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열반에 대한 논의(nibbanakatha)

담마다사 이병욱 2011. 7. 22. 22:31

 

 

 

열반에 대한 논의(nibbanakatha)

 

 

 

 

한글 반야심경의 두 가지 오류

 

매일 아침 불교방송에서 동일 시간대에 듣는 방송이 있다. 한글 반야심경이다. 우리말로 된 경전보급의 일환일까 벌써 일년정도 내 보내고 있는 방송을 들으니 이제 꽤 익숙해 졌다.

 

그런데 불교강좌를 진행하고 있는 스님이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한문으로 된 경전을 우리말 하는데 있어서 좀 더 숙고하지 못한 번역에 관한 것이다.

 

하나는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에 있어서 공상이다.  이 공상이 모든 공한 모양이라 하였는데, 이는 공을 형상화 하는 오류를 범하였다는 것이다. 공이란 모양도 없고, 맛도 없고, 냄새도 없어서 그저 공한 것일 뿐인데, 공상(空相)공한 모양이라고 표현한 것은 잘 못 되었다는 것이다. 올바른 번역은 공의 특징이라고 해야 맞는다고 한다.

 

또 한가지오류는 공중무색(空中無色)에서 공중이라는 단어의 번역에 관한 것이다. 한글반야심경에서는 이를 공 가운데서는 물질도 없고라 하였는데, 공이라는 것이 방향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 못 되었다는 것이다. 공이라는 것이 동서남북이 있다든가 위 또는 아래, 가운데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공중(空中)공 가운데로 번역하기 보다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라고 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비우고 또 비워서

 

반야심경은 대승경전의 진수라 한다. 이는 다름 아닌 공사상을  매우 짧은 문구로 압축하여 잘 표현해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공사상을 불자들이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공을 이해하려면 그 공을 이해하려는 마음까지 공해야 하고, 또 그 공 또한 공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공공공....”해야 되는 것이라 한다. 이렇게 비우고, 내려 놓아서 한 없이 천착해 들어 갈 때 비로소 진짜 공(眞空)을 체득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

 

그런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너와 남을 구별하는 이분법은 의미가 없고, 더구나 성인들이 설한 진리의 말씀조차 공한 것이 되고 만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이다.

 

부처님이 설한 근본가르침인 12연기와 사성제 역시 공한 것이라서,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空中),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는 것(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이 되고 만다. 사성제 역시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空中),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는 것(無苦集滅道)이 되고 만다.

 

이처럼 공의 세계에 들어가면 모두 공한 것이 되고 마는데, 이는 문자나 언어로 진리를 표현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자나 언어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진리를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대기설법(大機說法 , pariyāya-desanā)

 

부처님은 수 많은 가르침을 남겼다. 그런 가르침을 모아 놓은 것이 니까야인데, 일반적으로 8 4천개에 달하는 법문이라 한다. 그런 가르침의 특징을 보면 중생의 수준에 따라 다양한 법을 설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대기설법(大機說法 pariyāya-desanā)이라 한다.  이를  또 다른 말로 방편설(方便說)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처음 입문하는 재가자들 또는 법을 잘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보시(danā), 지계(sīla), 생천(sagga)을 설하셨고, 법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게도 그 사람의 근기에 맞게 다양하게 법을 설하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의 내용을 보면 자비실천에 관한 가르침도 볼 수 있고, 현실직시의 가르침도 있고, 평등의 가르침, 마음챙김수행의 가르침등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궁극적 목표는 항상 열반이었다.

 

멸성제와 열반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열반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범부가 알 수 있는 경지도 아니고, 책을 통하여 이해 할 수 있는 경지도 아니라고 한다. 반드시 수행을 통하여 체득할 수 있는 경지라 한다. 그런 열반은 사성제에서 설명된다. 사성제중 멸성제가 바로 열반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궁극적인 뜻에서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런 진리란 열반을 말한다.

(청정도론, 16장 기능과 진리, 65)

 

 

고통과 고통의 원인, 고통의 소멸,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인 사성제인데, 고통의 소멸이 바로 열반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열반임에 틀림없다. 그런 열반에 이르기 위한 방법이 도성제이고 이는 다름이닌 팔정도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오로지 열반에 집중될 수 밖에 없다. 그런 열반은 어떤 것일까.

 

공성(sunyata)이란

 

청정도론에 열반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다. 멸성제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열반의 논의(nibbanakatha)’ 대한 글이다. 제목을 왜 논의라고 하였을까. 아마도 대승불교와 힌두교의 영향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청정도론이 쓰여질 당시가 5세기인데, 이 때 쯤이면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널리 퍼져 나갔고, 브라만교 또한 힌두이즘이라는 이름으로 환골탈태되어 있었다. 대승불교의 경우 용수(Nagarjuna, 150~250)에 의하여 공사상에 대한 이론이 완성 되었는데, 이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비판하고 성립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용수의 공사상은 어떤 것일까. 권오민 교수가 번역한 인도불교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불교의 근본진리인 연기를 생멸, 거래(去來), 일이(一異), 단상(斷常)의 대립을 넘어 선 것(八不)으로 해석하여 어떤 고정적인 견해에 집착하는 모든 것을 철저하게 파기하였는데, 이 파기의 논리를 공()이라 하며, 이러한 공성(sunyata)이 바로 연기라는 사실을 밝혔다.

(인도불교사, 10, 121p, 권오민교수역, 경서원)

 

 

이와 같은 공성은 제법무자성에 근거를 두고 있었는데, 이는 설일체유부의 법일체설에 대한 반박의 의도로 만들어 졌다고 볼 수 있고, 그에 따라 연기는 무자성이고, 곧 공이라는 논리를 주장하였다. 즉 연기=무자성=공의 등식으로 본 것이다. 이것이 대승에서 말하는  모든 법의 실상이라는 것이다.

 

진리조차 공한 것으로

 

이런 논리는 반야심경에서도 그대로 나타나서 공의 입장으로 보았을 때 12연기와 사성제와 같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마저 공한 것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초기불교에서 법을 보는 관점은 설일체유부와 다르다.

 

모든 구경법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공상과 법의 고유의 특성인 자상을 갖기 때문에 유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법이 항상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불교에서는 공의 논리로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인 12연기와 사성제를 비판하였는데, 특히 사성제를 공의 입장에서 없는 것이라 하였다면 이는 멸성제도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멸성제는 다름 아닌 열반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반야심경에서는 결국 열반을 부정하였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대승불교에서 열반을 부정하였다는 것은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였다는 것과 같다. 이는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문자나 언어로 정확하게 나타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나 뜻으로 밖에 진리가 전달될 수 밖에 없다는 논리이고, 또 하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불완전하게 본 것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대승불교에서 노골적으로 강조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한 이유

 

무비스님은 이 시대의 대강백이다. 그런 스님의 강의를 최근 불교TV사이트에서 들을 수 있었다. 서장 첫 번째 강의에서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불교의 탄생은 부처님이 성도한 이후 그 성도의 내용을 다시 말해서 깨달음의 내용을 녹야원에서 다섯비구들에게 설하는 것으로 불교가 출발했습니다. 그래서 초기불교, 원시불교, 근본불교, 상좌불교, 대중부불교, 부파불교, 소승불교 이건 시대에 따라서 다종다양한 불교가 발생하였습니다.

 

이건 시대의 요구에 의한 것이지 불교의 변질이라고는 말 할 수 없고, 시대에 따라서 성향에 따라서 많은 불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또 인지가 발달하니까 부처님이 열반한지 오류백년 경에는 그 동안의 수 많은 불교도 사람들의 지적욕구를 또는 정신적 욕구를 총족시켜 주지 못해서 폐기 하게 됩니다.

 

그리고 새롭게 일어난 운동이 대승불교운동이고, 그 대승불교운동을 거치면서 또 발생한 것이 이 대승불교만 가지고 안된다라고 해서 비밀불교 소위 밀교라는 것이 또 한 쪽에서 생기게 되고, 중국에서는 소위 선불교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무비스님, 무비스님의 서장특강 1)

 

 

스님은 대승불교가 일어난 요인에 대하여 시대적 요청때문이라 하였고, 근본적으로 부처님당시의 불교가 후대 사람들에게 만족시켜 주지 못하였기 때문에 폐기하고 새로운 불교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불완전한 가르침 vs 완전한 가르침

 

이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불완전 한 것, 또는 덜 완성된 것이라는 관점에서 본 것이라 볼 수 있다. 더구나 후대로 가면 갈수록 인지가 발달함에 따라 지적 욕구가 높아져 자꾸 새로운 불교를 만들게 되었는데, 밀교도 그렇게 해서 나왔고, 선불교 역시 그런 결과의 산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21세기에도 새로운 불교를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이런 대승불교의 시각에 대하여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성제, 12연기등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 자체는 완전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불완전하고 덜 완성된 것이라 보는 대승불교에서는 공사상등으로 비판하여 폐기하였고, 반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완전 그자체로 보는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변형없이 전승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왔다고 볼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 열반을 추구하지 않는 이유

 

청정도론은 붓다고사비구에 의하여 5세기에 스리랑카에서 쓰여졌다. 5세기 상황이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 대승불교의 공사상으로 비판 받아 공의 입장에서 12연기는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하고, 또 사성제는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한 것으로 본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사성제 마저 없는 것으로 보았을 때 열반 또한 없다고 했음에 틀림 없다. 이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법문이 있다. 불교방송의 경전공부시간에서 유마경을 강의 하던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본래 자성청정하기 때문에 생사도 번뇌도 알고 보면 진여의 마음을 아주 여의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중생의 분별심 그 자체도 본래 맑고 깨끗한 그 마음 즉, 열반을 떠나서 존재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마음 바탕이 그대로 열반이기 때문에 다시 얻어야 할 열반이 없다는 것이다.

(불교방송, 경전공부, 유마경 강좌,  201012 19일자)

 

 

강사스님은 따로 얻어야 할 열반이 없다고 하였다. 우리가 원래 부처이기 때문에 마음 한 번 바꾸면 부처가 되므로 따로 열반이라는 업을 지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승불교에서는 열반을 추구하지 않는데, 이는 지혜와 어리석음을 분별하는 사성제를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열반에 대한 논의(nibbanakatha)

 

붓다고사가 집필할 당시 인도에서도 위와 같은 분위기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청정도론에서 열반에 대한 논의를 멸성제에서 다루었는데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열반은 없다는 주장에 대하여

 

만약 누군가 열반은 토끼의 뿔과 같이 개념적인 것이라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였을 때 ,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방법을 통하여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방법이란 무엇일까. 바로 도닦음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설한 사성제중의 도성제에 해당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도를 닦지 않은 범부들은 열반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얻을 수 없는 것이라 주장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 한다.

 

자신이 못한다고 하여 있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짜 열반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이 설한 말씀은 모두 거짓이 되고 말것이다. 더구나 도닦음 역시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결과가 될 것이다.

 

도를 닦는다함은  바른 견해(정견)을 제일로 하여 계의 무더기인 계, , 혜를 닦아 가는 과정인데, 열반이 없다면 무용지물이 되고 말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둘째, 열반은 단지 존재하지 않음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오온으로 이루어진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여 이를 열반으로 볼 수 있을까. 오온으로 이루어진 나는 과거와 미래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열반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현재들이 없는 것이 열반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여기에서 현재들(vattamananam)이란 현 삶에 존재하는 오온들을 뜻한다. 현재 살아 있는 이 몸과 마음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만일 그들이 없다면 이미 현재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오온이 없다면 유여열반(sopadisesanibbana)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넷째, 오염원이 없는 것이 열반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이 말은 무엇을 뜻할까. 오염원들이 없다는 것이 열반이라면 도를 닦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두번째와 세번째의 존재하지 않음이 열반이라면 역시 도를 닦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가 없어도 존재하지 않음인 열반은 가능하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도가 없어도 열반이 얻어진다면 도가 나타나기 이전에도 이미 오염원이 없다는 말이 되어버려서 도를 닦는 의미가 없어지고 마는 모순에 빠지고 말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가 일어나는 순간에 오염원들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허물이 아니다라는 반대론자들의 말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섯째, 탐욕등이 다한 것이 열반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잠부카다경(Jambukhadaka Sutta, S.iv.251)에 열반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사리뿟따존자는 탐진치들의 소멸을 열반이라고 하였고, 다시 탐진치가 소멸된 것이 아라한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청정도론의 주석에 따르면 단지 탐진치가 다한 것이 열반이다라고 말하면 아라한이 됨도 다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고, 따라서 아라한 됨이 열반이 되어버릴 것이라 한다. 그렇게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탐진치가 다한 것이 열반이라고 한다면 단순히 탐욕등이 다함이기 때문에 그것은 일시적이고 형성된 것으로 되어버린다. 따라서 ~가 다한 것이 열반이라는 것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섯째, 다한 뒤로 다시 일어남이 없는 것을 열반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탐욕등 번뇌가 다한 뒤로 다시 일어남이 없는 그런 다한 것이 있을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그런 다함은 없기 때문이라 한다. 만일 그런 다함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성스런 도가 열반이 되어 버릴 것이라 한다. 성스런 도는 번뇌를 다하게 하는 다함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스런 도 다음에는 번뇌가 생기지 않기 때문에 그런 다함은 없다는 것이다.

 

일곱째, 왜 직접적으로 설하지 않았느냐는 주장에 대하여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아주 미묘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는 부처님이 열반을 있는 그대로 설하기를 주저하였다는 주석서(M.i.186)를 인용하고 있다. 또 열반은 성스런 눈으로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증명된 것이라 한다.

 

여덟째, 도를 증득할때 열반이 생겨난다는 주장에 대하여

 

이에 대하여 도가 열반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한다. 이런 열반은 시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도를 닦아 생겨나는 것도 아니라 한다. 따라서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늙음도 죽음도 없다고 한다.

 

생김, 늙음, 죽음이 없기 때문에 항상한 것이라 한다. 이는 82법에서 열반을 제외하고 모두 일어나고 사라지는 특성이 있는데, 열반은 제행무상의 법칙에 적용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아홉째, 열반도 원자등이 가지는 그런 항상함을 가진다는 주장에 대하여

 

이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학파에서 원자등이 있어서 것이 항상하다고 주장하지만 그렇게 내세우기 위해서는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기 때문에 항상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열째, 만약 열반도 항상하기 때문에 그들도 항상하다는 주장에 대하여

 

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유가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 열반이 항상하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원자등이 항상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왜냐하면 열반이 항상하다는 것이 원자등이 항상하다는 것을 증명할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라 한다.

 

열한째, 만약 열반처럼 생김등이 없기 때문에 그들도 항상하다는 주장에 대하여

 

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원자등은 항상한 것으로 증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열반의 특징은

 

위의 열한가지는 열반에 대하여 잘 못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설명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설한 궁극적 목표로서 열반은 어떤 것일까. 청정도론에서는 열반이 실재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항상하다고 하였다.

 

이는 실제로 있는 것이고 변함없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열반은 범부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도로서 증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열반은 과거의 업으로부터 받은 몸을 가지고 알아진 것이기 때문에 이를 유여열반이라고 한다. 이는 열반을 증득한 사람의 오염원이 가라앉았고, 또한 살아 있는 몸을 의지해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면 무여열반이란 무엇일까.

 

이는 과거의 업으로 부터 받은 몸이 없기 때문에 무여(anupadi)열반이라 한다. 왜냐하면 아라한은 일어남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서 미래에 결과를 가져올 업이 다한 자이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 열반의 특징은 무엇일까.

 

청정도론에서 열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세가지로 설명하였다.

 

첫째, 열반은 간단없는 노력으로 성취한 지혜로서 얻어지는 것이다.

둘째, 열반은 일체지자(Sabbaññu)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셋째, 열반은 고유성질이기 때문이다.

 

 

 

 

사진 http://archantia.blogspot.com/2011_07_01_archive.html

 

 

 

 

그래서 부처님은 열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Atthi bhikkave

ajatam

abhutam

akatam

asankhatam

 

비구들이여,

생긴것도 아니고,

된 것이 아니며,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형성된 것이 아닌 것이 있다.

 

(우다나,Udana, 自說經, UD80: It.37)

 

 

 

2011-07-2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