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한자경 교수의 무아와 한마음 비판, 윤회와 무아 현대적 의미를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1. 4. 23. 15:14

 

 

 

 

한자경 교수의 무아한마음비판, ‘윤회와 무아 현대적 의미를 보고

 

 

 

 

남는 것은 오로지 글 뿐

 

일을 하면서 글쓰기를 병행하다 보니 늘 시간에 쫒긴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일이 우선이다. 일을 한다는 것은 수입과 직결 되기 때문에 야간작업, 주말작업을 마다하지 않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일을 맡긴 고객관리 차원에서라도 납기는 반드시 맞추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일이 많아도 글쓰기는 멈추지 않으려 한다. 글쓰기는 이미 생활화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스님이 아침예불을 거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실 글쓰기는 돈이 되지 않는다. 시간이 곧 돈인 세상에서 몇 시간에 걸쳐 글쓰기를 한다는 것은 보통사람들이 보았을 때 시간낭비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남는 것은 오로지 글 뿐이다. 돈이 생겨서 술을 마시면 남는 것이 없지만, 그 돈으로 책을 사 두면 남는 것과 같은 이치라 볼 수 있다.

 

자주 가는 사이트

 

글쓰기를 위한 소재발굴은 주로 책을 통해서이다. 또 하나는 인터넷을 통해서이다.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생활인이다 보니 선지식으로 부터 직접 듣거나 가르침을 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일을 그만두기 전까지 힘들 것이다. 이처럼 바쁜 일상속에서 인터넷을 통한 정보는 매우 유용하다.

 

 

인터넷은 항상 접하는 생활필수품과 같다. 그런 인터넷의 특징중의 하나는 좋아하는 사이트에 가서 언제든지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정보가 저장 되어 있기 때문에 다시보기로도 여러번 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그런 이유로 자주 가는 사이트가 불교tv이다.

 

불교TV사이트에서 제공하는 프로중에 종종 과거에 방영하였던 것을 올려 놓은 경우가 있다. 그런 프로중에 지난 2007년에 방영되었던 특강 과학, 생명 그리고 불교’를 발견하였다. 거기에서 이화여대 한자경 교수의 윤회와 무아의 현대적 의미(제7회 윤회와 무아의 현대적 의미 1부, 제8회 윤회와 무아의 현대적 의미 2부)’를 보았다.

 

90분 강의내용을 녹취하고

 

한자경교수의 무아의 현대적 의미는 이미 지난 2007년에 어느 인터넷 뉴스 사이트에 올려진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때 당시 두 번을 보았는데, 강의 내용에 감동하여 블로그에 소감문(이세상이 비로자나  또는 야훼 그리고 알라의 한바탕 꿈이라면)을 올려 놓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번에 세 번째로 보면서 비판적인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초기불교를 알았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과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

 

우선 1,2회에 걸쳐 총 90분에 달하는 분량의 강의내용을 녹취하였다. 노트에 주요 내용을 받아 적고, 놓친 부분은 다시 듣기로 하여 보충하다 보니 무려 52페이지 달하였다.

 

 

 

 

 

 

 

 

 

여러시간에 걸쳐서 작성된 녹취내용을 다 글로 표현 할 수 없다. 하지만 초기불교적 관점에 보았을 때 왜 그런 이론이 나오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한자경 교수가 이해하는 무아

 

한자경교수는 무아를 현대적의미로 해석하였다. 이는 자신의 방식대로 무아를 해석하였다는 말과 같다. 그런 이론적 토대는 유식과 화엄경의 일체유심조에 바탕을 둔다. 그렇다면 한자경 교수가 이해하는 무아는 무엇일까.

 

한 교수는 부처님이 설한 무아에 대하여 두가지로 말하였다. 하나는 초기경전상의 무아이고, 또 하나는 대승불교이론을 바탕으로 한 자신이 생각하는 무아이다.

 

초기경전의 무아는 모든 현상이 인연화합의 산물로서 인연화합이 다하면 사라지는 무상한 것으로서 이는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던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말한다. 하지만 대승경전을 바탕으로 한 한교수가 보는 무아는 그 무상한 현상자체를 창출해 내는 무한한 힘이 유정물의 바깥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내면안에 개체성을 벗은 하나의 마음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 하나의 마음 즉, ‘한마음(일심)’과 합일 되는 것이 무아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불교의 핵심은 바로 이 한마음에 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자경 교수, 제7회 윤회와 무아의 현대적 의미 1부)

 

 

한교수가 말하는 무아는 결국 한마음과 같은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유정물 각자에 들어 있는 보편적인 하나의 마음, 청정한 마음을 깨달으면 진여가 되고, 이는 더 이상 육도윤회를 하지 않게 되어 해탈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한마음과 같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것은 선사들이 말하는 삼매와 같은 것으로 파악된다. 즉 의식을 비움으로서 무심의 상태가 되지만 항상 깨어 있는 적적성성(寂寂惺惺)의 상태를 말한다. 그렇게하여 의식을 무한히 확장하여 공의 마음, 한마음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무분별지가 되면 무한의 공이 자신이 자각하는 마음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론에 대하여 더 알기 쉽게 설명하였는데, 한교수의 독특한 꿈의 비유이다.

 

꿈의 비유

 

우리가 꿈을 꿀 때, 꿈속의 나와 꿈꾸는 나가 있다. 이 때 꿈속의 나는 가짜의 나(가아, 1)이고, 꿈꾸는 나는 진짜의 나(진아, 2)이다. 그런데 꿈을 깨보면 꿈속의 나와 꿈속의 객관적 대상들 즉, 너라든가 산천초목과 같은 것들은 모두 모두 꿈꾸는 나(진아, 2)가 모두 만들어 내는 것이라 한다. 그것도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실속의 나도 꿈속의 나인 유근신(假我, 1)과 객관적 대상인 기세간 모두 꿈꾸는 나(眞我, 2)가 만들어낸 마음의 산물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꿈을 깨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꿈꾸는 나(진아, 2)는 누구인가.

 

꿈꾸는 나는 누구인가

 

이에 대하여 한교수는 꿈꾸는 나가 바로 한마음(一心)’이라고 한다. 그 한마음은 모든 유정들 속에 들어 있어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마음을 말한다. 이 한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꿈속에서 꿈을 꾸는 것처럼 계속 윤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탈한다는 것은 이 현실세계가 가상이라는 것을 알아서 즉, 유식성을 깨달아서 현실의 꿈을 깨는 것이라 말한다.

 

꿈을 깬다는 것

 

어떻게 해야 꿈을 깰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한교수는 악몽을 예로 들었다. 꿈속의 나가 더 이상 살아 남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나의 자리가 없어졌을 때 꿈에서 깨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1을 버리고, 2로 가는 것이 깨어나는 것인데, 이는 1의 유근신(有根身)과 기세간(器世間)이 모두 꿈이라는 것을 우리모두가 가지고 있는 한마음의 식소변( 所變)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꿈을 깨는 것이라 한다. 또 꿈에서 깨어나는 것은 일체존재가 실유가 아니라 가유라는 것 즉, 공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꿈을 깨고 나서 어떻게 해야할까

 

그렇다면 꿈을 깨고 나서 어떻게 해야할까. 이에 대하여 한교수는 모든 유정들이 한마음과 연결 되어 있으므로 다른 유정들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아는 자비의 마음, 보살의 마음을 내는 것이라 한다. 따라서 비록 꿈을 깨었을지라도 다시 꿈속에 들어가 꿈속의 유정들이 꿈을 깨는 것을 도와 주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이왕 꿈을 꿀 것이라면 좀더 아름다운 꿈, 좀 더 인간적인 꿈, 좀 더 행복한 꿈을 꿀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이 보살이라 한다.

 

한마음은 실재하는 것일까

 

이처럼 한 교수는 자신의 독특한 꿈의 비유로서 자신이 이해하는 현대적 의미의 무아를 설명하였는데. 그녀가 주장하는 한마음은 진짜 실재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을 하였다.

 

 

우리가 자아라고 집착하는 오온이나 꿈속에서 윤회하는 오온은 가상이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그 가상을 진여, 일심, 한마음 이것을 ,,..하다는 뜻으로 실재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공처경지의 마음이고, 공의 마음이고, 부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한자경 교수, 제8회 윤회와 무아의 현대적 의미 2부)

 

공의 논리에 따르면 공 역시 공한 것이 되고 만다. 하지만 진공묘유(眞空妙有), 공즉시색(空卽是色)과 같이 공에서 유가 나오는 이유를 바로 한마음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를 제8식 아뢰야식의 식소변으로 이해하여 유근신과 기세간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보는데, 모두 한마음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그 세계는 한마음이 만들어낸 가상세계, 꿈의 세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나와 기세간을 만들어내는 마음이 반드시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한교수는 한마음이 공한 것이 아니라, 진공묘유로서의 실재하는 것으로 본다.

 

한마음과 하느님

 

한마음이 실재하는 것이고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강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멘트를 남겼다.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의 조상들은 한울에다 존칭인 님을 붙여서 한울님, 하눌님, 하느님이라 불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한마음이고, 부처님 마음이고, 하늘이고, 유교식으로 하면 태극이고, 기독교의 하늘의 주, 천주도 모두 한마음 속에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이고 천주님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이 한마음, 부처님의 마음을 통해서 다 하나로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한자경 교수, 제8회 윤회와 무아의 현대적 의미 2부)

 

 

현실의 거짓의 나에서 깨어나 진짜의 나인 한마음을 알게 되면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명칭들이 한마음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종교의 깨달음이 결국 모두 하나로 통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근거로서 일차적인 근원을 갈구하는 마음이 바로 나이니라라는 우파니샤드의 문구와 네마음이 곧 내마음이니라라는 동학의 최재우말을 예로 들어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과 어긋난다.

 

신을  직접 본 적이 있는가

 

부처님당시 고대인도에서 브라만교는 우주의 근원을 ‘브라만’이라 하고, 나의 근원을 ‘아뜨만 (ātman)’이라 하였다. 이것들이 일치하였을 때 이를 ‘범아일여 (梵我一如)’가 되어 최고의 진리에 도달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부처님은 출가한 후에 범아일여를 맛보기 위하여 여러 스승을 찾아 다니며 수행을 하였를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실체도 찾을 수 없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볼 수 있다.

 


“또는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브라흐민들의 스승의 스승 중에서 어느 한 사람이라고 브라흐마 신을 직접 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또는 그 스승들 중 7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어느 한 사람이라고 브라흐마 신을 직접 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님.”

(디가니까야:13 떼윗자 경 1-15,19,24,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부처님은 브라만을 믿는 브라흐민들에게 “신을 본적이 있는가?”하고 물어 본다. 그러자 누구하나 신을 본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 것도 7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신은 본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자 역시 본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들은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브라흐마 신과의 하나되는 길을 가르친다. 그러면서 이것만이 해탈에 이르는 곧은 길이며, 바른 길이며, 이 길을 따르는 사람은 브라흐마 신과 하나됨으로 이끈다’고 말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브라흐민들이 말하는 것이 터무니없음이 드러나지 않았는가?


(
디가니까야:13 떼윗자 경 1-15,19,24,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어느 누구도 신을 본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과 합일하는 범아일여를 주장하지만 이는 고대 브라흐민들이 전승한 내용을 그대로 암송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터무니 없다’고 부처님은 말씀 하신것이다.

 

아뜨만과 유사한 것들

 

부처님은 맹목적인 믿음 대신 우리의 몸과 마음을 분석하여 고통의 소멸과 다시 나고 태어남이 없는 불사의 문을 발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 대승운동이 일어나면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비판하게 된다. 그 주된 이유는 존재의 소멸로 끝나는 열반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일 것이다.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영원히 변치 않는 근원적인 것이 있다고 보았는데, 이는 고대인도의 아뜨만사상과 다름이 없다. 따라서 윤회의 주체를 인정해야 하는데, 후대로 내려 오면서 대승불교에서는 무아를 설하면서도 윤회의 주체를 아뜨만과 다른 형태로 인정하게 된다. 그것이 유식사상의 아뢰야식이나 여래장사상의 여래장이다. 이는 아뜨만과 매우 유사한 개념이다.

 

이처럼 부처님이 부정하던 아뜨만이 공사상에 기반을 둔 유식과 여래장사상으로 발전되면서 각각의 마음속에 궁극적 근원이 실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것이 중국으로 건너가면 중국의 역사와 문화와 현실적 사상과 접목되어 불성이 되는데, 이는 모든 유정중생들의 마음속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교수가 말하는 한마음역시 모든 유정들의 마음속에 실재하는 것으로 본다. 더구나  한마음을 아는 것은 모든 종교의 깨달음은 하나이고, 모든 종교는 결국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이유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크게 보고 있는 것이 불교의 힌두교화이다. 이는 아뜨만과 같은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서 부터 출발한다.

 

그런 바탕에는 공사상이 있고, 진공에서 모든 것이 생겨난다는 진공묘유, 그리고 공즉시생의 원리를 설명하려면 근원적인 어떤 것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인도에서 대승불교는 힌두교의 사상과 신격을 받아 들여 밀교화되고, 나중에는 힌두교와 거의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 인도에서 불교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상황은 어떠한가.

 

우리나라는 종교와 이념백화점과 같다고 한다. 한반도가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로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가 하면,  동서양의 제반사상과 종교가 서로 혼재되어 각축을 벌이고 있다. 그런 와중에 유일신교는 교세를 확장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런 상황속에서 대승불교의 교리는 취약하기 그지 없다. 종교적 깨달음은 같은 것이라거나, 한마음은 하느님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모든 종교는 같은 것이다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불교와 유일신교도 같은 것일까.

 

존재의 완전한 소멸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의 입장에서 보면 불교와 타종교는 결코 같을 수 없다, 출발지가 다르기 때문에 목적지 또한 다를 수 밖에 없다. 이는 불교가 탄생한 역사적 배경과도 관련이 있다.

 

불교의 시작은 여러가지 요인이 있지만 브라만교를 비판하며 성립한 것도 중요한 이유이다. 개아가 있다는 아뜨만사상과 자아는  있을 수 없다는 무아사상의 종착지는 다를 수 밖에 없다. 둘다 불사(不死)를 목표로 하지만 불멸의 브라만교의 범아일여는 영원히 존재하는 개념이 되지만, 불교의 열반은 다시 태어날 일이 없기 때문에 불생불멸의 불사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교가 브라만교의 범아일여와 같은 천인합일사상이라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우주는 대우주(Macro cosmos)라 하고, 인간은 소우주(Micro cosmos)라  하였고, 중국에서 천의 질서를 리()라 하였고, 나의 내면속의 리와 같은 요소를 성품 즉, 성()이라한 것도 천인합일 사상인 것이다. 기독교의 천국도 결국 천인합일사상과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근원과 내가 합일되어 존재 그 자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완전한 소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열반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한교수의 현대적 의미의 무아는 의식의 확장으로 인하여 나라는 경계를 허물어 한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 하는데, 이는 초기불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벗어난 것으로서 오히려 범아일여, 천인합일 사상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한교수는 모든 종교적 깨달음은 같은 것이고, 심지어 한마음이나 하느님도 명칭만 다를 뿐 같은 것이라 하였다.

 

형이상학적 개념과 희론

 

부처님은 실체가 없는 범아일여와 같은 천인합일사상을 부정하였다. 그 대신 철저하게 우리의 몸과 마음에서 그 답을 찾았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분해하여 설명하였다. 그렇게 한 이유는 자아나 영혼과 같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이었다.

 

자아나 영혼, 브라흐마, 절대자, 창조주, 한마음, 알라, 야훼등은 단지 이름과 명칭으로만 불리울 뿐 실체가 없어서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 낸 개념으로 본 것이다. 결국 부처님은 스스로 만들어 낸 마음속의 우상으로 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분해하여 설명한 것이다. 이처럼 형이상학적 개념에 대한 설명은 초기경전에서 볼 수 있다.

 

 

세상은 영원한가?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유한한가?

세상은 무한한가?

영혼과 육체는 같은가?

영혼과 육체는 다른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

(맛지마니까야: 63   쭐라말룽꺄경)

 

 

부처님은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하여 답변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였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목표와 이어져 있지 않으며, 청정한 삶의 근본에 적합하지 않으며, 깨어있음으로 이끌지 않으며, 욕망의 버림, 갈애의 소멸, 평회로움, 최상의 지혜, 깨달음, 그리고 열반에 이끌지 않기 때문이다.

(맛지마니까야: 63   쭐라말룽꺄경)

 

 

한 마디로 현실의 삶과 열반에 도움이 안되는 희론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희론과 관계없이 이 세상에는 여전히 태어남과 늙음, 죽음, 슬픔, 한탄, 괴로움, 절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현실적인 가르침, 사성제와 팔정도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고통받고 있는 삶에서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다. 지금 갈애의 독회살을 맞아 고통을 받고 있다면, 그 화살이 어디서 날아 왔는지 등을 따지기 전에 그 화살을 뽑고 독을 제거하는 것이 급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 주고, 궁극적으로 열반으로 이끄는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이처럼 부처님은 현실직시의 가르침을 말씀하셧을 뿐, 우주적 스케일의 형이상학적 가르침을 펴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가장 현실적인 사성제와 팔정도로 귀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성제와 팔정도를 떠난 가르침은 모두 허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아소까 각문에도 있다는 담마빠다의 유명한 게송이 있다.

 

 

Maggānaṭṭhagiko seṭṭho   막가낫탕기꼬 셋토

saccāna caturo padā      삿짜낭 짜뚜로 빠다

virāgo seṭṭho dhammāna 위라고 셋토 담마낭

dvipadānañca cakkhumā     드위빠다난짜 짝쿠마

 

길로서는 팔정성도가 최상이요

진리로서는 사성제가 가장 성스럽고

욕망을 다스리는 담마가 으뜸이며

인간과 천상을 통틀어 두 발 가진 생명 가운데

붇다야말로 최고의 성자이다.

(법구경 273번 게송)

 

 

 

 

2011-04-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