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화두의 비밀은? 무비스님의 서장(書狀)강의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11. 7. 31. 18:55

 

 

화두의 비밀은?  무비스님의 서장(書狀)강의에서

 

 

 

 

재가자들이 출가자들의 흉내나 내려 하고 있다어느 출가스님의 말이다.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의 정법정론에 실린 어느 스님의 칼럼을 보면 재가자들이 스님들이나 하는 참선이나 화두를 들고 있는 현상에 대하여 비판한 글이다.

 

스님은 한국에서 출가자들이야 성철스님이나 법정스님과 같은 뚜렷한 본보기로서 모델이 있지만, 아직까지 재자들은 그러한 모델을 갖고 있지 않아서 출가자의 모델을 따라 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는 한국에서 모범이 될만한 재가자가 부재한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스님이 말하는 재가자의 모델은 부처님 당시의 아나따삔디까이다. 금강경에도 등장하는 아나따삔디까는 대 부호로서 재보시의 표본으로 불리우고 있다. 따라서 재가자가 스님따라하기에 열중할 것이 아니라 재가자의 본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스님은 본래 불교의 출발부터 출가 수행자와 재가 제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출가자와 재가자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재가자가 출가자나 하는 수행법을 해서는 안되는 것일까. 특히 출가수행자의 전유물이나 다름 없는 화두참구나 참선을 하면 출가자 따라하기 내지 시늉하기가 되는 것일까.

 

무비스님의 서장(書狀)강의에서

 

최근 불교TV사이트에서 무비스님의 서장(書狀)강의(무비스님의 서장특강)’를 듣고 있다. 불교역사문화회관에서 재가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인데, 현재 9강까지(2011-07-26)진행되고 있다.

 

출가자들의 강원과목으로 잘 알려져 있는 서장은 전통강원에서 교재로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자료를 보니 강원에서 2학년때 도서, 선요, 절요등과 함께 함께 배우는 과목이다. 모두 선불교와 관련된 과목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스님들만 배우는 과목을 정보통신과 인터넷시대를 맞이하여 일반재가불자들에게도 공개 되고 있음을 불교TV강의를 통하여 알 수 있었다. 이는 자연스런 시대의 흐름이라 본다. 재가자들도 이제 스님들의 공부의 영역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 7가지 정신

 

재가자들이 그 동안 천수경은 기본이고, 금강경과 같은 경전을 수도 없이 듣고 배워서 잘 알고 있는데, 스님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참선과 화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모른다. 그런 강의를 이 시대의 대강백이라 불리우는 무비스님의 세심하고 사려깊은 강의를 통하여 선과 화두에 대하여 어느 정도 맛을 보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선가에서 말하는 화두는 어떤 것일까.

 

 

무비스님은 화두에 대하여 매우 명쾌하게 설명한다. 선을 신비화 한다거나 선사들이나 하는 것이 아닌 누구나 선을 할 수 있고 화두를 들 수 있는 것이라 한다. 먼저 스님은 선의 특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일곱가지로 말한다.

 

 

() 7가지 정신

 

1.간소(簡素)

2. 탈속(脫俗)

3.자연(自然)

4.유현(幽玄)

5.고고(枯高)

6. 정적(靜寂)

7. 변화(變化)

 

 

이것이 선의 7가지 정신이라 한다. 이처럼 선은 소박하고 간단한 것을 특징으로 하는데, 세속적인 것에서 멀리 떠나 고요한 분위기에서 어떤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스런 것이며, 동시에 변화무쌍한 것이라 한다.

 

양귀비와 안록산의 이야기

 

무비스님의 강의 스타일은 책을 읽어 나가면서 설명하는 스타일이다. 이는 다른 선사들의 법문 모습과 다르다. 대게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원고 없이 즉설식 강의 스타일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님의 강의는 교재를 함께 보면서 교재를 읽고 그에 대한 설명을 하고 서로 교감을 하는 강의 스타일이다. 그런 내용 중에 화두의 비밀이 있었다.

 

화두에도 비밀이 있을까. 일반적으로 화두를 든다하면 머리를 싸매고 의심하며 용맹정진하는 것을 연상한다. 그런 화두에 비밀이 있다고 하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스님은 화두의 비밀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양귀비와 안록산의 이야기를 들어 설명한다. 서장에 있는 내용이고, 선사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또 외우고 있다는 이야기에 관한 것이 시로서 설명되고 있는데, 그런 시는 어떤 것일까. 시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一段風光畵不成        일단풍광화불성

 洞房深處說愁情       동방심처설수정

頻呼小玉元無事        빈호소옥원무사

只要檀郞認得聲        지요단랑인득성

 

아름다운 그 맵시, 그림으로 그리려 해도 그리지 못하리니

깊고 깊은 규방에서 애만 태운다.

자주 자주 소옥을 부르지만 소옥에겐 일이 없고

오직 님께 제 소리를 알리려는 뜻이라네.

 

『소염시(小艶詩)

 

 

 

 

 

양귀비상

중국 서안 화청지

 

 

 

 

스님은 소염시의 예를 들어 화두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양귀비와 안록산의 불륜행각이 화두를 설명하는 예로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아마도 화두를 잘 설명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이지만 또 한편으로 서장에서 대혜종고 스님과 재가의 거사와 대화라는 것도 많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화두를 들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간화선은 출가자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 재가자를 위한 수행법이라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주장이 있었다.

 

간화선은 재가자를 위한 것

 

2010 8간화선 세계를 비추다라는 국제학술대회가 있었다. 동국대 불교학술원에서 주관한 이 학술대회는 불교TV사이트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에서도 볼 수 있다.

 

이 대회에서 미국의 버클리대 교수인 로버트 샤프교수는 간화선이 재가자를 위하여 창안 된 것( 제2회 Robert sharf-선공안 어떻게 사고할것인가? 미산스님-간화선의 3요체와37보리분법의 5근5력비교고찰)이라고 주장하였다.

 

법보신문에 따르면 샤프 교수는 “간화선은 대혜 스님이 편지를 이용해 불교적인 지식이 부족했던 문인들을 위해 간소화된 선()을 고안한 것(간화선, 재가자 위해 창안됐다”)”이라며 주장하였는데, 바로 서장에서 보는 것과 같은 내용이다.

 

서장에서 대혜스님의 상대로 등장하는 인물은 출가자가 아닌 재가자이다. 그는 세속에서 요즘말로 하면 장관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렸던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그가 궁금한 사항에 대하여 대혜스님에게 묻고, 이에 대하여 스님이 답변하는 형식으로 꾸며진 것이 서장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재가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기에 양귀비와 안록산의 일화를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이라 보여 진다. 또한 하버드대의 나타샤 헬러 박사도 샤프교수와 동일한 입장을 보여 주었는데, 그녀는 “대혜종고 스님의 가르침은 재가불교의 수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간화선은 재가신자들의 요구에 맞도록 적응시킨 수행법”이라고 밝혔다.

 

만일 간화선이 오로지 출가자를 위한 것이었다면 소염시에서 보는 것과 같이 양귀비와 안록산의 불륜을 예로 들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서 오욕락등 이것 저것 다 경험해 본 은퇴한 재가자에게 알아 듣기 설명하기 가장 쉬운 것이 아마도 양귀비와 안록산의 정사에 대한 이야기이었을 것이라 보여진다.

 

소옥아하는 소리에

 

소염시에서 양귀비가 안록산과 밀회를 즐기기 위해서 부른 말은 소옥이었다. 여기서 소옥은 하녀의 이름이다. 그래서 양귀비가 하녀이름인 소옥아하고 부르자 마자 하고 담 뛰어 넘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화두라 한다.

 

양귀비가 하녀이름은 소옥을 불렀는데, 왜 안록산이 담을 뛰어 넘었을까. 이에 대하여 무비스님은 설명하기를 양귀비가 소옥아하면서 자기표현을 하자 이를 알아챈 안록산이 담을 뛰어 넘음으로서 의사표현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담 밖에서 언제 부를까 하고 대기 하고 있던 안록산이 소옥아하고 불렀을 때 왜 소옥아 하고 불렀을까하고 곰곰히 생각하였다면 상대방의 마음을 못 읽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의심이 바로 화두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바른 방법이 못 된다고 한다. 소옥아 하고 부르면 두 말 않고 알아 차리는 것이 선인데, “왜 소옥이라고 하였을까라고 의심하면, 이는 부처님이 꽃을 들었을 떄 왜 꽃을 들었을까하고 의심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꽃을 들었으면 그것으로 끝난 것이지 이에 대하여 라고 하면 이는 선방에서 참선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3일이면 타파할 수 있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안거철에 수 천명의 스님들이 선방에서 보낸다. 주로 화두를 들고 밤낮으로 용맹정진하는데, ‘행주좌와어묵동정을 특징으로 한다. 이는 화두를 타파함으로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데, 일이년도 아니고 10, 20, 30, 심지어 평생을 선방에서 보낸다고 한다.

 

하지만 무비스님의 강의(무비스님의 서장특강 6)에 따르면 화두는 3일이면 타파할 수 있다고 한다. 길어야 7일 간다고 한다. 둔한 자한 철(3개월)’간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두를 타파하지 못한 이유는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못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 좋은 예가 임제스님이 황벽스님에게 몽둥이 세례를 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임제스님의 후손들

 

서장강의에서 무비스님은 한국불교의 선사들은 모두 임제스님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임제스님의 종지를 이어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선사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하여 잘 언급하지 않은 것 같다.

 

설령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하여 말을 하더라도 불완전한 가르침 또는 완성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문자와 언어로 전승되고 있는 가르침에 대하여 하나의 방편으로 생각하고 진실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부처님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 한다. 그런 대표적인 예가 염화미소와 같은 것이라 본다.

 

이처럼 부처님의 마음과 뜻을 이어 받은 것이 선불교라고 보는데, 만일 누군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면 이는 몽둥이 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상근기의 선불교 수행자들이게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스승이 제자를 깨우쳐 주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몽둥이, 고함소리, 손가락 들어 올리기등을 사용한다. 선가에서 널리 알려진 것중의 하나가 임제스님의 몽둥이에 관한 것이다.

 

불교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보았더니

 

한국 선종의 시조인 임제스님이 어느 날 자신의 스승인 황벽스님에게 불교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보았다고 한다. 스승의 문하에 들어 온지 수 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무엇인지 궁금하여 큰 마음 먹고 용기를 내어 스승에게 물어 본 것이다.

 

이에 대하여 스승은 황벽스님은 다짜고짜 가지고 있던 주장자로 패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무려 20대를 맞은 것이다. 더구나 황벽스님은 장사이었다고 한다. 생긴 모습도 우락부락 하고 손도 컷을 것임에 틀림 없다. 그래도 임제 스님이 반응을 하지 못하자 또 두들겨 맞았는데, 세차례나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 차례에 20방씩이니 모두 60방을 맞은 것이다.

 

이처럼 영문도 모르로 맞은 임제스님은 왜 때렸을까하고 몇달을 고민하다가 대우스님이라는 분에게 물어 보았다고 한다. 대우스님과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임제스님은 대우스님의 옆구리를 세 번 쥐어 박는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바로 이것이 스승인 황벽이 자신을 때린 이유에 대한 답으로 보는 것이다.

 

?” 라고 하면

 

그렇다면 왜 스승은 제자에게 반지성적이고, 언어와 문자를 거부한 반응을 보인 것일까. 이에 대하여 무비스님은 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으로 설명하였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몽둥이질이나 손가락 들어 올리기, 꽃을 들어 보이기와 같은 표현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이해 하지 못하고 왜 몽둥이질을 했을까라든가 왜 손가락을 들어 올렸을까또는 왜 꽃을 들어 올렸을까라고 온갖 자신의 지식을 총동원하여 사량분별하여 밝히려 하다 보면 84천리로 빠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몽둥이질, 손가락, 꽃등은 그 것 자체로 보아야지 여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만 차선책은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차선책으로 얻어지는 것들

 

소옥아하고 불렀을 때 이를 알아듣지 못하고 담 바깥에서 왜 소옥이라고 했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이 차선책인데, 바로 이것이 화두이고 참선이라는 것이다.

 

그런 차선책으로서 얻어지는 것도 많다고 한다. 이를 무비스님은 정신에 근육이 생기고, 뼈가 생기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화두를 들어 참선하는 수행자들은 대담해진다고 한다.

 

평소 얌전하고 자비롭고 보이던 사람들도 화두를 들면 용감해지고 대범해 져서 본심이 드러나게 되는데, 호탕하게 웃는다든가 불같이 화를 낸다든가 하는 정신적인 변화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어는 스님은 화두를 들고 있는 스님들에 대하여 한 마리의 호랑이를 보는 것 같다고 표현하였다. 또 부모를 죽인 원수를 만나면 단칼에 베어 버릴 듯한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하였다.

 

이는 깨달음을 위하여 화두를 놓치지 않으려 하는 것과 같이 보아서 일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차선책은 우리의 그릇이 거기까지이고, 우리의 근기가 거기까지이기 때문에 선방에 앉아서 참선하는 것으로 무비스님은 설명한다. 그렇다면 진짜 화두타파는 어떤 것일까.

 

화두의 비밀은

 

이에 대하여 무비스님은 있는 그대로 드러낸 것이 화두라 한다. 이는 황벽스님이 임제스님에 대하여 몽둥이질을 한 것도 있는 그대로를 드러낸 것으로 보는 것이라 한다. 이를 이해하여 임제스님이 대우스님의 옆구리를 세 번 쥐어 박는 액션을 취한 것도 있는 그대로의 현재를 드러낸 것으로 본다.

 

이처럼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기 위하여 화두라는 방편을 사용하는데, 몽둥이질을 했다면 왜 몽둥이질을 했는가라고 사량분별하면 이는 차선책으로서 참선이 되지만, 그 자리에서 다시 되받아 쳐 맞장구를 쳐 준다면 이는 현상이 있는 그대로 임을 알아 화두가 타파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이 꽃을 들어 보였을 때 가섭처럼 웃으면 되는 것이라 한다. 그 너머에 별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꽃을 봄으로서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생각이 멈추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이는 1억짜리 수표를 잃어 버렸를 때 더 이상 아무생각이 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한다. 또 양귀비기거 소옥아하고 불렀을 때 담넘어가는 하는 소리가 나는 것과 같이 보는 것이다.

 

쿵소리도 나지 않고, 왜 때렸을까 하고 온갖 알음알이와 지식을 동원하여 사량분별하면 할 수록 진리와 멀어지기 때문에 곧바로 현상을 알라차리는 것이 화두타파이고, 이것이 바로 화두의 비밀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선불교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요인

 

화두의 특징은 무엇일까. 어느 스님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단도직입, 격외도리, 제법실상, 진퇴양난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화두는 간소하고, 직설적이고, 단도직입적임을 알 수 있다. 또 화두라는 방편을 이용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불교는 반지성적이고 문자와 언어를 거부한다는 오해를 받고 있다. 이는 선가에서 회자되는 ’, 그리고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는 불립문자에 근원을 두어서 일것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에게 방망이질과 같은 방편을 이용하여 제법의 실상을 드러내 보이는 방법은 매우 가혹한 것이라 생각된다. “불교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다짜고짜 몽둥이질을 한다거나 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것,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양구하기등은 교학을 무시한 독특한 중국식 불교때문이라 볼 수 있다.

 

이는 한자라는 문자영향도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의 한자는 글자 하나가 하나의 이미지라고 본다. 따라서 보는 이에 따라 다양한 해석방법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뜻 글자로 이루어진 한자가 인도의 교학체계를 표현하기에 무리가 따랐을 것이다. 그래서 한자문화로 이루어진 중국에서 선불교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요인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본다.

 

방망이질과 경행

 

현대는 한문경전 뿐만 아니라 빠알리어를 직역한 한글번역본이 소개되고 있다. 니까야라 불리는 경장, 법을 체계화한 아비담마논장, 그리고 청정도론과 같은 주석등이다.

 

이처럼 부처님 당시부터 전해져 오는 교학은 수행법과 함께 전래 되어 오늘 날 정보통신과 인터넷시대에 누구나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선불교에서 보는 것 같이 방망이질()이나 고함소리()등과 반지성적이고 반문자적인 혐의를 받고 있는 화두라는 방편을 통하지 않고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 불교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본다면 다짜고짜 방망이질 대신 초기불교 교학과 수행에 따라 단계적으로 알려 줄 것이다. 예를 들어 방맹이로 현재와 현상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 대신 경행을 통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이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는 원인과 결과에 따른 연기법에 의한 것이라고 친절하게 가르쳐 줄 것이다.

 

간화선은 기초수행

 

이는 방망이로 맞아서 느끼는 것과 경행을 통하여 발바닥으로 느끼는 감촉을 아는 것과 별반차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모든 현상에 대한 실체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방망이로 맞아서 느끼는 아픔이나 경행을 통하여 발바닥을 통하여 닿는 느낌을 아는 것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스승이 제자에게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기 위한 방편으로서 간화선은 칠청정에서 있어서 견청정(diṭṭhi visuddhi)’‘16단계 지혜에 있어서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nāmarūpa pariccheda ñāna)’로 보여진다. 참고로 견청정은 칠청정에 있어서 두 번째 단계이고,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는 16단계 지혜에 있어서 첫 번째 단계에 해당되는데 이를 달리 말하면 있는 그대로의 봄(athā-bhūta-dassana, 實見)이 된다.

 

이는 가장 기초적인 청정과 지혜로서 이와 같은 청정과 지혜가 개발되지 않으면 다음단계의 수행으로 넘어갈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본다면 간화선은 초기불교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가장 기초가 되는 수행으로 보여진다.

 

출가자 흉내를 내면서

 

간화선이 기초중의 기초수행에 해당 된다면 수행을 시작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더구나 서장에서 표현 된대로 재가의 거사에게 가르침을 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간화선 수행은 간화선 국제학술대회에서 미국의 버클리대 교수인 로버트 샤프교수가 주장한 것처럼 재가자들을 위한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어느 스님은 재가자가 수행하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간화선 강좌를 열거나재가 불자 논강을 열어 출가자 흉내를 내면서재가자도 열심히 수행한다고 강변합니다. 출가와 재가를 가릴 것 없이수행병에 물들어 헤매고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깝습니다.

(한국 불교, 재가 불자의 역할과 위상?)

 

 

스님은 재가자가 수행하는 것에 대하여 수행병에 물들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출가자 흉내를 내고 있다고 하였다. 이는 명백히 간화선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간화선은 서장에서 표현한 바와 같이 원래 재가자를 위한 것이었고, 그런 간화선은 초기불교 입장에서 보았을 때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전에 기초공사를 닦아 놓는 예비적인 수행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가자는 어떤 수행을 해야 할까.

 

바른 견해(正見)를 제일로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출재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또 출가자는 법보시만 하고, 재가자는 재보시만 한다는 법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라면 부처님의 가신 길을 따라 누구나 갈 수 있는 것이다. 그 길이 바로 팔정도일 것이다. 따라서 출가자는 물론 재가자도 팔정도를 실천할 수 있는 삶을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수행도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어느 한순간 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단계별로 깨쳐 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계정혜삼학이다. 팔정도 역시 계정혜 삼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팔정도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정견이다. 이는 정견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계정혜를 닦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열반이 없다면 바른 견해(正見)를 제일로 하고 계의 무더기 등 세 가지 무더기(즉 계--)를 포함하는 바른 도닦음이 무익하게 되고 말 것이다.

(청정도론, 16장 기능과 진리 68)

 

 

불교의 최종 목표는 열반이다. 열반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가장 먼저 해야할일이 바로 정견을 세우는 것이다. 그런 정견은 어떤 것일까.

 

팔정도에서도 정견이 가장 먼저 강조 되는데, 이는 다름 아닌 사성제를 아는 것을 말한다. 사성제를 이해 하는 것 없이 바른 수행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선불교에서는 정견에 관한 것을 찾아 볼 수 없다. 단지 몽둥이를 들고, 꽃을 들어 보이고, 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행위 자체가 무비스님의 표현을 빌리면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로 보는데, 이는 초기불교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지혜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사성제를 나타내는 정견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결코 도와 과를 증득할 수 없을 것으로 본다. 바로 이점이 임제스님의 자손들과 부처님의 자손들의 차이일 것이다.

 

 

 

2011-08-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