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빅쿠(bhikkhu)’의 조건은

담마다사 이병욱 2011. 7. 15. 16:48

 

 

 

빅쿠(bhikkhu)’의 조건은

 

 

 

 

 

 

 

 

 

 

나의 사소한 행위가

 

연일 비가 내리고 있다. 덕분에 그다지 덥지 않은 여름을 보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장마철이라고 불리우는 우기에 때론 태풍이 불어와 모든 것을 쓸어 버리고 지나가는 경우도 있는데, 그 태풍이 불기까지 나의 행위도 영향을 끼쳤을까.

 

흔히 북경에서 나비의 날개짓이 뉴욕에서 태풍으로 발전한다는 카오스이론(Chaos theory)’을 말하기도 한다. 이는 나의 사소한 행위가 어떻게 해서든지 주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이에 대하여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연기법으로 설명된다.

 

빠띳짜사뭅빠다(patticca-samuppada, 緣起法)

 

연기법은 다른 말로 조건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연기라는 말 자체가 조건에 따라 일어는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는 연기법의 빠알리어 어원에서도 잘 드러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연기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조건에 따라 생긴 법의 모임(dhamma-samuda)이 연기라고 한 것은 두 가지로 이해해야 한다. 이것에 도달하면(patiyamana) 이것은 이익과 행복으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그것에 도달할(pacetum) 가치가 있다고 현자들은 말한다. 그래서 빠띳짜(patticca, , 조건하여)라 한다. 일어날 때 함께(saha) 바르게(samma) 일어난다(uppajjati). 제각각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원인 없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사뭄빠다(samuppada, , 함께 일어남)라 한다. 이와 같이 조건하여() 일어나는 것을 연기(緣起, 조건하여 함께 일어남)라 한다.

(청정도론, 17장 통찰지의 토양)

 

 

연기에 대한 문자적 풀이를 해 놓은 것이다. 연기를 빠알리어로 빠띳짜사뭅빠다(patticca-samuppada)’라 하는데, 이는 조건하여 함께 일어나는 것을 연기로 보는 것이다. 이처럼 청정도론에서는 명쾌하게 연기에 대하여 문자적 풀이를 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원인없이 일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처녀가 애를 배어도 원인이 있기 때문에 동정녀 마리아의 수태는 연기법에 따르면 거짓이 되고 만다.

 

이처럼 연기법은 철저하게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른데, 그 가운데 하나를 더 넣는다면 조건이 된다. 따라서 원인-조건-결과라는 법칙이 형성되어서 이를 빠알리어로 헤뚜-빠띳짜-팔라(hetu-paticca-phala)’라 한다. 이를 한자어로 옮기면 인연과(因緣果)’가 될 것이다. 흔히 우리나라 선사들이 법상에서 말하는 인연법이라는 말은 인연과에서 유래 되지 않았을까.

 

운명은 바꿀 수 있다!

 

인연과에 대한 현대적 해석에 대하여 불교tv사이트에서 본 김응철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인()은 자신의 적극적인 의지작용이라 한다. 이는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를 말한다. 그런 행위는 주변환경()과 맞아 떨어졌을 때 하나의 결과()를 생성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전생의 지은 업에 따라 현생이 결정되는 것으로 보는 숙명론적 운명관으로 부터 탈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지금 자신의 행위로 인하여 주변환경에 좋은 영향을 주어 주어진 자신의 운명을 얼마든지 바꾸어 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반대로 그 역도 성립된다. 지금 자신의 행위로 인하여 주변환경에 악영향을 주어 나쁜 결과를 갖게 되었을 때 그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적극적 의미로서 인연과에 대한 가르침을 펼쳐서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개척해 나가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북경에서 나비날개짓이 어떤 식으로든지 주변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물며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는 주변에 강력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몸과 말로 짓는 행위는 결정적인데, 이런 행위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 경우는 누구나 한 번 쯤 경험하였다고 볼 수 있다.

 

너 진짜 맞는 수 있다

 

최근 포털사이트의 메인 뉴스에 너 진짜 맞는 수 있다라는 말에 대한 기사가 올려져 있어서 이에 대한 비판의 글이 넷상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여당대표가 질문하는 여기자에게 막말을 한 것이다.

 

이처럼 한 번 내 뱉은 말은 줏어 담기가 힘들다. 더구나 카메라, 디카등 취재도구등으로 무장한 기자들 앞에서 한 막말은 그 사람의 현재의 의식구조나 상황에 대한 인식의 태도를 고스란히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수습하려면 공개사과라는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다.

 

비단 정치인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그러한 상황과 조건이 조성된다면 입에서 얼마든지 튀어 나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말을 하여 원인()을 만들고 그리고 그런 말이 퍼져 나갈 수 있는 인터넷과 같은 조건()이 만들어져을 때 이제 결과()만 남은 것이다. 그 결과는 고통의 열매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왜 신업(身業)이 무거운가

 

말로 인하여 주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만 몸으로 하는 것에 비하면 약과이다. 몸으로 짓는 행위는 직접적인 타격을 가해기 태문이다. 요새 병영에서 구타로 인한 목매 자살하는 군인들에 대한 보도 또한 몸으로 직접적인 타격을 가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구타를 한다거나 물건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사망하게 하였다면 이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게 된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이러한 신업에 대하여 다음 생을 결정짓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생은 악처를말한다.

 

이처럼 몸으로 짓는 행위(身業)는 악처로 떨어지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런 신업은 어떤 것이 있을까.

 

일반적으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살인과 도둑질과 삿된 음행이다. 이들 세 가지 몸으로 짓는 행위는 가장 먼저 의도를 가지게 되는데, 이것이 의업을 짓는 것이 된다.

 

이런 의도는 때와 장소, 상황등 조건이 맞으면 구업과 신업을 짓게 된다. 그런데의도와 행위는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저 새끼 죽여버려야 겠어!”라고 마음속으로 의도 하였다면 아직 실행하지 않았으므로 다음 생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주요한 변수는 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조건이 맞아 떨어져 상대방을 죽였다면 이는 몸으로 짓는 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다음 생을 결정될 정도로 강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으로 짓는 의도 역시 말이나 몸으로 짓는 행위 못지 않게 악업을 짓는 것으로 보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

 

말을 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없다. 하지만 표정이나 동작은 숨기지 못한다. 싫으면 싫은 기색이 얼굴에 써 있어서 싫어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또는 행위나 분위기로서도 파악이 된다.

 

따라서 마음속에 담겨진 의도는 때와 조건이 맞으면 언제든지 말과 몸의 행위로 이어진다. 그런 행위는 받드시 업을 형성하여 미래의 태어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행위의 두려움을 아는 자는 윤회의 두려움을 아는 자라고 볼 수 있다.

 

행위의 두려움을 아는 자, 윤회의 두려움을 아는 자는 몸과 말과 마음으로 업을 짓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런 자들을 불교에서는 비구라고 한다. 비구는 빠알리어 빅쿠(bhikkhu)의 음사인데, 그 어원을 보면 다음과 같다.

 

 

“윤회에서(sasāre) 두려움을(bhaya) 보기(ikkhati) 때문에 비구(bhikkhu)라 한다.

(청정도론, 1 7, Vis..7)

 

 

청정도론에서 문자적으로 두려움(bhaya, 바양)과 보는 것(ikkhati, 익카띠)을 합쳐서 비구(bhikkhu , 빅쿠)라고 설명하였다. , 비구는 윤회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윤회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윤회를 종식하기 위하여 수행을 하는 자라고 볼 수 있다.

 

도를 닦는 자는 누구나 빅쿠(bhikkhu)’

 

이처럼 문자적 의미로 본 비구는 누구나 윤회하기를 원하지 않으면 꼭 출가수행자가 아니더라도 비구로 볼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실제로 이런 견해는 디가니까야 주석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

 

 

“비구라는 것은 수행(paipatti)을 성취할 사람을 나타내는 술어이다. 물론 천인들이나 인간들도 도를 이를 수 있지만 비구가 되는 것이 도를 닦는데 가장 수승하다고 보기 때문에 ‘비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 그리고 도를 닦는 자는 누구나 비구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수행을 통해서도 비구의 신분을 보기 때문에 비구라고 말씀하셨다. 도를 닦는 자는 천인이든 인간이든 모두 비구라는 명칭을 가지게 된다.(DA.iii.755)

(마하시 사야도의 12연기 대한 주석서에서, 김한상역)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인간은 물론 천신에 이르기 까지 누구나 도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계를 받아 비구가 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한다.

 

그런데 디가니까야의 주석서에 따르면 도를 닦는 사람들은 누구나 비구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비구계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의 차이일 뿐 인간이나 천신 모두 윤회의 두려움, 즉 행위의 두려움을 아는 자들도 비구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비록 재가불자도 윤회의 두려움을 알고, 행위의 두려움을 안다면 비구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암발랏티까라훌라와다경(Ambalatthika-rahulovada Sutta, M61)에서

 

한 번 말을 내뱉고 나면 주워 담기 어렵다. 또 한 번 신체적 폭력을 행사하면 그 상처는 매우 오래 간다. 그 이면에는 반드시 의도가 개입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이런 행위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까. 부처님은 어린 라훌라에게 주는 가르침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라훌라야, 거울은 뭐하는 데 쓰는 거지?”

 

비춰보는 데 씁니다. 부처님.”

 

마찬가지로 라훌라야, 반복해서 네 자신을 비추어 돌아본 후에 행동을 해야 하고, 반복해서 네 자신을 비추어 돌아본 후에 말을 해야 하고, 반복해서 네 자신을 비추어 돌아본 후에 생각을 하여야 한다.”

(맛지마니까야 :61, 암발랏티까라훌라와다경- Ambalatthika-rahulovada Sutta: Instructions to Rahula at Mango Stone,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부처님이 어린 라훌라를 교육시키는데 있어서 빈 물그릇의 교훈과 함께 위와 같이 거울의 교훈을 설하였다.  행동이나 말이나 생각을 할 때 자기자신을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한 번 더 생각하라는 것이다.

 

마음의 거울이 있다면

 

거울은 거짓없이 그대로 나의 몸을 비추어 준다. 거울이 숨겨주거나 가려 주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그런 거울을 사람들은 매일 보는데, 여성의 경우 자신의 미모를 확인하며 흐믓한 미소를 짓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남성의 경우 역시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고 만족해 할 지 모른다.

 

하지만 마음의 거울을 비추어 보았을 때 과연 모두 다 예쁜 얼굴에 듬직한 모습일까. 마음에도 얼굴이 있다면 어떨까. 마음의 거울에 자기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 보았을 때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웃는 모습은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탐내는 모습은 추한 형태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더구나 화를 내는 모습은 악마의 얼굴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런 마음의 거울이 있다. 아비담마라는 마음의 거울이다.

 

아비담마에서는 심리현상을 52가지로 분류 하였다. 그 중에 아름다운 마음도 있고 해로운 마음도 있다. 예를 들어 연민(karuna), 더불어 기뻐함(mudita), 양심(hiri), 탐욕없음(alobha), 성냄없음(adosa)등과 같은 마음은 아름다운 마음이다. 이런 마음은 19가지나 되는 데 이런 마음을 내는 마음의 얼굴은 아름다울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탐욕(lobha), 자만(mana), 성냄(dosa), 질투(issa), 의심(vicikacca)등은 어떨까. 아마도 그 단어에 걸맞는 얼굴의 이미지가 떠 오를지 모른다. 이런 해로운 마음이 14가지나 된다고 아비담마에서는 설명한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아무리 미인이라도 화를 내고 질투하는 모습을 보면 추하고 혐오스럽다. 하지만 평범한 외모일지라도 자애와 연민과 더불어 기뻐 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보는 것 만으로도 행복을 느낀다.

 

부처님은 라훌라에게 행동을 할 때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되돌아 본 다음에 행동하라고 하였다. 왜 그렇게 말씀 하셨을까. 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라훌라야, 네가 행동을 하려고 할 때 이와 같이 네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내가 하려는 행동이 나에게 해로움을 주지 않을까? 또는 남에게 해로움을 주지 않을까? 또는 나와 남 모두에게 해로움을 주지 않을까? (혹시)이 행동이 좋지 못한 행동으로 고통스런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을까? 라고 돌아 보아야 한다.

(맛지마니까야 :61, 암발랏티까라훌라와다경,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이는 행위의 두려움을 말한것이라고 볼 수 있다. 행위의 두려움을 아는 자는 함부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행위로 인하여 새로운 업을 쌓게 되어 윤회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여 행위룰 할 수 밖에 없다. 그 행위가 나 뿐만아니라 타인에게도 해로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번 툭 던지 말 때문에 아파트에서 투신하였다든가 한 번 성 폭력으로 인하여 평생을 마음속의 응어리를 맺고 살아 갔다는 이야기등이 그것이다.

 

다 속일 수 있어도 자기자신만은

 

그와 같은 말과 행동으로 인하여 상대방도 고통 받지만 동시에 그런 악행을 되새기는 자신도 고통을 받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는 다 속일 수 있어도 마음의 거울로 보는 자기자신은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담마빠다(Dhammapada, 법구경)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이 세상에서도 그는 고통당하고

다음 세상에서도 그는 고통당한다.

이처럼 악한 행동을 한 사람은

양쪽 세상 모두에서 고통을 겪는다.

나는 악행을 저질렀구나 하는 정신적 고통을 느끼고

지옥에 태어나 또다시 고통을 겪는다.

(담마빠다, 17번 게송, 거해스님역)

 

 

악한 행위를 저지르면 고통을 받을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그가 스스로 잘 못되었음을 아는 것이다. 살인을 하였다면 마음속에서 그 행위가 남아 있어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언제 어드서든지 생각이 떠 오르게 될 것이다.

 

그 때 그 떠오른 생각으로 인하여 정신적 고통을 느끼고, 그런 느낌은 매우 강렬한 것이기 때문에 죽음에 임박하여도 가장 먼저 떠 오를 것이다. 그런 고통을 느끼며 마지막 죽음의식이 일어 났을 때 그 고통스런 느낌과 함께 하는 세계로 떨어져 계속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쁜 짓을 저지르면 이 쪽 세상에서도 고통받고 저 쪽 세상에서도 역시 고통받을 것이기 때문에 양쪽 세상에서 모두 고통받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어떻게 반조할 것인가

 

악한 행위는 반드시 고통을 수반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행동하기 전에 반드시 되돌아 볼 것을 말씀 하셨다. 또 자신이 하는 행동이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서도 반조해 볼 것을 말씀 하셨다. 이에 대하여 암발랏티까라훌라와다경을 참조하면 다음과 같은 12가지 경우의 수가 나온다.

 

 

 

No

 

     

1

행동하려 할 때

내가 하려는 행동이 나에게 해로움을 주지 않을까?

2

내가 하려는 행동이 남에게 해로움을 주지 않을까?

3

내가 하려는 행동이 나와 남 모두에게 해로움을 주지 않을까?

4

좋지 못한 행동으로 고통스런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을까?

5

행동하고 있을 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나에게 해로움을 주고 있지는 않은가?

6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남에게 해로움을 주고 있지는 않은가?

7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나와 남 모두에게 해로움을 주고 있지는 않은가?

8

좋지 못한 행동으로 고통스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닐까?

9

행동한 후

내가 한 행동이 나에게 해로움을 가져오지는 않았는가?

10

내가 한 행동이 남에게 해로움을 주지는 않았을까?

11

내가 한 행동이 나와 남 모두에게 해로움을 주지는 않았을까?

12

좋지 못한 행동으로 고통스런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았을까?

 

 

이처럼 주의 기울여 되돌아 보았을 때 나와 남에게 해로움을 주고, 고통을 주는 것이라면 해서는 안되고, 선한행동이라면 해도 좋다는 것이다.

 

만일 좋지 못한 행동을 하여 나와 남 모두에게 해로움을 주고 고통스런 결과를 받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이 행동은 좋지 못한 행동으로 고통스런 결과를 가져왔다라고 안다면, 그 때는 그런 행동을 함께 수행하는 지혜로운 동료나 스스에게 고백하고 드러내 보여야 한다. 그런 행동을 고백하고 드러내 보이고 열어 보이기 때문에 앞으로 조심하게 된다.

(맛지마니까야 :61, 암발랏티까라훌라와다경,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자신의 행위가 자신 뿐만 아니라 남에게 해로움을 주고 고통을 주는 행위이었음을 안다면 곧바로 참회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는 그런 행위가 발생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알아차리면 되는 것으로 본다.

 

사람들은 매일 매일 업을 지으며 살아간다. 그 업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천수경의 참회게에서 보듯이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주로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이다.  또 그것은 개유무시탐진치(皆由無始貪瞋痴)’라 하였다. 모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초기경전에서도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에 대하여 수 없이 언급되어 있는데, 그 중에 암발랏티까라훌라와다경(Ambalatthika-rahulovada Sutta)에 따르면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 반조함이 없이 하는 행위는 고통을 가져 올 것이라 하였다. 마치 거울을 들여다 보듯이 지금 심리상태를 마음에 거울에 비추어 보면 마음의 얼굴이 보일 것이라는 것과 같다.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 자, 행위의 두려움을 보는 자

 

성내는 사람에게 마음의 거울을 들여다 보게 하면 깜짝 놀라 나자빠질지도 모른다. 그 얼굴은 늘 평상시에 자신의 미모를 확인하던 그 얼굴이 아니라 마귀나 악마가 하나 들어가 있는 얼굴로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마귀나 악마가 되어 행동을 하였을 때 남에게 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성내는 자신이 더 고통받게 된다. 더구나 신체적 위해를 가하였을 때 그것은 다음 생을 결정할 정도로 직접적 원인이 되기 때문에 더욱 더 고통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생각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스스로 일어나듯이 악행으로 인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신작용 역시 스스로 일어나 이를 되새길 때 마다 정신적으로 몹시 고통스러워 할 것이다.

 

이런 행위야말로 윤회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청정도론에서는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 자비구라고 하였다. 그런데 윤회의 두려움은 바로 행위에서 나오기 때문에 비구는 또한 행위의 두려움을 보는 자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 비구는 반드시 출가대중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든 천신이든 간에 행위의 두려움을 알고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 자들은 모두 비구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2011-07-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