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잃어버린 고대도시를 찾아서, 나가라경(Nagara Sutta,The City)

담마다사 이병욱 2011. 8. 11. 23:24

 

 

잃어버린 고대도시를 찾아서, 나가라경(Nagara Sutta,The City)

 

 

 

즐겨찾기로 저장해 놓은 카페에서 경허스님에 대한 글을 읽었다. 경허스님이 머물렀다는 천장사에 대한 기행문형식으로 된 글이다.

 

선악과어불호(善惡果於佛虎)

 

경허스님 하면 떠 오르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꺼져 가는 선불교에 대한 중흥조로서의 이미지이고, 또 하나는 막행막식에 관한 이미지이다. 이처럼 상반된 이미지는 어떻게 하여 나온 것일까.

 

최근 불교TV사이트를 통하여 무비스님의 서장강의를 보고 있다. 9강에서 스님은 강의 도중 깨달음과 관련하여 경허스님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경허스님은 깨닫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경허스님이 스스로 자신이 쓴 책에서 나는 깨닫지 못했다라고 썼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허스님은 존경하는 이유는 지난 500년간의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하여 거의 꺼져 가는 불교의 등불을 되살려 놓았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다 꺼져 가는 한국불교를 살린 것이 경허스님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것 하나만으로도 한국불교에 있어서 부처님 다음으로 공로가 큰 스님이라 한다. 하지만 가장 비판 받는 부분은 스님의 삶에 대한 태도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가장 적절하게 표현 한 글이 스님이 가장 아꼈던 제자인 만공스님의 선악과어불호(善惡果於佛虎)’라는 글이라 한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 무비스님은 이 말을 선과어불(善果於佛)과 악과어호(惡果於虎)로 분리하여 설명하였다. 좋게 평하면 부처님보다 더 지나가고, 나쁘게 평하면 호랑이보다 더 지나간다는 뜻이다.

 

이처럼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경허스님에 대한 평가인데, 다른 사람이 말한 것도 아니고 스님과 동고동락을 하였던 애제자가 말한 것이기에 매우 정확한 표현이라 본다는 것이다.

 

아홉살에 청계사로

 

경허스님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두 가지로 추론 할 수 있다. 하나는 동진출가에 대한 것이고, 또 하나는 깨달음에 대한 내용이다.

 

경허스님은 동진출가하였다. 하지만 스스로 출가한 것은 아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절에 내 맡겨진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살길을 찾아 한양으로 가던 중에 절에 맡겼다고 한다. 그때 나이가 아홉살이었는데, 현재 의왕시 청계산 자락에 위치한 청계사이다.

 

 

 

 

청계사

고려시대 충렬왕 때 창건되었다. 경기도 의왕시 청계산에 위치하고 있다.

 

 

 

청계사는 서울과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절이어서 주말이면 항상 북적인다. 그런 청계사에는 경허스님의 부도탑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매우 오래 되어 보이는 비석도 있는데, 이는 청계사가 다 죽어 가는 한국불교를 중흥시킨 경허선사가 출가한 절이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런데 청계사에는 경허스님의 부도탑 뿐만 아니라 만공선사, 금오선사, 월산선사의 부도탑도 있어서 한국선불교의 기라성같은 스님들이 대부분 모셔져 있어서 선불교의 성지처럼 잘 단장해 놓았다. 2007 1월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다음과 같다

 

 

 

 

 

2007년도 부도탑전경

좌로 부터 월산선사, 금오선사, 만공선사, 경허선사 부도탑이다.

 

 

 

 

이후 대대적인 재정비가 이루어져 현재 다음과 같이 다시 정리 되었다.

 

 

 

 

 

 

 

2010년 부도탑전경

각 선사들의 부도탑모양은 2007년과 동일하다. 가장 오른편 반만 보이는 것이 경허선사 부도탑이다.

 

 

 

 

경허스님은 생사문제를 해결한다든가 중생구제를 목표로 큰뜻을 세워 출가한 것이 아니라 단지 굶어 죽지 않기 위하여 어머니의 결단에 따라 절에 들어 간 것이다. 이런면으로 보았을 때 옛날에 절이라는 곳이 고아원역할도 훌륭하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

 

절에 맡겨진 것 하고 절에 스스로 들어 간 것과는 천지차이일 것이다. 절에 스스로 들어 갔다는 것은 타고난 선근과 근기가 있어서 일 것이다. 하지만 맡겨진 경우 계속 승려로 살아가리는 보장이 없는 것 같다.

 

그런 예를 영화에서 보았다. 삼사라(Samsara)라는 영화이다. 현재 인도영역의 라다크라는 곳을 배경으로 한 티벳불교에 관한 영화인데, 스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영화에서 주는 화두는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라 볼 수 있다.

 

 

 

 

삼사라(2001)

 

 

 

이 영화에서 주인공 스님은 다섯살 때 절에 맡겨졌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맡겨져 절에서 자라 스님이 된 것이다. 3년간 무문관 명상수행도 하고, 그 결과 깨달음을 얻어 대자유인이 되었다고 생각하였지만 여인을 보게 되면서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3년간 무문관 명상수행

 

 

 

그것은 감각적인 욕망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환속을 하게 되는데, 그런 이유중의 하나가 부처님도 29세까지 속세에서 살았고, 깨달음도 속세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냐고 스승에게 반문한 것이다. 결국 사원을 떠나 속세로 떠난 주인공은 운명의 여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들 하나를 두게 된다.

 

 

 

 

 

가정을 이룸

 

 

 

그러다가 입적한 스승이 남긴 편지내용에서 수천가지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과 한가지 욕망을 정복하는 것 중 어떤 게 더 중요한 지를 알게 되겠지라는 글을 보고 재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하지만 그에게 이미 아내가 있고, 아들이 있는 상태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그러는 사이에 아내는 떠나 버리고 혼자 남게된 주인공은 땅을 뒹굴며 절규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함

 

 

 

 

선근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으면 스님이 되어서도 제대로 출가자로서 보낼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경허스님도 영화속의 스님과 비슷하다.

 

수행을 하여 크게 깨달았다고 하였을지라도 감각적 욕망에 대한 경계를 넘지 못하였을 때 막행막식하게 되고, 결국 늙은 나이에 환속하여 평범하게 살아 간것은 스스로 출가하여 선택한 것이 아니라 맡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공부가 안되어 엉엉울었다고

 

다음으로 깨달음의 내용에 대한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깨달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선불교전통에서 선사들의 깨달음은 진여와의 합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대승기신론에 표현되어 있듯이 깨달음은 그릇된 생각과 관념이 사라진 마음의 본체이고, 허공처럼 온 우주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서 우주와 한몸인 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경허스님이 깨달았다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선사들은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과 함께 화두를 깨쳐서 대자유인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부를 해도 잘 되지 않을 때 어떨까. 어느 스님의 법문을 들어보면 엉엉 울었다고 한다. 망상만 일어날 뿐 도무지 공부에 진척이 없었기 때문이라 한다.

 

육단심으로 밀어 붙여 보아도 깨치지 못하였을 때 자신의 몸을 소신(燒身)’하기 까지 한다고 한다. 자신의 몸을 불살라서라도 깨달음을 얻고 말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말한다. 그래서 어느 스님의 손을 보면 손가락 몇 개가 없는 경우도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일년이 아니라 10, 20, 30, 평생을 해도 깨우치지 못한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마도 그것은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3일 동안 시도해 보아도 안되면

 

어떤 일을 할 때 생각대로 잘 안될 때가 있다. 몇 날 몇 일을 반복해도 안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될때까지 계속밀어 붙여야 될까. 그 과정에서 요행히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제품을 개발하는 경우 3일 동안 시도해 보아도 안되면 방법이 잘 못 된 것으로 본다. 그럴경우 경험많은 선배들은 방법을 바꾸어 보라고 말한다. 되지도 않은 방법으로 붙들고 있어 보았자 시간낭비로 보는 것이다. 그 주어진 시간은 3일이다. 3일 이상이 되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접근방법이 잘 못 되었으므로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선방에서 10, 20, 30년을 지나 평생 깨닫지 못한다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다.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하였다든가 아니면 방법이나 수단이 잘 못 되었을 수 있다.

 

하지만 스승이 있어서 길을 알고 있는 경우 어떠할까. 이 경우 스승이 말하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될 것이다. 이런 스승은 훌륭한 가이드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이 바로 훌륭한 스승이자 선각자이고 가이드와 같은 존재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잃어 버린 고대도시(The ancient lost city)

 

선각자로서 부처님은 처음으로 길을 뚫은 사람이고, 가이드로서 부처님은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역할로서의 부처님에 대하여 스리랑카의  아상가 교수는 불교 TV에서 다음과 같이 잃어 버린 고대도시(The ancient lost city)’를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부처님의 설법중에 아름다운 비유가 있습니다. 고대도시와 그곳에 이르는 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숲에서 어떤 길을 발견하여 그길을 따라 가보니 마침내 그 도시에 이르러 기쁨을 얻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길을 발견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그곳에 이릅니다. 즐거움을 만끽한 뒤 돌아와 다른 이들에게 그곳에 이르는 지도를 전합니다.

 

최기경전에 의하면 그것은 부처님께서 행하신 바와 완전히 똑같습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여러분은 스스로 그 아름다운 고대도시에 이르러야 합니다. 물론 진정한 의미의 열반은 도시가 아닙니다. 단지 이것은 비유입니다.

 

(아상가 교수, 불교tv, 불교영어도서관특강, 근본불교의 가르침, 제2 불자가 된다는것의 의미)

 

 

이 비유에서 잃어 버린 고대도시는 열반을 말한다. 그리고 그 길은 팔정도를 말하고, 지도는 빠알리 삼장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잃어 버린 고대도시는 예전에 누군가 갔었을 것이다. 그래서 잃어 버린 도시라고 한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현 하기 전에 과거의 25분의 부처님도 똑 같이 잃어 버린 고대도시를 팔정도라는 길로 찾아 갔던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가면서 그 길로 다니지 않다 보니 그 길을 잃어 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잃어 버린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먼 훗 날 어떤 이가 나타나 다시 그길로 걸어가다 잃어 버린 고대도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길없는 길일까

 

잃어 버린 고대도시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아상가교수의 강의를 불교tv사이트에서 듣고 이에 대한 경을 찾으려고 검색을 하여 보았다. 하지만 잃어 버린 고대도시라는 키워드로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불교방송의 불교강좌시간에 혜문스님의 알기 쉬운 불교이야기에서 성읍경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내용을 들으니 아상가교수가 이야기 하는 것과 비슷하였다. 다만 아함경에 있는 내용이라 한다.

 

몇 일전 마침 경허스님에 대한 글을 카페에서 읽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최인호의 길없는 길이 떠올랐다.

 

길없는 길은 소설제목이다. 경허스님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소설인데, 마치 선불교 공부하듯이 최인호가 중국선종사에서 부터 화두란 무엇인가까지 매우 상세하게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소설 한 권을 읽고 나면 선종사에 대하여 다 아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는 소설이다. 아마도 작가가 선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기에 그런 소설이 나왔을 것이다.

 

실제로 작가는 나는 스님이 되고 싶다라는 에세이도 발표한 바 있다. 그 에세이가 나오고 난 후 천주교 신자이었던 최인호가 곤역을 치루었다는 이야기도 한 때 들렸었다.

 

길없는 길은 무슨 말일까. 한참 화두처럼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몇일전에 쓴 글 중에 때아닌 때 먹지 말라라는 말이 생각났다. 사미를 위한 열 가지 계율중에 먹는 것에 관한 것이다.

 

때아닌 때란 무엇일까. 그것은 아무 때와도 같은 말이다. 아무 때나 먹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길없는 길역시 아무 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경허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 제목으으로 길없는 길이라 하였는데, 이는 경허스님의 행적과 꼭 들어 맞는 것을 느꼈다. 경허스님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았을 때 만공스님이 악과어호(惡果於虎)라 하였듯이, 한국불교에 있어서 일부 선승들의 막행막식이 바로 경허스님으로 부터 비롯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길이 아닌 길로 인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또 아무 길로 가도 좋다는 의미도 된다. 그래서 길없는 길이라고 제목을 붙이지 않았을까 상상을 해 본다.

 

그토록 찾던 경을 발견하고

 

부처님은 길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그 길로 가는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왜냐하면 그 길로 가서 직접 열반이라는 고대도시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잃어 버린 고대도시 이야기가 어떤 경일까 무척 궁금하였는데단서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여러가지 검색어를 넣어서 구글검색을 한 끝에 상윳따니까야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경의 이름은 나가라경(Nagara Sutta)’이었다.

 

그런데 영문판 이었다. 타닛사로(Thanissaro) 비구가 번역한 영문판만 보일 뿐이었다. 영어제목은 The city인데 이것으로 원하는 경을 찾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영문이라 읽기가 불편하였다. 그래서 다시 검색을 하여 한글판을 찾아 보려 하였으나 아직까지 누군가가 올려 놓지 않아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이 좋은 생각이 떠 올랐다. 혹시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어느 블로거로부터 법보시를 받은 파일이었다. 그 파일에서 Nagara’를 키워드로 하여 검색하니 그토록 찾던 경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전재성박사가 번역한 것이다. 그 경의 내용중에 아상가 교수가 말한 내용과 유사한 부분을 발견하였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광야의 숲속에서 방황하다가 옛날 사람들이 다니던 옛 길과 옛 거리를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 가다가 정원을 갖추고 원림을 갖추고 연못을 갖추고 제방을 갖추고 분위기가 좋은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옛 성과 옛 도시를 발견했다고 하자.

 

그때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은 왕이나 왕의 대신들에게 보고할 것이다. '왕이시여, 마땅히 아셔야 합니다. 저는 광야의 숲속에서 방황하다가 옛날 사람들이 다니던 옛 길과 옛 거리를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 가다가 정원을 갖추고 원림을 갖추고 연못을 갖추고 제방을 갖추고 분위기가 좋은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옛 성과 옛 도시를 발견했습니다. 왕이시여, 그 도시를 다시 세우십시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왕이나 왕의 대신들이 그 도시를 다시 세우게 해서 그 도시가 나중에 번영하고 부유해지고 사람들이 몰리고 인구가 많아져서 성장과 발전을 이루듯이 이와 같이 나는 전생의 올바로 깨달은 분들이 거닐던 옛 성과 옛 거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면 수행승들이여, 전생에 올바로 깨달은 분들이 거닐던 그 옛 길과 옛 거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여덟 가지의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마음새김, 올바른 집중의 길이다. 이것이 수행승들이여, 과거의 올바로 깨달은 분들이 거닐던 그 옛 길과 옛 거리이다. 나는 그 길을 따라 갔다. 그 길을 따라 가서 나는 늙고 죽음을 깨달았고 늙고 죽음의 원인을 깨달았고 늙고 죽음의 소멸을 깨달았고 늙고 죽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깨달은 것이다.

 

(나가라경,  Nagara Sutta: The City , 도시, 상윳따니까야, SN 12.65, 전재성박사역)

 

 

나가라경(Nagara Sutta, 도시).pdf 

나가라경(Nagara Sutta- The City).docx

 

 

 

 

 

아무 길로 가다보면

 

경허스님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아홉살에 절에 맡겨져 스님이 된 분이다. 다 죽어가는 한국불교를 크게 일으키는 공을 세우기도 하였지만, 반면 수행자로서 해서는 안될 것을 거침없이 하여 후대 일부 승려의 막행막식하는 하나의 원인을 제공하였다고도 본다.

 

그런 스님의 일대기에 대한 소설이 길없는 길인데, 이는 천주교를 신봉하는 최인호가 쓴 것이다. 그런데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하나의 화두처럼 들린다. 왜 길없는 길이라 하였을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 길로 해석하여 보았다. 이는 경허스님의 무애행과도 큰 관련이 있다. 그 길이 길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마구 가는 케이스라 볼 수 있다. 청정도론에 이런 말이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장님인 자가 인도해줄 사람이 없어

어떤 때는 바른 길로 어떤 때는 길이 아닌 곳으로 가듯

윤회에 돌고 도는 어리석은 자는 인도해줄 사람이 없어

어떤 때는 공덕이 되는 행위를

어떤 때는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를 짓는다.

법을 알고서 진리를 관찰할 때

무명은 가라앉고 고요하게 다닐 것이다.

 

(청정도론, 17장 통찰지의 토양)

 

 

길을 모르면 바른 길로 가는 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이때 길을 아는 자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면 안전하게 갈 것이다. 그런 역할을 하는 자가 부처님이라 볼 수 있다.

 

잃어버린 고대도시를 찾아서

 

부처님은 이미 잃어 버린 고대도시를 보고 왔기 때문에 안내하는 대로 그 길로 가면 된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가는 것은 아니다. 경전이라는 지도를 가지고 가는 것이다. 그 경전에는 고대도시로 가는 방법이 상세히 기록 되어 있다.

 

가나까목갈라나경에는

 

 

첫 번째 단계가 계행을 지키는 것,

두 번째 단계가 감각기관을 절제하는 것,

세 번째 단계가 음식을 절제하는 것,

네 번째 단계가 명상으로 번뇌를 맑히는 것,

다섯 번째 단계가 마음챙김과 선명한 알아차림에 머무는 것,

여섯 번째 단계가 다섯 가지 장애를 정화하는 것,

일곱 번째 단계가 네가지 선정에 머무는 것

 

 

라고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삽바사와경(모든번뇌의 경)에는

 

 

첫째, 관찰에 의해서 제거되는 번뇌

둘쩨, 다스림에 의해서 제거되는 번뇌

셋째, 수용에 의해서 제거되는 번뇌

넷째, 인내에 의해서 제거되는 번뇌

다섯째, 피함에 의해서 제거되는 번뇌

여섯째, 제거에 의해서 제거되는 번뇌

일곱째, 닦음에 의해서 제거되는 번뇌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외 수 많은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이 경전과 주석서등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부가 안된다고 엉엉울거나, 때로는 육단심으로, 때로는 신체의 일부를 소신공양을 하고, 평생을 수행하지만 잃어버린 고대도시로 가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길없는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닐까.

 

 

 

2011-08-1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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