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와 벌나비 이론, 초기불교로 본 상구보리 하화중생
소승과 대승
틈틈이 즐겨 찾는 사이트가 불교TV이다. 그런데 최근 새로 올려진 프로 중에 법륜스님의 ‘반야심경’이 눈에 띄었다. 이미 지난 2008년 방송된 것을 다시 올려 놓은 것이지만 스님의 강좌는 언제나 재미있고 하나라도 건질 수 있는 내용으로 꽉 차 있다. 그런 강좌는 매회 40여분간 총 25회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 스님의 해제 강의를 듣던 중 ‘소승’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요즘 왠 만해서는 소승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남방불교를 폄하 할 때 소승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공식적으로 금지된 용어와 같다. 그 대신 ‘테라와다’ 또는 ‘테라와다불교’라고 말하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로 정착된 듯 하다.
하지만 불교방송과 불교tv에서 경전공부 시간에 일부 스님들은 거침없이 소승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자주 듣거나 보게 된다. 이번 법륜스님의 반야심경 강좌 역시 소승이라는 말을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스님은 강좌에서 소승과 대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대승에서 소승이라 부릅니다. 소승이라는 말이 나쁜 말이 아닙니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가는데 안 가겠다는 사람은 수행자가 아닙니다. 건너 가는데 아무도 안가면 나라도 가야 된다, 나라도 가야 되고, 나부터 가야 된다 이것이 소승입니다.
대승은 나부터 먼저가고 나만이라도 가야합니다. 그런데 나만 가서는 만족이 안됩나다. 안갈려는 사람까지, 갈 능력이 없는 사람까지 끌고 가야 합니다. 끌고 가겠다는 의지가 그 원이 어느 정도 강하냐 ‘내가 못가는 한이 있더라도 데리고 가겠다’ 이 정도로 강하다는 겁니다.”
결국 소승은 저 열반 언덕을 자신 혼자서만 건너 가는 것을 말하고, 대승은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교화시켜 함께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을 대승에서 가장 부각시키고 있고, 소승과 가장 차별화 되는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대승보살사상으로 대표되는 한국불교가 사람사는 곳에 보이지 않고 오로지 깊은 산중에 가야만 접할 수 있다면 대승정신이 무색해진다. 오히려 ‘작은수레’에 비유 되는 소승보다 못한 오로지 한 사람만 탈 수 있는 수레인 ‘일승’에 지나지 않는지 모른다.
초기불교 연구 전성시대
요 몇 일 사이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에서 의미 있는 기사가 실렸다. 제목은 ‘초기불교 연구 전성시대가 열렸다’라는 자극적인 기사이다.
초기불교 관련 박사학위 논문을 보면 73편인데, 이중 최근 20년간 급격히 증가 하였고, 2000년대 들어와 발표된 논문이 48편이라 하니 폭발적으로 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논문 중에 특히 사념처수행과 심리학과의 접목에 따른 ‘불교심리학’이 눈에 띈다고 한다.
사진 http://www.beopbo.com/news/view.html?section=93&category=98&item=&no=64848
이렇게 박사학위 논문이 증가하는 원인에 대하여 1999년 부터 빠알리 원전을 번역한 니까야가 대중화 되고 나서 부터라 한다. 그런 배경에는 서구불교학의 영향이 컷다고 한다.
서구에서는 이미 100년 전 부터 빠알리원전을 번역하고 세상에 알리는 작업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으로 보았을 때 우리나라는 역으로 서구에서 불교를 수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초기불교는 학문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불자들은 수행이나 교학에도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초기불교가 점차적으로 큰 흐름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소승이라 불러도
그렇다면 빠알리 니까야라 불리우는 초기불교경전이 어떻게 전승되어 왔을까. 또 남방 테라와다 불교국가에서는 어떻게 수행하고 있을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의 역자 대림스님의 해제(解題)글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그들은 소승이라든지 은둔불교라든지 아공법유라든지 부처님 가르침을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다든지 하는 그들을 향한 어떠한 비난이나 도전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부처님이 직접설하신 법을 올바르게 이해(빠리얏띠)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켜 잘못된 견해를 극복하고 바른 도를 실천하여(빠띠빳띠) 괴로움에서 벗어나(빠띠웨다) 부처님이 보이신 해탈열반을 직접 실현하는 것이었으며 이런 출가생활이 이웃이나 불교도들에게 가장 큰 공덕을 가져다준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세상의 위없는 복전(福田, puññakkhetta)이 된다고 부처님께서 설하셨기 때문이다.
(대림스님, 청정도론 解題,)
대림스님의 해제글을 보면 초기불교경전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온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부처님법이 오래도록 전승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관심을 두었을 뿐 소승이라 부르건 그 어떤 비난에도 게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빠리얏띠, 빠띠빳띠, 빠띠웨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궁극적으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하여 빠리얏띠, 빠띠빳띠, 빠띠웨다로 대표되는 세가지를 강조 하였는데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은 곧바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입니다.
(숫따니빠따 558, 3장 대품, 셀라경, 전재성님역)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을 안다는 것’은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법을 올바르게 이해 하고 ‘철저하게’ 아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 빠알리어로 ‘빠리얏띠(pariyatti)’라 한다.
또 ‘닦아야 할 것을 닦는 다 는것’은 부처님법을 자신에게 적용시켜 잘못된 견해를 극복하고 바른 도를 ‘철저하게’ 실천 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 빠알리어로 ‘빠띠빳띠(paṭipatti)’라 한다.
마지막으로 ‘버려야 할 것을 버렸다’는 의미는 괴로움에서 벗어남을 말하고 이는 부처님이 보이신 해탈 열반을 ‘철저하게’ 실현하는 것을 말하는데 빠알리어로 ‘빠띠웨다(paṭivedha)’라 한다.
이처럼 모든 것을 철저하게 알아야 하고, 철저하게 닦아야 하고, 철저하게 열반을 실현해야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향기와 벌나비 이론
그렇게 하여 성자가 되었을 때 불교도 뿐만아니라 이웃에도 공덕을 짓게 하는 복전이 된다고 하였다. 이는 향기 있는 꽃에 벌과 나비가 모여 드는 이치와 같다.
사진http://chineseartstore.com/catalog/chinese-silk-blue-butterfly-flower-painting-p-672.html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에서 김정빈님의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칼럼의 내용은 ‘향기와 벌나비’ 이론이라는 것이다. 이 이론에 대하여 작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나부터 닦자, 그럼으로써 내면에 향기가 가득한 사람이 되자. 그러면 먼저 나 자신이 행복해질 것이고, 자연스럽게 남들에게도 이익이 미칠 것이다.”
(김정빈, ‘김정빈의 명상 이야기’3-爲己主義로서의 불교, http://www.mediabuddha.net/detail.php?number=6164&thread=32r30)
흔히 대승불교에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이야기 하지만 상구보리만 되면 하화중생은 자연히 된다고 작가는 말한다. 왜냐하면 상구보리 그 자체만으로 이미 완성이기 때문이라한다. 따라서 하화중생은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부차적인 문제라 한다. 이를 팔정도에 비유하여 말한다.
부처님은 팔정도를 설하실 때 자기자신을 어떻게 하라는 내용일 뿐 남을 어떻게 하라는 내용이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일단 깨달음을 성취했다면 만명을 교화한 아라한이나 깨닫자마자 반열반에 드신 아라한이나 아무런 차등이 없다고 한다.
자기 자신이 먼저 지복으로서 평화에 안착하는 것이 불교의 수행관의 시작이고 끝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남은 언제 교화 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작가는 “저절로 남을 위하게 된다” 라고 말한다. 깨달은 사람이 남을 위하여 만나고 접촉하지 하지 않더라도 그 분을 만나면 무언가 높은 가치를 지닌 것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나 자신을 청정하게 하게 하는 것이 남에게 베푸는 것이라는 것이다.
마음이 잘 수양된 사람 곁에 있으면
이제까지 북방불교에서는 자신을 스스로 대승이라 칭하면서 남방불교를 또 스스로 소승이라 칭하며 폄하해 왔다. 그런 내용은 대승경전에도 고스란히 나와 있다. 그러면서 열반이라는 저 언덕에 안갈려고 하는 사람, 갈 능력도 없는 사람을 억지로라도 끌고 가야 겠다는 원을 세운 보살사상에 대하여 상대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잘 수양된 사람 곁에 있으면 나의 마음 또한 자연히 평화롭고 가벼워지듯이 굳이 안가겠다는 사람, 갈 능력도 없는 사람을 끌고 가려는 것은 무리가 있다. 교화한다는 것이 길거리에서 ‘예천불지’식의 막무가내식의 전도방식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변화하였을 때 자연스럽게 하화중생이 된다고 한다. 마치 향기 있는 꽃에 벌과 나비가 모여 들듯이.
2011-03-0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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