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굴레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준 ‘고통종결자’
5월도 중순이어서일까 이제 따뜻함을 넘어 덥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주말에 늘 즐겨찾는 ‘서울대공원’에 갔다. 이맘때 쯤이면 동물원보다 장미원이 더 낫다. 5월말부터 장미원축제가 열리지만 장미원은 아직 장미는 피지 않았다. 그대신 꽃을 피우기 위한 꽃 봉우리가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귀가 따갑도록 듣던내용
장미원의 한적한 곳에서 교회에서 왔는지 청소년들로 보이는 일단의 무리들이 야외예배를 올리고 있었다.
소리를 들어보니 매우 익숙하다. 십자가 이야기가 나오고,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 우리의 죄를 대신.. 등 고교시절 ‘미션스쿨’에서 귀가 따갑도록 듣던내용이다.
기독교인들의 예배하는 모습을 영화에서도 볼 수 있는데, 놀라운 것은 한결같이 ‘동일한 패턴’이라는 것이다. 영화에서 보나, 야외예배에서나, 결혼식 참석차 교회에서 본 예배나 모두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고교시절 경험하였던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예배하는 모습을 보고 두가지를 느꼈다. 하나는 청소년층이 많아 ‘부러웠다’는 것이다. 또하나는 ‘마음속의 우상숭배’로 인하여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포교대상은 누구인가
도시에서 일요일 오전 풍경중의 하나는 잘 차려 입은 사람들이 바이블과 찬송책을 옆구리에 끼고 교회가는 것이다. 불과 몇 십미터 간격으로 들어차 있는 수 많은 교회가 있는데, 교회에 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차림새’로 확연하게 구분된다. 그런 사람들중에 청소년도 적지 않다.
청소년을 비롯하여 젋은층이 많다는 것은 해당종교의 미래를 밝게 해준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불교의 경우 청소년포교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많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청소년이 미래의 한국불교를 이끌어 나갈 주역임에도 불구하고 나이든 여성불자나 노보살 위주의 불교가 주류를 이룬다. 이는 불교tv에서 본 법회참가자의 면면을 보면 증명이 될 것이다.
포교의 중요성은 아무리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정작포교해야할 대상에대하여는 소홀하고, 포교하지 않아도 될 대상에 대하여 열중하는 것이 한국불교의 모습이라 보여진다.
이미 선근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나, 스스로 알아서 부처님법을 찾는 이들은 따로 교화할 필요가 없다. 이는 포교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포교대상은 누구일까. 이쪽으로 갈까 저쪽으로 갈까 하며 아직 종교를 결정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청소년과 어린이, 또는 군인들이 대표적이다. 포교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여야 한다.
그래서일까 기독교에서는 청소년전도에 목을 맨듯하다. 전국 곳곳에 미션스쿨을 만들었는데, 자료에 따르면 전국사립학교의 20-25%에 달한다고 한다. 군대에서도 부대마다 교회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이처럼 그들이 청소년 전도에 열을 올리는 것은 한번 결정된 신앙은 결코 변할 수 없는 확신이 있어서일것이다.
대형교회 하나만도 못한
불교에서는 청소년과 군포교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대부분 방치되고 있다고 한다. 이는 포교의 황금어장을 놓치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
기독교가 쌍끌이 저인망으로 바닥부터 훝어서 ‘싹쓸이’ 하듯이 젊은 층을 흡수 할 때, 불교는 마치 남의 일처럼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 최근 불교관련인터넷신문에서 이학종기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어린이 법회에 참여하는 전국의 불자어린이 숫자를 다 합쳐도 기독교 대형교회 한 곳의 어린이예배 참가 숫자에 미치지 못한다는 현실을, 거리에서 연등을 들고 깜찍하고 앙증맞은 몸짓으로 뛰어다니는 어린이 불자들을 보면서 혹시라도 망각했다면 끔직한 일이다.
(미디어붓다, 이학종기자-연등축제의 감동과 모르핀 효과)
전국의 어린이 법회 참가숫자가 대형교회 하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또 연등축제에 직접참여한 인원이 수 만명이 되지만, 이는 대형교회 하나에서 예배보는 숫자와 비슷한 것이라 한다. 이는 조계종의 1년 예산이 대형교회 하나만도 못하다는 말과 맥락이 일치한다. 그렇다면 한국불교는 나이든 보살에 목을 맬 것이 아니라 비록 ‘돈’이 되지 않을지라도 청소년과 군포교에 매진해야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들이 부럽기는 하지만
공원에서 청소년들이 예배보는 모습을 한국불교의 현실과 비교하여 부럽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 그들이 불쌍해 보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부처님의 ‘정법’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오신날이 지나간지 불과 몇 일지나지 않았지만 마치 오래전에 있었던 일로 생각되듯이 사람들은 바쁜 일상에 다시 몰입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오신날을 기리며 축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tv사이트를 보면 부처님이 오신 이유에 대한 법문이 시리즈로 올려 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스님들의 법문에 눈에 띨만한, 기억할 만한 명쾌한 법문은 기억나지 않는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이유가 있을것이고, 부처님이 자신이 깨달음을 펴신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신으로 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준 것이라 볼 수 있다.
팔정도(八正道)야말로
부처님당시에 사람들은 브라만교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래서 신분은 철저하게 구분되었고, 그러한 사회적 제도를 당연하게 ‘숙명론’적으로 받아 들였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 고정불변한 영혼이 있어서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에 합일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부처님은 그런 방식이 잘 못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이 세상은 원인없이 누가 창조한 것도 아니고, 우연히 발생된 것도 아니고, 전생에 지은 업에 따라 현생이 결정되는 숙명적인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모두 자신이 지은 행위에 따라 그에 따른 과보를 받은 것일 뿐 그 어디에도 원인 없는 결과는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처럼 부처님은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른 연기법에 따라 이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였고, 자신이 하기에 따라 미래는 얼마든지 바꾸어 나 갈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성제와 팔정도로 요약되는데, 특히 팔정도야말로 부처님이 오신 뜻을 잘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의 바퀴를 굴릴때에도 팔정도를 설하였고, 마지막 열반의 순간에도 팔정도밖에 없다고 초기경전에 쓰여 있다. 그래서 팔정도는 불사(不死)로 가는문이고 동시에 열반을 성취하는 지름길이라 한다.
인과법을 무시하는 기도
누구나 죽기 싫어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죽을 까봐 가슴졸이며 산다. 설령 죽는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영혼만은 계속살아 남아 더 좋은 곳에 태어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가 이처럼 죽어서 더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바라고 창조주나 절대자, 초월적 존재에게 ‘기도’한다.
하지만 이런 기도는 인과법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또 기도는 대단히 이기적인 행위이다. 더구나 돈을 내고 기도하는 행위는 정치헌금을 내고 댓가를 바라는 것과 같아서, 무종교인들이 거지에게 조건없이 돈을 준다든가 국민성금을 내는 것 보다 훨씬더 못한 ‘이기적행위’라는 것이다.
그런 기도가 잘 먹히면 “은총을 받았다”거나 “가피를 받았다”고 말한다. 반면에 잘 먹히지 않으면 “나를 시험하시고 있다”거나 “업장을 소멸했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이 기도인데 이는 원인과 결과를 무시해서 나타나는 ‘어리석은’ 행위로 본다.
배탈이 난 원인을 살펴보니
이 세상에서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적용받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몸이 아파도 아플만한 원인이 있어서이고, 죽음도 죽을 만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우연히 찾아 오는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되도록 이이 결정된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 그렇게 되도록 만든것인가.
‘배탈’이 나서 지금 이 순간 매우 고통스럽다면 그 원인 있을 것이다. 원인을 생각해 보니 점심 때 먹은 ‘음식’때문이다. 그 때 내 몸을 생각하여 맛있는 것을 찾아 먹었는데, 먹다보니 ‘과식’한 것이 주요한 이유이다.
이 때 또 원인을 생각해 보니 먹는 것에 대한 탐욕이 있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식탐’이전의 원인은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니 ‘내 몸’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다.
배탈을 시작으로 하여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니 음식이 원인이었고, 또 그 원인은 과식, 또 그 원인은 식탐, 마지막으로 나의 마음임을 알았다. 이는 몸과 마음을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였기 때문에 배탈이 나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런 몸과 마음은 실재하지만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실재하지만 실체가 없다
부처님은 ‘실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오온으로 설명하였다. 몸과 느낌, 인신등 다섯무더기로 분석하여 관찰하였더니 실체가 없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재하는 것이란 어떤 것일까.
쉽게 말해서 눈에 보이고, 귀로 들리고, 혀로 맛보고 하는 것등이다. 이를 여섯가지 감각기관이라 하는데, 눈, 귀, 코등 여섯감각기관이 형상, 소리, 냄새등 여섯감각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이 세상의 ‘일체’이고 ‘실재’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초기경전에 오온과 더불어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이 무수하게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느낌은 실재하지만 실체는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조건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지지만 조건이 있어서만 느낄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다. 그래서 ‘인연과’라 한다.
이처럼 부처님은 우리들이 대상과 접촉하였을 때 “차갑다”거나 “딱닥하다”는 등 실재하는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을 뿐, 실재하지 않는 개념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는 해탈과 열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이름이나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마치 ‘토끼의 뿔’처럼 창조주나 절대자, 초월적 존재들은 실재하지도 않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런 존재들을 믿고 기도하는 행위는 어떠한 것일까.
가슴속에 말 못할 멍울이
이는 마치 화가가 귀신그림을 그려 놓고 그 귀신에 철저하게 종속당하는 것과 같이 마음이 만들어낸 우상에 비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본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실재하지도 않고 실체도 없는 신에게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행위는 매우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효과도 없다는 것이다.
단지 기도하는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마음이 정화되어 선행의 결과가 나타난 것일 뿐 “은총을 받았다”든가 “가피를 입었다”라는 것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도를 해도 전혀 반응이 없고 오히려 해로운 일이 벌어졌다면 어리석은 행위를 그만 두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나를 시험하신다”든가 “업장이 소멸되었다”든가 하는 따위의 말로 위안을 삼고, 실제로 종교인들은 그렇게 가르친다.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의 심리상태는 어떤 것일까.
기도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기도하는 대상을 두려워한다. 자신의 기도를 들어줄 대상은 절대자나 초월적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 보다 위로 올려 놓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가슴속에 절대자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생활한다. 또 자신의 일거수 일투적을 다 들여다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를 안나가가면 불안하고, 헌금을 하지 않으면 그 만큼 도둑질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블로그에 올린 글이 언젠가 대문에 올라가서 댓글이 천개가 달렸는데, 그 댓글에서 확인한 사항이고, 어느 교수님의 강의로 부터 들은 사항이고, 우연히 기독교방송의 라디오를 듣다 신행상담에서 들은 말이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멍에를 지니고살고, 코꿰어 살고, 가슴속에 말 못할 시커먼 커다란 멍울이들어 살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실재하지 않고 실체도 없는 개념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그런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고 살아 가는 것이 불쌍해 보인다는 것이다.
고통종결자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성제와 팔정도로 요약된다. 그것은 철저하게 고통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고통의 원인과 고통의 해결,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가르침에 창조주, 절대자,초월적 존재와 같은 개념이 발붙일 틈이 없다. 실재하지도 않고 실체도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처님은 우리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다시는 나고 죽는 일이 없는 불사의 경지인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가르침도 폈지만, 동시에 실재하지도 않고 실체도 없는 신에게 기도함으로서 고통받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하여 ‘신의 굴레’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주기 위한 가르침도 펼쳤기 때문에, 여래십호와 더불어 부처님의 별명을 하나 더 붙여 준다면 ‘고통종결자’라 할 것이다.
2011-05-1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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