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진짜위기는, 누가 초기불교를 가장 두려워하는가
초기불교에서 빈번하게 접하게 되는 단어는 ‘무상’ ‘고’ ‘무아’이다. 이를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삼특상’이라 하고, 이것을 토대로 만든 것이 북방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삼법인’이라 볼 수 있다. 삼법인의 경우 세가지 법의 도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불교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북방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삼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 (一切皆苦), 제법무아 (諸法無我)인데, 어느 경우 일체개고 (一切皆苦)를 빼고 그 대신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어 삼법인이라고 하고, 모두 포함하여 사법인이라고도 한다.
삼특상과 삼법인 또는 사법인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은 ‘무상’과 ‘무아’이다. 이는 항상하고 변치 않는 고정된 자아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중 무상은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자연의 변화을 통해서 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늙는 것을 봄으로서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무상은 항상 고정된 나가 있다는 시각에서 본 것이다. 언제든지 나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껴도 내가 느끼는 것이고, 괴로움을 겪어도 내가 겪는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단 한 순간도 나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런 나는 없다고 한다. 그리고 무아라고 주장한다. 그럴때 나는 누구일까.
불교TV사이트에서 본 프로 중에 ‘특집세미나 <나, 버릴 것인가 찾을 것인가>(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2&PID=P568)’가 있다. 이 프로에서 김종욱 교수는 무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무아와 일인칭대명사
무아는 곧이 곧대로 말하면 ‘내가 없다’는 것인데, 내가 없다고 한다면 “너는 누구냐” 하였을 때 할 말이 없어질 것이다. 이렇게 무아를 말한다고 하여 일인칭대명사 마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진짜 그렇다면 불교가 2,500년 동안 전승하여 오지 못하였을 것이다.
불교에서 일인칭대명사마저 부정하지 않는다. 그 근거로서 모든 경전에서 볼 수 있는 ‘여시아문’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하였을 때 그 나는 일인칭대명사를 말한다. 따라서 내가 없다라고 해서 일인칭대명사로서 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무엇을 부정하는가. 그것은 자아이다. 자아란 무엇일까. 그것은 실체로서의 나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무상과 무아는 불교의 큰 특징이라 볼 수 있다. 만일 불교에서 제법이 항상하다고 주장한다든가, 항상하는 나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 것은 불교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모든 문명권에서는 실체로서의 나를 염두에 두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변화하기 마련인데, 변화한다는 이야기는 결국 생성되어 소멸한다는 말과 같다.
죽어도 죽지 않을 수 있는 그 무엇
생성과 소멸은 결국 인간이나 생명체는 태어나서 죽는다는 말과 같다. 이 죽음의 대목에서 모두 도망가고 싶어한다.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극복하려 한다. 이럴경우 이 세상이 다 변해도 변치 않는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방식을 찾게 된다.
그것은 찾아 낼 수만 있다면 더우기 그것과 내가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적어도 “죽어도 죽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이 세상에는 영원불변하는 어떤 근원이 있고, 그런 것을 실체라 보고 있다. 그리고 그런 근원은 내속에도 있다고 믿고 싶어진다.
그렇게 해서 우주의 근원과 나의 근원이 일치된다면 바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인도철학에서는 우주의 근원을 ‘브라만’이라 하고, 나의 근원을 ‘아뜨만 (ātman)’이라 하였다. 이것들이 일치하였을 때 이를 ‘범아일여 (梵我一如)’라 하는데, 이와 비슷한 방식이 고대 그리스에서도 있었다. 그 때의 우주는 대우주(Macro cosmos)라 하고, 인간은 소우주(Micro cosmos)라 하였다. 이런식의 발상은 인도, 그리스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있었다.
중국은 유교와 도교와 불교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자생적 철학이라고 볼 수 있는 유가와 도가는 한마디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정신이다. 천을 우주로 본다면 인간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후대 성리학으로 발전하였다. 천의 질서를 리(理)라 하였고, 나의 내면속의 리와 같은 요소를 성품 즉, 성(性)이라 하였다. 성과 리를 합하여 ‘성리(性理)’라 하는데 이것이 성리학의 모토가 되는 것이다.
나를 부수는데서 시작된 불교
이처럼 고대 그리스, 인도, 중국에 있어서 모두 공통되는 것은 우주와 나사이의 일치를 찾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때의 나는 바로 내속에 있는 절대적 실체로서의 나이다. 하지만 불교에서는(이경우 불교는 초기를 말한다) 그것을 부정하였다.
이렇게 보면 불교는 세계사상사적으로 보았을 때 매우 독특한 입장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인도, 그리스, 중국철학의 모두가 우주와 나 사이의 일치에서 출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그 나를 부수는데서 시작된 것이 불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2,500년이 흘러왔다. 그러는 사이 대승불교나 밀교, 선불교와 같은 많은 드라마가 있었다.
초기불교에서는 아트만과 같은 고정불변한 실체를 부정한다. 그런데 그렇게 부정을 하는 행위는 누가하느냐이다. 그것은 내가 한다. 이렇게 행위의 주체는 여전히 문제로서 남는다고 볼 수 있다. 이럴경우 이때의 나는 실체로서의 나라기 보다 주체로서의 나가 되고, 철학에서는 이런 것을 자아라기 보다 자기라고 하는 말로 개념을 바꾸어서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까지 ‘나, 버릴 것인가 찾을 것인가’의 프로에 대한 김종욱 교수의 발제성 설명이었다.
그들은 왜 불교를 연구할까
한국불교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신도수는 정체되어 있고, 사회적 영향력은 갈 수록 감소하고, 거기에다 유일신교의 직접적인 공격이나 타격 또한 갈수록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염려스러운 점은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대승불교로 지칭되는 한국불교는 유일신교의 타켓이 되고 있다. 그것은 유일신교 신앙을 가지고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불교를 연구하는 것일까.
그들의 논문을 읽어 보면 그 의도를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유일신교와 불교의 일치점을 찾기 위한 것이다. 그때의 불교는 거의 대부분 ‘대승불교’이다. 예를 들어 진보적 기독교신학자라 불리우는 ‘오강남’교수는 불교평론의 논문에서 “내 속에 있는 참 나는 결국 절대자이기에, 그 절대자와 내가 하나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872)”라고 주장하였다.
역시 같은 기독교신학자인 ‘김경재’ 교수 또한 ‘폴 틸리히’의 예를 들어가며 “선불교적 궁극적 실재관인 ‘공(空)’·진여(眞如) 가 말하려는 진리를 폴 틸리히의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이 받아들이지 못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신학자 길희성교수 역시 “나라는 것이 오온일 뿐이라고 자각하는 자가 있음을 상기시키며 이것은 오온의 배후에 있는, 오온과는 다른 초월적인 자아,참자아, 아트만이다”라고 자신의 책 보살예수에서 설명하였다.
이처럼 불교를 연구하는 유일신교의 신학자들은 대승불교와 기독교의 접점을 찾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는데, 또 다른 기독교신학자인 이찬수교수는 마침내 “종교는 모두 같은 것이다(불교평론,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950”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모든 종교는 다 같다는데
기독교신학자들이 불교를 연구하는 방향은 크게 두가지 방향이다. 하나는 대승불교를 연구하는 것이고, 또하나는 초기불교이다. 이중 대승불교는 유일신교와의 유사성을 찾기가 매우 쉬운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대승불교의 ‘불성’과 같이 개인의 내면에 있는 실체성을 주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불성은 진여, 참나, 주인공등으로 불리우는데 이는 기독교 학자들은 이를 ‘절대자’와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신학자 오강남 교수는 “내 속에 있는 참 나는 결국 절대자이기에, 그 절대자와 내가 하나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명백히 앞서 언급한 김종욱 교수의 발제문에서 보여지는 하늘과 인간의 합일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고대 인도의 브라만사상, 그리스와 중국에서의 천일합일 사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현대기독교 사상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고대인도의 브라만사상, 그리스와 중국의 천일합일 사상, 그리고 유일신교 사상은 매우 유사하여 이찬수 교수가 말한대로 “모든 종교는 같은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런데 거기에 대승불교가 끼여 있다는 사실이다.
도로 브라만?
그렇다면 대승불교가 왜 기독교 신학자의 타켓이 되었을까. 이는 초기불교를 비판하고 성립한 종교가 대승불교이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은 부처님 당시 범아일여사상으로 대표되는 브라만교를 비판하였다. 그때 당시 브라만교는 고대인도에 있어서 ‘고도의 철학체계’이었다. 우파니샤드나 리그베다처럼 수백년간 체계화된 철학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한 브라만교의 교리를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비판하였는데, 그 기반은 ‘무상’ ‘고’ ‘무아’ 이었다.
수백년에 걸쳐 형성된 고도의 철학체계를 비판하고 탄생된 종교가 불교라면, 불교 역시 더욱 더 고도의 철학체계일 수 밖에 없다. 이는 철학적 기반 없이 성립된 여타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처럼 고도로 체계화된 철학으로서의 불교에 있어서 핵심사항은 ‘무아’이다.
그런데 현실의 나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실체가 없는 무아라고 주장하니 사람들은 당황하고 허둥대었을 것이다. 도대체 실재를 전제하지 않은 세계가 어떻게 가능할까? 상상도 할 수 없고 납득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되돌아 간 것이 ‘대승불교’라 볼 수 있다.
대승불교의 논리는 철저하게 초기불교를 비판하고 성립하였다. 이는 반야심경에서도 볼 수 있다. 반야심경에서 공의 논리에 따르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사성제와 십이연기와 같은 핵심 가르침이 모두 부정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브라만교를 비판하고 성립된 것이 초기불교이고, 초기불교를 비판하고 성립된 것이 대승불교로 본다면, 대승불교는 ‘도로 브라만’교와 같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그런 혐의를 받을 수 있는 많은 교리가 많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여래장사상’이나 ‘불성사상’일 것이다. 자신의 마음속에 어떤 변치 않는 실체가 있어서 어떤 근원과 합일하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 주된 설명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교리는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신학자들의 좋은 타켓이 될 수 밖에 없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초기불교를 비판하는 기독학자
하지만 초기불교는 다르다. 본래 고도 철학체계인 범아일여의 브라만을 비판하고 성립한 종교가 불교이기 때문에 천일합일사상의 범주에 들어가는 유일신교와 비교대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비교하면 비교할수록 차별성만 느껴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신학자 중에 초기불교를 유일신교와의 접목을 시도하려는 학자는 보지 못하였다. 다만 초기불교를 비판하는 것은 보았다. 그런 비판 중에 가장 단골 메뉴가 ‘무아’사상이다.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할 수 있는가와 같은 논리로서 헛점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런 사람중에 대표적 인물이 울산대 ‘김진’교수일 것이다.
인터넷에서 본 그의 논문‘무아설과 윤회설의 문제’을 보면 불교와 기독교의 합일점을 찾기 보다 초기불교의 이론적 모순을 찾기에 혈안이 된 듯하다. 그는 논문에서 “새롭게 기술되어야 할 불교철학의 변증론은 무아설과 윤회설 사이의 모순에서 비롯되는 좌초될 수밖에 없는 불교적 최고선을 실현 가능하게 하는 조건명제로서 실천적 행위주체의 요청, 자유존재의 요청, 그리고 니르바나적 세계질서의 요청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무아와 윤회설의 모순으로 불교철학이 좌초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 하고 요청명제로서 ‘영혼불멸성’과 ‘신의 존재’를 이야기 하고 있다.
누가 초기불교를 가장 두려워하는가
이처럼 불교를 연구하는 유일신교의 신학자의 경우 대승불교는 기독교와 유사성을 찾기 위하여 노력하고, 결국 모든 종교는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자신의 내면에 어떤 절대로 변화하지 않는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고대인도의 브라만교에서는 ‘아뜨만’이라 하였고, 유교에서는 ‘성품’,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는 ‘소우주’, 그리고 유일신교에서는 ‘영혼’이라고 부르고, 중국화된 대승불교에서는 ‘불성’이라 부른다. 그런 변치 않는 내면의 실체들이 어떤 근원 또는 절대자와 합일 하였을 때 죽지 않고 영원히 살수 있으며 죽음 또한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은 이를 부정한다. 내면의 고정불변하는 자아나 영혼과 같은 실체는 있을 수 없으며 단지 조건에 따라 상속되는 일시적인 나, 임시적인 나만 있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합일해야 될 어떤 근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한 존재의 완전한 소멸을 뜻하고, 이를 다른 말로 열반(nibbāna, 닙바나)이라 한다.
그런 열반은 나가 소멸되었기 때문에 인식할 수 있는 우주(세상) 또한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부처님은 열반에 대하여 설명할 수 없는 것(無記)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반을 ‘상락아정(常樂我靜)’으로 이해 한다면 ‘전도 (顚倒)된’ 인식으로 본다는 것이다.
열반을 추구하는 불교와 천인합일을 추구하는 종교의 종착지는 다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그 출발선상도 다를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불교와 여타종교는 결코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불교가 처한 위기상황에 대한 결론이 나올 수 있다. 그것은 본래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충실하면 결코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기독신학자들이 초기불교를 연구하면 할 수록 유일신교의 모순만 드러나기 때문에 초기불교의 확산을 가장 두려워 하는 사람들은 대승불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라기 보다 아마도 유일신교를 믿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진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asp?ls_StSbCode=CATPR_02&PID=P568
2011-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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