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여실견(如實見)과 여실지(如實智)

담마다사 이병욱 2011. 7. 9. 16:36

 

 

 

여실견(如實見)과 여실지(如實智)

 

 

 

몸이 아플 때

 

몸이 아플 때가 있다. 그것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할 때가 있다. 그런 경우 대게 창조주나 초월적존재에게 의존하려 한다. 또 그런 유혹을 떨쳐 버리기가 쉽지않다. 하지만 창조주나 초월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서 고통은 하나의 현상으로 볼 뿐이다. 그런 현상의 특징은 무엇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현상은 모두 일어나고 사라질뿐이다. 어느 것 하나 고정된 것이 없다. 따라서 모든 법은 무상하기 때문에 고통 또한 일어나고 사라지고 말 하나의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의 특징은 무엇일까.

 

잘 설해져 있는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은 잘 설해져 있다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초기경전에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고,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알아야 하는 것이다.

                                                                                  

svākkhāto bhagavatā dhammo            쓰왁카또 바가와또 담모

sandiṭṭhiko                                      산띠티꼬

akāliko                                            아깔리꼬

ehipassiko                                       에히빠시꼬

opaneyyiko paccatta                      오빠나이꼬 빳짜땅

veditabbo viññūhīti                           왜디땁보 웬뉴히

 

(앙굿따라 니까야, A.iii.285)

 

 

 

 

 

 

보리수잎

출처 ; http://en.wikipedia.org/wiki/Sacred_fig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은 열반으로 인도한다. 하지만 수 없이 많은 경들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듣는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달리 설하였기 때문에 경을 읽는 것만으로 방대한 가르침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고자함인지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요약하고 정리해서 수행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주석서이다. 대표적으로 청정도론을 들 수 있다.

 

청정도론을 읽으면

 

청정도론을 읽으면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왜 부처님이 8 4천이나 되는 방대한 법문을 펼쳤는지에 대한 해설서와 같다는 것이다. 그런 청정도론은 모두 일곱가지 청정을 중심으로 하여 단계적으로 도를 닦아 나가는 과정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는데, 동시에 각 청정에 해당되는 지혜도 기술해 놓았다. 이 중 견청정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도와 도아님에 대한 지와 견의 청정부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여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어떻게? 견의 청정에서는 정신-물질을 구분함으로써 괴로움의 진리(苦諦)를 구분하였다.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에서는 조건을 파악함으로써 일어남의 진리(集諦)를 구분하였다. 도와 도아님의 대한 지와 견에 의한 청정에서는 바른 도를 강조함으로써 도의 진리(道諦)를 구분하였다. 이와 같이 세간적인 지혜로 세 가지 진리를 구분하였다.

 

(청정도론, 20장 도와 도아님의 대한 지와 견에 의한 청정)

 

 

도와 도아님의 대한 지와 견에 의한 청정에 있어서 마지막 부분에 대한 글이다. 세 가지 청정에 대하여 고성제와 멸성제, 도성제를 대비하여 설명해 놓은 것이 특징이다.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칠청정과 16단계 지혜

 

칠청정

16단계 지혜

1

계청정(sīla visuddhi)

 

네 가지 청정한 계

2

마음청정(citta visuddhi)

 

근접삼매와 본 삼매

3

견청정--고성제

(diṭṭhi visuddhi)

1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nāmarūpa pariccheda ñāna)

4

의심을 극복함의 청정--집성제

(kakhāvitaraa visuddhi)

2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

(paccaya pariggha ñāna)

5

도와 도아님에 대한 지와 견의 청정(maggamāggañādassana visuddhi)--도성제

3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sammāsana ñāna)

6

도 닦음에 대한 지와 견의 청정

(patipadā-ñāadassa visuddhi)

4

생멸의 지혜(udayabbaya ñāna)

5

무너짐의 지혜(bhaga ñāna)

6

공포의 지혜(bhaya ñāna)

7

위험의 지혜(ādīnava ñāna)

8

역겨움의 지혜(nibbidā ñāna)

9

해탈하기를 원하는 지혜(muñcitukamyatā ñāna)

10

깊이 숙고하는 지혜(paisakhā ñāna)

11

행에 대한 평온의 지혜(sakhārupekkhā ñāna)

12

수순하는 지혜(anuloma ñāna)

6 7사이에

13

종성의 지혜(gotrabhu ñāna)

7

지와 견의 청정

(ñāadassa visuddhi)

14

도의 지혜(magga ñāna)

15

과의 지혜(phala ñāna)

16

회광반조의 지혜(paccavekkhaa ñāna)

2011-07-09 진흙속의연꽃

 

 

여섯번째의 청정인 도 닦음에 대한 지와 견의 청정을 보면 생멸의 지혜등을 포함하여 모두 무려 아홉개에 달하는 지혜가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 단계에 들어서면 수행의 대전환점을 이루게 된다고 한다. 이런 수행을 무엇이라 부를까.

 

위빠사나수행의 이득

 

칠청정과 16단계의 지혜의 증득과정을 다른 말로 위빠사나수행이라고 한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어떤 이득이 있을까. 다음과 같은 이득이 있다고 한다.

 

 

첫째, 청정한 마음을 갖게 한다.

둘째, 안정되고 균형 잡힌 마음이 된다.

셋째, 병이 치유 된다.

넷째, 법에 대한 이해가 높아진다.

다섯째,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

여섯째, 궁극적으로 성스런 법을 얻는다.

 

(우 쿤달라 비왐사,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위빠사나 수행의 궁극적 목적은 해탈과 열반의 실현이다. 수행과정에서 있어서 여러가지 이로움이 있는데, 그 중 지옥,축생, 아귀, 아수라와 같은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는것도 포함되어 있다. 

 

병을 치유할 수 있다!

 

그런데 수행의 이득중에서 세번째의 병이 치유된다라는 내용에 주목한다. 우 쿤달라 비왐사가 지은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을 보면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여 놓았다.

 

 

세 번째 이익은 병의 치유이다. 수행자가 생멸의 지혜에 이르면 소소한 질병과 통증이 사라진다. 여기에 있는 수행자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알아차림이 있는 순간은 매우 강력한 힘이 작용하기 때문에 수행중에 병이 생겨도 약을 잘 먹으려 하지 않는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먹는 것이 치료시간이 더 걸린다고 수행자들은 말한다. 그것은 목이 뻣뻣하거나 두통, 복통과 같은 통증이 오더라도 알아차리면 바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우 쿤달라 비왐사,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39page)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자가 생멸의 지혜단계(4)’에 이르면 왠만한 질병은 고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모든 법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심한 고통이라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결국 사라지고 말 운명이기 때문에 이를 지켜 보고 있으면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즉 고통을 고통이라고 알아차리는 순간 고통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방법은 매우 효과가 있다. 비록 생멸의 지혜의 단계에 이르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누구나 고통을 지켜 보면 사라진다는 말은 실감이 간다. 이는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현상이 법의 고유의 성질 때문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접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

 

법의 고유의 성질의 특징은 일어나고 사라짐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가장 첫 번째 지혜로서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것이 바로 견청정을 말하는데, 이는 현상을 바로 보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8가지 요소들, 12가지 감각장소들, 5가지 무더기들이라는 이 삼계의 속하는 모든 법들을 정신과 물질의 두가지로 구분한다. 그는 정신-물질뿐인 이 너머에 달리 중생이라든지 인간이라든지 신이라든지 혹은 범천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청정도론, 18장 견청정)

 

 

부처님의 가르침은 명쾌하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나와 세상을 만든 창조주는 없다는 것이다. 있다면 물질과 정신으로 구성된 인습적으로 부르는 나가 있을 뿐인데, 이는 부품들이 결합된 자동차라고 불리우는 이름과 같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초기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부품들이 모였을 때

수레라는 단어가 있듯이

무더기()들이 있을 때

중생이라는 일상적인 말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S.i.135)

 

 

누가 고통받는가

 

나 또는 중생, 신과 같은 명칭은 부품들이 모여서 형성된 것을 수레와 같은 의미라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어떤 병에 걸려 고통받고 있다든가, 또 누구로 부터 상처받은 마음이 되었을 때 과연 내가 아프고, 내가 상처받는 것일까. 부처님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직 괴로움이 생기고

괴로움이 머물고 사라질 뿐

괴로움과 다른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괴로움과 다른 것이 가라 앉는 것도 아니다.

 

(상윳따니까야, S.i.135)

 

 

아플 때 내가 아픈 것이 아니라 괴로움이라는 법이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부처님은 수 많은 경들에서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진 것을 설하였을뿐 나, 중생, 인간에 대하여 설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실견(如實見, Yathā-bhūta-dassana)

 

그렇다면 아파도 내가 아픈 것이 아니라 물질이 아픈 것이고 정신이 아픈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나란 것은 없다. 당연히 이 세상을 만든 창조주도 없고, 원인없이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자재천도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있는 것은 오로지 정신과 물질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나가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 졌다고 보는 것이 바른 견해라고 한다. 이를 다른 말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말하는데 빠알리어로 야타부따 닷사나(Yathā-bhūta-dassana, 如實見)’라 한다.

 

이렇게 나란 것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정신-물질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아는 지혜가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로서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의 출발점이고, 동시에 견해의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이러한 지혜에 이르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내가 겪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무관한 것으로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말 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견청정과 고성제를 대응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만일 영혼이 나가 있다거나 영혼이 있다고 믿으면 결코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의 궁극적 목표인 열반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첫 단추를 잘 못 꿰면 줄줄이 어긋나듯이 해탈과 열반의 길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바로 첫 단추를 올바로 꿰는 작업이 나는 없다” “중생도 없다” “초월적 존재도 없다” “창조주도 없다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렇게 인식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수행은 비로소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정신-물질은 조건의 산물이다.

 

나란 것은 없고 오로지 정신-물질로만 이루어진 존재라고 인식하여 견해의 청정이 이루어졌다면 두번째 청정의 단계는 의심을 극복하는단계이다.

 

이를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이라 하고, 이에 대응되는 지혜가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2)’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이와 같이 조건에 따라 정신-물질이 일어나는 것을 본 뒤 현재에 이렇듯이 과거에도 조건으로 부터 생겼고, 미래에도 조건으로부터 생길 것이라고 관찰한다. 이와 같이 관찰할 때 여기서 설한 방법대로 삼세에 대한 의심은 사라진다.

 

(청정도론, 19장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

 

 

불교는 조건교라고도 한다. 조건에 따라 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그런 조건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은 어떤 지혜일까.

 

나라는 존재가 정신-물질로 이루어졌다면 왜 그런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모두 원인이 있기 때문에 정신과 물질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만일 원인을 가지지 않고 우연히 존재한다거나 누군가 창조하였다고 한다면 외도의 견해에 빠지고 만다. 따라서 정신-물질은 조건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왜 조건의 산물인가

 

청정도론에서는 조건에 대하여 삼세를 예를 들어 설명한다. 과거의 업이 물질의 조건이 되고, 또 지금 마음이 일어 날 때 역시 미래의 물질의 조건이 된다. 이렇게 조건에 따라 업이 상속되어 윤회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업으로부터 과보가 생기며

과보는 업이 그것의 근원이다.

업으로부터 다시 태어남이 있고

이렇게 해서 세상은 계속된다.

 

(청정도론, 19장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

 

 

윤회하는 이유가 원인과 결과에 따른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조건은 사성제에서 집성제와 대응된다.

 

집성제는 고통의 원인에 대한 것인데, 가장 큰 원인으로서 갈애를 들고 있다. 따라서 갈애를 일으키면 연기가 회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일어나고, 취착을 조건으로 업이 형성되고... 하는 식이다. 이를 12가지로 조건으로 보는 것이 12연기이다.

 

연기는 조건지워져 함께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일아나고, 행을 조건으로 식이 일어나는 식으로 설명된다. 이처럼 조건지워져 일어나 상속되는 현상은 철저하게 원인과 결과에 따른다.

 

그분이 원인일까

 

어떤 원인이 있으면 그 원인에 대한 원인이 있고, 그 원인에 대한 또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소급하여 가다 보면 막히게 되는데, 그 때 초월적 존재나 창조주를 원인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기 때문에 그분이 원인이라고 보는 것은 거짓이 된다. 실재하지도 않고, 또한 실체도 없는 것으로 본다. 마치 토끼의 뿔처럼 명칭이나 이름으로 밖에 존재하지 않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는 나라고 부르는 것이 정신-물질의 또다른 이름인 오온을 인습적으로 부르듯이 초월적 존재나 창조주 역시 관습적으로 부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이처럼 인과 법칙에 어긋나는 것은 수행의 대상이 아니다. 수행의 대상은 실재하지만 실체가 없는 법이 대상이다. 그런 대상은 반드시 원인과 조건에 따라 결과로 발생되는 인연과라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원인의 배후에 다른 짓는 자가 있다든가 과보가 일어나는 것 외에 따로 과보를 경험하는자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로서 위빠사나 16단계지혜중의 두 번째 지혜에 해당된다. 동시에 칠청정중 의심을 극복함의 청정에 해당된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업을 의지하여 업으로부터 과보가 생길 뿐

신도 없고 범천도 없고 윤회를 만드는자도 없다.

원인과 조건에 따라 순수한 법들이 일어날 뿐이다.

 

(청정도론, 19장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

 

 

이처럼 부처님은 원인없는 결과를 부정하였고, 모든 법은 원인과 조건 그리고 결과라는 인연과(因緣果, hetu-pattica-phala)에 대하여 설하였고, 그에 따라 초월적존재도 창조주도 없음을 밝혀 냄으로서 인간을 신의 속박으로 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여실지(如實智, Yathā-bhūta-ñāna)

 

이처럼 정신과 물질이 일어난 것에 대하여 모두 조건으로 파악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대한 의심을 떨쳐 버리고 얻은 지혜를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이라고 말한다. 이를 다른 말로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라고 말한다.

 

따라서 모든 법들은 원인이 있어서 조건지워져 발생한다고 보는데, 이를 빠알리어로 있는 그대로의 지혜라는 뜻의 야타부따냐나(Yathā-bhūta-ñāna, 如實智)’라고 한다. 이것이 정견(正見)’이다.

 

이 단계에 이르면 발판을 얻은 자 또는 태어날 곳이 정해진자라 하여 작은 수다원이 되었다고 한다.

 

발판을 얻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이제 이 길로 죽 가기만 하면 도와 과를 이루어 해탈과 열반으로 갈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다음 생에 최소한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와 같은 사악도에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말과 같다.

 

왜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일까

 

불교란 무엇일까.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이 땅에 내노라 하는 선지식은 한마디씩 한다. 하지만 이런 의문은 또 다시 누군가에 의하여 끊임없이 주장 되어진다. 타종교에서는 볼 수 없는 이런 근본적인 의문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 그렇다면 진짜 불교란 무엇이고,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불교와 깨달음에 대한 정의를 요구하는 질문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은 각자 서로 다른 불교와 서로 다른 깨달음을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성불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성불하고 나면 자신도 부처이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말이 부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로지 한분의 부처님에 대한 가르침을 신봉하는 사람들에 있어서 불교는 오직 하나이고. 동시에 깨달음도 오직하나 일 수 밖에 없다.

 

수십년간 절에 다녀도

 

대승불교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불교에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접하기란 쉽지 않다.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로 대표되는 근본 가르침이 엄연히 있지만 어느 곳에서도 명쾌하게 설명해 주는 곳은 드믈어서 불자들은 사성제가 무엇인지, 팔정도가 무엇인지, 십이연기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러다 보니 절에서 가르쳐 준대로 열심히 108배하고, 다라니를 독송하고, 사경을 하는 것이 불교신행의 전부인줄 안다.

 

수십년간 절에 다니지만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제대로 접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방편이나 기복불교로 흐르기 쉬운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그러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접하면 또 다른 불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84천 법문이나 되는 방대한 가르침이고, 근기에 따라 대기설법식의 법문이기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알아 채기 어렵다. 그래서 나온 것이 논장이나 주석서이다.

 

부처님이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특히 청정도론을 접하면 부처님의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런 주석서는 담마의 바다에서 방향을 잃고 헤메이는 불자들에게 마치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은 청정도론의 목차와도 관계있다고 볼 수 있다.

 

청정도론에서는 칠청정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단계적으로 청정으로 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고 아울러 각 단계에 대응되는 지혜도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오로지 열반으로 가는 길을 제시하고자 8 4천개의 법문을 설하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 열반을 이야기하지 않는 다면 그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불교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 열반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이 생에서 발판이라도

 

대승불교전통, 특히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이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돈오를 이야기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점수에 관한 것이다. 벽돌을 쌓듯이, 계단을 올라가듯이 단계적으로 열반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이 청정도론에서 말하는 칠청정과 16단계의 지혜일 것이다.

 

하지만 재가불자들이 생업에 종사하면서 수행을 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단지 수행의 맛만 볼 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생에서 발판이라도 마련해 놓아야 할 것이다. 그런 발판을 마련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것은 칠정과 16단계 지혜에서 최소한 두개의 청정과 두개의 지혜를 닦는 것이라 본다. 그것이 위에서 언급한 견청정(정신-물질을 아는 지혜)’의심을 극복함의 청정(원인-결과를 아는 지혜)’일 것이다.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여실견(如實見)

여실지(如實智)

1

내용

있는 그대로 봄

(Yathā-bhūta-dassana,

야타부따 닷사나)

있는 그대로의 지혜

(Yathā-bhūta-ñāna,

야타부따냐나)

2

청정의 단계

3. 견청정

(diṭṭhi visuddhi)

4. 의심을 극복함의 청정

(kakhāvitaraa visuddhi)

3

지혜의 단계

1.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nāmarūpa pariccheda ñāna)

2.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

(paccaya pariggha ñāna)

4

설명

부품들이 모였을 때

수레라는 단어가 있듯이

무더기()들이 있을 때

중생이라는 일상적인 말이 있다.

조건에 따라 정신-물질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현재에 이렇듯이 과거에도 조건으로부터 생겼고, 미래에도 조건으로부터 생길 것이라고 관찰한다.

5

게송

오직 괴로움이 생기고

괴로움이 머물고 사라질 뿐

괴로움과 다른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괴로움과 다른 것이 가라 앉는 것도 아니다.

(상윳따니까야, S.i.135)

업으로부터 과보가 생기며

과보는 업이 그것의 근원이다.

업으로부터 다시 태어남이 있고

이렇게 해서 세상은 계속된다.

 

6

견해의 부숨

그는 정신-물질뿐인 이 너머에 달리 중생이라든지 인간이라든지 신이라든지 혹은 범천이 없다

업을 의지하여 업으로부터 과보가 생길 뿐, 신도 없고 범천도 없고 윤회를 만드는자도 없다.

원인과 조건에 따라 순수한 법들이 일어날 뿐이다.

7

대응 사성제

고성제

집성제

8

별칭

 

-작은 수다원(cula-sotapanna)

-발판이 마련된자

-안식을 얻은 자

-태어날 곳이 정해진 자

11

족쇄

유신견의 극복

법에 대한 의심의 극복

12

주수행방법

경행

경행

2011-07-09 진흙속의연꽃

 

 

모든 수행의 첫 단계는 계행의 준수에서 부터 시작되고, 다음으로 마음청정이 이루어지고 본격적인 출세간적수행이 시작 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견해를 부수는 것부터

 

출세간적 수행의 시작은 물질-정신을 아는 것 부터 시작 된다. 그리고 원인-결과를 식별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또 이 두개의 지혜는 이제까지 형성된 견해를 부수는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나라고 믿어온 아상을 깨는 것부터 시작 되는데, 이는 나라는 존재가 오로지 물질-정신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한다. 그런 물질-정신은 조건지워져 상속되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를 아는 것이고, 이는 곧 연기법을 아는 것이 된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정신-물질, 원인-결과를 아는 지혜는 가장 먼저 나를 부수는 작업이라 볼 수 있다.

 

나라는 것은 없고 단지 오온의 결합되어 관념적, 인습적으로 부르는 명칭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초월적 존재도 없고, 자재천도 없고, 창조주도 없음을 알게 된다. 있다면 단지 이름이나 명칭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산 속의 소의 비유

 

해탈과 열반에 이르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될 일이 바로 개념을 타파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만일 이와 같은 개념이 타파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행에 임하게 되었을 때 어떤 문제가 발생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산 속의 소의 비유로서 설명하였다. 청정도론에 소개된 비유는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리석고, 우둔하고, 들판을 모르고, 바위가 울퉁불퉁 돌출한 산을 걷는데 서투른 산악의 소가 있다고 하자. 그 소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전에 가 본적이 없는 방향으로 가 보리라. 전에 먹어 보지 못한 풀을 뜯어 보리라. 전에 마셔보지 못한 물을 마셔보리라, 그는 앞발을 잘 들여놓지도 않은 채 뒷발을 들여 올릴지 모른다.

 

그러면 그는 전에 가 본적이 없는 방향으로 가지 못할 것이고, 전에 먹어 보지 못한 풀을 뜯어먹지 못할 것이고, 전에 마셔보지 못한 물을 마셔보지 못할 것이다. 전에 가 본적이 없는 방향으로 가 보리라고 생각했던 그 장소로 안전하게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비구들이여, 그 산악의 소는 어리석고, 우둔하고, 들판을 모르고, 바위가 울퉁불퉁 돌출한 산을 걷는데 서투르기 때문이다.

 

(앙굿따라니까야, iv.418-19)

 

 

이 비유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한 마디로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자는 수행을 하여도 효과가 없다는 말이다.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하여 칠청정과 16단계 지혜를 얻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이 정신-물질과 원인-결과를 아는 것인데 이것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면 그 다음 단계로 가 보았자 실패할 것이고 헤메일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가장 먼저 해야 될 일은 나가 없고, 초월적 존재도 없고 창조주도 없고 오로지 물질-정신, 원인-결과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부터 수행은 출발된다고 하는 강력한 메세지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정신-물질, 원인-결과를 어떻게 아는 것일까.

 

왜 경행을 해야하나

 

흔히 수행한다라고 하면 도시의 오염원을 떠나 산 좋고, 물 맑고, 공기 좋은 심산 유곡에서 가부좌를 틀고 참선하는 것을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세간에서도 얼마든지 수행은 가능하다. 비록 세간에 있을지라도 출세간의 수행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런 수행의 첫 출발점은 경행을 하는 것이다. 열심히 절 수행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밋밋해보여서 도무지 수행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경행이야말로 위대한 수행이라고 한다.

 

흔히 수행처에서 하는 말은 정신-물질, 원인-결과를 아는 지혜는 경행에서 나온다고 한다. 한 발 한 발 내 딛었을 때 발바닥으로 부터 느끼는 감촉에 따라 우리몸이 물질을 느끼고, 그것을 아는 마음이 바로 정신임을 알게 해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행을 함으로서 우리의 몸과 마음은 오로지 정신-물질로만 이루어졌을 뿐 그 어디에도 내가 시켜서라든가, 초월적존재 내지 창조주가 개입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는 것이다.

 

더구나 발을 내딛으려는 의도가 일어나면 이는 원인이 되고, 발을 내딛었을 때 이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에 따른 것임을 알게 된다.

 

이렇게 경행을 통하여 정신-물질, 원인-결과를 아는 지혜가 열리는데, 이는 동시에 일어나고 사라짐의 생멸의 지혜도 알 수 있는 것이어서 경행은 여러 모로 위빠사나 수행에 있어서 해탈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매우 귀중한 수행방법이라 볼 수 있다.

 

그런 경행은 깊은 산속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아무곳에서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출세간적 수행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더 없는 행복

 

몸이 아프면 누군가에 의지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의지하는 순간 부처님의 가르침은 팔만사천리나 멀리 달아나 버린다. 초월적 존재나 창조주등에게 의지하여 기도하는 순간 부처님의 가르침인 해탈과 열반은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불자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일은 나라는 고정불변한 존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 부터 불교공부가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그 공부방법을 알려 주는 것이 경전이고, 이를 체계적으로 해설해 놓은 것이 청정도론같은 주석서이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빌거나, 의지하거나, 기도하는 순간 그런 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설한 제법이 무상함을 안다면 기도하지 않아도 병은 나을 수 있다고 한다.

 

병으로 인한 고통, 마음의 상처등 모든 것은 결국 일어나고 사라지고 마는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지켜보기만 해도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알아차리기만 모두 사라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아픈 곳을 주시하고 알아차리기만 하면 모두 사라지고 병이 치유되는데 굳이 초월적 존재나 창조주를 찾을 필요가 있을까.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부처님은 우리를 고통으로 구원해 주었고, 동시에 신의 속박으로 부터 해방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길도 제시해 주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한 것은 더 없는 행복이라는 것이다.

 

 

 

 

 

2011-07-0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