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죽음을 극복하려면, 슬픔없는 아소까와 아말라까열매

담마다사 이병욱 2011. 4. 16. 10:00

 

 

죽음을 극복하려면, 슬픔없는 아소까와 아말라까열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병으로 끝나고, 모든 젊음은 늙음으로 끝나며, 모든 생명은 죽음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 청정도론에 있는 말이다. 사람들은 늙음이 다가 오고, 그에 따라 병에 시달리고, 결국 죽게 되어 있다. 이런 죽음은 부자든 가난한자이든 부귀한자이든 미천한자이든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그런 죽음은 언제 오는가.

 

죽음은 언제 오는가

 

청정도론의 40가지 명상주제중의 하나인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死念)’이 있다. 죽음은 한 생에 포함된 생명기능이 끊어지는 것을 말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죽음에는 때가 된 죽음불시의 죽음두 가지가 있다.

 

이중 때가 된 죽음은 또 두 가지로 나누어 지는데, 하나는 공덕이 다하여 맞는 죽음이고, 또 하나는 수명이 다하여 맞는 죽음이다. 그렇다면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공덕이 다하여 맞는 죽음 :

비록 생명의 상속을 연장할 음식등의 조건이 존재해 있지만 단지 재생연결을 생기게 한 업의 과보가 익었기 때문에 맞는 죽음이 공덕을 다하여 맞는 죽임이다.

 

수명이 다하여 맞는 죽음:

신들이 갖는 운명의 우수함과 겁의 처음에 있던 것과 같은 시간의 우수함과, 북쪽의 꾸루들이 갖는 음식의 우수함등이 없기 때문에 현재의 사람들처럼 백 년의 수명이 다하여 맞는 죽음이 수명이 다하여 맞는 죽음이다.

(청정도론, 8장 계속해서 생각함의 명상주제)

 

 

공덕이 다하면

 

사람들은 언제 죽을 지 모른다. 그래서 초기경전의 숫따니빠따에서도 인간은 죽을까봐 항상 겁낸다(Sn.576)”라고 하였다. 따라서 인간의 수명은 보장 되어 있지 않다. 공덕이 다하면 죽는 것이다.

 

비록 오래 살 조건이 구비 되어 있을지라도 지은 업의 과보가 익으면 공덕이 다하여 죽는 것으로 본다. 술에 절어서 사는 알코올중독자, 줄담배를 몇 십년 피워서 폐가 녹아버린 사람, 잘못된 식습관으로 인한 각종질병같은 것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하지만 수명대로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는 드믈 뿐만 아니라 보장 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수명이 보장 되는 세계는 어디일까.

 

수명이 다하면

 

천상에 사는 중생은 수명대로 산다고 한다. 천상에 태어난 댓가로 수명이 보장 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 바로 위에 있는 천상이 사대왕천(짜뚜 마하라지까, Catu-maharajika)’인데, 거기에 사는 중생은 500천상년을 산다고 한다. 인간년으로 따지면 9백만년이다. 가장 오래사는 존재는 무색계의 비상비비상처에 사는 중생이다. 거기에 사는 존재는 무려 84천대겁을 산다고 한다.

 

급작스런 죽음

 

인간은 천상에 사는 중생과 같이 수명이 다하여 죽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각종 질병등으로 인하여 공덕이 다하여 죽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죽음외 하나가 더 있는데, 그것은 불시의 죽음이다. 불시의 죽음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마치 두시 마라(Dusimara, M.i.337)와 깔라부 왕(Kalaburaja, Ja.iii.39)등의 경우처럼 그 순간에 그 자리에서 죽게 하는 힘을 가진 업에 의해 상속이 끊어진 자들의 죽음이나 이전의 업에 의해서 칼등의 무기의 급습으로 상속이 끊어진 것이라 불리는 것이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이다.

(청정도론, 8장 계속해서 생각함의 명상주제)

 

 

정치인들이 암살을 당하면 세상이 단 번에 변한다. 이처럼 사람을 불시에 죽게 하는 것은 죽게 하는 업의 힘때문이다. 칼이나 총과 같은 무기로 급습 뿐만 아니라, 단지 쳐다 본다는 이유로 사람을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고, 돈 몇 푼 때문에 도둑이 강도로 돌변하여 급작스럽게 죽는 경우도 있다. 또 자동차나 비행기등을 타고 다니다 죽는 경우도 있고, 지진이나 쓰나미와 같은 자연재해로 희생되는 경우도 있다. 이 모든 경우 하필이면 그 순간에 그 자리에서 죽게 하는 힘을 가진 업으로 보는 것이다.

 

슬픔없는 아소까와 아말라까 열매

 

죽음에 대한 명상은 죽음, 죽음...” 하면서 죽음이 곧 들이 닥칠 것이다라는 절박함과 마음챙김과 지혜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서 지금 누군가 내게 칼을 들이 대는살인자가 나타난 것처럼 해야 되는데, 이외 영화가 몰락하는 것으로등 의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이중 영화가 몰락하는 것으로 죽음을 명상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영화가 몰락하기 전까지 영화는 빛난다. 하지만 몰락하게 되면 더 이상 그런 영화는 없다. 좋은 예가 청정도론에 있다.

 

 

전 대지를 정복하여 10억을 보시했던

행복한 왕도 마지막에는 그 왕국이

아말라까 열매의 반 정도에도 미치지 못했다.

비록 슬픔 없는 아소까였지만 공덕이 다 하여

죽음을 향했을 때 바로 그 몸으로 슬픔을 느꼈다.

(청정도론, 8장 계속해서 생각함의 명상주제)

 

 

여기에서 아소까(Asoka)는 고대 인도 마우리야 제국의 3대 황제인 아소까대왕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전륜성왕이라 말하고, 재세시 제3차 결집이 일어나 테라와다 불교가 정통으로 공인받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바퀴를 굴리는 아소까대왕

 

BC1세기작품(A "Chakravartin" ruler, first century BC/CE. Andhra Pradesh, Amaravati. Preserved at Musee Guimet,)

고대인도 마무리야 3대황제(304–232 BC). 무력에 의한 정복을 포기하고 담마에 의한 정복함을 천명하여 전륜성왕이라 한다.

 

 

 

 

 

 아말라까열매

 

사진 http://www.homeopathyandmore.com/forum/viewtopic.php?t=1098

 

 

 

그런 아소까왕도 말년 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오로지 아말라까 열매 한 톨정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말뜻은 무엇일까.

 

세상을 승가에 보시하였지만

 

전대지를 정복하여 10억이라는 막대한 재물을 보시한 왕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 영화가 몰락하여 고작 아말라까 한 톨만 보시 할 수 있게 되어 슬픔을 느꼈다고  했는데, 이에 대한 내용을 일아스님의 아소까-각문과 역사적 연구라는 책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책에 따르면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고 한다.

 

 

빠딸리뿟따의 꾹꾸따라마(Kukkutarama)승원에 큰 탑이 있는데 이름이 아말라까(amalaka)탑이라 하는데 아말라까란 인도의 약용과일 이름이다. 아소까 왕이 병이 들어 중태가 되었을 때 승가에 진귀한 보물을 공양하려 하였으나 가신들의 만류로 공양할 수가 없었다. 천하를 마음대로 통치했던 권력은 가버리고 이제는 오직 식사에 나온 아말라까만 뜻대로 될 뿐이라고 한탄하면서 아말라까를 먹지 않고 꾹꾸따라마 승원으로 보냈다. 그래서 승가대중들은 그 아말라까를 끈으로 묶어 국을 끓여 국물은 대중이 모두 먹고 아말라까를 꺼내어 탑을 세우고 탑 속에 모셨다 한다.

(일아스님의 아소까-각문과 역사적 연구에서)

 

 

아소까대왕 당시 인도에서 온 세상을 승가에 보시하였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 시대의 관습이었다고 한다. 요새말로 하면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에 서울을 하나님에게 봉헌 하겠다라는 말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전대지를 정복한 아소까대왕이 온 세상을 승가에 보시 하였을 때 대신과 관리들은 그 보시한 세상을 많은 돈을 내고 다시 찾아 오는 관행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소까대왕이 말년에 병이 들어 죽음이 임박하였을 때, 승가에 진귀한 보물을 공양하려 하였으나 가신들이 반대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보배를 승가로 부터 돈을 주고 다시 사 와야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슬픔이 없는 행복한 왕도 말년에 공덕이 다하여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무엇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었을 때 슬픔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가 몰락하는 것으로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업대로 사는 인간

 

누구나 죽게 되어 있다. 지금 젊다고 해서 그 젊음이 영원히 오래 가는 것도 아니다. 모든 젊음은 늙음으로 끝날 뿐이다. 지금 건강하다고 해서 그 건강 또한 영원하지 않다. 항상 병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지금 살아 있지만 언젠가 죽게 되는데, 인간의 경우 세가지 중의 하나이다. 병들어 죽는 것과 같이 공덕이 다하여죽거나, 생명기능이 다하여 자연사하는 것처럼 수명이 다하여죽거나, 사고로 죽는 것처럼 불시에죽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수명대로 사는 것이 보장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업대로 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업공덕을 많이 닦아 천상에 태어난 존재는 수명이 보장 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은 업대로 살지만 천상의 존재는 수명대로 산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죽음을 극복하려면

 

누구나 죽게 되어 있는 죽음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그 방법은 열반(닙바나)에 드는 것이라 하였다. 열반에 들면 다시 나고 죽는 일이 없기 때문에 불사의 문이라 하였다. 따라서 불교의 궁국적 목표는 열반이다. 부처님은 열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유명한 세 가지 수호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1.   망갈라숫따(Mangala sutta, 행복경)

 

Tapô ca brahman cariyam ca              따뽀오 짜 브라흐만 짜리얌 짜

ariya saccâ na dassanam                  아리야 삿짜아 나 닷사남
Nibbâna sacchi kiriyâ ca 
                   닙바아나 삿찌 끼리야야 짜

êtam mangala muttamam                   에에땀 망갈라 뭇따맘

 

감관을 수호하여 청정하게 살며, 

거룩한 진리를 관조하여, 열반을 이루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숫타니파타-Sn 2.4와 쿳다카파타-Khp 5 12번 게송, 전재성님 역)

 

 

 

2.   라따나숫따(Ratana sutta, 보배경)

 

Khīa purāa nava natthi sambhava   -낭 뿌라-낭 나와 낫티 삼바왕
Virattacitt
ā āyatike bhavasmi,                   위랏따찟따- -야띠께 바와스밍
Te
īabilā avirūhicchandā                         떼 니나빌라- 아위루-리찬다-
Nibbanti dh
īrā yathāyampadīpo,                   닙반띠 디-- --얌빠디-
Idampi sa
ghe ratana paīta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그에게 과거는 소멸하고 새로운 태어남은 없으니,

마음은 미래의 생존에 집착하지 않고,

번뇌의 종자를 파괴하고 그 성장을 원치 않으니,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숫타니파타-Sn 2.1 와 쿳다카파타-Khp 7 14번 게송, 전재성님 역)

 

 

3.   멧따숫따(Metta Sutta, 자애경)

 

Diṭṭiñ ca anupagamma                                     딧힌 짜 아누빠감마
s
īlavā dassanena sampanno                           실라와- 닷사네나 삼빤노
K
āmesu vineyya gedha                                  까-메수 위네이야 게당
na hi j
ātu gabbhaseyya punaretī                  나 히 자-뚜 갑바세이양 뿌나레띠

 

 

삿된 견해에 의존하지 않고

계행을 갖추고, 통찰을 갖추어

감각적인 욕망을 다스리면,

결코 다시 윤회에 들지 않을 것이옵니다.

(숫타니파타-Sn 1.8 쿳다카파타-Khp 9 10번 게송, 전재성님 역)

 

 

오늘 날 테라와다 불교에서 위의 세 가지 경전은 늘 수지독송하고, 공식적 또는 비공식적 행사에 독송되는 가 하면 동시에 예불문이라 한다. 이들 세 경은 모두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고, 동시에 초심자나 입문자를 위한 쿳따까파타(소송경)에도 실려 있어서 우리나라 불자들이 늘 수지독송하는 천수경과 같은 생활경전이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열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죽음을 극복하려면

 

먼저 망갈라숫따(행복경)에서는 사성제를 관조하여 열반(ariya saccâ na dassanam Nibbâna sacchi kiriyâ ca)에 드는 것이 더 없는 축복이라 하였다. 다음으로 라따나숫따(보배경)에서는 번뇌의 종자가 남김 없이 소멸 되었을 때 열반에 들 것(Nibbanti dhīrā yathāyampadīpo)이라 하였다. 마지막으로 멧따숫따(자애경)에서는 감각적 욕망을 다스리면 다시는 윤회하지 않을 것(na hi jātu gabbhaseyya punaretī)이라 하였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열반이 목표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불교는 깨달음이 목표로 되어 있다. 깨달음은 열반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에 불구함에도 한국불교는 오로지 깨달음에 올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이 왜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까. 그것은 용어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깨달음을 한자어로 보리(菩提)라고 하고, 빠알리어로 보디(bodhi)라 한다. 그래서 37조도품을 37보리분법이라고 하는 이유도 열반에 이르는 깨들음의 수단이 37가지나 있다는 것이다. 37보리분법에서 정진(viriya) 9,  알아차림(sati) 8. 지혜(pañña) 5번 언급되어 있어서 이들 세 가지가 주요한 깨달음의 수단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죽음을 극복하려면 깨달음이 아니라 열반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2011-04-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