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금강경의 ‘뗏목의 비유’, 니까야에도 있었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1. 4. 22. 00:42

 

 

 

 

금강경의 뗏목의 비유’, 니까야에도 있었다

 

 

 

불자가 아닌 우리나라 국민들도 반야심경 정도는 알고 있다. 내용은 자세히 모를지라도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문구는 많이 들어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야심경 이상은 잘 모른다.

 

금강경을 접하고

 

불교교양대학에 입교하여 불자가 되면 경전을 배우게 된다. 이 때 필수적으로 배우게 되는 것이 금강경이다. 그런 금강경을 처음 접하게 되었을 때 알게 되는 사실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큼지막한 한자어 옆에 자그마한 한글로 해석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한문을 읽고 해설하는 서당식교육이 특징이다.

 

두번째로 놀라게 되는 것이 부피가 매우 얇다는 것이다. 조계종의 소의경전이기도 한 금강경은 한자어 5,249자에 지나지 않는다. 84천개나 되는 경중에 하나의 경에 지나지 않지만 유일신교의 바이블처럼 종단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경전으로 보는 것이다.

 

금강경 공부를 하면서 금강경외우기에 도전하고 싶었다.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면 그 공덕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경의 도처에서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5,249자개의 글자라면 천수경의 4배에 달하는데, 노력하면 외울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먼저 200자 원고지에 만년필로 사경하였다. 그 사경본을 이용하여 한 분, 두 분 반복하여 총32분을 외우는데 한달 보름이 걸렸다. 이렇게 어렵게 외고나자 잊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또 외웠다. 그래서 지금도 금강경의 문구는 매우 친숙하다. 그런데 초기불교 경전인 빠알리 니까야를 접하면서 금강경에 실려있는 문구와 매우 유사한 것을 여러차례 발견하였다.

 

니까야는 부처님당시 부터 구전되어 온 경전이고, 금강경은 기원전후에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나면서 대승논사들이 보살사상과 공사상을 전파하기 위하여 찬술된 경인데, 니까야의 문장이 금강경에서 단어만 바뀐채 그대로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세가지의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뗏목의 비유이다.

 

금강경의 제육분 정신희유(正信希有分)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相應捨 何況泌法

이시의고 여래상설 여등비구 지아설법 여벌유자 법상응사 하황비법

 

 

이런 이유로 내가 항상 이르되 나의 설법을 뗏목을 비유하였느니라.

법도 버려야 하는데 하물며 비법에 매여서 되겠느냐.

(금강경 제6분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위의 내용과 매우 유사한 문구를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발견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들에게 소유하여 가질 목적이 아닌 강을 건너기 위한 목적인 뗏목에 비유한 가르침을 설하였다. 가르침이 뗏목과 비슷함을 안다면, 좋은 것에 집착하는 것도 버려야 하거늘 하믈며 나쁜 것들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맛지마 니까야: 22   알라갓뚜빠마경- Alagaddūpama Sutta)

 

 

문장구조 자체가 똑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단어만 다를 뿐인데, 금강경에서는 비법에 대하여 집착하지 말것을 이야기 하였고, 알라갓뚜빠마경에서는 좋은 것나쁜 것들에 대하여 집착하지 말것을 말하고 있다.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 실려 있는 내용을 좀 더 보면 다음과 같다.

 

 

뗏목의 비유 : 집착을 버림

"비구들이여, 소유하여 가질 목적이 아닌 강을 건너기 위한 목적인
뗏목에 비유한 가르침을 그대들에게 설하겠다. 어떤 사람이 긴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크고 깊고 넓은 강물을 만났다고 하자, 그런데 그가 있
는 쪽은 두렵고 위험한 반면 건너편 언덕은 안전하고 위험이 없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저 쪽으로 건너는 다리도 배도 없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편 언덕은 안전하다. 그런데 건널 다리도 배도 없다. 그러니 갈
대, 나무 막대기, 나뭇가지, 나뭇잎들을 모아 뗏목을 만들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뗏목에 의지하여 손과 발의 힘으로 저쪽 언덕으로 안전
하게 건너가면 어떨까?


그래서 그는 이렇게 하여 강을 건널 것이다. 강을 건너 저쪽 언덕에
도착하여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뗏목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이 뗏목에 의지하여 손
과 발의 힘으로 저쪽 언덕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그러니 이제 나는 이
뗏목을 머리에 이든지 어깨에 짊어지고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
어떨까?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뗏목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 그가 취
하여야 할 뗏목에 대한 바른 태도인가?"


"아닙니다. 부처님,"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 뗏목에 대한 바른 태도인가? 강을 건
너 저쪽 언덕에 도착한 그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뗏목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이 뗏목에 의지하여 손
과 발의 힘으로 저쪽 언덕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이제 이 뗏목을 마른
땅으로 끌어 올려 두든지 아니면 물속에 침수시키고 내 갈 길을 가면
어떨까?'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이 해야 할 뗏목에 대한 바른 태도이
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들에게 소유하여 가질 목적이 아닌 강을 건너
기 위한 목적인 뗏목에 비유한 가르침을 설하였다. 가르침이 뗏목과
비슷함을 안다면, 좋은 것에 집착하는 것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나
쁜 것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맛지마 니까야: 22   알라갓뚜빠마경- Alagaddūpama Sutta,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대승경전과 달리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상, , 무아로 설명된다. 따라서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을 강조한다. 대표적으로 느낌()을 들 수 있다.

 

감각기관이 감각대상을 만났을 때 느낌이 일어 날 수 밖에 없는데, 이때 반드시 좋다(樂受)” “싫다(苦受)” “좋지도 싫지도 않다(不苦不樂受)”라는 느낌이 일어난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으면 거머쥐려(탐욕)’하고, 싫으면 밀쳐내려(성냄)’ 한다. 그런데 그런 원인에 따른 결과가 항상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을 모른다. 이처럼 원인과 결과를 모르기 때문에 욕심내고 성내는 것을 어리석다고 한다.

 

탐진치에서 벗어나려면 느낌에서 그쳐야 한다. 그러나 느낌을 따라 가다 보면 갈애가 생기고 집착하게 된다. 그런 느낌은 좋은 것도 있지만 나쁜 것도 있다.

 

즐거움이나 행복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 지나가면 그 느낌이 지속되지 않아 괴롭다. 따라서 즐거움이나 행복도 결국 괴로운 것이다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운 것은 나쁜 것이다. 그래서 그 고통에서 한시 바삐 빠져 나오기위한 갈애가 생긴다. 갈애가 더욱 더 강화 되면 집착이 된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갈애와 집착은 항상 고통을 수반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경에서 집착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볼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느낌으로 그쳐야 한다는 말이다.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와 버리면 이미 늦은 것이다. 그런데 더욱더 안 좋은 것은 집착이다. 집착이 되어버리면 업이 형성될 수 밖에 없어서 고통, 근심, 절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보시의 비유이다.

 

금강경 제15분 지경공덕분(持經功德)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須菩提 若有善男子善女人 初日分 以恒河沙等身
수보리 약유선남자선여인 초일분 이항하사등신


布施 中日分 復以恒河沙等身 布施 後日分

보시 중일분 부이항하사등신 보시 후일분

亦以恒河沙等身 布施 如是無量百千萬億劫 以身布施

역이항하사등신 보시 여시무량백천만억겁 이신보시


若復有人 聞此經典 信心不逆 其福 勝彼
약부유인 문차경전 신심불역 기복 승피


何況書寫受持讀誦 爲人解說
하황서사수지독송 위인해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에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고, 낮에 다시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며 다시 저녁에도 또한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여 이와같이 무량한 백천만억 겁 동안을 몸으로 보시하더라도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믿는 마음이 거슬리지 않으면 그 복이 저 몸을 보시한 복보다 수승하리니, 어찌 하물며 경을 받아 지니며 읽고 외워서 남을 위해 해설해 줌이겠는가.

(금강경 제15분 지경공덕분-持經功德)

 

 

위의 문장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일아스님이 지은 아소까-각문과 역사적 연구를 보다가 발견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아침에 백개의 가마솥의 음식을 보시하고, 점심에 백개의 가마솥의 음식을 보시하고, 저녁에 백개의 가마솥의 음식을 보시한다고 하자. 또 만일 어떤 사람이 비록 소젖을 짜기 위해 소의 젖꼭지를 한 번 당기는 것만큼의 잠깐의 시간이라도 아침에 잠시동안 자비로운 마음을 실천하거나, 점심에 잠시 동안 자비로운 마음을 실천하거나, 저녁에 잠시 동안 자비로운 마음을 실천한다고 할 때, 백 개의 가마솥 음식보다 잠시 동안이라도 자비스러운 마음을 실천하는 것이 훨씬 더 결실이 더 크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자비로써 마음의 해탈을 발전시키고 연마하며, 자비를 수레로 삼고, 자비를 토대로 삼고, 자비의 마음을 견고하게 하고, 자비 속에서 자신을 단련하고, 자비로움을 온전히 성취하리라.

 

(상윳따 니까야 20, 오빵마상윳따 4- Okkha Sutta: Serving Dishes, 일아스님의 아소까-각문과 역사적 연구에서)

 

 

하루를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나누어 보시하였을 때, 금강경에서는 항하사와 같은 몸으로 표현하였고, 오빵마상윳따에서는 가마솥 백개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단어만 다를 뿐 문장의 구조가 똑같음을 알 수 있다.

 

금강경에서는 아침, 점심, 저녁마다 항하사의 모래수만큼이나 많은 몸보시를 하더라도 금강경을 수지독송하고 외워서 남에게 알려주는 공덕보다 못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오빵마상윳따에서는 마음의 실천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 잠시동안의 자비로운 마음을 내는 것이 아침, 점심, 저녁에 가마솥 100개 분량의 음식을 보시 하는 것 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다.

 

이처럼 문장구조는 똑 같지만 담겨 있는 메세지는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셋째, 무상의 비유이다.

 

금강경 여러 게송이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게송이 아마도 32분 응화비진분 (應化非眞分)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게송일 것이다.

 

 

何以故

하이고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무슨 까닭인가.

일체의 함이 있는 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

(금강경 32분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무비스님역)

 

 

 

 

 

 

 

사진 blog.pegasuscom.com/Leverage-Poi...entality

 

 

 

위의 게송과 비슷한 것을 청정도론에서 보았다. 오온을 설명할 때 초기경전의 문구를 인용하여 거품덩이, 물거품, 신기루등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금강경 32분의 게송과 매우 유사한 것은 어떤 내용일까. 초기경전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물질은 거품 덩어리 같고

느낌은 물거품 같고

지각은 아지랑이 같고

형성은 파초와 둥지와 같고

의식은 마술과 같다.

이와 같이 태양의 후예가 가르치셨네.

(상윳따 니까야 :21  칸다 상윳따 95)

 

 

위 게송에 대한 빠알리어와 영어는 다음과 같다.

 

 

빠알리어

 

Pheapiṇḍūpama rūpa vedanā bubbuupamā
Maricikupamā saññā sa
khārā kadalūpamā,
Māyūpamañca viññā
a dīpitā 3diccabandhunā.

(Sayuttanikāyo, 95. Sāvatthiya:)

 

 

영어

 

Matter is comparable to foam
Feelings to bubbles,
Perceptions are comparable to illusions
Intentions to plantain sheaves
And consciousness to magic,

(Book 21 - Khandha Sayutta (95) Phena - Foam)

 

 

금강경과 초기경전의 게송을 보면 공통적으로 물거품, 아지랑이와 같은 단어가 나온다. 이와 더불어 금강경에서는 꿈, 환상, 그림자, 이슬, 번개가 나오고, 초기경전에서는 거품, 파초둥지, 마술과 같은 용어가 나온다.

 

이들 용어의 특징은 한 마디로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주의 깊게 조사해 보면 비어 있고, 실속이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초기경에서 부처님은 오온을 설명할 때 이들 용어를 사용하였다. 물질()은 거품덩어리로, 느낌()은 물거품으로, 지각()은 아지랑이로, 형성()은 파초둥지로, 의식()은 마술과도 같다고 하였다.

 

이처럼 부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해체하여 놓고 관찰해 보니 비어 있고, 실속이 없고, 결국 실체가 없는 것이어서 나의 몸, 나의 마음, 나의 자아가 없다는 무아를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동일한 문장구조

 

초기경전이나 주석서 또는 논장을 보면 대승경전에서 보던 문구를 많이 발견하게 된다. 대승경전만 접한 사람이라면 오로지 대승경전에서만 사용 되는 문구인줄 알 것이다. 하지만 도처에서 발견되는 문장구조는 단지 단어만 틀릴 뿐 동일한 문장구조이다.

 

뗏목의 비유에서 즐거운 느낌(樂受)’괴로운 느낌(苦受)’()’비법(非法)’으로 바뀌어 있는데, 이는 대승불교에서 소승불교를 비판할 때 유용하게 사용된다. , 소승교설이 법에 집착하고 있는 법집임을 강조할 때 사용하는 것이다.  

 

보시의 비유에서 금강경에서는 금강경을 수지독송하고 전파하는 법보시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지만, 초기경전에서는 자비의 마음을 내는 것이 가마솥 100개 분의 밥을 보시 하는 것 보다 훨씬 낫다고 하였다.

 

한편 무상의 비유에서 부처님은 오온이 실체가 없음을 색수상행식에 거품덩어리, 무거품, 아지랑이, 파초둥지, 마술과 같다고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이처럼 금강경과 초기경전을 비교하면 동일한 문장구조와 비유법을 사용하였는데, 때로는 용어가 비슷한 면도 있지만 일부는 사용목적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창작일까 표절일까

 

초기경전이 부초님당시 부터 전승되어 왔고 대승경전 보다 훨씬 먼저 성립되었다. 그러나 대승경전은  부처님 사후 500년이 지난후에 공사상에 입각한 대승보살상을 널리 퍼지게 하기 위하여 대승논사들이 부처님의 이름을 빌어 찬술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논사들이 찬술과정에서 초기경의 문장구조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 발견된 것이다. 대승논사들이 부처님의 이름을 빌어 여시아문형식으로 경을 만들어 내는 것도 문제가 되고 있는데, 거기에다 문장구조나 비유법까지 그대로 가져와 단어만 바꾸어 사용하여 소승교설에 대한 공격으로 사용하였다면 비판받아 마땅 할 것이다.

 

금강경에서 보는 뗏목의 비유와 보시, 무상의 비유는 과연 창작일까 표절일까.

 

 

2011-04-2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