 교수의 강좌에 따르면 불교에서의 열반은 살아 있을 때 실현 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죽어서 삶이 완성된다는 모든 종교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다. 이처럼 살아 있을 때 열반을 실현한 자들을  성자라 부른다. 그런 성자들은 어떤 삶을 살아 갔을까.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열반을 실현 했다고 해서 그들은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리거나 사업을 해서 큰 돈을 벌었을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매우 소박하고 단순한 소욕지족의 삶을 살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깨달음을  다른 이에게도 전달하여 그들로 하여금 똑 같은 깨달은 세계로 인도하는 삶을 살아 갔다고 한다.

 

그런 성자들의  해탈과 열반의 기쁨을 게송으로 노래한 경전이 테라가타(장로게)와 테리가타(장로니게)이다. 그런 게송의 내용은 무엇일까. 몇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가야의 봄 축제에 온 것은

내게는 정말 좋은 일이었다.

그때 나는 깨달으신 분께서

최상의 가르침을 설하시는 것을 보았다.

 

환히 빛을 발하는 무리의 스승, 최상의 경지에 이른 분

견줄 바 없는 통찰력을 갖추신 인도자.

신과 인간의 승리자, 그 분을 보았다.

 

그분은 위대한 코끼리, 위대한 영웅,

번뇌를 여윈 위대한 광채

번뇌를 완전히 소멸하신 분

어디에도 두려움은 없다.

 

진정 오랜 세월 그른 길로 갔고

잘못된 견해의 사슬에 묶여 있던

, 세나까를 부처님은 모든 속박에서 해방시켰다.

(테라가타 287-290, 세나까비구)

 

 

! 자유! 정말로 나는 벗어났다.

세 가지 굽은 것들에서 벗어났다.

절구, 절구공이, 그리고

마음이 비뚤어진 남편으로부터 벗어났다.

나는 생사에서 벗어났다.

윤회로 이끄는 것은 뿌리째 뽑혔다.

(테리가타 11, 뭇따비구니)

 

 

출가한지 25년이 흘렀다.

그러나 나는 아직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였다.

 

마음의 평화, 마음을 다스림,

오랜 세월 찾아 헤맸으나 얻을 수 없었다.

그때 언뜻 승리자(부처님)의 말씀

떠올리고는 전율하였다.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정적으로 분투노력하였다.

 

그리고 갈애를 부수어 버렸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성취되었다.

오늘은 갈애를 끊은 지 7일째 날.

(테리가타 39-41, 다른 사마 비구니)

 

 

 

 

 

 

 

 

 

사진 http://www.buddhistdoor.com/download/images/dhammapada273_1024X768.jpg

 

  

 

2011-03-0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