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지진보다 쓰나미보다 더 무서운 것, 일본 대지진을 보며

담마다사 이병욱 2011. 3. 13. 10:55

 

지진보다 쓰나미보다 더 무서운 것, 일본 대지진을 보며

 

 

 

  

진도8.8의 대지진이 일어난 일본의 상황에 대하여 방송에서는 연일 매시간대 별로 보도 하고 있다. 그런데 지진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바로 해일(海溢, surge)’이다.

 

TV화면에서 보여 주는 해일을 보면 모든 것을 쓸어 가 버린다. 바닷물에 떠 밀려온 자동차를 보면 마치 장난감처럼 보인다. 하나의 도시가 초토화 되고 흔적을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인간이 이룩해 놓은 문명이 한낱 휴지조각에 지나지 않음을 느끼게 해 주는 거대한 해일을 다른 말로 쓰나미(津波, tsunami)라고도 한다.

 

 

 

 

 

일본의 해안도시를 덮치는 거대한 쓰나미

출처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31098265

 

 

 

 

인터넷 백과사전에 따르면 해일은 바다에서 높은 파도가 밀려오는 현상으로 폭풍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과 외부적인 충격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 이 중 태풍이나 저기압등에 의해 생기는 것을 폭풍해일이라 부르고, 지진이나 화산의 활동에 의해 생기는 것을 지진해일이라 하는데 이를 다른 말로 쓰나미라 한다.

 

쓰나미는 지진에 의하여 발생된 해일을 말한다. 해저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였을 때 수백킬로미터에 달하는 해저가 몇미터 상승하면 그에 따라 해면에 요철이 생기면서 그 파장이 사방에 퍼져가게 되는데, 먼바다에서 대수롭지 않은 파도가 해안가에 이르면 수 십미터 높이의 파도가 된다고 한다. 이번 일본의 해일 역시 그런 케이스라 볼 수 있다.

 

 

 

 

 

일본의 금요일 지진과 쓰나미

Friday's earthquake and tsunami

사진 ; http://www.digitaltrends.com/international/despite-tsunami-and-quake-devastation-japan-remains-online/

 

 

 

자연재해와 종교는 어떤관계 이길레

 

지난 2004년 인도네시아, 태국, 스리랑카등 동남과 서남아시아에 거대한 쓰나미가 덥첬다. 이 때 수십만명이 사망하였는데, 이런 지구상의 대재앙이 일어날 때 마다 항상 따라다니는 말이 있다. 그것은 종교와 관련된 말이다.

 

쓰나미가 일어 났을 때 우리나라 대형교회의 어느 목사는 쓰나미에 희생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대체 자연재해와 종교는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길래 그런 발언이 나왔을까.

 

쓰나미와 지진과 같은 거대한 속수무책의 자연재해가 일어 날 때 마다 항상 말들이 있어 왔는데,  주로 신의 심판론인과응보론으로 요약된다.

 

신의 심판론

 

신의 심판론에 따르면 악의 응징으로 표현된다. 특히 자신의 신을 믿지 않아서 발생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쓰나미로 희생된 사람들이 불교나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희생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과연 그들이 불교나 이슬람교를 믿는다고 하여 모두 악이라고 볼 수 있을까.

 

쓰나미 현상에 대하여 영국의 어느 칼럼니스트는 신이 악을 방조한 것은 선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라고 썻다고 한다. 신이 전지전능하고 선 그자체라면 악은 발생하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악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신이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증거일 것이다. 또 악을 인정한다면 악신 또한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만일 의사에게 치료할 기회를 주기 위하여 암이 있어도 좋다는 논리, 준법시민이 되기 위하여 죄를 저지르는 범법자도 있어야 한다는 논리와 같다.

 

악의 존재를 인정하고 악을 응징하하는 것은 선을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신을 설명한다면, 그런 신은 없어도 좋다. 이는 다른 사람이 착한일을 하기 위하여 또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는 논리와 같은 것으로 그런 신이 있다면 선신이 아니라 악신일 것이고, 그런 신은 믿을 것이 못 되는 신이라 볼 수 있다.

 

인과응보론

 

2008년 중국의 쓰촨성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다. 이때 역시 종교적 발언이 있었다. 발언의 당사자는 미국의 여배우 샤론 스톤이었다. 티벳불교 신봉자이었던 그녀는 중국에서 지진이 나 많은 사람들이 죽은 이유에 대하여 중국정부가 티벳에 대하여 고통을 주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과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발언은 중국인들에게 거센 반발을 일으켜서 결국 그녀는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악마의 저주론

 

2010년 아이티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였다. 무려 22만명이 죽은 사상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때 역시 종교적 발언이 있었다. 미국의 개신교 목사가 아이티에서 지진이 발생한 이유로서 악마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다. 아이티는 가톨릭(80%)과 개신교(16%)를 믿는 나라로 되어 있지만, 그 이면에는 아프리카 토속종교에 기원을 둔 부두(Voodoo)교를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진이나 쓰나미보다 더 무서운 것

 

그렇다면 이번 2011년 일본대지진에서는 어떤 발언들이 나올 것인가. 벌써 부터 어떤 이들은 일본침몰론등을 이야기 하며 마음속으로 고소해 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는 듯하다. 마치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처럼 여기는 이상심리같은 것이다.

 

남의 불행은 아랑 곳 하지 않고, 그 와중에서도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현상은 주식시장에서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지난 1999년 일어난 대만 대지진일 것이다. 그때 당시 대만에서는 반도체공장등을 비롯한 산업단지가 파괴 되었는데, 그 와중에 이익을 챙기려는 애널리스트들의 발언들이 잇달아 나왔기 때문이다.

 

이번 일본대지진도 역시 그런 얄팍한 반사이익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일본 대지진을 종교적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사람들일 것이다.

 

일본어판 위키피디아(日本, http://ja.wikipedia.org/wiki/%E6%97%A5%E6%9C%AC%E3%81%AE%E5%AE%97%E6%95%99)에 따르면 일본의 인구는 1 2,800만명이다. 종교신자 구성은 신도(神道) 1700만명(83%)이고,  불교는 9,800만명(76%), 그리스도교는 300만명(2.3%)으로 되어 있다.

 

일본신도와 불교가 겹친 것으로 본다면 일본에서의 주류 종교는 불교이다. 반면 천주교와 개신교를 합한 그리스도교는 불교 2.3%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두고 어느 대형교회 목사는 일본 복음화의 필요성에 대하여 역설한 것을 인터넷기사를 통하여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대지진에 대한 종교성 발언이 또 나올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고 보면 지진이나 쓰나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종교적 편견일 것이다.

 

자연현상과 제행무상(諸行無常)

 

지난 2004년의 동남아시아 불어 닥친 쓰나미, 2008년의 중국 쓰촨성대지진, 2010년의 아이티 대지진으로 인하여 수십만명이 사망하고 엄청난 재산상의 피해를 보았다. 이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말이 종교성 발언이었다. 그런 발언에 항상 악에 대한 응징이라거나 인과응보’, ‘악마의 저주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지진이나 해일등 자연재해는 하나의 자연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자연재해는 신의 의지에 의하여 일어나는 응징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이 저지른 죄업따른 응보도 아니고, 더구나 악마의 저주는 더욱 더 아니다. 물론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자연과 환경오염, 그리고 무분별한 자원개발에 따라 기후변화가 발생됨으로서 오존층이 파괴되고, 지구온난화 현상이 발생되어 그에 따른 자연재해가 일어 났을 때 인과응보로 볼 수 있지만 지진이나 해일, 쓰나미는 하나의 자연현상일 뿐 거기에 어떤 신의 개입요소는 없는 것이다.

 

이런 자연현상에 대하여 불교에서는 제행무상 (諸行無常)으로 설명한다. 형성되어진 모든 것들은 변하기 마련이고,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구 내부에서 지각판이 움직이는 현상 역시 어느 것 하나 고정불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일 것이다.

 

지구는 끊임없이 변한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꽃이 피듯이 자연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사람 역시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결국은 죽게 된다. 사람의 마음 역시 매 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처럼 생주이멸(生住異滅)하는 마음, 생노병사(生老病死)하는 인간,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 우주는 어느 것 하나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구 역시 끊임없이 변한다. 거기에 지각판도 예외가 아니다. 지각판이 이동함에 따라 충돌을 일으켜 지진이 발생하고 그에 따라 해일, 쓰나미가 발생하여 커다란 인명과 재산피해를 주지만 그 것을 신의 응징이라거나 인과응보, 악마의 저주로 본다면 무상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상법은 엔트로피법칙과 매우 유사하다. 엔트로피 법칙이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하듯이 불교의 제행무상 역시 끊임 없이 변화하면서 결국 사라지는 것으로 보았을 때 엔트로피(entropy)법칙의 다른 이름이 제행무상으로 보여 진다.

 

재난이나 재앙이 닥쳤을 때

 

무상한 세상에서 언제 어느 때 나에게도 재앙이 닥칠지 모른다. 일본에서의 대지진이 예측될 수 없었듯이 앞으로의 우리에도 어떤 재난이나 재앙이 닥칠지 알 수 없다. 따라서 형성된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에서 담담하게 받아 들여야 한다.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부처님은 초기불교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슬픔의 화살을 뽑아버린 사람

 

 

사람의 목숨은 예측할 수 없으며 아무도 모른다. 이 세상의 삶은 짧고, 이 세상의 삶은 어렵고, 이 세상의 삶은 괴로움으로 묶여 있다. (574)

 

태어난 존재들은 죽는다. 죽음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늙으면, 아니면 다른 이유로 해서 누구든지 죽게 된다. 이것이 존재하는 것들의 길이다. (575)

 

과일이 익으면 어느 날 떨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태어난 존재들은 언젠가는 죽음에 떨어져야 하는 두려움이 따라다닌다. (576)

 

마치 옹기장이의 점토로 만든 그릇들이 마침내는 부서지듯이 죽어 부서지는 인생도 이와 같다. (577)

 

젊은이도 늙은이도 지혜로운 이도 어리석은 이도 모두 다 죽음의 지배하에 있게 된다. 모든 존재들의 종착역은 죽음이다. (578)

 

그들은 죽음에 굴복하여 저 세상으로 가지만, 아버지도 아들을 구할 수 없고 가족이나 친척도 어쩔 도리가 없다. (579)

 

보라, 친척들이 슬퍼하면서 보고 있지만,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끌려간다. (580)

 

이렇게 세상 사람들은 늙음과 죽음으로 고통당한다. 이런 이치를 아는 지혜로운 이는 슬퍼하지 않는다. (581)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그대는 그 길을 알지 못한다. 그 양 끝을 보지 못하는데도 그대는 헛되이 슬퍼한다. (582)

 

슬퍼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으며 자신을 해치거나 하는 바보일 뿐이다. 슬퍼한다 해서 무슨 이득이 생긴다면 지혜로운 사람들이 그렇게 할 것이다. (583)

 

울고 슬퍼한다고 마음의 평안이 오지 않으며 오히려 더 큰 고통이 오고 몸만 해칠 뿐이다. (584)

 

슬퍼하는 사람은 창백하게 점점 야위어간다. 이것은 자신을 해치는 행위이다. 슬퍼한다고 죽은 사람을 살릴 수도 없으므로 슬퍼 한탄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585)

 

슬픔을 버리지 않으면 고통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며, 이미 죽은 사람 때문에 울부짖는 것은 슬픔의 손아귀에 잡힌 것이다. (586)

 

전에 지은 업에 따라 살고 있는 죽음에 당면한 사람들을 보라. 죽음에 붙잡혔다는 것을 알 때 그들은 전율한다. (587)

 

기대하는 것과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항상 다르다. 죽은 자의 이별도 또한 이러하니 이런 세상의 이치를 마땅히 보라. (588)

 

사람이 백 년을 살거나 혹은 그 이상을 살더라도 마침내는 사랑하는 친척들과 헤어져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 (589)

 

그러므로 훌륭한 사람이 슬픔을 버린 것처럼 가르침을 잘 듣고 배워서, 만일 죽은 사람을 보더라도 울거나 슬퍼하지 말고 ‘저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구나’ 라고 새겨야 한다. (590)

 

마치 집에 불이 나면 물로 꺼버리듯이, 지혜롭고 확고부동한 훌륭한 사람은 마치 바람이 목화솜털을 날려버리듯이, 슬픔이 일어나면 즉시 그것을 날려버린다. (591)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자신에게 꽂은 한탄의 화살, 욕망의 화살, 슬픔의 화살을 뽑아버려야 한다. (592)

 

한탄과 욕망과 슬픔의 화살을 뽑아버린 사람, 모든 집착을 버린 사람,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얻은 사람은 모든 슬픔을 초월하였으며 그는 슬픔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른다. (593)

 

(숫따니빠따 3편 8: 살라 수따 574-593,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2011-03-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