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갈애’라는 독화살을 맞았는데, 쭐라말룽꺄뿟따경(Cula-Malunkyaputta Sutta)

담마다사 이병욱 2011. 6. 28. 12:34

 

갈애’라는 독화살을 맞았는데, 쭐라말룽꺄뿟따경(Cula-Malunkyaputta Sutta)

 

 

 

 

악조건 속에서도

 

요 몇 일간 비가 촉촉히 내렸다. 그래서일까 신록은 더욱 더 푸르러지는 것 같고, 여기저기에서 생명의 향연을 보는 것 같다. 도저히 생존이 불가능할 것 같아 보이는 틈새에서 싹이 돋아나 마침 내린 비를 듬뿍맞고 커나가는 잡초를 보면 생명의 환희를 느낀다. 더구나 그런 악조건 속에서 한 송이 꽃을 피워내는 것을 보면 그 잡초는 자신의 할 바를 다 했다고 볼 수 있다.

 

 

 

 

 

 

 

 

어느 날 집에서 기르던 화초에서 꽃이 피었을 때 무척신기하게 느껴진다. 몇 년이 지나도 도저히 꽃을 피울 것 같지 않던 화초가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꽃대가 나오고 생전 처음 보는 자그마한 꽃을 피워내었을 때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아마 기적이 있다면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라 본다. 그렇지만 그 화초에게 있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과 다름 없을 것이다.

 

 

 

 

 

 

 

 

사무실에 그저 구색용으로 가져다 놓은 행운목에서 3년만에 꽃이 피었을 때 역시 강렬한 생명력을 보았다. 아무 기대도 하지 않고 항상 그 자리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이지 않던 행운목이 꽃을 피워낸 대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매우 놀라웠다.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후각을 자극하여 견딜 수 없을정도로 매우 강렬한 향내를 발산하였다는 것이다. 이쯤 되니 미물에 불과한 행운목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것으럼 보이고. 마치 자신의 할 바를 다 했음을 선언하는 것처럼 보여서, 단순한 초목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체로 느껴졌다.  

 

 

 

 

 

 

 

 

악조건에서 자란 잡초이건, 집에서 기르던 화초이건, 야생에서 자란 이름모를 초목이건간에 생명이 있는 것들은  한 번쯤 꽃을 피워낸다. 마찬가지로 미물이건, 동물이건간에 조건이 성숙되면 자손을 번식함으로서 자신의 할 바를 다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떠할까.

 

좋은 결과를 바라지만

 

인간도 조건이 성숙되면 사랑을 하고 자손을 번식한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기타 생명이 있는 것들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런 정도에서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사유를 통하여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괴로움이다. 세상에는 즐거운것 보다 괴로운 것이 더 많은 데. 이는 내 뜻대로되지 않아서일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것은 속성임과 동시에 진리라고 볼 수 있다.

 

괴로운 것은 괴로운 그 자체가 괴롭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고, 즐거운 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아 괴로운 것이라서 결국 삶은 괴로운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는 모든 현상이 고정 되어 있지 않고 변화하기 때문에 발생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순간 순간 변화 하는 삶에 있어서 사람들은 즐거움과 행복을 얻기 위하여() 좋은 조건()을 만들어 좋은 결과()를 얻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이나 행복도 오래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삶이란 괴로운 것이라고 또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래서 영원히 변치 않는 저 세상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긋지긋한이 세상을 떠나 항상 즐거움과 행복으로만 가득한 저 세상을 동경하게 되었다.

 

아무도 가본적이 없는 저 세상

 

종교인들은 천상, 천국, 극락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하지만 아무도 가 본적이 없다라는 것이다. 단지 전해져 온 이야기를 그대로 반복할 뿐이다. 이처럼 이 세상을 혐오하고 저 세상을 동경하는 것은 허무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죽어서야 이루어지는 저 세상에 대한 동경은 아무도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있게 말을 할 수 없지만. 반면에 누구도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라도 가 본 것처럼 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부처님은 저 세상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았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충실한 삶을 강조하였고 열반은 죽어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이 생에서 실현되어야한다고 하였다.

 

 

대부분의 종교가 죽어서나 완성되는 종교적 삶을 이야기 하지만 이는 허무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허무란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을 말한다. 부처님이 저 세상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은 것은 그 자체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그런 삶에 대한 이야기가 쭐라말룽꺄뿟따경(Cula-Malunkyaputta Sutta, MN63)’일 것이다.

 

  Cula_Malunkyaputta_Sutta.pdf

 

 

수행생활을 접겠다는데

 

쭐라말룽꺄뿟따경은 열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 관한 것이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근분적인 질문이라 볼 수 있다. 경에 따르면 말룽꺄뿟따는 부처님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던 것 같다. 그것은 다름아닌 자신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다음과 같은 추론에 대하여 말을 하지 않고 배척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한 추론이란 어떤 것일까.

 

 

세상은 영원한가?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세상은 유한한가?

세상은 유한하지 않은가?

영혼과 육체는 같은가?

영혼과 육체는 다른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은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은 것도 아닌가?

(맛지마니까야:63  쭐라말룽꺄경,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이와 같은 고차원적인 질문에 부처님이 답변을 해주면 수행생활을 계속할 것이고, 만일 답변을 해주지 않는다면 수행생활을 접겠다고말룽꺄뿟따는 마음속으로 다짐한 것이다.

 

부처님이 되묻기를

 

이는 마치 기도하는 사람이 내 소원을 들어주면 부처님을 믿고,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믿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이처럼 배수진을 치고 말룽꺄뿟따가 부처님에게 위의 10가지 사항에 대하여 질문하였지만  부처님은 답은 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되물었다.

 

 

말룽꺄뿟따, 내가 그대에게 나를 따라 청정한 수행을 하면 그대에게 세계는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또는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을 말해줄 것이다라고 말한적이 있는가?

(맛지마니까야:63  쭐라말룽꺄경,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이렇게 부처님이 묻자 말룬꺄뿟따는 없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서 재차 위의 10가지 질문에 대하여 말해준다면 출가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라고 묻는다.

 

이렇게 부처님은 말룽꺄뿟따에게 출가하면 위의 10가지 사항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는데 설명해주지 않으면 수행을 접겠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말씀 하였다.

 

대체 누가 쏘았길레

 

그렇다고 해서 10가지 사항에 대하여 말해 주지 않으면 출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헛된 일이 될 것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10가지 사항에 대하여 결코 설명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대신 부처님은 의기소침해 있는 말룽꺄뿟따에게 독 묻은 화살에 대하여 비유로서 설명하였다.

 

어떤 사람이 독이 잔뜩 묻은 화살을 맞았는데, 그는 곧바로 병원으로 긴급하게 후송되었다. 그리고 의사의 진료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독화살을 맞은 것이 매우 분하였던지 의사에게 독화살을 쏜 자가 누구인지 알기 전에는 결코 진료를 받지 않겠다고 하였다.

 

대체 독화살을 쏜 자가 왕족인지, 상인인지, 노예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어느 종족인지, 키가 큰지, 작은지, 피부가 검은지 갈색인지, 시골에 사는지 도시에 사는지, 쏜 화살이 긴 것인지 격발식인지, 활줄이 섬유로 만든 것인지 갈대로 만든 것인지등등 수 많은 의문이 풀리기 전에 결코 독화살을 뺄 수 없다고 말을 하였다. 하지만 그와 같은 수 많은 이유를 알기 전에 죽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마찬가지로 세상은 영원한가등의 10가지 질문을 설명해 줄 때 까지 출가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부처님은 결코 설명해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러는 동안 죽고 말것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애롭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였다.

 

 

말룽꺄뿟따, 청정한 삶이란 세상은 영원한가 또는 영원하지 않은가와 같은 견해에 따라서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영원하다또는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 이것과는 관계없이 이 세상에는 여전히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이 있으며, 슬픔, 한탄, 괴로움, 절망이 있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이것들의 부수어 버림을 가르친다.

(맛지마니까야:63  쭐라말룽꺄경,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종교인들은 죽어서 가는 저 세상에 대하여 말한다. 저 세상은 항상 즐겁고 행복한 세상이라서 이 지긋지긋하고 더러운 세상과 비교하여 설명한다. 하지만 이 세상을 혐오하고 저 세상을 동경할지라도 그것과 무관하게 태어남과 죽음은 끊임 없이 반복 되어 결국 슬픔, 한탄, 괴로움, 절망만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고통을 부수어 버리는 것이 급선무이지 저 세상을 바라는 것은 하나의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단언하지 않은 이유

 

부처님은 말룽꺄뿟따의 의문사항에 대하여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은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에 대하여 있다” “없다라고  단언하여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단언하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였다.

 

 

나는 왜 그것들을 단언하여 말하지 않았는가? 왜냐하면 이것들은 목표와 이어져 있지 않으며, 청정한 삶의 근본에 적합하지 않으며, 깨어 있음으로 이끌지 않으며, 욕망의 버림, 갈애의 소멸, 평화로움, 촤상의 지혜, 깨달음, 그리고 열반으로 이끌지 않기 때문이다.

(맛지마니까야:63  쭐라말룽꺄경,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이처럼 부처님은 10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하여 설명하지도 않았고 단언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10가지 질문은 아무 쓸모 없는 것이라 하였다. 왜 그럴까. 한 마디로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갈애라는 독화살을 맞았는데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은 이야기를 요즘에 듣는 것은 어렵지 않다. 거의 모든 종교인들이 영원영혼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리고  천국이나 극락과 같은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저 세상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이는 다름아닌 영원에 대한 집착이라 볼 수 있다.

 

공허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보면 끊임 없이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명화하게 이야기 해 주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일까.

 

바로 지금 여기에서 느끼고 있는 고통에 관한 것이 진리이다. 그리고 고통의 원인, 고통의 소멸,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이야기 하였을 때 모두 수긍하게 된다. 이는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이다.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가 무명이라는 독화살을 맞아서이고, 또 지금 여기에서 갈애라는 독화살을 맞았는데, 그것도 한방이 아니라 육근이 육경에 부딪칠 때 마다 무수히 맞았다면  빼는 것이 급한 일이다.

 

 

 

 

 

 

 

사진 http://www.cayennephotos.com/artwork_05-2009.html

 

 

 

 

 

여기에 그 어떤 관념적이고 공허한 이야기는 무의미하고 무가치할 뿐이다. 무의미하고 무가치 한 것은 다름 아닌 허무주의이다.

 

그러고 보면 부처님은 독화살을 빼 주는 의사와도 같고 매우 현실주의자이었음을 알 수 있다.

 

 

2011-06-28

진흙속의연꽃

 

Cula_Malunkyaputta_Sutta.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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