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갑해 미치겠다”는 20여년 선방의 수좌, 수경스님 인터뷰기사에서
아침 6시 전후로 불교방송의 경전공부와 불교강좌시간에 강사스님들은 ‘소승불교’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하지만 소승불교라는 용어는 대승불교권에서만 사용하는 용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전세계적으로 대승이나 소승이라 부르는 용어를 무어라 부를까.
영문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대승불교를 ‘마하야나부디즘(Mahayana Buddhism)’이라 부르고, 대승에서 소승이라 스스로 폄칭하는 소승불교를 ‘테라와다부디즘(Theravada Buddhism)’이라 부른다. 또 티벳불교는 ‘바즈라야나부디즘(Bajrayana Buddhism)’이라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선사들은 여전히 동남아시아의 불교를 소승불교라 폄하하고 대승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초기불교, 근본불교, 원시불교
방송에서 선사들이 소승불교라고 칭하는 것과 함께 또 자주 사용하는 용어가 ‘원시불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불교를 초기불교 또는 근본불교라고도 하는데 선사들은 왜 소승불교라는 용어와 함께 원시불교라는 용어를 ‘즐겨사용하는’ 것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가르침을 크게 초기불교, 근본불교, 원시불교라 부른다. 이에 대한 구분법은 무엇일까.
경북대 임승택교수에 따르면 초기불교라는 용어는 “부처님에 의해 직접주도된 불교”라는 의미에서 초기불교라고 한다. 이와같은 초기불교라는 용어는 요즘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고, 대승불교와 비교하여 사용되기도 한다.
한편 근본불교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는 “모든 불교적 가르침의 출발점”이라는 시각에서 본 불교라고 한다. 그 범위는 부처님과 직제자들의 의해 남겨진 불교로 한정하고, 명칭에서 풍기는 뉘앙스와 같이 “다른불교는 불교적이지 않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이런 용어는 당연히 대승불교의 반발을 사고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라 한다.
원시불교라는 용어는 대승불교에서 즐겨사용하는 용어인데, 이는 근본불교와 정반대의 입장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원시불교라는 용어는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덜 성숙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는 것은 ‘불완전’하게 보는 것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어떤 면을 본 것일까.
덜 성숙된, 불완전한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의 ‘뜻’과 ‘마음’을 중요하게 여긴다. 진리는 결코 언어와 문자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말과 글자를 여의어 부처님의 본마음과 뜻을 가장 잘 표현한 경전이 대승경전이라는 것이다.
이처럼의 부처님의 진실한 뜻과 마음을 표현한 경전을 대승경전이라 하고, 완전한 가르침이라는 의미에서 ‘요의경’이라 한다. 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언어와 문자로 기록한 것을 소승경전이라 하는데 이는 불완전한 가르침이라는 뜻의 ‘불요의경’이라 한다.
하지만 초기불교와 테라와다불교 신봉자들은 이와 같은 대승불교의 구분법을 수용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빠알리삼장 자체가 완전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믿기 때문이다.
은명불탁(隱名佛託)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과 뜻의 해석에 따라 초기불교에서 부파불교로, 그리고 대승불교로 갈라져 나오게 되었는데, 특히 대승불교의 경우 부처님의 뜻을 중시하다 보니 이에 대한 나름대로 해석을 한 것이 대승경전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오늘 날 보는 수 많은 대승경전은 논사들이 부처님의 뜻을 자신의 체험과 비교하여 작성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이를 자신의 이름으로 하지 않고 부처님의 이름을 빌어 대승경전을 편찬한 것이다. 불교방송의 불교강좌에서 화랑스님은 이를 ‘은명불탁(隱名佛託)’이라고 표현하였다.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부처님이름으로 가탁(假託)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탄생되 대승경전에 대하여 우리불자들은 부처님의 속마음이 가장 잘 표현된 경전이라 믿고 신봉하고 있다. 그런 경전들 중의 대표적인 경전이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인데, 특히 화엄경이 부처님이 전하고자 하는 본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 하여 화엄교학을 대승의 최고로 간주한다.
처음 한 번 하기가 어렵다
무엇이든지 처음 한 번 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한 번 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여러번 하게 된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기 까지 수 많은 실험과 실패를 겪었지만 결국 해 내게 됨에 따라, 이후 수 많은 종류의 전구가 나오게 되었고, 또 시대에 따라 계속 발전되고 새로운 모델이 개발되고 제품이 업그레이드 되어 오늘 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상품을 보게 되었다. 대승경전과 불보살사상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부처님의 진실된 뜻과 진리를 표현하기 위하여 대승경전이 처음 편찬된 이래, 부처님의 뜻과 마음을 체험한 논사들이 각자 자신이 이해한 것을 책으로 편찬하였다. 그러다보니 수 없이 많은 경전이 나오게 되었다.
특히 중국에서 전통적인 유가나 도가사상, 그리고 충효사상과 현실주의가 결합되어 독특한 ‘위경’제작이 이루어졌는데, 이런 것들 역시 부처님의 마음을 이해한 것을 글로 나타난 것이라 한다.
그런 논리라면 누구나 경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실제로 중국에서 달마대사가 직접저술한 책은 없지만, 달마대사의 마음을 헤아려 달마대사의 이름으로 편찬된 책이 4-5종에 이른다고 불교강좌에서 화랑스님은 말하였다.
다불다보살과 천백억화신
대승불교의 특징은 ‘다불다보살(多佛多菩薩)’사상이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 한 분만 출현한 것이 아니고 또 한분만 계신 것이 아니라 한다. 보살 역시 한분의 보살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또한 처음한번 하기가 어렸웠지 한 번 하고 나면 그 이후 무수하게 쏟아진다는 발명품과 같이, 역사적인 부처님외에 타방에도 부처님이 있을 수 있다는 사상이 나오고 난 이후 무수한 부처님이 계시다고 믿고 있다. 이는 보살도 마찬가지이다.
대승불교의 보살은 천백억화신으로도 표현된다. 부처님의 자비를 강조하면 ‘관세음보살’이 되고, 원력이 강조되면 ‘지장보살’이 되고, 지혜를 강조하면 ‘문수보살’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처음에는 부처님의 자비만 강조하는 관세음보살 하나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지남에 따란 부처님의 가르침에 걸맞는 무수한 보살이 창작되었고, 모두 다 합하면 천백억이나 된다고 한다. 이는 우리들 마음속에 보살이 있는 것과 같다. 이를 다른 말로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이처럼 처음 한번 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한번 하고 나면 그 이후는 수 많은 버전이 만들어지는 소트트웨어 프로그램처럼, 수 많은 대승경전이 편찬되고 천백억이나 되는 부처의 화신이 있다고 보는 것이 대승불교 사상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언어나 문자가 아닌 뜻과 마음으로 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방법에 따라 근본가르침과 대승의 가르침으로 나누어진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부처님당시의 불교와 근본가르침을 전승하고 있는 테라와다불교전통과 보살사상과 공사상으로 대표되는 대승불교전통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라보는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역사적으로 대승불교에서 문제제기한 것으로 본다. 즉 기존의 부파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오로지 문자와 언어로 이루어진 경전에 의지 하는 것은 부처님의 진실된 가르침을 정확하게 표현하는데 있어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그런 가르침을 스스로 ‘소승교설’이라 폄하하고 진실된 가르침을 부처님의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법은 문자나 언어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어야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염화미소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깨달음과 스승의 인가
이처럼 대승불교 전통에서 마음을 중시하다 보니 모든 것을 마음이 만들어 내었다고 보는 ‘화엄경’을 불교의 최고교학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마음중시의 전통은 ‘중국선종’으로 발전되고 우리나라에서는 ‘간화선’이라는 수행방법이 도입되어 한국불교의 주류를 이루었다.
하지만 마음중시의 불교에서 마음을 해석하기에 따라 각자의 마음만큼이나 수 많은 깨달음이 있게 되는데, 이는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깨달음에 대하여 스승의 인가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불교에서 깨달음을 점검해 줄 만한 스승이 별로 없다고 한다.
“갑갑해 미치겠다”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에 수경스님에 대한 기사가 떳다. 작년 6월 문스스님의 소신공양에 충격받아 잠적한 스님을 최근 인터뷰한 기사이다. 이 기사에서 수경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봉암사에서 20여년을 간화선 수행을 한 상좌가 얼마 전 토굴에 왔다. 묻더라. 답이 보이지 않는다고. 갑갑해 미치겠다고.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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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에 가보면 제각각이다. 염불, 위파사나... 등등 간화선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의 경우, 선방에 처음 갔더니 화두 3개를 늘어놓고 골라잡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처음 1번 해보다 안 되니 2번 하고, 그래도 안 되니 3번을 해본다는 거다....”
(불교닷컴, 수경스님 “난 떠난 사람...할 말이 없어”)
사진 www.ibulgyo.com/news/read.asp%3F...%3D98591
선종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의 성불에 이르는 수행방법이 간화선인데, 어느 수좌가 “답답해 미치겠다”고 하소연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깨달음만을 추구하는 한국불교에서 깨달음을 인가해 줄 스승이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선방에서 수십년 정진한 스님들 중에 깨달은 사람이 별로 없다는 말과도 같다.
“스님들이 공부를 너무 안 한다”
이는 부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가르침에서 출발하여, 공사상과 유식, 여래장과 같은 사상으로 발전된 불교가 선종에 이러로 본마음, 참나, 주인공과 같은 부처의 성품(불성)을 보면 성불한다는 ‘견성성불’에 이르렀는데, 그 성품을 보지 못하니 미치겠다는 말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것도 한철이 아닌 20여년간 했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였다면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한국불교의 스님들이 공부를 하지 않은 것도 요인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수경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스님들이 공부를 너무 안 한다. 그러니 불교의 핵심을 모른다. 4념처 8정도를 비롯한 37조도품. 제대로 핵심을 짚어 설명하는 스님이 있나? 없다!”
(불교닷컴, 수경스님 “난 떠난 사람...할 말이 없어”)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이 공부를 너무 안한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인 4념처, 8정도, 37도품과 같이 깨달음으로 이끄는 수단에 대하여 제대로 아는 스님들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재가불자들도 공부하는데
4념처, 8정도, 37도품은 깨달음으로 이끄는 수단이다. 이와 같은 가르침이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이 니까야나 아함경에 전승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뜻과 마음이 진실한 가르침이라 하여 문자나 언어로 전승된 가르침을 무시한 결과 한국불교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질타라고 볼 수 있다.
선방에서 수십년간 화두를 들고 깨치려 하여도 “갑갑해 미치겠다”면 지금부터라도 부처님의 근본가르침부터 공부해야 할 것이다. 요즘은 초기불교경전인 4부 ‘니까야’와 ‘아비담마’ 논장, 주석서이자 수행지침서인 ‘청정도론’이 번역되어 있어서 재가불자들에게 까지 읽혀지고 있다.
그러는 이때, 4념처, 8정도, 37도품과 같이 해탈과 열반으로 인도하기위한 깨달음으로 이끄는 ‘수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공부없이 화두 하나로 단박에 견성성불이라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돈오돈수’를 추구한다면 “갑갑하다” “미치겠다”라는 말이 나와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이 들린다.
2011-05-1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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