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자애(metta)수행이 실패할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11. 6. 26. 12:20

 

 

자애(metta)수행이 실패할 때

 

 

 

 

멧따수행(자애수행)’을 해 본적이 없다. 다만 책을 통하여 접하였을 뿐이다.그런 수행방법은 청정도론에 매우 상세하게 표현 되어 있는데, 무려 32페이지 걸쳐서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따라서 누구나 책을 통하여 멧따수행에 대하여 알 수 있고, 또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다. 이런 내용이 5세기에 쓰여졌다는 사실이 놀랍고, 더 놀라운 것은 모두 부처님의 말씀에 대한 주석이라는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메타기도에 대한 비판글을 올렸었다. 자애수행이 어떻게 기도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또 경전적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한 글이었다. 이에 대하여 어느 법우님이 글을 남겨 주셨는데, 메타기도를 하게 된 요인이 스님께서 도반들이 수행하지 않는 모습을 보시고 궁여지책으로 메따수행의 방법과 효과를 보이시고자 하셨답니다.”라고 표현 하였다.

 

궁여지책은 일종의 방편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니 쉽게 알려주기 위하여 기도라는 형식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기도라는 용어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따르면 매우 부적절한용어이다.

 

해당사이트에서 본 메타기도는 주로 소원성취에 관한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이는 기도와 다름 없는 말이라고 본다. , 자신이 바라는 바(대학입시합격)를 명확히 설정하고, 그 대상(아들 또는 딸)이 소원성취된 모습을 대상에게 계속해서 방사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상대방에게 자신의 마음을 방사하면 그 에너지가 파동으로 바뀌어 전 우주를 진동시켜서 결국 모든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신랑에게 메따를

 

이런 방식의 기도는 아기를 갖고자 원할 때도 유용한 것 같다. 동사이트의 글에 따르면 어느 분이 아기를 갖고자 신랑에게 메따를 방사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래서 메따도 저와 저의 신랑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안그랬지만 수행을 하면서 이제는 이번달은 임신이 될까? 이러면서 한 번 씨~익 웃어 버립니다..

 

 

이에 대한 스님의 답변에서 스님은 다음과 같은 쪽지를 받았다고 한다.

 

 

스님 !! 오늘 병원에서 초음파로 아기집을 확인하고 왔습니다.
담주에는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스님께서 열심히 메따해주신 덕분입니다.

 

 

 

 

 

 

 

사진 http://www.clear-mind-meditation-techniques.com/metta-meditation.html

 

 

 

메타기도가 남녀간의 사랑에도 유효하게 쓰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멧따수행방법에 어긋나는행위이다.

 

자애수행이 실패할 때

 

청정도론에 따르면 자애수행이 실패하는 경우도 언급해 놓고 있다.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특히 이성에 제한하여 자애를 닦아서는 안되고, 죽은 자에 대해서는 절대로 자애를 닦아서는 안된다.

(청정도론 2, 9장 거룩한 마음가짐 139p)

 

 

자애수행은 이성과 죽은자에 대하여 닦아서는 안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왜그럴까. 이성에 대하여 자애를 닦을 때는 애욕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하나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어느 재가자가 장로비구에게 어떤 사람들에 대해 자애를 닦아야 합니까?”라고 물어보자, 장로는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재가자는 자신의 부인을 사랑하였으므로 아내를 대상으로 자애를 닦았다. 하지만 그는 밤새도록 과 싸웠다고 한다. 이말은 이성간 또는 부부간에 자애를 닦으면 애욕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죽은자는 자애를 방사해도 파장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으로 본다. 이미 돌아가신 부모를 위하여 자애를 방사해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죽은자에 대하여 절대로자애를 닦아서는 안된다고 청정도론에서는 강조하고 있다.

 

자심해탈 (慈心解脫)

 

이처럼 자애수행은 닦아야 할 대상이 있고, 닦아서는 안될 대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자애수행은 목적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까라니야멧따경(Karaniya Metta Sutta)에서 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따(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의 구절에 근거한 것이다.

 

여기서 모든 중생은 나를 포함하여 원수까지, 인간부터 천신까지, 동물에서부터 성자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말한다. 이런 중생들이 모두 원한이 없고, 고통이 없고, 근심이 없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일 뿐인데, 여기에 어떤 바램을 넣어서 상대방을 변화시키려하거나 소원을 성취하려는 것은 초기경전이나 주석서 그 어디에도 근거를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초기경전이나 주석서에서 목표로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이다. 이를 자심해탈 (慈心解脫)’이라 한다.

 

까라니야멧따경(자애경)에서

 

40가지 사마타 명상주제중의 하나인 자애수행을 통하여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까라니야멧따경(자애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Diṭṭiñ ca anupagamma                        딧띤 짜 아누빠감마
s
īlavā dassanena sampanno               실라와- 닷사네나 삼빤노
K
āmesu vineyya gedha                    -메수 위네이야 게당
na hi j
ātu gabbhaseyya punaretī        나 히 자-뚜 갑바세이양 뿌나레띠

 

삿된 견해에 의존하지 않고 계행을 갖추고,

통찰을 갖추어 감각적인 욕망을 다스리면,

결코 다시 윤회에 들지 않을 것이옵니다.

(까라니야멧따경- Karaniya Metta Sutta, 10번 게송, 전재성역)

 

 

자애경의 가장 마지막 게송은 윤회에 들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자애수행이 소원성취용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바라는 기도를 하면

 

부처님은 자애경에서 삿된견해에 의존하지 않고 계행과 통찰지를 갖추고 감각적 욕망을을 다스리라고 하였다. 여기서 감각적 욕망이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바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 하면 갈애이다.

 

갈애는 초기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술어이다. 빠알리어로 딴하(tahā)라 하는 갈애는 윤회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사성제에서 고통의 소멸인 멸성제는 다름 아닌 갈애의 소멸이다.

 

갈애는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존재의 근본적인 욕망을 말한다. 따라서 바라는 모든 것은 갈애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바라는 것이 바로 기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도하는 행위는 윤회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말과 동일하다. 그래서 초기불교 또는 테라와다전통의 불교에서는 기도하지 않는다.

 

태어남은 부서지고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대한 최종목표는 해탈과 열반이다. 초기경전과 아비담마논장, 주석서인 청정도론을 보면 오로지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감을 알 수 있다. 그 길은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길이다.

 

그 길로 가기위해서 여러가지 깨달음의 수단이 등장하는데 팔정도, 칠각지, 오근, 오력등과 같은 법수에 따른 7가지 보리분법과 정진, 알아차림, 통찰지, 집중과 같은 37개의 깨달음에 대한 정신적요소를 닦아야 하는 것으로 본다.

 

동시에 탐욕성냄어리석음과 같은 해로운 정신적 요소 또한 소멸시켜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수행이라고 본다.

 

탐진치를 여의는 과정이 수행이라면 단계가 있을 것이다. 단번에 탐진치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소멸시켜 나가는 것인데, 부처님은 이를 4단계로 나누었다. ,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다.

 

이 단계에서 수다원을 견도(見道)라고 하고, 사다함과 아나함을 수도(修道), 아라한을 무학도(無學道)라 한다.

 

견도는 수행의 시작을 말한다. 이는 사성제을 이해하는 것으로 부터 출발한다. 팔정도의 정견이 사성제를 이해하는 것을 말하듯이, 예류자(수다원)가 되면  무엇이든지 생긴 것은 소멸한다라는 사성제의 진리를 깨닫는 다고 한다.

 

이렇게 사성제를 이해하고 팔정도 수행을 통하여 탐진치가 소멸되었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은 성취되는데, 이 상태가 바로 열반이고 동시에 아라한의 깨달음이라 한다. 그래서 초기경전의 도처에 아라한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성취하였을 때 외치는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는 아라한송이 있다.

 

적개심의 소멸단계는

 

견도와 무학도의 중간 과정이 수도(修道)인데, 이는 사다함과 아나함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오도송이 없다. 그 이유는 수행의 과정단계이기 때문이다.

 

수행의 과정에 있어서 소멸시키는 대상은  무엇일까.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10가지 족쇄를 보면 수도단계에서 소멸되는 것은 감각적욕망(kāma-rāga, 탐심)’적의(paigha, 진심)’이다. 이 두가지 해로운 마음의 요소는 사다함에서 옅어지고, 아나함단계에서 소멸된다. 따라서 아나함단계에서는 탐욕과 성냄이 완전히 소멸되고, 아라한 단계에 이르면 무명(avijjā, 치심)마저 소멸되어 탐진치의 불이 완전히 꺼져 열반에 드는 것으로 본다.

 

이렇게 탐진치가 소멸되면 더 이상 미래의 업이 되는 마음의 찌꺼기를 남겨 놓지 않아  할 일을 다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탐진치를 모두 말려버린자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손등으로 맞는다는 것

 

도올 김용옥교수의 강좌를 인터넷사이트에서 보았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였다. 예수가 오른 쪽 뺨을 맞았을 때 왼쪽 뺨을 내 주었다고 한다. 이는 상대방이 오른쪽손을 이용하여 위에서 아래로 손바닥으로 오른 쪽 뺨을 때리고 난 후,  그 손을 다시 아래에서 위로 들어 손등으로 때리기 좋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예수당시의 최대모욕은 손등으로 맞는 것이라 한다. 이쯤되면 예수는 진심(성냄)을 소멸한 단계로서 불교의 성인 4과중에 최소한 아나함의 단계까지 이르렇다고 볼 수 있다.

 

종종 스님들 이야기를 보면 도력이 매우 높은 선사가 불같이 화를 내었다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상좌들을 깨우쳐 주기 위한 자비방편이라고 하지만, 초기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진심이 소멸되지 않은 것으로 본다. 따라서 성인사과중에 아라한도 아니고 아나함도 아니고 사다함이하로 볼 수 있다.

 

아나함이나 아라한이 되면 어떤 경우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고 한다. 때리면 맞을 뿐이라 한다. 화를 냄으로 인하여 새로운 업을 짓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화를 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윤회 (sasāra)의 사슬에 묶이게 하는 원인

 

십이연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육입’‘’’’’’’다섯 가지 단계일 것이다. 5가지 단계는 미래에 태어날 원인을 제공한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2연기에서는 여섯 감각기능(六根, indriya)들이 외부의 감각대상(六境, visaya)들과 맞부딪쳐 감각접촉(phassa)이 일어나고, 이러한 감각접촉에서 느낌(vedanā)이 일어나고 이러한 느낌에서 이 갈애가 일어난다. 그리고 이러한 갈애는 다시 집착(upādāna)을 불러일으킨다.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 주해, 김한상역)

 

 

감각기관이 감각대상(六入)과 부딫쳤을 때() 필연적으로 좋다또는 싫다의 감정()이 일어난다. 또 좋은지 싫은지 구별이 가지 않은 무덤덤한감정도 일어난다.

 

이 때 좋으면 잡아당기고, 싫으면 밀치게 되는 갈애()’가 일어나는데, 이것이 탐심과 진심이다. 좋거나 싫거나 간에 이를 붙들게되면() 새로운 업을 유발하게 되어 윤회 (sasāra)의 사슬에 묶이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윤회의 원인이 되는 마음의 찌꺼기나 한을 남겨 두지 않아야 하는데, 바로 그것이 탐심과 진심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있는 그대로 볼 것을 말한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그런데 진심과 관련하여 사마타수행으로 해탈하고자 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이 바로 자애수행이라 볼 수 있다.

 

원한 맺힌 자에 대하여

 

청정도론에 소개되어 있는 자애수행방법은 매우 구체적이다. 초심자가 책만 보고서도 가능하도록 매우 상세하게 소개 되어 있다. 그런 자애수행의 목적은 자애를통한 마음의 해탈(자심해탈)인데, 자기 자신과 좋아 하는 사람과 무관한 사람과 원한 맺힌 사람에 대하여 평등하게 자애를 방사하면서 동시에 평등한 마음을 성취하고 한계를 부수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원한 맺힌 자이다.

 

자애를 통한 해탈을 이루는데 있어서 원한 맺힌 사람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청정도론에서는 네 가지 부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애를 닦기 전에 먼저 원수에 대하여 적개심을 누구러 뜨릴 것을 강조 하고 있다. 이는 한마디로 진심을 소멸시키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았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단계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화를 화로써 앙갚음 하지 않는다.

둘째, 연민을 통해 적개심을 가라 않는다.

셋째, 자신을 훈계하여야 한다.

넷째, 업이 각자 자기의 주인임을 반조한다.

다섯째, 부처님이 전생에 인욕수행한 덕을 반조해야 한다

여섯째, 일체중생에 대하여 나를 한번쯤 낳아준 어머니로 생각한다.

일곱째, 자애수행의 열한가지 이익에 대하여 생각한다

여덟째, 존재를 나()나 나의 것이 아닌 오온, 12, 18계의 요소로 본다.

아홉째, 보시를 통하여 성냄을 제거 한다.

 

 

이 중 다섯번째의 부처님이 전생에 인욕수행한 덕을 반조해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는 부처님의 본생담(Cula Dhamma Jataka) 에 대한 이야기로서, 죽순이 잘리듯이 손발을 자를 때도 화를 내지 않았다는 이야기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 첫번째 단계에서 부터 여덟번째 단계에 이르기 까지 갖가지 방법을 써 보아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분이 풀리지 않을 경우

 

아홉번째 단계에서는 보시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보시야말로 직접적이고 확실하게 적개심을 누그러 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보시는 자기의 소유물을 상대방에게 주는 것을 말한다. 또 남의 소유물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주고 받는 것이 보시인데, 원수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보시하면 반드시 그 사람에 대한 적개심이 가라 앉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의 경우도 그가 전생부터 품어 오던 화가 그 순간에 가라 앉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원한 맺힌 자에 대한 적개심을 풀고 그 다음에 자애수행에 들어가야 한다고 청정도론에서 강조한다. 그래서 자기 자신, 좋아 하는 사람, 무관한 사람, 원한 맺힌 사람 모두에게 평등하게 자애를 닦아야 마음의 해탈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시물을 받는 자는 머리를 숙이고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자애수행의 가장 큰 목적중의 하나는 상대방에 대한 진심을 누그러뜨리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원한 맺힌 자에 대한 적개심을 푸는 것이다. 그런데 그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내가 상대방의 원한을 샀을 경우이다. 이 경우 역시 풀고 넘어가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보시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보시는 반드시 재물보시가 아니어도 되는데, 상냥한 말로서 하는 보시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소개하고 있다.

 

 

보시는 조어되지 않은 사람을 조어하고

보시는 모든 이로움을 성취시킨다.

보시와 상냥한 말씨를 통해 시주자는

편한해지고 시물을 받는 자는 머리를 숙인다.”

(청정도론 2, 9장 거룩한 마음가짐 159p)

 

 

원한 맺힌 자에게 상냥한 말씨로 보시함으로서 내마음은 편안해지고, 더구나 그 보시물을 받은 자는 머리를 숙일 것이라 하니 보시야말로 즉각적 효과를 가져 올 수 있고, 서로 좋은 것이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가 되고 일석이조가 되는 것으로 본다.

 

자애명상인가, 바라는 명상인가

 

청정도론에서 자애수행에 관한 설명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룬 것은 진심의 극복이다. 원한 맺힌 자에 대한 적개심을 먼저 풀고 그 다음에 자애를 닦아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적개심을 몰아낸 상태에서 자애수행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과 좋아 하는 사람과 무관한 사람과 원한 맺힌 사람 모두에게 평등하게 자애의 마음을 보내어서 한계를 부수는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이 한계를 부수는 것이 자애수행의 목표라고 한다. 한계를 부숨과 동시에 표상과 근접삼매를 얻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애와 함께 초선을 얻고, 그 표상을 반복하고 닦았을 때 4종선의 경우 3선까지 얻는 것이 가능한데, 이것으로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을 얻는 것이 진정한 자애수행의 목적일 것이다.

 

하지만 자애수행이 실패할 경우도 있다. 이성간이나 죽은 자에 대하여 자애를 닦을 경우이다. 부부간이나 연인사이의 자애명상은 애욕으로 발전되기 때문에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죽은 자는 반응이 없어서 되지 않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자애명상을 소원성취용으로 활용하는 경우일 것이다. 이른바 바라는명상인데, 이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과 어긋난다. 부처님은 갈애의 극복을 통하여 해탈과 열반을 성취 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반대로 무언가 바라는 기도를 한다는 것은 갈애를 추구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행복하게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름다운 마음이다. 더구나 원수에게까지 잘 되기를 바라는 그지 없이 거룩한 마음이다. 하지만 그 또는 내 마음에 원한이 남아 있다면 아무리 행복하기를!” 하고 방사해 보았자 별다른 효과가 없을 것이다. 이 경우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직접적인대화이다. 그리고 선물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 무관한 사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마음속으로  우리 어머니가 고통이 없기를!” “우리 아버지가 건강하기를!” “우리동생이 고통에서 벗어 나기를!”하는 것 보다 차라리 전화라도 한통화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다 선물까지 더하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2011-06-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