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목숨을 건 포교, 뿐나경(Punna sutta)

담마다사 이병욱 2011. 4. 30. 12:05

 

 

 

목숨을 건 포교, 뿐나경(Punna sutta)

 

 

 

 

 

죽은 자들을 위한 불교

 

지난 주 일요일 꽃들이 피기 시작하며 신록이 시작되는 따사한 봄날 인근 C사찰을 찾았다. 사람사는 곳에 절이 없다시피한 수도권의 도시에서 비록 산중에 있기는 하지만 역사와 전통을 가진 C사는 주말에 참배객들을 포함하여 등산객이 많이 몰리는 절이다. 특히 부처님오신날 당일의 경우 인산인해를 이루곤 한다.

 

하지만 일요일 오전에 본 C사에서는 참배객이나 등산객들을 위한 법회나 법문은 볼 수 없었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부처님오신날을 제외하고 일반법회가 없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 대신 주법당이라고 볼 수 있는 극락보전에서 ‘49가 열리고 있었다.

 

전스님들이 참석한 49재는 마이크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일요일을 맞이 하여 참배하러 온 사람들도 들을 수 있도록 전 도량에 쩌렁쩌렁울려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참배하러 온 불자들은 49재가 끝나기 전까지 법당에 들어 갈 수 없었다. 대신 마당에 마련된 야외법석에서 절을 하거나 앉아서 경을 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수도권에서 비교적 큰 축에 속하는 절이 이정도라면 이 보다 작은 절에서 행사는보나마나 일 것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찰에서 법회나 법문을 보기 힘들다. 대신 불자들은 부처님이나 보살상 앞에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건강, 합격발원, 입찰발원등 이기적인소원성취를 빌며 불전함에 돈을 넣는 행위가 신행생활의 전부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스님들은 돈이 되는 48재나 천도재등에 더 관심이 있을 뿐 불자들을 위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매우 인색함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사람이 사는 곳에 절이 보이지 않는 것도 아쉬운데, 설령 산중에 절이 있다고 하더라도 죽은 자들을 위하여 불교가 존재한다면, 이는 암담하다 못해 참담한한국불교의 현실이라 볼 수 있다.

 

C사찰을 내려 오는 도중에 주차장에서 홍보용 봉고차를 발견하였다. 불자들을 대상으로 팜플렛을 나누어 주고 있었는데, 스님가수로 유명한 I 스님의 공연을 알리는 것이었다. 부근 도시의 시민회관에서 I스님의 특별콘서트가 열린다는 것이다. 그런 I스님은 불교TV나 산사음악회등 각종 불교행사등에서 볼 수 있어서 불자들에게 잘 알려진 가수스님이다. 그 스님은 수행자가 되려고 출가한 것인가, 아니면 가수가 되려고 출가한 것인가.

 

왜 출가하였는가

 

세속에서 추구하는 가치관을 버리고 출세간의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출가수행자들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이다. 청정도론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고 눈물을 흘리던 가족들마져 버렸거늘이라는 표현대로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은 나름대로 출가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당시의 출가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초기경전에 다음과 같은 출가이유에 대한 게송이 있다.

 

 

 

출가이유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을 보면

   어리석어 얻은 재물을 보시할 줄 모르네

   욕심스럽게 재물을 쌓아두고

   더욱더 감각적 쾌락을 열망하네

 

   땅을 무력으로 정복한 왕은

   바다에 아르기까지 온 땅을 다 통치하고

   아직도 바다 이쪽에 만족하지 못하고

   바다 저쪽까지 탐내네

 

   왕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와 같이

   갈애를 버리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면

   아직 만족하지 않은 채 시체를 떠나네

   세상에서 감각적 쾌락은 만족이 없네

 

   친족들은 울며 머리를 쥐어뜯고

   “아이고,우리의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네

   수의로 감싸서 운반하여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태우네

 

재물은 뒤에 남긴 채 수의 한 벌만 입고

   불타는 막대기에 찔리면서 장작더미 위에서 불타네

   죽는 사람에게는 친족도, 친구도

   안식처가 될 수 없고 의지처가 될 수 없네

 

   상속자가 재물을 가져가고

   사람은 업에 따라 제 갈 길을 가야 하니

   죽을 때는 자식도, 아내도, 재물도, 토지도

   아무것도 그를 따를 수 없네

 

   재물이 많다해서 장수할 수 없고

   부유함이 늙음을 몰아낼 수 없네

   “인생은 짧다고 모든 성인은 말하네

   영원한 것은 없으며 변화할 뿐이라고

 

   부자든 가난하든 똑같이 죽음이 오네

   성인도 어리석은 자도 똑같이 죽음이 오네

   어리석은 자는 그 어리석음에 의해

   마치 때려눕힌 듯 누워 있지만

   현명한 자는 죽음이 와도 흔들리지 않네

 

재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혜이며

   그 지혜로움으로 궁극의 목표를 얻네

   어리석음으로 사람들은 악행을 저지르고

   세세생생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네

 

   달콤하고 즐거운 수많은 감각적 쾌락이

   여러 면으로 마음을 괴롭히니

   감각적 쾌락에 얽매임이 위험을 보고

   대왕이여, 나는 출가를 하였네

 

   과일이 나무에서 떨어지듯이 사람도 그와 같네

   젊은이든 늙은이든 몸이 부서지면 떨어지나니

   대왕이여, 이것을 보고 나는 출가하였네

   사문의 삶이 확실히 더 훌륭하다네.

 

 ( 맛지마니까야  82, 랏타빨라 경, MN82, Ratthapala Sutta,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부처님당시의 출가이유를 보면 죽음의 극복에 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의가르침을 실천하여 나고 죽는 일이 없는 불사의 문으로 들어 가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던 가족들 마저 버리고, 모든 것을 버려야 겠다는 그 마음까지 버리고 출가한 이들이 세속인들의 흉내나 내는 일에 몰두 하고 있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가수스님, 화가스님, 쉐프스님

 

우리나라 출가수행자들의 특징은 시 () · 서() · 화() · 각() · 악() · 무() · 다() 등을 허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분야에 관하여 전문가 빰치는 수준의 실력을 보여 주는 스님들이 적지 않다.

 

최근에는 노래를 잘 불러서 음반을 내는 스님도 있고, 통기타를 치며 산사음악회등 각종 불교행사에 초대받아 노래하는 가수스님도 있다. 또 달마도를 잘 그려서, 단청을 잘해서 유명한 화가스님도 있고, 음식을 잘 만들어 사찰음식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앞장서는 쉐프스님도 있다.

 

한편 학문을 닦아서 박사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스님도 있고, 평생 역경하는 일에만 전념하기로 천명한 스님들도 있다. 하지만 초기불교적 입장으로 보았을 때 이는 출가이유에 반하는 것들이다.

 

지금 여기에서 감각적 욕망을 극복하여 나고 죽는 일이 없는 불사의 경지를 실현하려면 머리에 불이 나듯이수행을 하여야함에도 불구하고, 눈으로 형상을 즐기듯, 귀로 소리를 즐기듯, 혀로 맛을 즐기듯이 감각대상에 끄달리는 생활을 지속한다면 이는 수행과 거리가 먼 것으로서 세속인의 생활과 다름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출자자들의 일탈된 행위는 부처님당시에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방 테라와다 불교국가에서 수행자들이 노래하고, 춤추고, 그림그리고, 음식을 만드는 행위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타종교인들 특히 유일신교의 목사나 신부들이 그런 일을 하리라고 상상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에서는 노래, , 그림, 음식만들기가 허용되는데, 이는 우리나라 불교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한 현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수행자의 본분은 무엇일까.

 

마성스님은 자신의 글에서 수행자의 본분은 수행과 포교라고 하였다. 그래서 수행과 포교를 제외한 신변잡기, 그리고 직업을 갖거나 생산활동을 하는 것은 모두 수행자의 본분에 어긋나는 것이다. 따라서 수행과 포교라는 본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래, , 그림, 음식만들기등과 같은 부업에 더 치중한다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라 스님은 강조한다.

 

부처님 당시 출가자들의 포교열정

 

출가자라면 수행과 포교에 전념해야 하는데, 수행과 포교는 별개가 아니라 수행과 포교를 겸비해야 진정한 출가자로 볼 수 있다. 그 중 포교는 출가자의 의무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 당시 출가자들의 포교열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초기경전에서 포교와 관련된 경이 있다. 상윳따니까의 뿐나경(Punna sutta)이 그것이다. 부처님의 제자인 뿐나가 어느 지방으로 포교하러 가려 할 때 부처님과의 대화에 관한 경이다.

 

 

목숨을 건 포교

 

 

 부처님은 뿐나 존자에게 [감각기관의 절제에 대하여 가르침을 주신후] 이어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간단한 가르침을 그대에게 말하였다. 이제 뿐나여, 어느지방으로 가서 지내려고 하는가?”

 

부처님, ‘수나빠란따라는 지방이 있는데 거기에서 지내려고 합니다.”

 

뿐나여, 수나빠란따 사람들은 거칠고 난폭하다. 만일 그들이 모욕하고 욕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부처님, 만일 그들이 모욕하고 욕한다면수나빠란따 사람들은 나를 주먹으로 때리지 않았으니 정말 훌륭하다.’ 고 생각하겠습니다. 부처님.”

 

그러나 뿐나여, 만일 그들이 주먹으로 때린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부처님, 만일 그들이 주먹으로 때린다면수나빠란따 사람들은 나를 흙덩이로 때리지 않았으니 정말 훌륭하다.’ 고 생각하겠습니다.”

 

만일 흙덩이로 때린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부처님, 만일 그들이 흙덩이로 때린다면수빠란따 사람들은 나를 몽둥이로 때리지 않았으니 정말 훌륭하다.’ 고 생각하겠습니다.”

 

만일 몽둥이로 때린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부처님, 만일 그들이 몽둥이로 때린다면수나빠란따 사람들은 나를 칼로 찌르지 않았으니 정말 훌륭하다.’ 고 생각하겠습니다.”

 

만일 칼로 찌르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부처님, 만일 그들이 칼로 찌르다면수나빠란따 사람들은 나를 날카로운 칼로 죽이지 않았으니 정말 훌륭하다.’ 고 생각하겠습니다.”

 

만일 날카로운 칼로 죽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부처님, 만일 그들이 날카로운 칼로 나를 죽인다면어떤 부처님제자는 고통스러울 때 자신의 육신과 생명을 혐오하여 자결을 호소한 사람도 있었는데, 나는 가해자를 찾지 않고도 칼에 찔림을 당하게 되었다.’ 고 생각하겠습니다.”

 

장하다, 뿐나여, 그런 자제력과 평화로움을 가지고 있으니 그대는 수나빠란따 지방에 가서 살 수 있다. 그럼 좋을대로 떠나도록 하여라.”

 

이와 같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그는 길을 떠나 마침내 수나빠란따에 도착하였다. 그 후 우기 안거 동안에 500명의 남자신도와 500명의 여자 신도를 교화시켰다.

 

(상윳따니까야:35  사라야따나 상윳따88, 뿐나경-Punna sutta,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사진http://www.buddhistdoor.com/download/images/dhammapada197_1280X1024.jpg

 

  

 

임지로 떠나는 뿐나존자는 부처님에게 감각기관의 절제에 대한 간단한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다. 오랜 세월 동안 공부하여 커다란 깨달음을 얻어 포교하러 가는 것이 아니다. 또 포교지 또한 부처님이 지정해 준 곳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결정한 곳이다. 그 곳으로 떠나기에 앞서 부처님이 염려 스러워 물어 보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가 지배적인 종교이었고, 또 각 지방에서는 토속종교가 성행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삭발을 하고 가사를 걸친 비구가 나홀로이교도가 있는 지역에 가서 담마를 전할 때 목숨을 내 줄 각오를 하지 않으면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들이 욕을 하거나 모욕을 줄 때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어 본다. 그 때 뿐나존자는 주먹으로 때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 여기겠다고 대답한다. 이렇게 욕에서 시작하여 주먹, 몽둥이, 칼에 이른다.

 

그런데 칼로 찌렀을 때 어떻게 하겠느냐의 물음에 뿐나존자는 육신과 생명을 혐오하여 자결을 호소한 사람도 있었는데, 나는 가해자를 찾지 않고도 칼에 찔림을 당하게 되었다.” 라고 생각하겠다고 답변하였다. 이는 순교하겠다는 말과 같다.

 

못하는 것인가,  안하는 것인가

 

이처럼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포교하였다. 하지만 한국불교의 현실을 보면 목숨을 걸고 포교하는 이들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도시에, 사람사는 곳에 절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한마디로 포교의지가 없거나, 아니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거나, 다른 곳에 눈이 팔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포교를 못한다면 지금부터라도 부처님의 담마를 열심히 익히면 될 것이다. 알면서도 포교를 안하면 수행자의 본분인 수행과 포교의 대한 직무유기에 해당된다. 이런 현실에서 절에 가면 재를 올리는 마이크 소리만 요란하고, 불자들 또한 이기적인 기복에만 머물로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 방편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고 있는 비불교적인 요소가 마치 불교인 것처럼 둔갑되어 있는가 하면, 또 방편이라는 이름 아래 노래부르기, 춤추기, 그림그리기, 음식만들기, 무술등에 열중함으로서 수행자의 본분을 망각하는 현상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금은 부처님 당시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교통과 통신이 발달되어 있다. 또 포교지에 가서 몽둥이나 칼에 맞아 죽을 일도 거의 없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는 곳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여야 본업을 충실히 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불교를 볼 수 없다. 현실이 이토록 어려운 것이라면 가상공간이라도 활용해야 한다.

 

사이버세상에서라도

 

요즘은 가정과 직장과 현장에 네트워크가 깔려 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따라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을 매일 넘나들며 생활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가상공간에서 시간을 보낼 때가 더 많기도 하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세상인 사이버세상에 주목하여야 한다.

 

현실공간에서 못하는 포교를 사이버세상을 통하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이버세상은 부처님당시의 뿐나존자처럼 이교도로 부터 칼에 찔려 죽을 염려도 없다. 그러나 사이버세상에서도 목숨을 걸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려야 함에는 변함이 없다.

 

한국불교의 현실을 보면 스님들이 현실공간에서도 불자와 국민들과 소통하려 하지 않으려하고, 마찬가지로 사이버세상에서도 역시 소통하려 하지 않는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거나 수행자의 본분을 망각하는데서 나오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누가 포교해야 하는가.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훌륭함을 아는 자만이 포교할 수 있다는 말이다.

 

 

 

2011-04-3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