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결국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말것을, 성냄과 정신적고통(도마낫사,domanassa)

담마다사 이병욱 2011. 4. 2. 11:05

 

 

 

결국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말것을, 성냄과 정신적고통(도마낫사, domanassa)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마구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되어야 직성이 풀려서 자신의 뜻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화부터 내는 것이다.

 

하지만 화를 내는 사람만 괴롭다. 상대방은 그 화를 받아서 고통을 겪어야 하나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싱글벙글하고 있다면 더욱 더 분통이 터질 일이다. 그래서 이제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화가 나 죽겠다로 발전하다. “화가 나 미치겠다도 같은 표현이라 볼 수 있다.

 

화가 나서 죽을 정도로 또는 미칠정도로 화가 더욱 더 치밀어 올랐을 때 화병에 걸리기 쉽다. 우리나라에서 주로 발현된다는 화병은 세계의학사전에 화병이라는 용어가 등재되어 있을 정도라 한다. 그런 화병이 나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는다. 그런 화는 대체 어떤 것일까.

 

화와 정신적고통

 

초기불교의 교학에서는 화를 정신적고통으로 보고 있다. 고통에는 크게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청정도론에 따르면 육체적 고통은 싫어 하는 감촉을 경험하였을 때 반드시 몸과 관련이 있고, 정신적 고통은 싫어하는 대상을 경험하였을 때 싫어 하는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반드시 심장이 가장 가까운 원인이라 한다.

 

정신적고통은 한마디로 불만족을 말한다. 그래서 심장이 가장 가까운 원인이라고 한다. 이런 정신적고통은 오직 욕계중생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항상 즐거움만 넘쳐나고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색계나 무색계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것이 성냄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욕계중생에게만 일어나는 성냄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 두 가지

 

화를 내면 싫어하는 대상인 상대방이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화를 낸 당사자가 정신적 고통을 받는다. 그때의 마음을 청정도론과 아비담마에서는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이라 하여 다음의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불만족이 함께 하고, 분노와 결합되고, 자극 없는 마음 하나

둘째, 불만족이 함께 하고, 분노와 결합되고, 자극 있는 마음 하나

(아비담마 길라잡이, 1장 마음의 길라잡이)

 

 

초기불교에서는 욕계의 마음을 89가지로 분류하여 놓았다.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못하기 때문에 순간 순간 마음은 해로운 마음과 유익한 마음이 번갈아 일어나는 데, 그 중 성내는 마음은 두 가지로서 모두 불만족분노가 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싫어하는 자들과 만났을 때

 

사람들은 불만족스로웠을 때 화를 낸다.이는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마구 화를 내는 것과 같다. 그런 불만족은 다름아닌 고통이라는 것이다. 이를 정신적고통이라 하고 빠알리어로 도마낫사(domanassa)’라 한다.

 

화를 내면 고통스로운데 이는 불만족이 함께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불만족은 나쁜성질의 심리현상을 말하는데 이를테면 낙담, 우울, 실의, 고뇌, 슬픔, 비통같은 것을 말한다. 이런 불만족은 모두 느낌에서 비롯된다. 싫어하는 대상을 경험하였을 때 싫다는 느낌이 일어나고 이어 불만족이 일어나는데, 특히 싫어하는 자들과 만났을 때이다.

 

불교에서는 좋아하는 자들과 헤어지는 것도 고통이지만, 원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고통이라 한다. 이는 마음을 괴롭히는 역할을 하고 괴로움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청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설명한다.

 

 

싫어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첫 번째로 마음에 괴로움이 일어난다.

그들의 행위로 생긴 괴로움이

그다음에 몸에도 일어난다.

이것은 두 가지 괴로움의 토대이기 때문에

대성자께서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괴로움이라 하였다.

(청정도론, 16장 기능과 진리)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은 고통에 대하여 설하셨는데, 싫어하는 자들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라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성냄에 뿌리박은 두 가지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싫어하는 사람을 보기만 해도, 심지어 떠 올리기만 해도 화가 치미는 것이다. 그런 화를 다른 말로 성냄, 적의, 분노등 여러가지 말로 표현한다. 그런데 적의란 구체적으로 어떤 뜻일까.

 

적개심이 일어날 때

 

화가 나서 죽을 지경 또는 화가 나서 미칠지경이 되었다면 격분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 순간을 참지 못하면 어떤 상태가 발생할지 알 수 없다. 대게 우발적인 살인이 순간적인 감정을 참지 못하여 발생하는데, 이와 같은 폭력적인 격분을 적의라 하고 빠알리어로 빠띠가(patigha)’라 한다. 이는 미세한 짜증과 구분 되는 것이다.

 

싫어하는 것, 싫어하는 대상, 싫어하는 자를 경험하였을 때 가장 약한 짜증에서 부터 적의까지 싫은 느낌이 일어나는데, 이를 불만족과 성냄이 결합되어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이라 하여 두 가지 마음이 있다고 하는데, 그 구분 방법은 자극이다. 그 자극이란 무엇일까.

 

자신을 무시한다고 하여 순간적으로 격분하여 살해하였을 때 이는 우발적이다. 이를 아비담마에서는 자극받지 않은 마음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싫어하는 대상이 있어서 미운감정을 가지고 항상 불쾌감과 불만족과 적의를 느끼고 있었다면 이는 자극받은 마음에 해당된다. 이 경우 죽일 의도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시간을 두고 음모를 꾸민다. 이것이 불만족이 함께하고, 분노와 결합되고, 자극 있는 마음일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욕을 많이 얻어 먹는 사람

 

대한민국에서 가장 욕을 많이 얻어 먹는 사람은 누구일까. 다름아닌 대통령이다. 인터넷에서 뉴스의 댓글이나 토론사이트에서 대통령에 대하여 특정 동물에 비유하여 원색적인 비난이 넘쳐나지만 TV에 나타나는 그의 모습은 고통받는 얼굴이 아니다.

 

수천, 수만의 네티즌들이 비판과 비난과 비방을 하였지만 오히려 싱글벙글 농담까지 하며 혈색까지 좋은 것을 보면 상대방을 결코 곤경에 빠뜨린다거나 고통스럽게 만들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비방하고 비판하는 그 성낸 마음이 자신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은 항상 불만족과 분노가 함께 하게 되어 있다. 그 상태를 불교에서는 괴로움이라 하는데, 특히 이를 정신적고통이라 한다. 성내는 것은 상대방에게 결코 타격을 주지 않는다. 반대로 자신이 성내는 마음 때문에 고통을 받을 뿐이다.

 

성을 내어 보았자 자신만 손해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상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은 세상은 차라리 내버려 두는 것이 낫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여 마구 성질을 내어 보았자 자신만 괴로울 뿐이다.

 

이제까지 속고 살았다!”

 

사람들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여 왜 화를 내는 것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는 오온을 나의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를 오취온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모든 고통의 뿌리를 오온을 내 것, 나의 자아로 보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초기경전 도처에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오온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이제까지 속고 살았다!”초기불교사이트에서 음성법문에서 들은 말이다. 집중수행을 하는데 어느 수행자가 이제까지 속아 산 것에 대하여 분하여 한 말이라고 한다. 대체 무엇에 속고 살았다는 것일까.

 

스님의 법문에 따르면 오온이 자신의 것처럼 살아 온 것에 대한 후회라고 한다. 그것은 항상 느낌에서 부터 시작 되는데, 이는 좋다” “싫다” “좋지도 싫지도 않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좋으면 잡아 당기고(탐심), 싫으면 밀쳐내며(진심)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중생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에 대하여 갈애를 일으키고 집착하게 되어 굴종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 바탕에는 항상 자아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는 오온을 자신의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오온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좋아도 내가 좋은 것이고, 싫어도 내가 싫은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성을 내고 정신적고통에 빠진다. 그런 자신이 이제까지 오온에 속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 오온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질()거품덩이처럼 보아야 한다.

쥐어짜는 것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느낌()물거품처럼 보아야 한다.

즐거움은 짧은 한 순간 뿐이기 때문이다.

 

인식()신기루와 같다고 보아야 한다.

틀린 말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상카라들()은 까달리 나무(파초)수간(樹幹)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

고갱이가 없기 때문이다.

 

알음알이()요술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

속이기 때문이다.

(청정도론, 14장 무더기())

 

 

 

마치 금강경의 마지막에 나오는 게송인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을 보는 것 같다. 물질은 거품덩이으로, 느낌은 물거품() 으로, 인식은 신기루()로 무상한 것으로 보는 것이 비슷하다.

 

하지만 상카라들은 파초의 수간과 같다고 보았다. 파초는 몸통의 줄기가 같다. 따라서 몸통의 줄기 중심이 되는 심이 없다. 이를 두고 고갱이가 없다고 표현하였다. 이를 다른 말로 실체가 없다는 말과 같다.

 

 

 

 

 

 

 

한편 알음알이()은 요술부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오온은 물거품과 같고, 신기루와 같아서 실체가 없기 때문에 우리를 매일 속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수다원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온이 나의 것이라거나, 나의 자아라 하여 좋으면 당기고, 싫으면 밀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삶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오온은 단지 무더기들의 모임을 뿐이지 자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고 영혼도 아니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차갑다” “딱딱하다등의 지금 여기에서 느끼는 것이 실재하는 것이고 그 외는 모두 개념놀음이다. 이는 좋다” “싫다와 같은 느낌에서 그치지 않고 갈애와 집착으로 발전하였을 때 반드시 업을 짖게 되어 태어남을 수반하고, 그 결과는 항상 늙음, 죽음, 비탄, 탄식, 고통, 절망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모든 현상에 대하여 무상, , 무아로 보아야 하는데, 이를 오온에 적용하면 물질은 더로운 것, 느낌은 괴로운 곳(즐거움도 괴로움으로 봄), 인식과 상카라들은 자아가 아닌 것, 알음알이는 무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런 무상, , 무아는 한마디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눌라 스님의 음성법문 (다섯무더기속의 담마 -오취온과 연결하여 푸는 법념처) 에 따르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것이라 하였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면 수다원이라 한다. 실제로 이런 말은 초기경전에서 볼 수 있다.

 

초전법륜경에서 처음으로 부처님이 다섯명의 전 동료 수행자에게 법을 설하였을 때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꼰단냐비구는 띠끌 없는 진리의 눈이 열렸다. ‘무엇이든지 생긴것은 모두 소멸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상윳따니까야 :56  삿짜상윳따 11, 율장 마하왁가 1)

 

 

한자어로 교진여라 불리우는 꼰단냐비구가 깨달은 것은 부처님이 깨달은 것과 동일한 내용으로서 무엇이든지 생긴것은 모두 소멸한다는 매우 단순해 보이는 진리이었다. 이 것이 무상, , 무아와 같은 말이라는 것이다. 이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말한다.

 

결국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말것을

 

사람들은 결국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말 운명에 처해 있는 좋아하고 싫어 하는 것에 목숨을 건다. 하지만 내 뜻대로 안된다고 하여 화를 내 보았자 상대방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화내는 사람만이 그 화내는 마음으로 인하여 정신적 고통을 당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온이 마치 자기의 것인양 내 뜻대로하려 하기 때문에 매번, 매순간 자신에게 속고 산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든지 생긴것은 모두 소멸한다’고 하는데, 사라지고 말 성냄과 그에 따른 개념놀음에 목숨을 걸 이유가 있을까.

 

 

 

2011-04-0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