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왜 정진인가, 용맹정진과 바른정진(正精進)

담마다사 이병욱 2011. 6. 22. 20:15

 

 

 

 

왜 정진인가, 용맹정진과 바른정진(正精進)

 

 

 

아침에 습관적으로 라디오를 트는데, 그것은 불교방송이다. 그 때 듣는 프로는 경전공부불교강좌이다. 벌써 수 년째 듣고 있는데, 주로 대승경전과 대승불교에 관한 것이다.

 

원각경, 금강경, 육조단경, 대승기신론, 법화경, 범망경, 유마경등 수 많은 대승경전을 유명 강사스님들이 강의하고 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그냥 들을 뿐이다.  불교방송도 시대에 발맞추어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와 같은 초기경전도 강의해 주면 좋으련만 아직까지 시기상조인 것 같다.

 

강좌가 주로 대승경전 위주로 편성되어 있지만 종종 부처님의 일대기에 대한 강의도 이루어진다. 그런데 어느 강사가 이야기하든지간에 부처님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들을만 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부처님이야기라도 강사에 따라 듣는 묘미도 다르다.

 

최근 불교강좌프로는 혜문스님이 진행하고 있다. 강좌제목은 혜문스님의 알기쉬운 불교이야기인데, 부처님의 일대기에 대한 것이다. 스님은 강의 중의 종종 자신의 체험담을 이야기하는데, 딱딱한 강의를 재미있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 체험담 중에 해인사용맹정진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불자들이 알고 있는 정진

 

용맹정진은 어떤 것일까. 스님은 1992년 당시 해인사에 있었다고 한다. 선방에서는 자체적으로 청규를 만드는데, 그 때 당시 청규를 보면 ‘14시간정진하기로 했다고 한다. 새벽 2시에 기상하여 3시간 정진하고, 아침을 먹고 4시간, 사시식사후에 3시간, 저녁식사후에 4시간 정진하는데, 취침은 10시에서 2시까지 4시간자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성도절을 앞두고 1주일 전부터 잠을 자지 않는다고 한다. 이를 용맹정진이라고 한다. 이렇게 잠을 자지 않고 1주일 동안 용맹정진 하다 보면 졸음과 혼침등과의 싸움이 시작되고. 이를 견디지 못하는 수행자는 떠나기도 한다고 한다. 이를 퇴방이라 하는데, 두고 두고 따라다니는 꼬리표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1주일동안 잠을 자지 않고 정진하다 보면 화두나 생사문제와 같은 철학적 사유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오로지 잠과 혼침과의 싸움이라 한다. 마침내 용맹정진을 다 마쳤을 때 해 냈다라는 강한 성취감을 맛 본다고 한다.

 

이처럼 빡세게정진하고 나면 그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해쳐 나가는 용기를 갖게 되기 때문에 다른 선방에서 정진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스님은 말한다. 이것이 불자들이 알고 있는 정진에 관한 것이다.

 

 

초기불교에서의 정진은

 

하지만 초기불교에서 정진은 선방에서 스님들이 용맹정진하는 것과 내용이 다르다. 초기불교에서 정진은 팔정도의 정정진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정진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무엇이 바른 정진인가? 악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여 분투노력하고, 악한 생각을 버리도록 최선을 다하여 분투노력하며, 선한 생각을 일으키도록 최선을 다하여 분투노력하며, 선한 생각을 더욱 성장하도록 최선을 다하여 분투노력하는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45 막가상윳따 8,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정진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눕지 않는 수행인 장좌불와도 있을 수 있고, 하루 한끼만 먹는 일종식수행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팔정도의 정진은 정정진에 관한 것이다.

 

이는 바른정진이란 뜻으로 빠알리어로 삼마와야마(sammāvāyāma)’이다. 그래서 바른 정진이란 선법과 불선법에 관한 것인데. 선법은 더욱 더 증장시켜야 하고, 불선법은 일어나지 않도록 쳐내야 한다는 것이다.

 

정정진과 사정근과의 관계

 

그런데 이 정정진은 또 사정근과 같은 것이다. 정정진과 사정근의 관계를 알기 전에 팔정도의 도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도성제(道聖諦, dukkha-niroda-gāmiī-paipadā-ariyasacca)

팔정도(八正道, ariya-aṭṭhagika-magga) = 중도(中道, majjhima-paipadā)

삼학(三學,

ti-sikkhā)

계온(戒蘊,

sīla-kkhandha)

바른 말(正語, sammā-vācā)

거짓말하지 않기, 중상모략하지 않기, 욕설하지 않기, 잡담하지 않기

바른 행동(正業,

sammā-kammanta)

살생하지 않기, 주어지지 않은 것을 가지지 않기, 사음하지 않기,

바른 생계(正命,

sammā-ajiva)

그릇된 생계수단을 버리고 바른 생계수단으로 살아가기

정온(定蘊,

samādhi-kkhandha)

바른 정진(正精進,

sammā-vãyama)

사정근(四正勤)

바른 알아차림(正念,

sammā-sati)

, 느낌, 마음, 마음대상의 사념처(四念處)

바른 집중(正定,

sammā-samãdhi)

초선(初禪), 이선(二禪), 삼선(三禪), 사선(四禪)

혜온(慧蘊,

paññā-kkhandha)

바른 견해(正見,

sammā-diṭṭhi)

고제, 집제, 멸제, 도제를 아는 것

바른 사유(正思惟,

sammā-sakappa)

출리의 사유, 악의없음의 사유, 해치지 않음의 사유

출처 ;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 초전법륜경 역주, 김한상(수마나)님 역

 

  주해모음(김한상_역주).hwp

 

 

 

 

 

 

 

 

도성제는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성스런 진리이다. 그런데 도성제는 고통을 소멸하여 열반에 이르게 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팔정도를 제시하고 있다. 그런 팔정도를 중도(中道, majjhima-paipadā)라고도 한다. 따라서 도성제와 중도와 팔정도는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다.

 

표에서 바른정진을 사정근으로 표기하여 놓았다. 그렇다면 사정근이란 무엇일까. 사정근에 대한 아비담마 논장을 보면 다음과 같다.

 

 

네 가지 바른 노력이 있으니 이미 일어난 나쁜 것을 버리려는 노력,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나쁜 것을 일어나지 않게 하는 노력,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것을 일으키는 노력, 이미 일어난 유익한 것을 증장시키려는 노력이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2, 7장 범주의 길라잡이)

 

 

아비담마 논장의 사정근의 내용과 상윳따니까의 정정진의 내용이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팔정도의 정정진은 사정근과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정근은 팔정도의 정정진이기도 하지만 오근과 오력의 두번째인 노력의 내용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오근과 오력에서의 노력을 빠알리어로 위리야(viriya)’라고 한다. 사정근에서 정근은 빠알리어로 삼마빠다나(sammā-ppadhāna)라고 한다.

 

이렇게 정진이라는 용어는 보리분법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고 있는데, 정리하면 팔정도에서는 삼마와야마(sammāvāyāma)’, 오근과 오력에서는 위리야(viriya)’, 사정근에서는 삼마빠다나(sammā-ppadhāna)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보리분법에 따라 정진이라는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정진이 매우중요한 깨달음의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왜 정진이 중요한가

 

그렇다면 37보리분법(37조도품)에서 정진은 몇개나 사용되고 있을까. 이에 대하여 37보리분법에 대한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37조도품과 8정도의 관계

구성요소
(마음부수 또는 정신적요소)

4념처

4정근

4

여의족

5

5

7각지

8정도

합계

(37)

1

정진( viriya, 정정진)

 

4

1

1

1

1

1

9

2

마음챙김(알아차림, 사띠, sati, 정념)

4

 

 

1

1

1

1

8

3

통찰지(빤냐, pañña, 정견)

 

 

1

1

1

1

1

5

4

집중(사마디, samādhi, 정정)

 

 

 

1

1

1

1

4

5

믿음(삿다, saddhā)

 

 

 

1

1

 

 

2

6

일으킨생각위딱까, vitakka, 정사유)

 

 

 

 

 

 

1

1

7

경안(빳사디, passaddhi)

 

 

 

 

 

1

 

1

8

희열(삐띠,piti)

 

 

 

 

 

1

 

1

9

평온(우뻭카, upekkha)

 

 

 

 

 

1

 

1

10

열의 (찬다, chanda)

 

 

1

 

 

 

 

1

11

마음(찟따, citta)

 

 

1

 

 

 

 

1

12

바른 말(sammā-vācā, 정어)

 

 

 

 

 

 

1

1

13

바른 행위(sammā-kammanta, 정업)

 

 

 

 

 

 

1

1

14

바른 생계(sammā-ajiva, 정명)

 

 

 

 

 

 

1

1

  합계

4

4

4

5

5

7

8

37

 

 

 

표를 보면 정진이 9개로서 가장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법수로 표시 되어 있는 보리분법에서 사념처를 제외한 모든 것에 다 들어가 있다. 그 뒤를 이어 마음챙김(8), 통찰지(5), 집중(4)의 순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요소가운데 가장 강조되는 것이 정진, 알아차림, 지혜, 집중임을 알 수 있다.

 

종합선물세트같은

 

초기불교를 접하다고 보면 니까야라 불리우는 초기경전 뿐만 아니라 아비담마 논장, 청정도론과 같은 주석서를 접하게 된다. 그러면서 온처계근제연이라 불리우는 교학체계를 알 수 있는데, 37가지 깨달음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다발로 묶어 놓은 것이 보리분법이다. 그 중에 팔정도와 칠각지가 가장 중요한 것임을 또한 알 수 있다.

 

이런 보리분법은 마치 종합선물세트와 같아서 그 세트에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는 인기 상품정진’ ‘알아차림’ ‘지혜’ ‘집중과 같은 네가지 요소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정진이라는 상품이 선물세트에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라면 정진의 중요성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정진은 선방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용맹정진하는 그런 정진이 아니라 선법과 불선법을 선택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마음속의 심리현상을 분석하여 선한 것과 불선한 것을 가려 내어서, 선한 것은 받아들이고, 불선한 것은 수용하지 않는 것을 정진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알아차림, 통찰지, 집중등의 또 다른 요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14가지 항목의 마음부수 또는 정신적요소에 대한 법들이 충족되면 깨달음은 자연스럽게 따라 올 것이라고 전재성박사는 상윳따니까야 출간사에서 말하였다.

 

보리분법은 순서가 있을까

 

이런 37조도품에서 법수별로 나열되어 있는 일곱가지 보리분법은 사성제나 팔정도처럼 순서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위의 경전상의 7종의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법의 나열순서는 7가지의 점진적인 수행단계를 표현하는 인상을 주지만 그렇지가 않다.

 

자세히 살펴보면 단지 4에서 8에 이르는 법수적인 나열임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다른 팔정도나 사성제의 순서처럼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한 종류의 요소들이 다른 종류의 요소들에 속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한 종류가 다른 종류의 한 요소로서 간주되기도 한다. 이들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요소들은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유일한 목표를 향해 사람들의 다양한 조건에 맞도록 조정된 다양한 가르침을 내포한다.

 

각 가르침은 서로 겹치고 상호 교차하면서 법계의 전체구조인 연기법과 관련을 맺고 있으나, 무지나 무명에서 일어나는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속박의 연박연기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밝은 지혜에 바탕을 두는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라는 자유의 해탈연기를 지향한다는 점이 다르다.

(전재성박사, 우리말 상윳따니까야 서문에서)

 

 

쌍윳따니까야관련자료(종합판)1[1].hwp

 

 

 

전박사는 37조품이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목표를 향한 것이고, 또 각 보리분법은 서로 겹치고 상호교차하면서 연기법과 관련을 맺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결국 속박연기가 아니라 해탈연기를 지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라한의 깨달음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37조도품은 문자그대로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법을 말하고, 그런 법들이 충족되었을 때 번뇌가 소멸되어 완전한 깨달음((正覺: sambodhi)’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이것이 바로 아라한의 깨달음인데, 깨달음을 얻기 까지 번뇌를 소멸시키는 과정을 수행이라 볼 수 있고, 수행이 완성되었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은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11-06-22

진흙속의연꽃

 

 

주해모음(김한상_역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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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윳따니까야관련자료(종합판)1[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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