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미소지으며 죽을 수 있다면

담마다사 이병욱 2011. 8. 6. 13:21

 

 

미소지으며 죽을 수 있다면

 

 

 

 

 

 

 

종교인들은 어떤 수입으로 유지될까. 개신교라면 신자들의 헌금에 크게 의존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목사들은 감동적인 설교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천주교의 경우 신자들이 의무적으로 부담하는교무금에 대한 의존률이 높다고 한다. 그렇다면 불교는 어떤 것에 의지할까.

 

()에 의존하고 있는 사찰경제

 

불교의 경우 절이 주로 산중에 있다보니 큰 마음 먹지 않는한 자주 가기 힘들다. 설령 가더라도 대웅전이나 기타 전각에 참배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불전함에 넣은 금액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등을 매달 다는 것도 아니다. 일년에 한 번 다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불전함이나 인등수입만으로 사찰의 살림이 유지 되기 힘들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수입원이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학종 기자가 불교평론에 발표한 ‘한국불교의 시주 현황과 용도’에 관한 논문에 따르면 조계종의 각 사찰에 대한 분담금 내역을 보면 재가불자들의 시주금이 차지 하는 비율은 약40%정도라고 한다. 나머지 60%는 직영사찰의 특별분담금이나 문화재 관람료수입등이라 한다. 이는 불교조상이 물려준 약 3억평에 달하는 막대한 토지와 1700년 불교역사에 있어서 우리나라 전체문화재의 약70%를 차지 하는 불교문화재가 있기 때문이다.

 

재가불자들로부터 거두어 들이는 순수한 수입은 40%라고 하였다. 40% 중에서 불전함과 인등비등 순수한 수입은 얼마나 될까. 자료를 참고 하여 계산하여 보면 40% 100으로 놓고 보았을 때 20%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80% 49재나 천도재와 같은 로 인한 수입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사찰의 경제는 각종 재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한국불교에 있어서 재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죽은 자를 위하여

 

재는 죽은 자를 위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49재가 있고, 이미 죽은 조상을 위한 천도재도 있다. 이외 우란분재나 수륙재등 다양한 재가 있는데, 이는 대승불교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죽음에 대한 의식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재는 사람이 죽어서 일정기간 머문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49일 동안 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생에 태어 난 것도 아닌 중간적인 존재로 머문다는 중유(中有, antarā-bhava)를 인정한다. 이 기간 동안 다음 삶에 대한 과보가 결정되는 것으로 본다. 이런 중유가 있기 때문에 49재를 지내주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천도재란 무엇일까. 인터넷 불교용어 사전에 따르면 죽은 사람의 영혼을 극락에 보내기 위한 불교의식이라고 표현 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49재라고 한다.

 

하지만 흔히 말하는 조상천도재에 관한 설명은 사전에서 찾을 수 없다. 죽은지 49일이 지나면 일반적으로  내생이 결정되어 다음생이 시작 되는데, 그 중에서도 내생이 결정 되지 않아 중유계를 떠 도는 영혼을 내생으로 다시 태어 나게 해 주는 의식이 천도재일 것이다.

 

그런 천도재는 요즘 우리나라 사찰치고 시행하지 않은 곳이 없고, 전쟁에서 죽은 자는 물론 생사를 알 수 없는 자, 심지어 낙태한 영가까지 천도재를 지내주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불교에 있어서 이와같은 천도재가 사찰의 주수입원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천도재를 한 번 치루는데 몇 백만원이 들어 간다고 하는데, 이는 불전함 수입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금액이다. 그런 천도재가 사라진다면 사찰경제도 타격을 받을 것임에 틀림없다.

 

중유기간 없이 곧바로

 

초기불교를 접하면서 놀란 것은 죽음에 대한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불자들이 알고 있는 죽음과 다른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중유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초기불교의 연장선상에 있는 테라와다불교 전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중유가 없는 초기불교에서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초기불교에서는 죽은 다음에 중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중유기간 없이 곧바로 다음 생이 시작되는 것으로 본다. 한 생이 끝나고 다음 생이 시작 되는 것을 순간적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마치 한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듯이, 한 생의 마지막 식이 사라진 다음에 수태, 즉 내생의 식이 뒤따라서 일어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중유가 존재할 근거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테라와다 불교전통에서는 49재라든가 천도재라는 개념이 없다.

 

이와 같이 한 존재가 생을 마감하고 다른 생이 시작 되었을 때 재생연결식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12연기에 있어서 행다음에 식의 연결고리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불교에서 죽음에 이른 자의 내생은 어떻게 결정될까.

 

(kamma), 업의 표상(kamma-nimitta),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

 

대승불교의 경우 49일동안 중유로 머물면서 49일동안 7일마다 시왕으로 부터 7번 심판을 받아 다음 생이 결정되는 것에 반하여, 초기불교에서는 중유가 없기 때문에 누군가 심판을 해주는 존재가 없다. 대신 죽는 순간 마지막 죽음의 의식이 일어나는 데, 일반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의 경우이다.

 

사람이 죽어갈 때 자신의 업(kamma), 업의 표상(kamma-nimitta),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ta)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는 자신의 의지가 작용해서 업이나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보여지는 것일 뿐이라 한다.

 

그래서 어부가 임종하는 순간 마치 물고기를 잡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평생동안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린 어부의 업을 쌓았기 때문이고, 살인자의 경우 흉기나 범행장소에서의 끔찍한 피해자를 보는 것은 살인업을 쌓았기 때문으로 본다. 이는 여러 업중에서 가장 무거운 업이 다음 생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임종할 때 기억은 선행이나 악행중에 가장 강렬한 기억이 떠오르게 되어 있는데, 죽어가는 사람이 극도의 두려움을 보이는 것은 과거의 악행때문이라 한다. 이런 경우 친척들이 안심시키려 하지만 허사인데, 이는 악업의 결과로 태어날 불행한 내생을 미리 맛보고 있을 것으로 본다.

 

즉사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역시 업과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본다고 한다. 이는 눈 한번 깜짝할 찰나에도 마음의 단위들이 수십억번이나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경전에서 말하기 때문이라 한다.

 

이처럼 초기불교에서는 대승불교와 달리 죽는 순간에 다음 생이 순간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세 가지 현상 즉, 업과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에 있어서 좋은 내생의 표상으로 떠 오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재가신자 담미까 이야기(Dhp16)

 

평소에 선근을 쌓아야 한다고 말한다. 선업을 많이 지어서 선업과 연관된 표상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예가 담마빠다(법구경)의 인연담에 나오는 재가신자 담미까 이야기(Dhp16)’이다. 이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재가 신자 담미까 이야기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수도원에 계시던 어느 때, 재가 신자 담마까와 관련하여 게송 16번을 설법하시었다.

 

사왓티 성 내에 담마까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 재가 신자가 있었다. 그는 평소에 계행을 잘 지켰고, 덕이 높았으며, 베푸는 마음이 있어서 항상 빅쿠들을 잘 공양했다. 그에게는 입곱 쌍의 아들과 딸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 열네 명의 자녀들도 아버지를 닮아서 동정심이 많고 널리 베풀었으며, 부모를 따라 수도원에 자주 가서 설법을 듣고 열심히 수행했다. 실로 담미까와 그의 가족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담미까가 늙어 병이 들었다. 그는 죽음이 임박함을 알고 빅쿠들을 집에 초청하여 마하사띠빳타나숫따를 독경해 주기를 청했다. 빅쿠들은 담미까의 집에 마하사띠빳타나숫따를 독경하기 시작했다.

 

그때 담미까에게는 여섯 군데의 하늘로부터 자기를 델리러 오는 수레 여섯 대가 보이는 것이었다. 그들 여섯 곳으로부터 온 천인들은 담미까를 서로 데려갈려고 야단들이었다.

 

담미까는 이런 소란을 보고 이 소란 때문에 빅쿠들의 독경이 중단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천인들을 향해서 「잠깐 기다려 주시오 !」하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담미까의 이 말을 들은 빅쿠들은 독경을 그만해 달라는 것으로 생각하고 독경을 중지했다. 빅쿠들은 곧 그곳을 떠나 수도원으로 되돌아왔다.

 

잠시 후 담미까는 자녀들에게 자기가 본 여섯 개의 황금수레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래서 자녀들은 그 중 어떤 수레를 선택할 것인지 아버지에게 여쭈어 보았다. 그러자 담미까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곧 운명했다.

 

뚜시따에서 내려온 수레가 가장 좋아 보였다. 나는 그 수레에다 꽃을 던지겠다.(선택하겠다).”

 

이 일과 관련하여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이 세상에서도 그는 즐거워하고

다음 세상에서도 그는 즐거워한다.

이처럼 착한 행동을 한 사람은

양쪽 세상 모두에서 즐거워한다.

그가 더욱 즐거운 것은

즐거움을 누리며 자기 선행을 보고 되새기는 것이다.

(Dhp16)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열심히 사는 재가불자인 담미까가 임종에 임박하여 본 것은 태어날 곳의 표상이었다. 죽기직전에 자신을 태울 천상의 수레를 보았는데, 여섯개의 황금수레 중에 뚜시따(도솔천)의 수레가 좋아 보여서 화환을 던져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대중을 교화하기 위한 인연담이지만 중요한 것은 선행을 하고 선업을 쌓은 자는 죽음에 임박하여 아름다운 표상이 나타나고 그런 표상이 있는 곳에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에 임박한 자에게 산 자들이 해주어야 할 일은 선업과 관련된 좋은 표상과 내생의 표상이 떠 오르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죽음에 임박한 자 앞에서 슬픈표정을 짓거나 울고 불고 하는 일은 삼가는 것이다. 그 대신 눈과 귀와 코등으로 좋은 표상이 떠 오를 수 있는 부처님상이나 불교와 관련된 음악, 향등이 좋을 듯 하다.

 

지혜가 결여된 선행은

 

선업을 지어서 죽으면 좋은 표상이 떠 오를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지혜가 결여된 선행이나 열반에 대한 목적의식이 없는 선행은 어리석은 과보심이 된다고 한다. 마지 못해 하는 선행이라든가 지혜와 결부 되지 않은 선행을 하였을 때이다. 보시를 하는데 있어서 남들이 하니까 마지 못해서 한다든가, 오로지 바라기만 하는 기도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이와같은 행위의 선행은 결국 어리석은 것이어서 비록 탐욕이나 성냄이 없는 행위를 하였다고 할지라도 선근이 없는 것으로 되어 어리석은 과보심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경우 세가지 원인중 두가지인 성냄없음(adosa)과 탐욕없음(alobba)만을 가지고 재생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참고로 세가지 원인이란 어리석지 않음(무치, amoha),성냄 없음(무진, adosa), 탐욕 없음(무탐, alobba)을 말한다. 이처럼 어리석음과 함께 재생이 이루어졌을 때 성냄없음이나 탐욕없음의 두가지 원인으로 재생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악도를 면할 수 있지만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할지라도 불완전한 눈이나 귀등을 가지고 태어날 확률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혜로운 삶이란 무척 중요한데, 바로 그것은 불교적 지혜를 말한다.

 

기쁨으로 보시하였을 때

 

불교적 지혜를 갖추어 세가지 원인 즉, 어리석지 않음(amoha),성냄 없음(adosa), 탐욕 없음(alobba)을 갖추고 임종을 맞게 되었을 때 어떠할까. 평소에 선행을 하여 선근을 심어 놓았기 때문에 유익한 과보심이 일어나는데 네 가지로 본다.

 

이 과보심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데 욕계천상과 같은 선처에 태어나는 것으로 본다. 인간으로 태어나도 모든 감각기관이 완전할 뿐만 아니라 선근까지 갖추어 태어 나는 것으로 본다.

 

그 때 네가지 유익한 과보란 무엇일까. 아비담마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1) 기쁨이 함께하고 지혜가 있고 자극받지 않은 마음 하나

2) 기쁨이 함께하고 지혜가 있고 자극받은 마음 하나

3) 평온이 함께하고 지혜가 있고 자극받지 않은 마음 하나

4) 평온이 함께하고 지혜가 있고 자극받은 마음 하나

 

 

이것이 욕계에서 일어나는 유익한 과보의 마음 4가지인데, 공통적으로 지혜가 들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첫 번째 경우의 기쁨이 함께하고 지혜가 있고 자극받지 않은 마음 하나는 어떤 의미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보시할 물건과 보시 받을 사람등의 행운을 만나거나 또는 다른 기쁨거리를 만나 기쁘고 신명이 난 사람이 보시하면 공덕을 쌓는다라는 정견을 가진다. 그는 그 정견을 가장 중요시 여겨 조금도 망설임 없이 타인으로 부터 자극을 받지 않고도 보시등을 행하는 공덕을 쌓는다. 그때 그의 마음은 기쁨이 함께하고 지혜가 있으며 자극받지 않은 것이다.

(청정도론, 14장 무더기, 84)

 

 

부처님은 가르침을 처음 접하는 재가불자들이나 법을 잘 모르는 자들에게 보시(danā)하고 지계(sīla)하면 생천(sagga)한다는 가르침을 펼쳤다.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 재가불자가 보시하면 큰 공덕을 쌓는 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때 아주 기쁜 마음으로 조금도 망설임 없이 도움을 줄 것이다.

 

선근을 심어 놓으면

 

이런 선근이 쌓여서 죽음에 임박하면 좋은 표상이 일어나고 천상과 같은 선처에 나게 되고, 인간으로 태어나도 모든 감각기관이 온전할 뿐만아니라 선근까지 태어나는 것으로 본다. 

 

이처럼 무치(amoha), 무진(adosa), 무탐(alobba)의 세가지 원인을 가졌을 때 선처에 태어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욕계중생이 모든 행위를 하는데 있어서 무치, 무진, 무탐인 것은 아닐 것이다. , , 치등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상대적으로 무치, 무진, 무탐이 탐, , 치 보다 더 많은 것으로 보기 때문에 선처에 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색계선이나 무색계선을 닦을 경우 무조건 무치, 무진, 무탐의 세가지 원인이 작용하기 때문에 죽어서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부처님의 제자라면 선행을 하는데 있어서 지혜롭게 할 뿐만아니라 열반에 대한 목적의식을 가져야 된다고 한다.

 

선정수행은 선행을 하긴 하되 열반에 대한 목적의식이 없으므로 윤회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열반에 대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출세간적 마음을 갖는다면 그런 선근을 뿌리로 하여 가장 고귀한 재생이 이루어 지고 궁극적으로 열반을 증득하여 재생연결이 이루어지지 않아 불생불멸이 될 것이라 한다.

 

생이지(生而知)’의 예

 

그런 선근을 아마도 생이지(生而知)’라 할 것이다. 이런 생이지에 대한 내용이 청정도론의 서문에서 언급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통찰지를 갖춘 사람은

계에 굳건히 머물러서

마음과 통찰지를 닦는다.

근면하고 슬기로운 비구는

이 엉킴을 푼다,

(상윳따 니까야 S.i.13)

 

 

게송에서 통찰지를 갖춘사람은 이미 지혜를 가지고 태어난 존재이다. 후천적으로 학습을 통하여 얻어지는 학이지(學而知)와 다른 것이다. 이는 바로 이전 생의 연속이라는 말과 같다.

 

이전 생에서 열반을 목표로 하여 수행하였다면 그 선근의 뿌리를 갖추고 태어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초기경전에 수다원이 되면 7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으로 설명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바왕가(bhavaga)’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재생연결식은 바로 이전 생에서 일어난 업 또는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난 마음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이전 생의 연장선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변치 않는 고정된 자아나 영혼이 옮겨 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조건에 따른 마음의 상속으로 보는 것이다. 한 생에서 처음으로 일어나는 재생연결식(paisandhi-vinñāa)과 마지막 죽음의식(cuti-citta)’은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사이에 무수한 마음이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며 상속하지만 한 존재의 큰 틀을 유지하게 해주는 마음을 바왕가(bhavaga)’라 한다.

 

바왕가는 한 존재의 정체성과 같은 것이다. 지금 내 얼굴모습과 성향은 모두 바왕가로 보여진다. 얼굴은 죽기전까지 결코 다른 존재와 같은 형태로 변하지 않을 것이고, 성격 또한 성자가 되어 계보를 바꾸기 전까지 타고난 성향을 그대로 유지한다.

 

이처럼 나를 나처럼 여기게 하는 몸과 성향을 바왕가라 볼 수 있는데, 이는 죽기전의 표상을 대상으로 생겨난 재생연결식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재생이 되었다는 것은 또 다른 존재로 일생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초기불교에서 죽음과 재생이 왜 합리적인가

 

윤회는 바왕가의 연속이라 볼 수 있다. 바왕가와 바왕가의 사이에 죽음의식과 재생연결식이 있어서 끊임없이 이 존재에서 저 존재로 조건에 따르 상속되는 마음이 윤회하는 것으로 본다. 이를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바왕가

전생

현생

내생

바왕가1

바왕가2

바왕가3

재생연결식

(단한번 발생)

일상바왕가

(전생애 걸쳐 발생)

죽음의 마음(단한번 발생)

재생연결식

(단한번 발생)

일상바왕가

(전생애 걸쳐 발생)

죽음의 마음(단한번 발생)

재생연결식

(단한번 발생)

일상바왕가

(전생애 걸쳐 발생)

죽음의 마음(단한번 발생)

일생동안 모습과 성향을 유지

일생동안 모습과 성향을 유지

일생동안 모습과 성향을 유지

욕계천상

인간

색계천상

 

 

 

이처럼 존재는 재생연결식에 의하여 사람이 되기도 하고,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개구리가 되기도 하고, 또 천신이 되기도 한다. 그런 재생연결식은 순식간에 일어나는데, 이를 심찰나(citta-kkhaa)라 한다.

 

이런 심찰나는 너무나 순간적인 기간이라서 번개가 번쩍이고 눈한번 깜박이는 순간에도 수많은 심찰나가 흘러 갈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심찰나의 특징은 다시 일어남(, uppāda)과 머묾(, hiti)과 무너짐(, bhaaga)의 세 순간으로 이루어지는데, 순간적으로 자기의 역할을 수행하고 소멸한다고 한다.

 

이때 반드시 다음에 일어나는 마음의 조건의 힘에 따라서 다음마음이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죽음의식 다음에 일아나는 재생연결식 또한 심찰나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다.

 

이때 죽음의식에서 업이나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보았다면 이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의 마음이 일어나 한 존재의 특성을 결정짓는 몸과 성향이 형성되는 것으로 본다.

 

다행히도 천상에 나게 되었다면 일생을 행복하게 보낼지 모르지만, 불행하게도 지옥과 같은 악처에 태어나게 되었다면 죽을 때까지 한 개체의 몸과 성향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초기불교에 있어서 죽음과 재생은 매우 합리적으로 보여진다.

 

아라한은 업을 짓지 않는다

 

부처님은 번뇌가 소멸하지 않으면 죽음뒤에 정신과 물질의 과정이 계속된다고 말씀 하셨다. 번뇌는 탐진치로 대표되는데, 이런 오염원이 소멸되었을 때 더 이상 재생연결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한다. 이는 죽기전에 보는 업과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표상이 없으니 마음의 대상이 없어서 마음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못하고, 그 마음은 서로 조건에 따라 상속하는 것으로 보는데, 한 존재의 마지막 죽음의 마음에서 아무런 내생에 대한 표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음 또한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불생불멸의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아라한은 업을 짓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행위를 하긴 하되 나중에 재생이 되는 업을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라한은 악업은 물론 선업을 짓지 않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아라한의 마음이라 하고, 아비담마 술어로는 작용만 하는 마음(kriya-citta)’이라 한다.

 

이는 단순한 마음의 작용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행위에 대하여 어떤 과보도 만들어 내지 않는다. 따라서 업으로 확정되지도 않고 업의 결과도 생산하지 않는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그렇네” “그렇군” “그렇구나” “그러려니할 뿐이지 집착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아라한의 미소

 

아라한은 조바심을 내거나 후회하거나 안달복달하가나 근심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미소짓는 마음만 있을 뿐이다. 이런 마음을 아라한들과 벽지불과 부처님들에게만 있는 특유한 마음이라 한다. 욕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하여 그렇네” “그렇군” “그렇구나” “그러려니하며 미소짓게 하는 마음이라 볼 수 있다. 이런 마음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아라한으로 하여금 하찮은 것에도 미소를 머금게 하는 역할을 한다.

(청정도론, 14장 무더기, 108)

 

 

하찮은 것에도 미소를 머금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마도 주위에서 그런 사람들을 찾아 보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아라한이 되면 탐진치가 모두 소멸된 무학의 경지이기 때문에 모든 현상에 대하여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는 결코 업을 만들어 내지 않기 때문에 미소짓는 마음이라 하는데, 이를 청정도론에서는 기쁨이 함께하고 원인을 갖지 않은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이라고 정의 하였다.

 

중유는 천도재의 발판

 

이와 같이 대승불교와 초기불교는 죽음이후에 벌어지는 것에 대하여 다르게 보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중유를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 일 것이다. 중유를 인정하는 대승불교의 경우 죽은 자를 위한 천도재를 시행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천도재를 하면 여러가지 이점이 있을 수 있다. 가장 먼저 죽은 자에 대하여 선처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이고, 부수적으로 사찰경제가 좋아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자식들에게 마지막 효도를 할 수 있게 하여 심적부담을 덜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누이 좋고 매부좋고를 넘어 일석삼조의 효과를 보는 것이 천도재라 볼 수 있다. 반대로 천도재의 폐단도 있을 것이다.

 

천도재를 지내 줌으로서 죽은 자를 선처로 인도하느 것은 인과법에 어긋나는 것이다. 아무리 죄를 많이 지어도 천도재로 인하여 죄를 탕감하여 선처로 가게 하는 것은 연기법을 무시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또 사찰에서 천도재를 주수입원으로 삼아 스님들이 천도재에만 관심을 보인다면 이는 죽은 자를 위한 불교로 되어 버리고 정법대신 방편에만 의지 하는 불교로 전락될 수 있다는 것이다.

 

초기불교가 우리나라에 정착된다면

 

반면 초기불교에서는 중유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천도재를 지낼 필요가 없다. 죽는 순간 곧바로 다음 생이 시작 되기 때문에 천도재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천도재에 따른 비용이 지불 되지 않기 때문에 산 자들은 부담이 없을 것이다.

 

이런 초기불교가 우리나라에 정착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사찰경제에 지대한 타격을 줄 것이다. 우리나라 사찰에서 주수입원이 각종 재를 지냄으로 인한 것이 약 60%인데, 그 주수입원이 없어짐으로 인하여 사찰경제가 어려워질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면을 보았을 때 우리나라 사찰에서 초기불교도입을 그다지 탐탁치 않게 생각할 지 모른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불교가 정착한다면 더이상 죽은 자를 위한 불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천도재 또한 소멸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따르면 번뇌가 소멸되지 않으면 물질과 정신은 계속된다고 하였다. 이는 어떤 변치 않은 영혼을 인정하지 않은 말이고, 또 곧바로 재생되는 것을 의미한다. 임종때의 이러한 현상은 주석서에서 잘 표현 되어 있는데, 빠알리경전에서도 발견된다고 한다.

 

미소지의며 죽을 수 있다면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에 따르면 임종때의 현상에 대하여 언급한 경이 발라빤디따경(Balapandita Sutta,愚賢經, 맛지마니까야, M129)’라 한다. 그 경에서 부처님은 임종때의 악행이나 선행에 대한 기억을 말씀하시면서 이를 저녁때 들판에 드리워진 산의 그림자로 비유하였다고 한다. 이는 임종시에 볼 수 있는 표상에 관한 것이다.

 

실제로 들은 이야기가 있다. 도심에서 포교당을 운영하는 스님은 시체치우는 일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경우 겁에 질린 듯 눈을 커다랗게 뜨고 더구나 입까지 벌리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고 한다. 이는 임종순간 마지막 죽음의식에서 일어나는  ,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중의 하나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죽음의 순간 마음이 생멸하듯이 역시 죽음의식이 일어나 과거 행위에 대한 가장 강렬하고 인연깊었던 사건에 대한 표상이 일어나고 이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의 마음이 일어나 한 존재의 새로운 삶이 시작 된다면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죽을 때의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한다. 죽을 때 미소짓고 죽는다면 아마도 다음 생은 없을 것이다.

 

죽음은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두려워 한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서도 “익은 과일들이 아침에 떨어질 두려움이 있듯이 이와 같이 태어난 중생도 항상 죽음을 두려워한다.( Sn.476-77)”고 하였다. 과연 그런 죽음은 있기나 한 것일까.

 

우주는 성주괴공하고, 사람의 삶은 생노병사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역시 생주이멸한다.  여기서 키워드는 일어나고 사라짐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바로 제행무상을 말한다. 모든 현상들은 무상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해간다. 그것은 바로 일어나고 사라짐인데, 사람의 삶과 죽음 역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직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 있다는 사실에 굳건하게 마음챙기며 머문다....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함이 없이 갈애와 그릇된 견해에서 벗어나 머문다.

(맛지마 니까야 10, 사띠빳따나경, 염처경,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현상은 오로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만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갈애와 삿된 견해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삶과 죽음이라는 것 역시 하나의 생멸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이는 결국 무상한 것으로서 변화하는 과정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다는 것과 같다. 따라서 모든 현상은 생사가 아닌 생멸로 보아야 하고, 우리의 삶 역시 멸할 수 밖에 없는데, 연기법에 따라 반드시 조건 지워져 발생된다면 본다면 죽음 또한 다음의 일어남을 위한 조건을 남기는 것으로 본다.

 

죽은 자의 불교가 아니라 산 자의 불교로

 

조건에 따라 새로이 일어남이 있고 또 멸함이 있는 끊임없는 생멸과정으로 본다면 죽음은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대승불교에서 중유를 인정하고, 더구나 천도재를 지냄으로 인하여 좋은 곳에 나게 한다고 한다.

 

이는 초기불교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인과법을 부정하는 것이다. 인과법의 부정은 곧바로 연기법을 부정하는 것과 같고 이것은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널리 퍼지고 있는 이때 언제까지나 인과법을 무시한 천도재가 계속될 것인가. 이는 지구상에서 가장 호전적인 유일신교와 공존하고 있는 한국적 상황에서 천도재는 그다지 경쟁력이 없는 요인이다.

 

한국불교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 천도재를 유지하자니 인과법을 무시한 방편불교라는 비판을 받고, 천도재를 포기하자니 사찰의 주수입원이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천도재를 포기함으로 얻어지는 이익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으로 회귀해야 한다. 정법을 펼침으로 인하여 스님들은 산 자를 위하여 설법위주 불교를 펼칠 것이고, 불자들은 살아 있을 때 보시등 선행을 많이 하게 될 것이다.

 

이는 죽은  자를 위하여 거액의 천도재를 지내 주는 것이 아니라, 평소 살아 있을 때 보시를 많이 하여 공덕을 쌓게 하여 주는 것으로 전환을 뜻한다. , 죽은 자의 불교가 아니라 산 자의 불교로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과연 한국불교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2011-08-0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