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전법포기선언인가, 21세기 아쇼카선언과 아소까의 담마에 의한 정복

담마다사 이병욱 2011. 8. 25. 16:12

 

 

 

전법포기선언인가, 21세기 아쇼카선언과 아소까의 담마에 의한 정복

 

 

 

전법포기선언인가

 

전법의 목적이 개종이 아니다불교신문에서 본 기사의 제목이다. 지난 8 23일 발표된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 선언에서 발표한 다섯가지 내용중의 하나이다. 이런 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은 아무래도 기독교의 공격적인 선교에 기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따라 위기감을 느낀 불교계가 선제로 제안 한 것이 개종을 목표로 한 전도를 포기하는 선언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기독교측에서도 이와 같은 선언을 해 주기를 바래서 작성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가장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구원관과 독선적 진리로 무장된 기독교집단에서 이런 제안을 받아들일리 만무하다. 어쩌면 이러한 선언은 스스로 전법의지를 약화시키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입장에서 본다면 부처님의 담마이외의 모든 것은 삿된 법에 지나지 않는데, 그런 삿된 법을 믿는 자들에게 전법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일것이다.

 

중생들이 불쌍해 보여서

 

부처님은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으시고 전법의 길로 나섰다. 그 첫 번째 대상이 같이 수행하였던 다섯 비구이었다. 그 때 설하신 경이 담마짝까경(Dhammacakka sutta, 초전법륜경)이다. 이 때 사성제와 팔정도를 설하심으로서 최로 법의 바퀴를 굴리셨다. 이후 1년도 안되어 제자가 60명이 생기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은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 계셨다.

제자들 60명이 아라한이 되었을 때 부처님은 제자들을 모으시고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나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대들도 또한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중생의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세상에 대한 자비심을 가지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자비심을 가지고,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둘이 함께 같은 길을 가지 마라.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고,

바른 뜻과 문장을 갖춘 가르침을 설하여라.

완전하고도 청정한 수행의 삶을 보여주어라.

세상에는 더러움에 덜 물든 사람들도 있다.

다만 그들은 가르침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멀어졌지만,

만일 그들이 가르침을 듣는다면 그것을 곧 알아들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도 또한 가르침을 설하기 위하여

우루웰라의 세나니 마을로 가야겠다.”

 

(상윳따니까야 4  마라 상윳따1, 율장 마하왁가 1 11,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이처럼 부처님은 교단이 모양새를 갖추어 가자 전법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목적은 세상에 대한 자비심때문이다.

 

부처님이 깨닫고 보니 중생들이 불쌍해 보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깨달은 제자들에게 떠나라고 하였는데, 이는 중생들이 모두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전법을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을 것이다. 도저히 불쌍한 사람들을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 대상은 타종교를 믿는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모두 전법의 대상이다

 

조계종에서 전법의 목적이 개종이 아니다라고 하였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이 훌륭함을 안다면 이와 같은 선언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타종교를 믿는다고 해서 예외를 둘 수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가 아닌 것을 믿는 자들은 매우 어리석은 자들로 보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3독이라 해서 매우 경계한다. 그래서 삼독을 소멸하여 나고 죽는 일이 없는 열반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지 못하였거나 삿된 견해에 빠진 자들은 어리석은 행위를 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 자들은 자신이 업에 따라 과보를 받을 것이고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나는 것으로 본다. 그런 세상은 경전에 묘사 되어 있기를 불행하고, 비참하고, 처참한 곳이라 한다.

 

설령 타 종교를 믿어 선행을 베풀어 천상에 태어 났다고 할지라도 제행무상의 법칙에 따라 수명이 다하면 끝없이 윤회하여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것으로 본다. 이처럼 존재에서 두려움을 보았을 때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은 그들이 불쌍해 보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전법을 하는 데 있어서 기존의 종교를 믿든 안 믿든 모두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대표적인 예가 뿐나(Punna)비구일 것이다. 

 

목숨을 건 이교도 전법

 

뿐나는 산스크리트어로 푸루나이고 한자어로 부루나로 불리운다. 그런 뿐나비구는 부처님의 10대 제자중의 한 사람으로서 설법제일로 알려져 있다.

 

그런 뿐나비구가 전법하러 떠 났는데, 이교도가 있는 곳 이었다. 이제 막 교단이 갖추어져 포교를 할 즈음의 상황은 주위가 온통 브라만이나 육사외도와 같은 이교도로 둘러쌓여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교도를 피하여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을 대상으로 전법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훌륭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뿐나비구는 이교도가 있는 곳으로 가서 전법하기로 하였다. 목숨을 건 포교인 것이다.

 

이런 뿐나비구의 결연한 의지에 대하여 부처님은 걱정스러워 몇가지 질문을 한다. 그런 내용이 초기경에 실려 있다.

 

 

목숨을 건 포교

 

부처님은 뿐나 존자에게 [감각기관의 절제에 대하여 가르침을 주신후] 이어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간단한 가르침을 그대에게 말하였다. 이제 뿐나여, 어느지방으로 가서 지내려고 하는가?

 

“부처님, ‘수나빠란따’ 라는 지방이 있는데 거기에서 지내려고 합니다.

 

“뿐나여, 수나빠란따 사람들은 거칠고 난폭하다. 만일 그들이 모욕하고 욕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부처님, 만일 그들이 모욕하고 욕한다면 ‘수나빠란따 사람들은 나를 주먹으로 때리지 않았으니 정말 훌륭하다.’ 고 생각하겠습니다. 부처님.

 

“그러나 뿐나여, 만일 그들이 주먹으로 때린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부처님, 만일 그들이 주먹으로 때린다면 ‘수나빠란따 사람들은 나를 흙덩이로 때리지 않았으니 정말 훌륭하다.’ 고 생각하겠습니다.

 

“만일 흙덩이로 때린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부처님, 만일 그들이 흙덩이로 때린다면 ‘수빠란따 사람들은 나를 몽둥이로 때리지 않았으니 정말 훌륭하다.’ 고 생각하겠습니다.

 

“만일 몽둥이로 때린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부처님, 만일 그들이 몽둥이로 때린다면 ‘수나빠란따 사람들은 나를 칼로 찌르지 않았으니 정말 훌륭하다.’ 고 생각하겠습니다.

 

“만일 칼로 찌르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부처님, 만일 그들이 칼로 찌르다면 ‘수나빠란따 사람들은 나를 날카로운 칼로 죽이지 않았으니 정말 훌륭하다.’ 고 생각하겠습니다.

 

“만일 날카로운 칼로 죽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부처님, 만일 그들이 날카로운 칼로 나를 죽인다면 ‘어떤 부처님제자는 고통스러울 때 자신의 육신과 생명을 혐오하여 자결을 호소한 사람도 있었는데, 나는 가해자를 찾지 않고도 칼에 찔림을 당하게 되었다.’ 고 생각하겠습니다.

 

“장하다, 뿐나여, 그런 자제력과 평화로움을 가지고 있으니 그대는 수나빠란따 지방에 가서 살 수 있다. 그럼 좋을대로 떠나도록 하여라.

 

이와 같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그는 길을 떠나 마침내 수나빠란따에 도착하였다. 그 후 우기 안거 동안에 500명의 남자신도와 500명의 여자 신도를 교화시켰다.

 

(상윳따니까야:35  사라야따나 상윳따88, 뿐나경-Punna sutta,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부처님의 제자들은 이와 같은 열정적으로 전법하였다. 이교도이건 아니건간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려 마음 먹는 다면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는 목숨을 건 포교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법의 목적이 개종이 아니다라고 선언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훌륭함을 모르고 한 소리일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종교를 믿고 안믿고를 따지고 해야 될 이유가 있을까.

 

역류도(逆流道)이긴 하지만

 

부처님이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으시고 그냥 열반에 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법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자신이 깨친 법이 세상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법이고,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역류도(逆流道)이긴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알아 들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런 고민에 대한 것이 초기경에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참으로 힘들게 성취한 이 진리를

왜 사람들에게 알려야만 하는가?

욕망과 증오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

이 담마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심오하고 알기 어렵고 미묘하고

흐름을 거슬러 가는, 알기 힘든 담마를

어둠에 가려있고 욕망에 불타는 사람들은

결코 보지 못할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6  브라흐마상윳따1, 율장 마하왁가 1 5,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이것이 깨닫고 난 후 부처님의 고민이었다. 탐진치와 오욕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법인데, 이런 법을 누가 알아 들을 수 있겠는가에 대한 회의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 나아가 가르침을 펴기로 마음먹었다. 그 장면에 관한 것이 다음과 같이 초기경에 실려 있다.

 

 

그들에게 불사의 문은 열렸다.
귀있는 자는 [잘못된] 믿음에서 벗어나라.
성가시다는 생각으로, 오 브라흐마여,
숭고하고 빼어난 가르침을
나는 가르치지 않으려 하였네.

 

(상윳따니까야 6  브라흐마상윳따1, 율장 마하왁가 1 5,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세상에는 별의 별 사람이 다 있다. 각자 생긴 모습이 다르듯이 온 갖 종류의 사람들이 다 있는데, 부처님의 눈으로 바라보니 세상에는 더러움에 덜 물든 사람과 많이 물든 사람, 예리한 사람과 무딘 사람, 훌륭한 성품의 사람과 나쁜 성품의 사람, 가르치기 어려운 사람과 쉬운 사람, 내세와 잘못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에 자신의 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법의 바퀴를 굴리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깨달은 법이 맞는지 시험해 보기 위하여 전에 같이 고행하였던 다섯명의 동료를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에게 적용한 결과 자신의 생각이 맞아 떨어졌음을 확인하였다. 검증된 것이다.

 

불교는 검증된 종교

 

불교는 검증된 종교이다. 이는 누구나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하면 부처님의 깨달았던 경지를 맛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런 깨달음은 어떤 것일까. 두말 할 것도 없이 사성제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사성제를 아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부처님이 최초로 다섯비구에게 법을 설하였을 때 꼰단냐 존자에게 일어난 법은 그 무엇이든 모두 사라지게 되어있다라는 티 없고 때 묻지 않은 법의 눈(法眼)이 생겼는데, 이는 바로 사성제를 이해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참으로 꼰단냐는 알아들었다. 참으로 꼰단냐는 깨달았다라고 선언하였다. 이로서 처음으로 법의 바퀴가 굴러 가게 되었는데, 2 5백년이 지난 오늘 날까지 법의 바퀴는 끊임없이 굴러가고 있다. 단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에 의해서이다.

 

그런데 이런 법의 바퀴는 멈출 수 없다고 한다. 또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깨달은 담마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이시빠따나(사슴동산)에서 처음으로 설법하여 꼰단냐 비구가 일어난 법은 그 무엇이든 모두 사라지게 되어있다라는 티 없고 때 묻지 않은 법의 눈(法眼)이 열리는 순간 세상은 진동하였다고 초기경에 표현되어 있다. 그 순간을 초기경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법륜을 굴리시자, 땅의 신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나니,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천인이나 마라도 범천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것을 멈추게 할수 없도다.”라고

 

(상윳따니까야 56  삿짜상윳따11, 율장 마하왁가 1 6, 담마짝까경 Dhammacakka Sutta 초전법륜경)

 

 

꼰단냐비구가 법의 눈이 열렸을 때 이를 가장 먼 안 존재는 이시빠따나(사슴동산)에 있던 땅의 신들이었다. 그들이 외치자 인간 바로 위에 있는 천상인 사대왕천으로 퍼졌고, 사대왕천이 또 외치자 삼십삼천으로 퍼졌는데, 이렇게 삽시간에 온 우주에서 알게 된 것이다.

 

그 바퀴는 아무도 멈출 수 없네

 

그런 법의 바퀴는 아무도 막을 수 없고 또 멈추게 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그렇게 한 번 굴러가기 시작한 법의 바퀴는 아무도 멈추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초기경에서 말하였다.

 

 

셀라여, 나는 이미 왕이네

담마의 최상의 왕이네

나는 담마의 바퀴를 굴리네

그 바퀴는 아무도 멈출 수 없네.

 

(맛지마 니까야: 92 셀라경)

 

 

부처님이 굴린 법의 바퀴는 아무도 막을 수 없다.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진리는 바로 사성제이다. 부처님이 “이것이 삶의 진실이다” 라고 말하며 사성제를 설하였을 때, “그렇지 않아요, 이것은 삶의 현실이 아니어요”라고 말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법의 바퀴를 누구도 막지 못하고 되돌려 보낼 수 없는 이유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우리의 삶과 직결된 문제를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고통이다라고 하여, 생노병사등을 설하였을 때 이를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의 바퀴는 굴러 가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이 오로지 고통한 가지만 설하였다면 염세주의자로 몰렸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이 법의 바퀴가 굴러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고통이라는 문제를 제기 하여 놓고 그 원인과 해결책까지 마련해 주었다. 더구나 그 해결에 이르는 여덟가지 실천항목까지 제시하였다. 이렇게 불교에서의 진리는 한 가지가 아닌 네 가지인 것이라 하여 사성제인것이다.

 

부처님이 굴립 법의 바퀴는 사성제이고, 이 사성제를 아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그런 법은 쉬임 없이 굴러 왔는데 누구도 막지 못한다. 이를 전륜성왕의 바퀴에 비유하기도 한다.

 

라자짜까왓띠(rāja-Cakkavatti), 전륜성왕

 

고대인도에 있어서 바퀴는 무력의 상징이었다. 어느 왕이 막강한 군사력으로 이웃나라에 진격해 들어갈 때 상대방 왕의 선택은 바퀴를 받아들일 것인가아니면 맞서 싸울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이처럼 막강한 전력을 가진 국가의 바퀴는 한 번 구르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 그런데 같은 바퀴라도 무력이 아닌 법의 바퀴를 굴렸을 때 역시 막을 자는 없다. 그런분이 바로 부처님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셀라경에서 자신은 왕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담마의 바퀴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고 하였다.

 

이렇게 부처님은 무력에 의한 바퀴를 굴리지 않고 법의 바퀴를 굴림으로서 담마를 전파 하였다. 그런데 고대인도에 있어서 법의 바퀴를 굴리어 담마로 세상을 정복한 왕이 있었다. 그런 왕을 전륜성왕이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인도 고대 마우리아왕조의 아소까대왕을 들 수 있다.

 

부처님이 출가를 하지 않고 세속에서 왕이 되었다면 ‘전륜성왕’이 되었을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전륜성왕의 의미는 무엇일까. 빠알리주해서에 따르면 전륜성왕은 ‘라자짜까와띠(rāja-Cakkavatti)라 한다.

 

이는 rāja()+cakka(바퀴)+vatti(굴리는)의 합성어로 ‘바퀴를 굴리는 왕’이라 직역된다. 그런데 이를 한자어로 옮길때 중국에서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 이름 붙였다. 또 영어로 ‘Universal monarch’라 하는데 이를 직역하면 ‘전세계를 통치하는 제왕’이 될 것이다.

 

라자짜까와띠(rāja-Cakkavatti)를 직역하여 ‘바퀴를 굴리는 왕’이다. 그런 왕은 전차를 이용하여 이웃나라로 진격하여 모든나라를 정복한 왕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왕의 전차바퀴는 아무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륜성왕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담마로 정복하는 왕을 뜻한다. 바로 아소까 대왕(Emperor Ashoka ,B.C. 304-239)을 말한다.

 

담마에 의한 정복

 

아소까대왕은 인도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평가 되는데 초기에 수많은 군사적 정복으로 오늘날의 인도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서쪽으로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일부, 동쪽으로 아삼주, 남쪽으로 미소레주까지 넓혀서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룬 인도 마가다국의 제3왕조인 마우라아제국의 세 번째 황제이다. 말년에 전쟁의 비참함을 느껴 불교를 융성하게 하고, 불교윤리에 따른 통치를 실현하였는데 불교권에서는 일반적으로 아소까대왕을 전륜성왕이라 보고 있다.

 

 

 

 

아소까 사자석주(Sarnath Lion Capital of Ashoka)

인도에서 국가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륜성왕이라 불리웠던 아소까대왕 역시 초기에 전차의 바퀴를 굴렸다. 막강한 군사력으로 쳐들어 갔을 때 선택은 두가지중의 하나이었다. 싸울 것인가 받아 들일 것인가이었다. 하지만 깔링가 전쟁(BC257)’에서 비참함을 본 뒤 완전히 전쟁을 포기 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전쟁에 의한 정복이 아닌 담마에 의한 정복을 천명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이처럼 정복전쟁을 포기하였을 때 이웃나라가 쳐들어 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아소까대왕은 이런 점을 고민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 해결책으로서 담마사절단을 전 세계에 파견하여 전쟁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바위칙령에 따르면 아소까대왕이 담마사절단을 파견한 나라는 다음과 같다.

 

 

담마사신과 담마행정관 파견지역

No

지역

현대지역

왕이름

1

앙띠요까(Amtiyoka)

시리아(인더스강 접경)

Antiochos 2 Theos(BC 261-246)

2

뚜라미야(Turamiya)

이집트

Ptolemy 2, Philadelphos(BC 285-247)

3

앙띠끼니(Amtikini)

마케도니아

Antigonos Gonatas(BC 278-239)

4

마까(Maka)

끼레네(이집트서부)

Magas(BC 300-285)

5

알리까수다라(Alikasudara)

에피루스(그리스와 접경)

Alexander 2세왕 (BC 272-258)

6

요나(Yona)

인도 북서변방의 그리스인

 

7

깜보자(Kamboja)

카불강가지역(간다라)

 

8

나바까(Nabhaka)

웃따라 꾸루스에 속한 도시

 

9

나바빵띠(Nabhapamti)

북서쪽 히말라야 사람들

 

10

보자(Bhoja)

까슈미라 지역

 

11

삐띠니까(Pitinika)

까슈미라 지역

 

12

뿔리다(Pulida)

안드라와 꼬삼비 중간 지점

 

13

앙드라(Amdhra)

중부지방

 

14

쪼다(Coda)

남단의 인도 영토 아래 동쪽

 

15

빵디야(Pamdiya)

인도 최남단 국경지역

 

16

땅바빵니(Tambapamni)

스리랑카

 

출처 ; 바위칙령13, 일아스님의 아소까에서

 

 

 

담마사절단이 파견된 지역은 아소까의 담마에 의한 정복 정책에 따라 담마사신과 담마행정관을 파견하였다. 요즘말하는 외교관이다. 그런데 그들은 외교업무만 수행한 것이 아니라 전법도 함께 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런 내용에 대한 기록이 바위 칙령에 기록 되어 있다.

 

 

 

 

 

아소까각문은 브라흐미와 카로슈티 두 가지 글자로 씌어져 있다.

 

 

 

예를 들어 담마직종중에 두따가 있는데, 이는 통상적으로 외국에 파견되는 사신을 말한다. 그런데 동시에 담마를 가르치는 임무도 겸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담마 직종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담마 마하마따, 마하마따, 무카, 뿔리사, 라주까, 유따, 쁘라데시까, 라띠까와 같은 직종이 있어서 직급에 맞는 담마를 가르친 것이다.

 

이렇게 전세계에 담마사절단을 보낸 이유는 바위 칙령에 써 있듯이 담마에 의한 정복만이 이 세상과 저 세상에 행복을 가져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장로비구 사절단의 파견

 

아소까대왕은 3차 결집이 끝난 후 테라와다 불교를 공인하였다. 그 무렵 빠알리 삼장도 완성되어 전세계에 불교를 전파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담마에 의한 전세계의 정복을 뜻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지면 전쟁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올 것으로 믿은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퍼져 있지 않은 지역에 장로비구를 파견하였다. 따라서 이교도를 믿는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게 만들면 전쟁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아소까대왕이 장로비구를 파견하여 담마에 의한 정복을 실천한 지역은 어디일까. 디빠왕사와 마하왕사에 표현된 지역은 다음과 같다.

 

 

 

장로비구 담마사절단 파견지역

No

대표장로이름

보낸지역

현대의 지역

1

맛잔띠까 장로

까슈미라 지역, 간다라

간다라는 고대 펀잡의 지역(빼샤와르, 라왈삔디)

2

마하데와 장로

마히사 또는 마히사만달라

까르나따까(Karnataka)의 마이소르(Mysore)

3

락키따 장로

와나와사

까르나따까(Karnataka)

까나라(Kanara) 북쪽

4

요나까담마락키따 장로

아빠란따까

구자라뜨 북쪽, 까띠아와르, 깟츠와 신드

5

마하담마락키따 장로

마하랏타

마하라쉬뜨라 또는 태국

6

마하락키따 장로

야와나(요나) 지방

북서인도의 그리스 거주지

7

깟사빠고따, 맛지마, 두라밧사라, 사하데와, 물라까데와 장로

하마와뜨 지역

히말라야 지역

8

소나 장로와 웃따라 장로

수완나부미

미얀마남부: 타톤

9

마힌다, 잇따야, 웃따야, 삼발라, 밧다살라 장로

땅바빵니

스리랑카

출처 ; 디빠왕사와 마하왕사,  일아스님의 아소까에서

 

 

 

 

 

마우리아왕조의 영토

고대 리아 위가

 

 

 

이처럼 전 세계 각지에 장로비구로 구성된 담마 사절단을 파견하였는데, 이는 담마에 의한 정복을 완수하기 위해서이었다. 그 결과 파견한 지역에 부처님의 담마가 꽃 피우고 큰 열매를 맺었다고 한다. 그런 영향은 오늘날까지 미쳐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는 물론 유럽과 미국등 전세계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퍼져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을 실현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결과 불교는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는 종교가 되었는데, 참고로 전세계 인구중 불교가 15억명이고, 가톨릭이 13억명, 이슬람교가 12억명, 힌두교가 8억명, 개신교가 7억명 순이다.

 

이는 법의 바퀴가 끊임 없이 굴러감을 뜻하고, 그 바퀴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유일신교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돌기둥 각문에서 아소까 대왕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지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바른 법이 널리 퍼져서 모든 사람들이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기원한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국에서만큼은 부처님의 바른 법이 아직도 굴러가지 않는 것 같다.

 

부처님은 오늘날 유일신교와 유사한 브라만교를 비판하였다. 그것은 다름아닌 창조주라 불리우는 유일신의 속박으로 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유일신교와 같이 기복으로 일관하고 방편에만 의존하다 보니 유일신교와 구별이 안되어 유일신교로 넘어가는 개종이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유일신교에 한 번 발을 딛어 놓으면 빠져 나오기 힘들다.

 

유일신교가 득세하는 한국적 상황에서 유일신교를 믿으면 사회적으로 여러가지 이득이 있고 또 시설사용의 편리함, 서비스를 받는 즐거움도 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두려움죄의식을 심어 주기 때문에 커다란 마음의 부담으로 작용하기도한다.

 

일요일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 같고, 십일조를 다 하지 않았을 때 돈을 도적질하는 듯하여 벌을 받을까 두려움에 떨기도 하는 것이 좋은 예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가슴에 말못할 응어리가 져서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가슴속에 안고 평생 살아간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모두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귀신 그림을 그려 놓고 자주 쳐다 보면 그 귀신그림에 압도되듯이, 신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게 되면 거기에 철저하게 종속되고 만다. 이는 모두 마음장난일 뿐이다.

 

부처님은 모든 현상은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만들어낸 신도 오로지 마음속에서만 존재하여서 실재하지도 않고 실체도 없는 개념일 뿐이다. 실재하는 것이 있다면 지금 여기(here and now, diṭṭha-dhamma디따담마, 現法)에 있는 것들이다.

 

 

지금 여기에서 따스하고 강렬한 햇살을 만끽 하였을 때 살아있음을 느낀다. 또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쳐갔을 때 살맛이 난다. 이처럼 부처님은 지금 여기에 기반을 둔 현실적인 가르침으로서 인간이 겪고 있는 신의 속박으로 부터 해방시켜 준 것이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부처님은 진정한 해방자이다.

 

저 달과 저 해가 빛나는 한 영원히 가기를

 

조계종에서 종교평화를 위한 소위 아쇼카선언문을 발표 하였는데, 그 중 전법은 다른 종교인을 개종시키는데 목적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 문구의 의미는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특히 한국적 상황에서 개신교의 공격적 선교로 인하여 위기에 처한 한국불교에서 절실한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개신교를 의식하여 불교 스스로가 전법의지를 꺽어 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진리이기 때문에 종교를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모두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종교를 믿는 사람에게는 전법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소극적이고 스스로 전법의지를 져 버리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조계종에서 아쇼카왕은 부처님께 귀의하고 스스로 불교도임을 자처했지만 통치자로서 다른 종교를 억압하거나 다른 종교인을 억지로 개종시키려는 권력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각 종교의 차이를 인정하고 관용과 존경으로 이웃종교를 대할 것을 백성들에게 요청했습니다라는 문구를 들고 있지만, 실제로 아소까대왕은 전륜성왕으로서 담마에 의한 정복을 천명하였다. 그런 문구는 바위칙령에 그대로 남아 있다.

 

 

자비로운 왕의 사절(duta)이 아직 가지 않은 곳이라 하더라도, 자비로운 왕의 담마의 실천, 담마의 칙령, 담마의 가르침을 듣고 사람들은 담마를 따르고 계속해서 따를 것이다....담마에 의한 정복만이 이 세상과 저 세상에 행복을 가져온다.

(아소까대왕의 바위칙령 13, 일아스님의 아소까에서)

 

 

이처럼 아소까대왕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행복을 위하여, 전쟁없는 평화를 위하여 담마에 의한 정복을 천명한 것이다.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만이 평화와 행복을 가져올 것을 의심치 않아서 전차의 바퀴를 굴려 전 세계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담마 사절단을 파견하여 법의 바퀴를 굴려 담마에 의한 정복으로 불국토를 실현하려 한 것이다.

 

그런 노력은 성공을 거두어 오늘날 동남아시아는 물론 동아시아, 유럽, 미국등 전세계적으로 법의 바퀴는 굴러 가고 있다. 그런데 그 바퀴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아소카대왕의 꿈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 아소까대왕의 염원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바위칙령에 새겨놓았다고  한다.

 

 

저 달과 저 해가 빛나는 한 영원히 가기를

 

 

 

2011-08-2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