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바라지 않는다, 로히땃사경(Rohitassa Sutta)

담마다사 이병욱 2011. 4. 28. 14:28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바라지 않는다, 로히땃사경(Rohitassa Sutta)

 

 

 

세상이 있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있어서 세상이 존재하는가.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한 번쯤 해 보았을 것이다. 이처럼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은 객체로서의 세상과 주체로서의 세상, 이렇게 두가지가 있다.

 

객체로서의 세상과 주체로서의 세상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자신을 객체로서 보는 세상에 더 익숙하다. 그래서 세상이 있어서 내가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 세상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고, 죽은 다음에도 세상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 세상이 올 스톱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 갈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세계관에서 나는 세상의 일부분일 뿐이다. 마치 밑도 끝도 알 수 없는 거대한 우주속에서 먼지 보다 작은 한 점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세상속에서 나의 기쁨과 고통, 행복과 불행 또한 매우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고통을 겪고 있을지라도 거대한 우주적 관점에서 본다면 너무 작아서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다. 그렇다면 우리자신을 객체로서 보는 세상은 어떻게 시작 되었을까. 유일신교적 관점과 대승불교적 관점으로 구분하여 보았다.

 

단 하나의 원인 그 분

 

유일신교에서 보는 세상은 신의 창조로 본다. 시간을 출발시킨 원인으로서 창조주를 상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신에 의하여 창조된 세상은 우리와 삼라만상을 만들었는데, 그 세상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내가 있어서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존재 하기 이전에 세상이 이미 만들어져 있었고, 그 세상속에서 계속 살아가다가 죽고난 후에도 세상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의 일부로서의 나는 객체에 지나지 않고 구제받아야 할 대상이다. 따라서 자신의 능력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이 세상을 만든 창조주와 소통하려 하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와 같이  일상에서 발생하는 시시콜콜한 문제까지 모두 의존하게 되어 철저하게 종속된다.

 

신이 창조한 세상은 유시유종(有始有終)이다. 시작이 있으니 끝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 시간의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시간관에 대하여 직선적 시간관이라 한다. 마치 활을 쏘았을 때 화살이 궤적을 그리며 떨어지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런 유시유종 세상의 특징은 무한소급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세상을 창조한 최고의 원인이 되는 창조주는 누구에 의하여 시작 되었는지등에 대한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유일신교에서는 단 하나의 원인으로서 그 분을 상정하기 때문에 인과율을 제한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꿈꾸는 사람이 만들어 낸 세상

 

대승불교에 유식(唯識, vijnapti-matrata)이 있다. 모든 존재는 오직 식, 마음이 만들어낸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이 객관적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이화여대 한자경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나를 포함한 현실세계는 마음이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이는 현실세계가 마치 꿈꾸는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처럼꿈속의 세상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의 나는 표층적인 의식만 느끼지만, 표층의식을 넘어 심층적이고 근원적인 마음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한마음(一心)’이라 한다.

 

그리고 표층의식의 연속성을 위하여 말라식(7)과 아뢰야식(8)을 상정하였는데, 이는 윤회의 원인이 되는 마음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몸과 입과 마음으로 업을 지으면 낱낱이 아뢰야식에 종자의 형태로 저장되는데, 종자의 흐름을 아뢰야식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종자들도 모든 유정들이 공유하는 공업종자가 있고, 유정마다 차별적으로 갖는 불공업종자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종자들이 인연화합하여 중연이 갖추어지면 현행을 하게 되는데, 이는 마치 씨앗이 발아하여 나무가 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때 불공업종자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유근신(有根身)’이 되고, 공업종자는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 즉, 산하대지 산천초목등과 같은 기세간(器世間)’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근신과 기세간은 모두 한마음이 만들어 낸 것으로서 궁극적으로 같은 마음의 작용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꿈을 꿀 때 꿈속의 나와 꿈속의 세상 모두를 인식할 수 있는 꿈꾸는 나와 같은 것이라 한다.

 

그런데 이런 꿈꾸는 나와 똑 같은 개념으로 보는 한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런 방식으로 나가다 보면 무한소급에 걸리지 않을 수 없다.

 

주인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면

 

이렇게 세상을 객체로 보면 세상을 창조한 신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고, 이는 나와 세상은 별개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 종속되는 존재로 된다. 따라서 삶의 과정에서 어려운 문제가 닥쳤을 때 제1의 원인인 그분에게 의지하게 된다.

 

유식에서처럼 세상이 꿈꾸는 자의 마음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라면 마치 컴퓨터 프로그램속에서 살아가는 버그와 같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을 주체적으로 보면 세계관이 달라진다.

 

주인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면 자신이 주인이 되고, 자신이 주체가 되어 바라본 세상은 이성적으로 설득하지 못하는 세상은 받아 들일 수 없다. 신이나 어떤 마음이 주체가 되어 형성되어 인과율을 무시하는 세상을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불교의 세계관이다. 그런 불교의 세계관은 어떤 것일까.

 

부처님은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은 우리의 감각기관인 눈, , , , , 마음이 외부의 대상인 형상, 소리, 냄새, , 감촉, 현상과 부딪쳤을 때 인식하는 마음이 이 세상의 전부(일체)’라고 하였다. 이외 다른 세상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일체인가? 눈과 형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마음() (마음의 대상인) , 이를 일러 일체라 한다.”

(S35:23. 상윳따니까야)

 

 

세상은 누가 창조한 것도 아니고, 누구의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기관이 감각대상을 인식할 때 세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 그런 세상은 어떤 것일까.

 

세상을 잘 아는 분, 로까위두(Lokavidu)

 

부처님의 별호는 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이다. 이중 세간해(世間解)’가 있다.

 

세간해는 세상을 잘 아는 분이라는 뜻이다. 빠알리어로 로까위두(Lokavidu)’라 한다. 부처님이 생각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길래 세상을 잘 안다고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을 참고 하면 다음과 같은 문구를 발견할 수 있다.

 

 

모든 방면에서 세상을 잘 아시기 때문에 세상을 잘 아시는 분(世間解)이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고유성질에 따라, 일어남에 따라, 소멸에 따라, 소멸에 이르는 방법에 따라 모든 방면에서 세상을 아셨고, 경험하셨고, 통찰하셨기 때문이다.

(청정도론, 7장 여섯가지 계속해서 생각함)

 

 

부처님께서는 세상을 알기 위하여 세상 끝까지 여행을 하지 않았다. 단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분해하여 세상을 본 것이다. 일미터 몇십센티미터에 불과한 이 몸안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보고서 세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본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은 세상은 영원한가? 세상은 유한한가?등의 10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마두삔디까경(Madupindika sutta)에 따르면 세상의 원인과 창조등을 논하는 형이상학적 희론과 개념에 대하여 인간을 괴롭히는 것으로서 기뻐할 것도, 환영할 것도 집착할 것도 없다고 하였다. 그런 희론과 개념은 다툼, 싸움, 논쟁, 비난, 악의, 거짓말의 원인이 된다고 하였다.

 

세상의 끝에 도달한 자

 

이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나는 갠지스강의 모래알과 같은 존재이며 객체이며 종이다. 이때 이 세상을 창조한 이나 이 세상을 꿈꾼 꿈꾼이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시작될 것이다. 세상의 끝에 도달하려 하지만 가도 가도 끝이 없다.

 

하지만 이 세상을 주관으로 보고 주인으로 살아간다면, 창조주에게 기도하거나 꿈꾼이를 찾을 필요가 없다. 지금 여기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으로 느끼고, 느끼고, 인식하는 세상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여행으로써는 결코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세상의 끝에 이르지 않고서는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세상을 아는 자, 슬기로운 자

세상의 끝에 도달한 자, 청정범행을 완성한 자

고요한 자, 그는 세상의 끝을 알아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바라지 않는다.

 

(상윳따니까야 S.I-62 로히땃사경-Rohitassa Sutta, 숫따니빠따 SN 2.26 , 청정도론에서 발췌)

 

 

 

 

 

 

사진http://2012hongkong.blogspot.com/2010_10_01_archive.html

 

 

 

세상의 끝에 이르러야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물리적인 세상의 끝에 이르지 않고서도 우리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여 세상의 끝에 도달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부처님이 설한 사성제를 통해서이다.

 

이 세상도 바라지 않고 저 세상도 바라지 않는다

 

대부분의 종교가 죽음이후를 말한다. 우리의 삶은 죽은 다음에완성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살아 있을 동안 열심히 헌금을 하고 보시하고, 계율을 지켜서 도덕적이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 갈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면 천국이나 극락에 태어 난다는 것이다.

 

만약 부처님도 위와 같은 논리대로 가르침을 폈더라면 불교 또한 이 세상에 나타났다가 사라져간 그렇고 그런 종교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영원에 대한 집착인 상견(常見)을 배격하였다.

 

부처님은 열반에 대하여 죽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몸을 가지고 있을 때 완성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죽어서나 갈 수 있다는저 세상’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았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려 열반을 실현할 것을 말씀 하셨다. 그것이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이고 사성제이고 실천방법인 팔정도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열반을 실현한 이들은 주인으로서 세상을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몸이 무너져도 다시 나고 죽는 일이 없다. 따라서 이들에게 객관적인 세상이 달리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상을 아는 자, 슬기로운 자, 세상의 끝에 도달한 자, 청정범행을 완성한 자, 고요한 자는 이 세상도 바라지 않고 저 세상도 바라지 않는다고 하였다.

 

 

 

2011-04-2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