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꽃이 피면 열매를 맺고, 막가(magga, 道)와 팔라(phala, 果)

담마다사 이병욱 2011. 8. 17. 00:03

 

 

 

 

꽃이 피면 열매를 맺고, 막가(magga, )와 팔라(phala, )

 

 

 

 

8 15일을 기점으로 여름이 다 간 것 같다. ‘열대야라고 불리우는 잠 못 이루는 밤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벌써 여름도 얼마 남지 않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오달진 열매

 

밤에 잠을 잘 때 쌀쌀함을 느낄 정도이면 이제 밤더위로 고생할 일은 없다. 지금부터 더위도 내리막길로 접어들기 때문이다. 그런 늦여름 날씨의 특징은 낮에는 햇볕이 강렬하고 밤에는 쌀쌀해서 일교차가 무척 심하다는것이다.

 

그런데 이런 날씨일수록 곡식은 잘 익는다. 그래서일까 산림욕장에서 보는 나무에는 어느 덧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다. 비록 녹색을 띤 풋풋한 열매이긴 하지만 보면 볼수록 탐스럽고 오달지다.

 

 

 

 

 

 

은행나무 열매

 

 

 

열매가 열리려면 먼저 꽃이 피어야 한다. 그리고 수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수정은 벌이나 나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대표적으로 호박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비오는 날이 더 많아서인지 호박열매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산나무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 그런 열매중의 하나가 때죽나무열매이다.

 

때죽나무 꽃과 열매

 

때죽나무를 알게 된 것은 지난 5월말 촬영한 하나의 예쁜 꽃을 보고나서이다. 순백색으로 곱게 핀 꽃을 블로그에 올렸더니 어느 법우님이 때죽나무 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알게 된 때죽나무 있는 곳으로 갔더니 열매가 열려 있었다.

 

 

 

 

 

 

때죽나무 꽃

5월 말

 

 

 

 

 

 

 

때죽나무 열매

8월 중순

 

 

꽃이 피고 2달 여 만에 본 때죽나무의 열매는 지난 번 보았던 꽃의 수 만큼이나 주렁주렁 열려 있다. 이처럼 자연은 꽃이 피면 열매가 맺게 되어 있다. 이런 것을 하나의 원인과 결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가장 예쁠때

 

열매를 맺는 것은 씨를 퍼뜨리는 것과 같다. 자신의 유전형질을 널리 퍼지게 하여 영원히 살고자 하는 바램이다. 그런 바램은 식물뿐만 아니라 생명이 있는 모든것은 다 해당된다. 그래서 동물도 성장을 하면 짝을 이루어 새끼를 낳게 되는데, 이는 종족을 번성시키려는 본능적인 행위이다. 이와 같은 본능은 사람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사람이 가장 예쁠때가 있다. 꽃 다운 나이를 먹었을 때이다. 그 나이가 되면 얼굴에 화장을 하지 않아도 빛나 보이고, 아무옷이나 걸쳐도 맵시가 있어 보인다. 이처럼 꽃다운 나이가 마치 꽃이 필 때와 같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사람도 꽃이 피어 열매를 맺는 것에 있어서 식물이나 동물이나 똑 같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식물이나 동물과 달리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자손을 남기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현자들만이 알 수 있는 법()

 

이 세상의 대부분의 종교가 인간적인 욕망을 극대화하여 행복한 삶을 강조한다. 그래서 자연을 정복하고 자손을 많이 퍼뜨리는 것을 장려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사고는 동물의 행태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먹고 마시고 자고 싸는 삶의 방식은 동물이나 사람이나 똑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의 대부분의 종교는 욕망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불교는 이와 정반대이다.

 

세상사람들이 감각적욕망을 추구할 때 불교는 이와 반대로 간다. 그래서 역류도(逆流道)라고 한다. 그런 역류도는 세상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힘들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없다. 법문을 해도 감각적 욕망을 부추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깨달은 이 법은 너무나 심오하다. 이해하기 어려우며 매우 고귀하고 내적인 평화를 안겨준다. 지성과 논리로 접근할 수 없다. 미묘하여 오직 현자만 이해 할 수 있다.”

(마하시 사야도의 12연기에서)

 

 

부처님의 설한 가르침은 결국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것인데, 그런 가르침은 세속적인 지식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유를 넘어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오직 현자들만이 알 수 있는 법이라는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네 가지 법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심오하기 때문에 도와 열반을 이해하기는 커녕 따라오지도 못할 정도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중에 어려운 것은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 교재에 따르면 다음의 네 가지라고 한다.

 

 

사성제

생명이 있는 존재의 본성

재생

연기의 성질

 

 

이를 이해하기 어려운  네 가지 법이라고 한다.

 

이렇게 어려운 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현자라면 누구나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현자는 위빠사나 통찰지를 가진 사람을 뜻한다.

 

이런 통찰지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세계적인 철학자, 차라투스트라나 마호멧트와 같은 종교창시자, 헤밍웨이와 같은 작가, 아인쉬타인과 같은 세계적인 대과학자등과 같이 세상속에서의 지식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법은 성별, 나이, 교육에 상관없이 위빠사나 통찰로 점진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정신과 물질을 관찰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고, 성스러운 도와 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한 도와 과는 어떤 것일까.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는다

 

도는 빠알리어로 막가(magga)라 하고, 과는 팔라(phala)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도만 강조하지만 초기불교에서는 도와 과는 함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불교tv사이트에서 스리랑카의 아상가교수는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는다라는 표현을 하였다.

 

도와 과는 어떤 관계일까. 도는 일반적으로 길이는 뜻이고, 과는 열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는다라는 말은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다라는 말과 같지 않을까. 이는 원인과 결과로도 설명될 수 있는데,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결국 결실을 가져 오는 것으로서 완성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게된 존재를 성자라 부른다. 그런 성자는 모두 8종류가 있다. 이를 흔히 사쌍팔배의 성자라 부른다. 또 다른 말로 사향사과라고도 부른다. 즉, 수다원도, 수다원과, 사다함도, 사다함과, 아나함도, 아나함과, 아라한도, 아라한과이다. 이처럼 네가지 부류의 성자가 네가지의 도와 네 가지의 과를 가지고 있다.

 

()와 과()는 무엇인가

 

이러한 성자를 구분하면 수다원도는 첫 번째 성자이고, 수다원과는 두 번째 성자이다. 이런식으로 총 여덟부류의 성자가 있게 된다. 이처럼 도와 과는 구분되어 있는데, 이러한 도와 과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영문판 불교사전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출세간의 도(magga)는 위빠사나 통찰지에 의하여 네 가지 성스런 상태(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중의 하나에 들어가는 순간(moment)의 호칭을 말한다. 이를 열반이라 하는데, 이는 일시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들어갔다 나오면 한 존재의 인생과 성품의 대변환을 영원히 가져다 준다.  (열매, phala)는 도를 이룬후 그 결과로서 즉각적으로 따르는 의식의 순간을 말한다. 이런 과는 일생을 사는 동안 수없이 반복 될 수 있다.

 

According to the Abhidhamma, 'supermundane path', or simply 'path' (magga), is a designation of the moment of entering into one of the 4 stages of holiness - Nibbāna being the object - produced by intuitional insight (vipassanā) into the impermanence, misery and impersonality of existence, flashing forth and forever transforming one's life and nature. By 'fruition' (phala) is meant those moments of consciousness which follow immediately thereafter as the result of the path, and which in certain circumstances may repeat for innumerable times during the life-time.

 

(불교사전, Buddhist Dictionary 'Ariya-puggala에서)


  불교사전.pdf

 

 

위의 불교사전에 따르면 막가()는 하나의 수행방법에 관한 것이 아니라 열반을 얻는 순간의 체험(the moment of entering)을 말한다. 그런 체험은 곧바로 팔라()로 나타나는데, 이는 의식의 순간(moments of consciousness)으로서  하나의 결과를 만들어 낸다.

 

, 도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의 체험이라 한다면, 과는 그 순간적인 체험의 다음 순간에 얻어지는 깨달음이라는 결과를 말한다. 이처럼  도와 과는 원인과 결과로도 설명된다.  

 

 

막가가 원인이라면 팔라는 결과이다. 꽃이 피면 열매가 맺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는다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도를 이루어 열반을 체험하였을 때 그 열반은 일시적인 것으로서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열반에 들어 갔을 때 물질과 정신 모두 사라진 상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열반이 항상한 것, 즐거운 곳, 깨끗한 것, 영원한 참나가 있는 것이라 인식한다면 이는 열반이 아니라 선정상태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열반은 몸과 마음이 사라진 상태이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이라한다. 그래서 열반은 있어도 열반을 성취한 자는 없다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이는 아라한은 있어도 아라한을 성취한 자는 없다는 말과 같다. 만일 누군가 자신은 아라한이라고 떠 벌리고 다닌다면 그는 아라한이라 볼 수 없다. 이는 득도하였다고 방송의 자막이나 책에 써 놓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도가 개인적인 특별한 체험이라고 볼 수 있지만 열매를 맺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따라서 득도했다고 말하는 자는 득도 한 자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도는 있어도 도인은 없기 때문이다.

 

열매(팔라)는 도를 체험한 후 곧바로 얻어지는 결과인데, 이는일시적으로(impermanence) 이루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단지 깨어 나와 보아야 알 수 있다(flashing forth)고 한다. 그런데 깨어나 보면 세상이 달라져 있더라는 것이다. 이런 예로서 한수산작가가 어렸을 적 감명깊은 소설을 읽고 잠이 들었는데, 그 다음 날 일어나 보니 온 세상이 새러워 보이고 달라져 보였다라는 이야기와 유사하다. 

 

열반으로 부터 나왔을 때 인생과 성품의 영원한 대변화 (forever transforming one's life and nature)를 일으키는 데, 이러한 열반체험은 일생동안 지속될 뿐만 아니라 다음생에 까지 계속되어 궁극적으로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열반을 체험하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여서 새로운 하늘과 땅이 열리는 것으로 보여진다.  

 

해탈과 열반의 기쁨

 

이러한 해탈과 열반의 기쁨에 대하여 노래한 것이 테라가타(장로게)와 테리가타(장로니게)이다. 부처님 당시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부처님이 깨달았던 그 경지를 그대로 맛 본 것을 노래한 게송들이다. 그 중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마음의 평화, 마음의 다스림,

오랜세월 찾아 헤맸으나 얻을 수 없었다.

그때 언뜻 승리자(부처님)의 말씀

떠올리고는 전율하였다.

 

모든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리고 갈애를 부수어 버렸다.

부처님 가르침이 성취되었다.

오늘은 갈애를 끊은 지 7일째 되는 날.

(테리가타 39-41, 다른 사마 비구니)

 

 

 

내가 그토록 열망한

비어있음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나는 부처님의 진정한 딸이며

평화속에서 항상 기쁘게 산다.

 

신과 인간 세상에 대한 욕망을 완전히 끊었다.

나는 생사윤회에서 벗어났다.

(테리가타 45-47, 다른 웃따마 비구니)

 

 

 

그 전에는 화장하고 보석을 장식하고 향수를 뿌리고 하여

감각적 쾌락에 집착하여 육신을 치장하였다.

이제 나는 바른 신심을 가지고 출가하여

무상한  이 몸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욕망을 뿌리째 뽑아버렸다.

 

윤회는 끊어지고 모든 욕구와 욕망은 가버렸다.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내 마음엔 오직 평화뿐이다.

(테리가타 87-91, 난둣따라 비구니)

 

 

 

남은 삶은 짧아! 늙음과 병마가 인생을 부수고 있구나.

이 몸이 부서지기 전에 게으름 떨 시간이 없지!

나는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다섯 무더기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온전히 해탈하여 우뚝 섰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마침내 성취되었다.

(테리가타 92-96, 밋따깔리 비구니)

 

 

이상 일아스님의 '한 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옮긴 것이다.

 

 

도를 깨닫는 순간은

 

그렇다면 도를 깨달은 순간은 어떤 것일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도는 탐욕의 무더기 등를 부술 뿐만 아니라 시작이 없는 윤회에 전전하는 괴로움을 말려버린다. 모든 악처의 문을 닫아 버린다. 일곱개의 성스런 보물과 대면하게 된다. 여덟가지 삿된 도를 버린다. 모든 증오와 두려움을 가라앉게 한다.

(청정도론, 22장 지와 견에 의한 청정, 14)

 

 

이것은 예류도에 관한 것이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무더기라는 오염원을 부수고 쪼개는 과정이다. 하지만 탐욕과 성냄은 사다함도에서 옅어지고, 아나함도에서 완전히 소멸된다.

 

아라한도란

 

최종적으로 아라한도에 이르렀을 때 어리석음이라는 무명이 제거 되는데, 이때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 자만, 들뜸도 함께 소멸된다. 그 과정이 아라한도의 수행이다. 이런 과정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상카라에 대한 평온의 지혜끝에 하나의 의문전향을 통해서 수순하는 지혜와 고뜨라부의 지혜가 일어나고 고뜨라부 다음에 아라한도가 일어난다.

(청정도론, 22장 지와 견에 의한 청정, 29)

 

 

이런 점으로 보았을 때 깨달음이라는 도는 10가지 족쇄라는 오염원을 제거 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그 오염원중 가장 핵심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인데, 가장 마지막으로 제거 되는 것이 어리석음(무명)이다. 따라서 도를 닦는 것(paipatti, 수행)’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오염원을 제거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오염원은 단계적으로 제거 되는데, 방법은 계정혜 삼학에 따른다. 그 계정혜 삼학은 다름아닌 팔정도이다. 결국 팔정도수행이야말로 해탈과 열반으로 이끄는 지름길인 것이다.

 

어떻게 열매를 맺을까

 

다음으로 과는 어떤 것일까. 과는 빠알리어로 팔라인데, 문자그대로 열매를 말한다. 하나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청정도론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 지혜다음에 그것의 결과로 둘 혹은 셋의 과의 마음들이 일어난다. 출세간의 유익한 마음들은 즉시에 과보를 주기 때문에 즉시에 과보를 주는 선을 설했다.(Sn,226)”고 하셨고, 그는 번뇌를 멸하기 위하여 즉시에 보는 과보를 주는 성스런 도에 천천히 도달한다.(A.ii,149)’고 설하셨다.

(청정도론, 22장 지와 견에 의한 청정, 15)

 

 

위 문장에서 이 지혜다음이란 예류도에 대한 지혜를 말한다. 또 둘 혹은 셋의 과의 마음들이 일어난다는 의미는 속행(자와나, javana)’을 말한다.

 

여기서 자와나란 아비담마 전문술어로서 일단 대상이 무엇이라고 결정되고 나면 일어나는 일련의 인식과정을 말한다. 이는 매우 빠르게 일어나는데, 일반적으로 인식과정에 있어서 최대 7번 같은 대상을 가지고 일어난다고 설명된다.

 

따라서 인식과정에 있어서 자와나(속행)가 일어나면 기억에 등록되고 저장되기  때문에 확고한 결과로 남는다. 도를 깨닫는 순간 즉시 과보를 주는 것이다. 컴퓨터에서 작업을 한 다음 저장하는 것과 유사한 이치이다. 바로 이런 점이 과가 결과이고 열매를 맺는 것으로 본다.

 

아무리 게으름을 피워도

 

앞서 불교사전에서 (magga)과에 들어서기 직전의 한 순간의 체험이라 하였고, (phala) 도의 결과 즉시 뒤따르는 의식의 순간을 의미한다고 하였는데, 수행의 과정에 있어서 체험된 도가 하나의 결실을 맺어 기억속에 등록되고 저장되어 확고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가 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첫번째 예류과를 성취하였을 때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아무리 게으름을 피워도 신이나 인간 중에 일곱번 달려서 윤회한 뒤 괴로움을 끝낼 수 있다.

(청정도론, 22장 지와 견에 의한 청정, 18)

 

 

여기서 게으름이란 것은 최대 일곱번 윤회하는 과정에 있어서 자신이 수다원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수행을 게을리 하거나 타 종교에 심취하는 것등을 말한다. 하지만 한 번 구경의 경지를 맛보고 그 열매를 맺었기 때문에 결국 되돌아와 윤회를 끝낼것이라 한다. 이러한 게송은 라따나경에서도 볼 수 있다.

 

 

Ye ariyasaccāni vibhāvayanti               예 아리야삿짜-니 위바-와얀띠
Gambh
īrapaññena sudesitāni               감비-라빤녜나 수데시따-
Kiñc
āpi te honti bhusappamattā            낀짜-삐 떼 혼띠 부삽빠맛따

Na te bhava aṭṭhama ādiyanti,        나 떼 바왕 앗타망 아-디얀띠

심오한 지혜를 지닌 님께서 잘 설하신,

성스런 진리를 분명히 아는 사람들은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여덟 번째의 윤회를 받지 않습니다.

[라따나경(Ratana Sutta, 보배경)9번 게송, 숫타니파타의 Sn 2.1, 전재성님역]

 

 

자신이 무척행복하다고

 

언젠가 글을 올렸는데 매우 민감한 주제라서 댓글이 무척 많이 달렸다. 그런 댓중에 어느 천주교인은 자신이 무척행복하다고 하였다. 돈도 있을만큼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신앙도 있고, 자신이 사랑하는 가정도 있어서 남 부러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런 상태가 계속 그대로 멈추었을 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세월은 흘러갈 것이고, 그에 따라 늙어가고, 하나씩 둘씩 죽어 갈 것이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지금 아무리 행복하다고 할지라도 그런 행복은 일시적이다. 따라서 윤회하는 삶은 근본적으로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런 윤회를 끝내기 위한 길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나무에 피는 꽃은 열매를 맺는다. 그렇게 함으로서 나무는 제 역할을 다 했다고 볼 수 있다. 동물은 발정기가 되면 교미를 하여 자손을 남긴다. 이로써 동물도 자신의 할 일을 다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떠할까. 물론 동물처럼 자손을 남김으로서 자신의 할 바를 다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 할 일을 다했다면 동물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동물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감옥에서도 사는 재미가

 

사람들은 10가지 족쇄에 자물쇠가 채워진채로 갇혀산다. 그런 감옥에서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배설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니 감옥밖으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감옥에서 나름대로 즐거움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은 감각적 쾌락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본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어른이 보기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지루한 줄 모른다. 마찬가지로 어른들은 감각적 쾌락이라는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 아이와 손자들 속에서 쾌락을 즐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이나 아라한들에게는 이러한 감각적 즐거움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한다. , 위빠사나, 열반과 같은 숭고한 가치에 대한 개념이 없는 범부와 천신들만이 감각적 쾌락을 대단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외딴 벽지에 사는 농부가 있었다. 그가 사는 곳은 문명의 이기가 미치지 않는 몹시 불편한 곳이었다. 쾌적한 설비가 없고, 별로 영양가 없는 음식, 초라한 옷, 더러운 주거지, 진흙길등 살기에 매우 불편한 곳이다. 이처럼 삶의 질이 형편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행복해 할 뿐만 아니라 고향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비록 열악한 환경이지만 그 속에서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며 나름대로 사는 재미를 발견 하였기 때문이다.

 

TV를 보면 먹는 프로가 많이 나온다.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한 상 그득이 차려서 맛있게 먹는 장면을 많이 볼 수 있는데, 먹는 모습을 보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보인다. 이처럼 식욕, 성욕, 안락욕, 재물욕, 명예욕과 같은 감각적 욕망을 추구 하는한 오지에서 불편하게 살아도 그 감각적 쾌락에 집착하여 살기 때문에 만족한다. 이는 족쇄로 채워진 감옥에서 먹는 재미로 사는 죄수들과 하등의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감옥탈출을 위하여

 

감옥과 같은 삶에서 벗어나도록 도와 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감각적 쾌락으로 부터 벗어나야 한다. 감옥도 살만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름대로 거기에서 사는 재미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눈의 보았을 때는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의미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감옥은 갇혀 사는 곳이 아니라 감옥은 탈출해야 할 곳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도를 닦아야 할 것이다. 마치 한 송이 꽃이 피어나면 필연적으로 열매를 맺듯이,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으면 감옥을 탈출하는 것으로 본다.

 

 

 

2011-08-1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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