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여인과 수행자, 감각적욕망은 언제 없어지나

담마다사 이병욱 2011. 5. 13. 15:46

 

 

여인과 수행자, 감각적욕망은 언제 없어지나

 

 

 

 

 

홀로 있는 성인(聖人)

 

초기경전을 읽다보면 도처에서 수행자를 유혹하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하여 감각기관을 절제하고 감각적 욕망의 대상으로 부터 멀리 떨어진 숲속에 거주 하고 있는 수행자일지라도, 어떤여인은 그런 수행자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한적한 숲에 있더라도 마치 불꽃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크고 작은 감각을 유혹하는 대상들이 나타난다.

여인은 홀로 있는 성인을 유혹한다.

그러나 그대는 여인이 유혹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숫따니빠따 311, 703번 게송,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이처럼 수행자가 숲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 여인이 나타나서 유혹할 수도 있지만, 마을에 탁발을 갔을 때 감각적욕망으로 부터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

 

가볍게 옷을 걸친 여인

 

수행자가 재가자의 집에서 지나치게 오래 시간을 보내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 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한다.

 

 

여기에 어떤 비구가 아침에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탁발하러 마을에 간다. 생각과 말과 행동을 절제하지 않고, 마음챙김에 머물지 않고, 감각기관을 절제하지 않을 때, 그는 거기서 가볍게 옷을 걸친 여인을 보게 되면 욕정의 마음이 그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상윳따니까야 19, 오빰마상윳따- Opamma Sayutta,  10- Biāro - A Cat,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인도는 우리나라보다 날씨가 덥기 때문에 가볍게 옷을 걸치는 여인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감각기관을 단속하지 않고 알아차리지 못하였을 때, 가벼운 옷을 걸친 여인을 보면 욕정이 일어나서 그를 공격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통을 당하게 되어 결국 계를 파하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수행을 거부하고 저급한 삶으로 되돌아 가게 될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이에 대하여 생각과 말과 행동을 절제하고, 마음챙김에 머물고, 감각기관을 절제하고 마을에 탁발하러 갈 것이다라고 말씀 하였다. 그래서 마을에 탁발하러 갈 때 청정도론에 따르면 눈을 내려뜨고, 멍애의 길이만큼 앞을 내다보며가라고 하였다. 멍애의 길이는 약 1~2미터 정도 되는 것으로 보인다.

 

수행자의 패배

 

수행자의 마음을 흔드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이경우 마을에 탁발을 나가는것과 달리 마을사람들이 숲속으로 찾아 오는 경우이다. 그래서 그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마음챙김을 유지하지 못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초기경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그들과의 만남의 결과 그는 욕망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갈애에 휘말리고, 그들을 부러워하고, 다시 출거전의 사치함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것이 수행자의 재난이다.

(맛지마니까야:122 마하순냐따경- Mahāsuññatasutta 24, M122,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재가자들이 방문하였을 때 그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그들을 부러워하여 결국 계를 파하게 되었을 때, 이를 수행자의 재난이라 하였다. 이는 결국 악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것에 굴복하였고, 윤회의 삶을 가져오는 패배자임을 뜻한다.

 

초기경에서 계를 파하여 스스로 세속으로 되돌아간자를 저급한 삶사치한 삶으로 간주 하였다. 이는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는 것 대신 윤회하는 삶을 스스로 택한 것이라 하여 수행자의 굴복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수행자를 패배로 몰아 넣는 여인의 유혹이나 감각적욕망을 극복하려면 어느 단계에서나 가능할까.

 

감각적욕망은 언제 없어지나

 

부처님당시 위사카라는 재가수행자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위사카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집으로 돌아 왔는데, 아내를 불러 놓고 청천벽력같은 선언을 하였다.

 

그는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모두 다 아내가 가져도 좋다고 말을 하고, 거기에 덧붙여 재혼을 해도 좋다고 말을 한 것이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위사카는 아나함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법구경 421번 게송의 인연담인 담마딘나 빅쿠니이야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감각적 욕망은 아나함이 되어서야 완전히 없어진다고 한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아나함 이전의 수다원이나 사다함의 과위에서는 감각적 욕망이 남아 있다는 말과 같다.

 

하지만 앞으로 7생이내에 열반에 들 것이라는 수다원의 감각적욕망은 그다지 강한 것이 아니라 한다. 아직까지 거친 감각적 욕망이 남아 있긴 하지만 악처로 인도할 감각적 욕망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사다함의 감각적욕망은 미세한 것이라한다.

 

이런 감각적 욕망은 아나함이 되어서야 완전히 없어지기 때문에 부부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아나함과를 얻은 재가자는 어디로 가야할까. 일반적으로 상가로 출가하여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삶에 매진 한다고 한다. 그래서 부부생활을 하는 재가중에 아나함이나 아라한이 나올 수 없는 이유라 한다.

 

재가자 수다원의 경전적 근거

 

재가자들이 부부생활을 유지하는 한 아나함이나 아라한이 나올 수 없지만 수다원이나 사다함이 나올 수 있다는 경전적인 근거가 있다. 후박나무님은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다음과 같이 초기경의 인용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왓차여, 나의 제자로서 흰 옷을 입고 감각적 쾌락을 수용하지만(kāmabhogino), 가르침을 따르고, 훈계를 받아들이고, 의심에서 벗어나, 의혹을 제거했고, 두려움 없고, 스승의 가르침 외에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사는 우바새가 백 명이 아니고, 이백 명이 아니고, 삼백 명이 아니고, 사백 명이 아니고, 오백 명이 아니고, 그 보다 훨씬 많다.

(맛지마니까야, 왓차곳따경-Vacchagotta sutta, M73, 후박나무님의 호진 스님의 <성지에서 편지> 읽고에서)

 

 

 

경에서 흰 옷을 입고 감각적 쾌락을 수용하지만(kāmabhogino)”이라는 표현은 재가자로서 결혼생활을 하는 우바새(Upasaka, 청신사)를 말한다고 한다.

 

그런 재가자가 가르침을 따르고, 훈계를 받아들이고, 의심에서 벗어나, 의혹을 제거했고, 두려움 없고, 스승의 가르침 외에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은 수다원의 과위에 오른 것을 말한다고 한다.

 

그런데 수다원이 된 결혼생활자가 오백명도 넘어 셀 수 없이 많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결혼생활을 하는 재가불자일지라도 감각적욕망을 누그러 뜨리고 감각기관에 대한 알아차림을 유지하며, 유신견과 의심등을 타파하면 누구나 수다원이 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여인을 바라 볼 때

 

범부들은 감각적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더구나 도시에서 눈과 귀와 코등을 통하여 감각대상과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렇다고 하여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코를 막고 살수는 없다. 귀머거리나 장님이라고 해서 번뇌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생긴 것은 모두 소멸한다”는 수다원 정도는 되어야 감각적 욕망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고,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아라한 정도는 되어야 더 이상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은 감각적욕망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늘 마음챙기고 알아차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도 가벼운 옷차림의 여인을 보았을 때처럼 감각적욕망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아마도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매우 효과적일 것이다.

 

 

연상의 여인은 어머니처럼 여기고

중년의 여인은 누이처럼 여기며

젊은 여인은 딸처럼 여겨라.

 (본생경, 인터넷에서)

 

 

여인을 바라 볼 때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면 누이동생으로, 자신보다 나이가 많으면 누나, 자신보다 훨씬더 나이가 많으면 어머니, 자신 보다 훨씬 더 나이가 어리면 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2011-05-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