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보시할 것인가, 빠빠(Pāpa)행과 뿐냐(Puñña)행 그리고 꾸살라(Kusala)행
지장보살을 엄마로
아마도 불자들이 불교방송을 가장 많이 듣는 시간대중의 하나가 아침 6시 전후일 것이다. 그런데 6시에 항상 듣는 광고방송이 있다. 전라도 광주의 D사의 ‘불사광고’이다.
몇 년 전 이유를 알 수 없는 화재로 대웅전이 소실되어 전국의 불자들을 대상으로 불사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는 광고인데 사오년째 듣는 것 같다. 마치 ‘라디오 앵벌이’와 같은 광고를 같은 시간대에서 수 년간 듣다 보니 이제 광고문구도 귀에 익었다.
그런데 그런 광고문구도 매년 바뀌고, 또 철에 따라 바뀐다는 것이다. 이번 광고 내용을 보면 ‘태아영가천도’에 관한 것이다. 낙태로 인하여 햇볕도 보지 못하고 죽은 불쌍한 영가를 위하여 ‘지장보살을 엄마로’ 하여 영가천도해주자는 내용이다.
천도재도 ‘천정’을 쳤나
천도재는 죽은 자를 위하여 그 영혼이 극락왕생하기를 비는 의식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49재를 들 수 있다. 죽은 자가 명부의 시왕에게 1주일 마다 심판을 받는데, 이중 7번째 즉, 49일째 되는 날 염라대왕의 최종심판이 있게 된다. 이때 재를 주관하는 스님이 시왕과 염라대왕에게 “잘 보아 주십시요” 하고 부탁하는 것이 49재라고 불교TV에서 어느 스님이 법문하였다.
이런 천도재는 49재 뿐만아니라 무주고혼을 천도하는 ‘수륙제’도 있고, 음력 7월 15일 백중에 목건련 존자의 효성을 본받아 천도하는 ‘우란분재’도 있다.
이와같은 천도재가 이제는 태아영가까지 천도하게 되었다. 조상에서 부터 무주고혼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도하여서일까 이제 남은 것은 불쌍하게 죽은 태아로 죽은 영가천도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쯤 되면 천도재도 이제‘천정’을 쳤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무엇으로 먹고 사느냐고
어떤 이들은 절에서 49재와 같은 방편을 사용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먹고 사느냐고 걱정하기도 한다. 절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 돈이 있어야 유지할 수 있을 것이 아니냐는 논리이다. 스님도 사람인데 노후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다 보니 재산을 축적하고 소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너도 나도 노후보장용으로 ‘사설사암’갖기가 유행이라고 어느 스님은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의 컬럼에서 지적하였다.
하지만 이는 “금과 은을 받지 않는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사항이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은 소유하는 폐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사꺄의 아들들인 사문들은 금과 은을 갖는 것이 허용되지 않으며 금과 은을 받지 않습니다. 만일 금과 은이 허용된다면 그들에게 다섯가지 감각적 쾌락도 또한 허용 될 것입니다.
(상윳따니까야:42 가마니상윳따 10,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여기에서 금과 은은 현대에 있어서 ‘돈’과 같은 것이다. 돈을 받게 되면 결국 ‘다섯가지 감각적 욕망’을 허용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일반적으로 다섯가지 감각적 욕망은 식욕, 성욕, 재욕, 안락욕, 명예욕을 말한다. 이를 ‘오욕락’이라고 하는데, 속세에서 사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관이다. 그렇다면 돈을 받는 행위는 수행자이기를 포기하고 세속인과 똑 같이 살아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직업을 갖지 않고, 생산활동을 하지 않은 출가수행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것은 재가자의 보시에 의지하여야 한다. 이때 보시는 ‘필수품’을 말한다. 부처님당시에는 보통 ‘네 가지 필수품’이라 하여 음식, 옷, 주거지, 의약품을 승가에 보시 하였다. 그 어디에도 금과 은과 같은 돈은 보이지 않는다.
자식들에게 물려주어 보았자
현대의 승가에서 돈은 필수적이다. 이는 부처님당시와 시대적상황이 많이 다름을 의미한다. 재가자는 돈이나 재물을 보시함으로서 재보시에 의하여 승가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하고, 승가는 재가자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달함으로서 법보시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하지만 한국적 현실에서 주로 돈으로 하는 재보시는 있지만, 부처님의 담마를 전하는 법보시는 그다지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신 천도재와 같은 방편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는 어느 특정인을 위하여 죽은 자를 위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돈이 되는 천도재 위주로 사찰이 운영되고, 돈이 있어 보이는 노보살이 환영받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어느 스님의 법문을 들어 보면 나이가 들어 죽을 날이 가까운 불자들에게 가지고 있는 돈을 절에 보시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자식들에게 물려주어 보았자 분란만 일어나고, 또 죽어서도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돈을 스님에게 맡겨 두면 자식들이 서로 싸울일도 없고, 더구나 죽었을때 스님이 천도재까지 지내 주기 때문에 ‘일석이조’라고 설명하는 것을 불교TV에서 보았다.
이처럼 죽은 자를 위한 방편불교가 되다 보니 스님들이 포교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오늘 날 도시에 사찰이 보이지 않고 청소년 포교와 군포교가 이루어지지 않는 요인도 방편불교와 관련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소년과 군포교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청소년과 군포교는 전혀 돈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포교하는 이유는 돈 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훌륭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을 인터넷상에서 보았다.
뿐냐디빠빅쿠, 해피스님
인터넷에서 본 사람은 ‘뿐냐디빠빅쿠’이다. 인터넷에서는 ‘해피스님’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박사타이틀을 가졌다거나 옥스퍼드나 하버드에서 공부한 해외파스님도 아니다. 카페 (해피법당) 를 만들어 열심히 글을 쓰고, 지역사회를 위하여 봉사를 하고, 근처의 군부대에서 장병을 포교하는 스님이다.
뿐냐디빠빅쿠, 해피스님
원주 해피법당 주지 해피 스님은 “불교의 핵심이 괴로움 소멸에 있다”며 해피캠페인으로 일상 속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출처 : http://www.beopbo.com/news/view.html?section=1&category=114&item=117&no=65678
스님이 운영하는 카페에 들어가 보면 직접 작성한 글로 가득하다. 주로 초기경전인 니까야에 근거한 글들이다. 그런데 매우 가난하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만을 전법하다 보니 돈이 안되는 것이다. 이는 기도와 방편으로 일관하는 기존의 한국불교 방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매일 꾸준히 인터넷에 글을 써서 법보시를 하고 있고, 더구나 군포교에도 매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군포교에 관한 글은 인상적이었다. 군인들을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해 줄 것인지, 그리고 그들에게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어떻게 전달할 지에 관한 글을 읽으면 포교에 대한 열정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포교의 황금어장과 ‘약의 비유’
흔히 청소년과 군인을 ‘포교의 황금어장’이라고 한다. 이 중 군대는 황금어장 중에서도 최대의 황금어장이다. 왜 그럴까. 이는 즉시 효과를 보기 때문이다. 이를 ‘약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병이 났을 때 약을 먹어도 낫지 않은 사람이 있다. 법을 설해도 먹혀 들어가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이미 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자신의 주관이 확고하거나 오염될 대로 오염된 사람들이다. 교도소의 재소자도 이에 포함 될 것이다. 이런 자들은 교화해 보았자 교화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교화대상에서 제외하여야 한다.
다음으로 약을 먹거나 먹지 않거나 병이 낫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교화할 필요가 없다. 이미 ‘선근(善根)’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부처님 법을 만난적이 없어도 잘 알아 듣는 사람이다. 또 스스로 찾아와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약을 먹으면 낫고, 약을 먹지 않으면 낫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중간에 걸쳐 있다. 중간에 끼여 이쪽으로 갈까 저쪽으로 갈까 망설이는 사람들이다. 바로 청소년과 군인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법이 필요한 것이다.
아픈 자에게 약을 투입하면 즉시 약발의 효과를 보는 것처럼, 청소년과 군인에게 법을 전하면 매우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이런 효과를 알아서일까 기독교의 경우 일찌기 학교를 만들어 청소년에게 선교를 하였고, 또 군대의 구석구석에 군종장교를 두어 군선교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이처럼 선교의 황금어장에서 최첨단 장비를 갖춘 쌍끌이 저인망처럼 밑바닥부터 훝어간 것이다.
돈이 되지 않는 청소년과 군포교
이렇게 청소년과 군인들을 싹쓸이 할 동안 불교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거의 손을 놓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군포교에 관해서 그렇다. 작년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에서 ‘벼랑끝 군포교의 현장’이라는 시리즈물이 있었다. 어느 재가법사가 군포교 현장에서 느낀 소감에 관한 것이다. 그 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후, 누군가로부터 ‘스님은 업(직업)으로 불사하지만 재가는 신심으로 한다’는 말을 듣고는 스님들에게는 법회 맡아달라는 청을 아예 접었다.”
군부대에 법당이 있지만 법회를 봐줄 스님이 없어서 인근 사찰에 연락하였지만 모두 거절 당했다는 것이다.
열 분이나 사시는 큰절에서는 당신들의 법회 때문에 안되고, 일곱 분이 사시는 절은 문지방이 너무 높아서 주지스님을 만나지도 못했다고 한다. 또 세 분이 사시는 절에서는 스님이 법회를 나가려면 한번에 10만원 주어야 한다고 했고, 또 다른 절에서는 수계법회나 초청법회는 몰라도 매월 정기적으로 나가는 것은 어렵다고 하여 모두 거절 당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청소년포교와 군포교는 돈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포교에 매진하고 있는 스님들은 돈 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훌륭함을 알기 때문에 하나라도 더 전달하고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에서 일 것이다.
빠빠(Pāpa)행이냐 뿐냐(Puñña)행이냐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에서 뿐냐디빠빅쿠에 대한 기사 (생생한 부처님 설법 니까야로 듣는다) 가 났다. 법보신문에 따르면 5월에 서울에서 설법회가 열린다고 한다. 주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관한 내용으로서 빠알리 니까야를 정리한 것이라 한다.
설법회는 무료이지만 자율보시의 형태로 운영된다고 한다. 이런 자율보시의 특징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댓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행위를 말한다. 또 법보시에 대한 재보시의 성격이다.
사람들은 보시할 때 댓가를 바란다. 교회에 헌금을 하거나, 절에 보시할 때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건강, 학업성취, 사업번창을 기도한다. 그런데 이런 기도는 마치 정치자금과도 같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에게 후원의 밤이 있다. 지지하는 정치인에게 돈을 후원하는 것이다. 문제는 후원금의 성격이다. 이는 댓가없이 주는 것이 아니라 댓가를 바라고 주는 것이다. 또 나중을 위하여 보험을 들어 두는 것과 같다. 후원한 정치인이 정권을 잡게 되면 보답을 기대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정치헌금과 같은 기부행위를 스리랑카의 아상가교수는 불교TV에서 이런 행위를 ‘빠빠(Pāpa)행’이라 하였다. 댓가를 바라며 보상을 원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행위는 아꾸살라(Akusala, 불선행)와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지혜롭지 못한 행위이기 때문에 악행으로 보는 것이다. 반면 공덕이 되는 행위가 있다. 이를 ‘뿐냐(Puñña)행’이라 한다.
뿐냐행은 ‘선행(善行)’을 하는 것을 말한다. 스님에게 음식, 옷, 거처, 의약품등 네 가지 필수품등을 보시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런 공덕행을 지으면 천상에 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는 윤회의 삶속에서 하는 행위이다. 약간의 선행을 함으로로서 사악도를 면하고 천상에 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삶속에서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가장 이상적인 보시는
가장 이상적인 보시는 무엇일까. 보시를 하긴 하되 댓가를 바라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는 공덕을 짓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를 부처나 아라한의 행동이라 말하고 ‘꾸살라(Kusala)행’라고 한다.
그렇다면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건강, 학업성취, 사업번창을 위하여 헌금이나 보시를 하며 기도하는 행위는 어디에 속할까. 댓가를 바라는 면으로 보았을 때 꾸살라행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빠빠행과 뿐냐행이다.
정지헌금과 같은 것을 ‘빠빠행’이라고 하였다. 댓가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댓가를 바라는 모든 기도는 빠빠행이 아닐까.
하지만 헌금이나 보시를 하긴 하되 댓가를 바라지 않고 공덕을 짓는다고 생각하면 ‘뿐냐행’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것은 보시를 하긴 하되 댓가를 바라지 않고 또 공덕도 짓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꾸살라행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국민성금 보다 못한
사람들은 매주 일요일 교회에 가면서 기도를 한다. 그리고 일정금액을 헌금한다. 절에도 마찬가지로 인등을 단다든지 불사를 한다든지 하여 보시를 한다. 하지만 댓가를 기대하는 보시는 정치헌금과 다를 바 없고, 무종교인이 조건 없이 내는 국민성금 보다 못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승가에서 돈이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돈이 되는 천도재와 같은 방편에 주력한다면 진정한 법보시라 보기 어렵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이 훌륭함을 알아 대중들에게 알려 주는 것은 매우 훌륭한 법보시로서 꾸살라행에 해당 될 것이다. 또 그 가르침을 듣고 감동하여 보시조건 없이 보시하였다면 이 또한 꾸살라행이 될 것이다.
이렇게 법보시와 재보시로 댓가없이 보시 하였을 때 한국불교가 한 단계 레벨업 될 것이다. 그런 현상을 초기불교를 전파하는 현장에서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법보시 하는 사람이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얕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어리다고 업신여겨서는 안될 네 가지
초기불교경전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대왕님, 어리다고 얕보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될 것이 네 가지 있습니다. 왕족은 젊다고 얕보아서는 안 됩니다. 뱀은 어려도 깔 보아서는 안 됩니다. 불은 작아도 얕보아서는 안 됩니다. 비구는 젊다고 얕보아서는 안 됩니다.”
(상윳따니까야 : 3 꼬살라 상윳따 1,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부처님과 꼬살라의 빠세나다왕의 대화에서 부처님이 한 말이다. 젊은 시절 부처님이 빠세나다왕과 대화에서 어리거나 젊다고 해서 얕보지 말아야 할 것 네 가지를 들고 있다.
왕족의 왕자는 자라서 ‘대왕’이 될 수 있으므로 얕보아서는 안 되고, 작은 뱀이라도 ‘독’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무시해서 안 되고, 한 톨의 불씨는 모든 것을 태워 버릴 수 있기 때문에 얕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젋은 비구는 나중에 훌륭한 스승으로 성장 할 수 있을 것이기에 얕보아서는 안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말 속담에도 젊은 사람 무시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이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제 지금 시작한 해피법당과 해피스님의 시작은 초라하다. 하지만 부처님 말씀처럼 왕자가 자라서 대왕이 되듯이 미래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2011-05-0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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