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인연없는 중생은...”최초의 불제자가 될 뻔한 우빠까(upaka)

담마다사 이병욱 2011. 7. 18. 13:43

 

 

 

인연없는 중생은...”최초의 불제자가 될 뻔한 우빠까(upaka)

 

 

 

정서적 불자로 보내다가

 

불교에 거의 잊고 살던 시절이 꽤 길었다. 하지만 중학교시절 접한 불교로 인하여 마음속으로는 항상 불자이었다. 그래서 각종 서식의 종교란에 종종 불교라고 썻었다.

 

이렇게 정서적 불자로 오래 보내다가 세상일이 뜻대로 되는 것 같지 않아 본격적으로 불교에 대하여 믿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갈만한 절을 찾아 보았으나 도시에서 절은 구경하기 힘들었고, 설령 있다고 해도 규모도 작고 옹색해 보일 뿐만 아니라 자꾸 점집이 연상되어서 도무지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 채로 또 세월이 한참 흘러 갔다.

 

불교공부를 하고 싶어서

 

그렇게 세월만 보내면 안 될 것 같아 가까운 관악산에 있는 절을 찾아 갔었다. 등산객들에 무료로 국수공양주기로 유명한 전통사찰이다. 그 절에서 스님을 만나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 기념품을 파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불교공부를 하고 싶다고 용기를 내어서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공부를 가르치는 곳은 아니고 기도만 하는 기도도량이라고 하였다. 불교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기도를 한다는 것이 도무지 이치에 맞을 것 같지 않아 혹시 불교공부를 가르쳐 주는 곳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몇 군데 알려 주었는데, 모두 다른 시에 있는 곳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는 생활인들에게 다른 시까지 가서 공부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맞지 않아 가능하지 않는 것이었다. 또 그렇게 세월이 흘러 갔다.

 

인연맺으로 오셨습니다

 

더 이상 그런 상태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아 근처의 작은 절에 찾아 갔다. 그린벨트내에 있어서 마치 일반 주택을 연상하는 절이었다. 주지스님이 비구니이고, 신도들은 보살들 뿐이었다.

 

용기를 내어 들어 갔더니 어느 보살이 주지스님에게 말하기를 어떤 처사님이 인연을 맺으로 오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절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너무나 초라하고 옹색하고 보잘 것 없을 뿐만아니라 비구니스님과 보살 일색이어서 도무지 다닐 마음이 나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때 들은 인연맺으로 오셨습니다는 말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인연(因緣)이란

 

사람들은 누구나 인연을 맺으며 살아 가고 있다. 그런 인연은 어쩔 수 없이 맺어질 수 밖에 없는 숙명적인 것도 있고, 자신의 의지대로 만들어 가는 것도 있다.

 

부모 자식간의 인연은 운명론적 내지 숙명론적이라고 볼 수 있다. 자기자신의 의지로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자신의 의지대로 자식 또한 선택할 수 없다. 다겁생래의 어떤 조건이 무르익어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 친척간의 인연이 형성되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삶의 과정에 있어서 인연은 자신의 하기에 달려있다. 이미 형성된 인연은 어찌 할 수 없지만 미래의 결과로 이어질 인연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신이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고객을 확보하기 위하여 열심히 뛰어 다닐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하는 일을 알리고 명함을 남기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씨를 뿌리는 과정이다. 광고도 마찬가지이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광고를 내 보냄으로서 하나의 연이 형성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 인연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일까. 국어사전으로 본 인연은 세 가지로 표현되어 있다.

 

 

인연(因緣)

 

1)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

2)어떤 사물과 관계되는 연줄.

3)내력 또는 이유.

 

 

인연이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가 주된 설명이다. 또 사람들 뿐만 아니라 사물들과의 관계도 인연으로 보는 것이다.

 

 

인연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인연 [hetu-pratyaya]

인은 결과를 산출하는 내적·직접적 원인이며, 연은 결과의 산출을 도와주는 외적·간접적 원인이다. 여러 가지 원인 가운데 주된 것이 인이며, 보조적인 것이 연이다. 또 인을 넓게 해석하여 인과 연을 합해 인이라고도 하고, 반대로 연을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모든 존재는 인연에 의해 생겼다가 인연에 의해 멸한다.

출처; 브리태니커

 

 

인연은 불교용어

 

인연은 불교용어이다. 그래서 헤투-프라트야야(hetu-pratyaya)라는 산스크리트 용어를 사용 하였는데, 이를 빠알리어로 말하면 헤뚜 빳자야(hetu-paccaya)’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헤뚜(hetu)원인을 말하고, 빳자야(paccya)조건을 말한다. 그래서 원인과 조건을 인연이라고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는 이러한 인연에 대하여 ()’내적 직접적원인이라 하였고, ‘()’에 대하여 외적 간접적 원인이라 하였다. 인과 연을 모두 원인으로 설명한 것이다.

 

그런 원인은 반드시 결과를 산출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연은 결과가 도출되기 전 단계라 볼 수 있다. 사업하는 사람이 자신이 하는 일을 알리기 위하여 열심히 명함을 돌리는 행위 역시 명함을 보고 전화가 걸려 오기를 바라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첫 만남은 앞으로의 결과를 전재로한 만남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수 많은 만남에 있어서 어떤 성과가 나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단지 인연으로 끝날 수도 있다. 설령 어떤 성과로 이어졌다고 할지라도 그 결과에 따라 좋은 인연(善緣)도 될 수 있고, 나쁜 인연(惡緣)도 될 수 있다. 실제로 그런 현상을 주위에서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모태신앙

 

인연이 내적 직접적원인외적 직접적원인의 결합어라고 매우 현학적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를 또 달리 표현하면 자신의 의지작용이라 볼 수 있고, ‘주변의 환경적 요인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적극적 의미에 있어서 인연은 자신이 주변환경을 어떻게 활용하느가에 따라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어진 여건을 잘 활용하여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된다. 공부를 하는 것도 그렇고, 사업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라 본다. 종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이는 태어나면서 종교를 갖게 되었다는 모태신앙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는 매우 운명론적이고 숙명론적이라 볼 수 있다. 마치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 형제자매와의 관계처럼 종교또한 자동적으로 가지게 될 수 밖에 없다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삶을 수동적으로 숙명론적으로 살 가능성이 많이 있다.

 

하지만 종교선택에 있어서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임한다면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우빠까가 만난 부처님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는 것도 인연이 작용해서 일 것이다. 어떤 이는 모태신앙의 인연으로 접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이는 우연히 접하여 인연을 맺게 된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것은 적극적인 인연을 맺었을 때 일 것이다. 스스로 가르침을 찾아 인연을 맺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최초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은 누구일까. 일반적으로 꼰단냐등 부처님과 수행을 같이 하였던 다섯비구들로 본다. 그런데 그에 앞서 최초로 인연을 맺을 뻔한 사람이 있었다. 경전에서는 그 사람의 이름을 우빠카(upaka)라 한다. 우빠까가 만난 부처님은 어떤 분 이었을까.

 

젊은 시절 부처님 모습은

 

부처님은 어떻게 생겼을까. 역사적으로 실존하였던 부처님의 모습을 그려 보는 것도 불자라면 한 번 쯤 생각해 볼 일이다. 물론 법당에 가면 부처님을 볼 수 있지만 실재로 어떻게 생겼는지 무척궁금하다. 더구나 젊은 시절의 모습은 어땠는지 더욱 더 궁금하다.

 

그런데 부처님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가 나라시하가타(Narasiha Gatha, 人中子偈) 라는 게송으로 부처님당시 부터 구전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이 게송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시고 난 다음 까삘라왓뚜를 방문하였을 때 야소다라왕비가 나이 어린 라훌라에게 들려 주기 위하여 읊은 게송이라고 한다.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 전승되어 온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라시하가타(Narasiha Gatha, 人中子偈)

 

1.

붉은 성스러운 두 발은 탁월한 법륜으로 장식되고,

긴 팔꿈치는 성스러운 징표들로 치장되셨고,

발등은 불자(拂子)와 양산으로 분장되셨으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2.

우아하고 고귀한 석가족의 왕자님,

몸은 성스러운 징표로 가득 차시고,

세상의 이익을 위하는 사람 가운데 영웅이시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3.

얼굴 빛은 보름달처럼 빛나고 하늘사람과 인간에게 사랑받으며,

우아한 걸음걸이는 코끼리의 제왕과 같으시니 인간 가운데 코끼리,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4.

왕족으로 태어난 귀족으로서 하늘사람과 인간의 존귀함을 받는 님,

마음은 계율과 삼매로 잘 이루어진 님,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5.

잘 생긴 코는 길고 두드러지며, 속눈썹은 젊은 여자의 것과 같고,

눈은 사파이어의 푸른빛이고, 눈썹은 무지게 같으시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6.

잘 생긴 목은 둥글고 부드러우며, 턱은 사자와 같고,

몸은 짐승의 왕과 같고, 훌륭한 피부는 승묘한 황금색이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7.

훌륭한 목소리는 부드럽고 깊고,

혀는 주홍처럼 선홍색이고,

치아는 스무개씩 가지런히 하야시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8.

아름다운 머리카락은 칠흙같은 심청색이고,

이마는 황금색 평판처럼 청정하고 육계는 새벽의 효성처럼 밝게 빛나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9.

많은 별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달이 창공을 가로지르는 것처럼

수행자들의 제왕은 성스러운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이분이 참으로 당신의 아버지 인간의 사자이시옵니다.

 

(전재성박사 번역)

 

 

불상으로 본 젊은 날의 부처님

 

우리나라 불자들이 알고 있는 32 80종호와는 약간 다름을 알 수 있다. 머리카락은 칠흑같이 어두운 심청색이고, 눈은  사파이어 같은 푸른색이고, 피부는 황금처럼 빛나는 금색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얼굴은 보름달처럼 빛난다고 하였다.

 

이는 젊은 시절 부처님의 특징을 잘 나타내 준다.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성취한지 얼마 안되는 부처님의 모습은 달덩이 처럼 훤하게 빛나 보였음에 틀림없다.

 

그런 모습을 야소다라 왕비가 부처님의 탁발하시는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 보고 부처님의 훌륭한 인품과 높은 덕성에 감탄하여 여덟개의 게송으로 읊은 것이라 한다.

 

이런 젊은 날의 부처님의 모습은 불상의 형태로도 표현 되었다. 그런 부처님상은 아마도 사르나트에서 발견된 다음과 같은 불상일 것이다.

 

 

 

 

젊은 날의 부처님

4세기 인도 사르나트의 불상

A statue of the Buddha from Sarnath, 4th century CE

Buddha in Sarnath Museum (Dhammajak Mutra)

사진 Gautama Buddha

 

 

 

 

누구든지 몸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을 보면 달덩이 처럼 훤하게 보인다. 부처님도 마찬가지이었을 것이다. 이제 막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한 눈에 범상하지 않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미가다야(Migadaya,鹿野苑)로 가는 길에

 

그런 부처님이 범천의 권청에 따라 자신이 깨달은 내용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하여 길을 떠 났는데, 가장 먼저 같이 고행하였던 꼰단냐, 앗사지등 다섯수행자를 떠 올리면서 바라나시의 미가다야(Migadaya,鹿野苑)를 항하여 길을 떠났다.

 

그 때 아지와까교도인 우빠까를 만난 것이다. 우빠까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대의 감관은 매우 깨끗하고 모습은 아주 밝습니다. 그대는 누구를 모시고 있으며, 그대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또 그대는 누구의 법을 따르고 있습니까?”

 

(맞지마니까야, 아리야빠리예사나경, Ariyapariyesana Sutta: The Noble Search , MN 26  PTS: M i 160, 고귀한 구함의 경)

 

 

우빠까의 눈에 보이는 부처님의 모습은 한 눈에 보아도 깨달은 사람처럼 보여서 스승이 누구이고 어떤 가르침인지 물어 본다. 수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ala)는 대답하기를

 

그런데 우빠까는 스승이 있었다. 그의 스승은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ala)이다.

 

막칼리 고살라는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 중의 하나인 아지와까(Ājīvika)교단을 이끌고 있었다.  이 교단은 니간타 나타뿟타(Nigantha Nataputta)의 자이나교도와 비슷한 교설을 펼쳤는데, 이들도 역시 나체수행자들이었다.

 

이들 수행자들을 중국에서는 유행자(遊行者)라 번역하였고, 영어로는 wondering ascetic이라 한다. 또 아지와까교단을 사명외도(邪命外道)라고도 하는데, 교주 막칼리 고살라가 펼친 주장이 초기경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막칼리 고살라는 대답하기를,

사람을 타락시키는 어떤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사람을 정화시키는 어떤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원인도 조건도 없이 타락되기도 하고 정화되기도 한다. 나 자신의 행동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도 없고, 남의 행동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도 없고,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도 없다.

 

(디가니까야: 2 사만나팔라경, DN 2: Samaññaphala Sutta — The Fruits of the Contemplative Life {D i 47} [Thanissaro].)

 

 

이와 같은 막칼리 고살라의 견해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숙명론이라고 한다.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존재에 대하여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생활도 그대로 내버려 두면 되는 것이고, 그렇게 오랜세월을 윤회하다 보면 스스로 잠에서 깨듯이언젠가 해탈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업을 자유의지로 해석하는 불교의 연기론적 업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래서 숙명론적인 관점을 가진 아지와까교도들을 사명외도라 하여 혹평한 것이다.

 

나는 모든 것에서 승리한 자

 

유행방랑사문인 우빠까가 부처님의 빛나는 형상을 보고 스승이 누구이고 어떤 가르침인지를 묻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답하였다고 한다.

 

 

 ‘나는 모든 것에서 승리한 자,

일체를 아는 자,

모든 상태에 오염되는 것이 없으니

일체를 버리고 갈애를 부수어 해탈을 이루었네.

스스로 알았으니 누구를 스승이라 하겠는가.

 

나에게는 스승도 없고 그와 유사한 것도 없네.

하늘과 인간에서 나와 견줄만한 이 없어

나는 참으로 세상에서 거룩한 이, 위없는 스승이네.

 

유일한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자로서 청량한 적멸을 얻으니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위하여 까씨성으로 가네.

눈 먼 세계에서 감로의 북을 두드리리.

 

(맞지마니까야, 아리야빠리예사나경, Ariyapariyesana Sutta: The Noble Search , MN 26  PTS: M i 160, 고귀한 구함의 경, 전재성박사역)

 

 

이렇게 부처님은 스승이 없다고 하였다. 위 없는 바른 깨달음(무상정등각)을 얻었으니 바로 자신이 스승이고 승리자라고 하였다.

 

담마빠다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은 게송은 맞지마 니까야 뿐만 아니라 담마빠다에서도 볼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Sabbābhibhū sabbavidūhamasmi            삽바비부 삼바위루하마스미

sabbesu dhammesu anūpalitto               삽베수 담메수 아누빨릿또

sabbañjaho tahakkhaye vimutto            삽반자호 딴학카에 위뭍또

saya abhiññāya kamuddiseyya          사양 아빈냐야 까묻디세이양.

 

나는 모든 것을 이겼고, 모든 것을 알았으며,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일체의 착하지 않은 행위를 포기했고,

또한 모든 욕망을 부수었나니, 나는 아라한을 성취했도다.

내 스스로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여 위없는 지혜를 지녔거니

어느 누구를 스승으로 삼으랴?

 

<담마빠다(Dhammapada, 法句經) 353번 게송>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이런 부처님의 말씀에 대하여  우빠까는 반신반의 하면서 벗이여, 무한 승리자가 될 만하다고 자인하는가?”라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번뇌가 부수어지면 그들도 나와 같은 승리자가 되리. 악한 것을 정복하여, 우빠까여, 나는 승리자가 되었네.”라고 답한다. 

 

이렇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빠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초기경에서 전한다.

 

 

‘벗이여, 그럴지도 모르지.’라고 말하고

머리를 흔들며 샛길로 사라졌다.

 

(맞지마니까야, 아리야빠리예사나경, Ariyapariyesana Sutta: The Noble Search , MN 26  PTS: M i 160, 고귀한 구함의 경, 전재성박사역)

 

 

 

 

 

방랑수행자 우빠까(upaka)

사진 http://the-wanderling.com/addendum.html

 

 

 

 

우빠까는 이제 막 무상정득각을 얻은 부처님과 만난 최초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도 있겠군요하며 머리를 흔들고 숲으로 사라졌을 때 불가에서 흔히 하는 말이 인연없는 중생은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숙명론을 특징으로 하는 아지와까교도인 우빠까가 좀 더 적극적으로 인연을 맺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고, 어떤 노력으로도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고 보는 스승 막칼리 고살라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우빠까에게 그럴 수도 있겠군요하면서 스스로 인연을 맺지 않은 것이다.

 

우빠까로 보아서는 참으로 만나기 어려운 좋은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놓치고 말았다. 만일 그 때 부처님께 귀의 하였더라면, 아마도 그는 최초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을 것이다.

 

바른 법(正法, saddhamma)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기 어렵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맹구우목(盲龜遇木)’의 비유로도 설명한다. 그런데 부처님의 바른 법(正法, saddhamma)’을 만나기는 더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법이란 어떤 것일까. 마하시 사야도의 12연기 주석서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삿담마(saddhamma)에서 sad/sat는 주로 합성어의 앞에 놓여서 ‘바른, 참다운, 진실한’ 등의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 sad(바른)+dhamma()으로 분해되며 ‘바른 법, 참된 법, 정법(正法)’을 뜻하고 주석서들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바른 법은 교학(pariyatti), 수행(paipatti), 통찰(paivedha)의 세 가지 측면으로 나뉜다.

 

(1) 교학(pariyatti, 빠리얏띠)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이 기록된 삼장(ti-piaka)을 공부하는 것이고,

(2) 수행(paipatti, 빠띠빳띠)이란 계·정·혜 삼학을 닦는 것이며,

(3) 통찰(paivedha, 빠띠웨다)이란 출세간도를 통찰하고 성스러운 과를 증득하는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12연기 주석, 김한상역)

 

 

만일 교학만 있고 수행이 없다면 정법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유일신교가 좋은 예일 것이다. 반면 수행은 있는데 교학이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소위 도를 닦는다는 단체들을 말한다. 이 또한 정법이 아님에 틀림 없다.

 

그런데 교학도 있고 수행도 있는데, 해탈과 열반이라는 출세간의 도를 지향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불교는 불교인데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불교라고 볼 수 있다. 이 또한 정법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인연없는 중생은 제도할 수 없다!”

 

사람들은 정법이 있는 줄 조차 모른다. 더구나 불자들은 정법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우빠까처럼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는 인연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인연은 만들기 나름이다. 번뇌를 부수고 승리자가 되려면 바른 법을 만나야 하는데, 정보통신과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 정법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바른 법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따르지 않는다면 인연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인연없는 중생은 제도할 수 없다!”와 같은 말이 나왔을 것이다.

 

 

 

 

2011-07-1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