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천지는 꿈꾸는 집이어니” 삼막사 새로보기

담마다사 이병욱 2011. 8. 8. 16:07

 

 

천지는 꿈꾸는 집이어니삼막사 새로보기

 

 

 

 

언제나 그렇듯이 계절은 극적이다. 입추가 시작 되는 날에 바람이 몹시 거세다. 서울과 수도권도 본격적으로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서 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밤새 덜컹거리는 창문소리에 잠을 잘 못 이루었다. 낡은 아파트에서 매년 몇 차례 겪는 연례행사이지만 어제는 참으로 무더웠다. 그래서 더위를 피하여 가까운 계곡을 찾았다.

 

여름철에 늘 찾는 곳

 

여름철이면 늘 찾는 곳은 두 곳이다. 한 곳은 안양예술공원계곡이고, 또 하나는 삼막사계곡이다. 모두 마을버스로 갈 수 있는 곳이어서 무더운 여름철이 되면 계곡은 피서객으로 넘쳐난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안양예술공원 계곡

안양예술공원은 구 안양유원지의 새로운 이름이다.

 

 

  

도시를 탈출하여 계곡에 도착하였다. 삼막사계곡이다. 삼막사 입구로 들어가는 도로는 주차장이 되어 더 이상 들어 갈 수 없을 정도로 포화상태이다. 바로 아래에 계곡이 있는데, 어느 계곡보다 깨끗하다. 그 이유는 계곡의 바닥이 모두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몇 일 전 비가 와서 물의 양도 풍부하다.

 

 

 

 

 

 

 

 

삼막사 계곡

한마음선원에서 경인교대방향으로 들어가는 곳에 있다.

 

 

 

 

벌써 계곡에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해마다 이맘 때 쯤이면 늘 보는 광경이다. 갈 곳이 없는 서민과 소시민들이 멀리 가지 못하고 즐겨찾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계곡에서 주로 가족끼리 모여 휴일의 한 때를 보내는데, 어느 곳은 마치 풀장을 방불케 한다.

 

 

 

 

 

 

 

 

삼막사 계곡

계곡물을 막아 놓고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삼막사 가는길에

 

좋은 자리는 모두 먼저 온 사람들이 차지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래간만에 삼막사에 가기로 하였다. 가는 길의 한켠에는 꼬치구이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여름 한 철을 맞이하 여 트럭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다. 좌판을 벌여 놓고 등산객을 대상으로 술을 파는데 거의 대부분 막걸리이다. 이런 술판은 계곡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점장사

등산객을 대상으로 주류와 안주를 판매한다.

 

 

 

 

목적지는 삼막사이기 때문에 도로를 따라 계속 올라 갔다. 올라가는 길에 두 개의 길이 나온다. 하나는 편하게 갈 수 있는 도로이고, 또하나는 계곡길이다. 갈림길에서 고민하다 계곡길을 선택하기로 하였다.

 

 

 

 

 

 

갈림길

도로길과 계곡길이 있는데, 우측으로 가면 등산로로서 계곡길이다.

 

 

 

계곡길은 등산로이다.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 되는 길이다. 이 길로 가면 2.8km에 달하는 도로로 가는 것 보다 배이상 빠르다. 하지만 가파른 계곡을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고되다. 계곡길이 힘은 들지만 종종 피로를 풀며 올라 갈 수 있다. 암반으로 이루어진 계곡에 발을 담그면 새로운 힘이 솟기도 한다.

 

 

 

 

 

 

삼막사 계곡길

등산로로서 삼막사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야망갈라가타를 부르며

 

가파른 계곡을 올라가다 보니 무척힘들다. 목적지를 생각하니 더욱 더 힘들어지는 것 같다. 이럴 때는 목적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냥 발에 집중을 하여 , ,..”하고 가면 효율적이다.

 

그래도 잡생각이 나면 소용 없다. 빨리 가야 겠다고 마음 먹는 순간 심적 부담이 생겨 산행이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잡념을 없애기 위해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데, 불자라면 염불을 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최근 자야망갈라가타를 외웠기 때문에 이번 산행에 써 먹어 보기로 하였다. 9분 정도 소요 되므로 두 번 반복해서 암송하다 보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 속으로 ~훙 사핫삼  아비님미따  ~유단땅..”하고 암송을 시작 하였다. 모두 9개의 이루어진 이 게송은 힘과 용기를 주기에 충분한 내용으로 구성 되어 있다.

 

특히  떼자사~ 바와뚜    자야  망갈라~와 같은 후렴구는 매우 인상적이다.  이 후렴구의 내용은 이 위대한 힘으로 승리의 행운 제게 임하길 바라옵니다.”인데 여덟개의 게송이 끝날 때 마다 반복이 된다.

 

이런 게송의 내용에 도취되어서 일까 가파른 계곡을 잡념 없이 금새 올라 갈 수 있었다.

 

 

 

 

 

 

 

삼막사입구

삼막사는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 삼성산에 있는 사찰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기록에 따르면 677(신라 문무왕 17)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젊은 스님의 부도탑

 

드디어 삼막사에 도착하였다. 힘들게 올라와서일까 강한 성취감을 느낀다. 그런삼막사는 늘 즐겨 찾는 곳이다. 벌써 십수년째 매년 몇 차례 방문하지만 종종 몰랐던 것을 발견하게 되고, 또 새로 지어진 것도 보게 된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작은 부도탑이었다. 전에 보이지 않던 부도가 입구에 세워져 있어서 관심있게 유심히 살펴 보았다. 젊은 스님의 부도탑이다.

 

 

 

 

 

 

부도탑

법명은 물론 속가의 이름, 주소까지 기재 되어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부도탑이 이름을 남기지 않는 것임에 비하여 새로 만들어진 부도탑은 비구의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입적한 날, 심지어 속가의 이름과 주소까지 기록 되어 있다. 아마도 삼막사와 인연있는 스님이라 생각된다.

 

삼막사의 볼거리

 

삼막사 내부로 들어 갔다. 삼막사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은 육관음전이다. 모든 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 천불전에는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다.

 

불교와 민속신앙이 어우러져 있는 삼막사에서 볼 수 있는 볼거리와 문화재는 다음과 같다.

 

 

 

 

 

 

삼막사 육관음전

삼막사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법당이다.

 

 

 

 

 

 

 

 

 

육관음전 내부

성관음, ·천수관음, ·마두관음, ·십일면관음, ·준제관음, 여의륜관음이다.

 

 

 

 

 

 

 

 

 

마두관음

육관음중의 하나로 분노의 모습으로 표현된 특이한 형상이다.

 

 

 

 

 

 

 

 

 

삼막사 3층탑

3층탑 아래에 이름모를 석상이 있다.

 

 

 

 

 

 

 

 

삼막사 삼귀자

지석영의 형 지운영이 새겨 놓았다.(1920)

 

 

 

 

 

 

 

 

 

삼막사 남녀근석

남녀의 성기모양이라 하여 남녀근석이라 부른다. 우라나라에서 남근석과 여근석이 함께 있는 경우는 이곳이 유일하다.

 

 

 

 

 

 

 

 

 

여근석 근접사진

비가오지 않은 건조한 날에도 항상물이 고여 있다.

 

 

 

 

 

 

 

남근석 근접사진

동전으로 바위를 긁어서 변색되어 있다.

 

 

 

 

 

 

 

 

 

남근석에 동전붙이기

4월 초파일과 7월 칠석날등 이름 있는 날에 전국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온다.

본 동영상은 2011년 부처님오신날 촬영한 것이다. 주로 남근석에 몰려서 동전붙이기를 하고 있다.

 

 

 

 

 

 

 

 

 

칠성각

남녀근석 바로 옆에 있다.

1763년에 조성되었다.

중앙이 치성광여래인데, 코를 갈아마시면 아들을 난다고 하여 현재 코가 납작해져 있다.

 

 

 

 

정대선사 부도탑과 공적비

 

삼막사에 대하여 몇 차례 글을 올린 바 있다. 일상적인 사찰방문에 대한 글이다. 이번 방문에서는 좀 더 심층적으로 살펴 보기로 하였다. 남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부분에 대한 것이다. 그런 것중의 하나가 커다란 부도탑과 공적비에 관한 것이다.

 

삼막사는 서울과 수도권에서 잘 알려진 절이다. 관악산 등산로에 위치해 있어서 등산을 다니는 사람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특히 일요일 등산객과 참배객을 위하여 무료로 국수공양을 하는 절로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삼막사에 또 하나 볼거리가 있는데, ‘정대선사 부도탑과 공적비이다. 하지만 이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보는 사람은 드믈다. 명부전 뒤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관심밖의 이유도 있을 것이다.

 

 

 

 

 

 

 

정대스님 부도비와 공적비

정대스님은 조계종의 제30대 총무원장을 역임하였다.

 

 

 

 

상좌중에 눈에 띄는 법명이

 

정대스님은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분이다. 재임기간은 1999.11.23 ~ 2003.01.15까지 약 3년가량이다.  스님은 총무원장 임기를 10개월 남겨 두고 종단안정을 위하여 물러난뒤 삼막사에서 주석하였다고 한다. 같은 해 2003 12 5일 입적하여 오늘 날 보는 부도탑과 공적비가 삼막사에 건립된 것이다.

 

공적비에는 스님의 일대기등 스님의 모든 것이 사면에 빽빽히 기록 되어 있다. 그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은 스님의 상좌들과 장학재단에 관한 것이었다. 먼저 스님의 상좌를 보면 대부분 성자항렬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문의 내용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문도질(門徒秩)

공적비에 상좌및 손상좌가 기록되어 있다.

 

 

 

 

 

은상좌(恩上佐)

성용, 성목, 성주, 자승, 성혜(신용), 성공, 성도, 성월, 성하, 성윤, 성운, 성무, 일우, 성봉, 성유, 성각, 성견, 성산, 성학, 성창, 성법, 성인, 성경, 성파, 의탄, 성허, 성전, 성수, 성타, 성은, 성송

 

 

건동상좌(上佐)

덕신(성오), 선관(성록), 경우(성석), 도현(성재), 성현, 성원

 

 

 

대부분이 자 항렬임을 알 수 있다, 손상좌의 경우 탄문, 탄호, 탄묵등으로 자 항렬이다. 그런데 성자 항렬중에 낯익은 법명이 보인다. ‘자승이란 법명이다. 이에 대하여 종무소에 문의 하여 보니 현 조계종총무원장인 자승스님이다.

 

사재 50억을 출연하여

 

또 하나 공적비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한 내용은 은정장학재단에 대한 것이다. 공적비에서 스님은 사재 50을 출연하여 장학재단을 건립하였다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대체 스님이 50억씩이나 어떻게 모을 수 있었을까. 궁금하여 은정재단을 키워드로 하여 검색하여 보았다. 검색결과 은정장학재단의 홈페이지 (http://www.eunjung.or.kr/home/bbs/board.php?bo_table=03_1&wr_id=489&page=3)

를 발견하였다.

 

정식명칭은 은정불교문화진흥원이다. 홈페이지를 보니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재 50억원은  스님이 속가의 어머니인 최은수여사(법명:청정심)’로 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 돈으로 2002년 은정불교문화진흥원을 설립한 것이다. 은정이라는 명칭은 최은수 여사의 자와 정대스님의 자를 합하여 은정이라는 명칭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진흥원의 이사장이 현 조계종 총무원장인 자승스님으로 되어 있다. 그런 은정불교문화진흥원에서 하는 일은 무엇일까.

 

은정불교문화진흥원에서 하는 일

 

홈페이지에 따르면 불교계 인재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포교단체와 학술연구단체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불교계 잘 알려져 있는 지관스님의 ()가산불교문화연구원에도 지원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하나 잘 알려져 있는 것이 교리경시대회에 관한 것이다.

 

올해로 3회 째를 맞이 하고 있는 불교교리 경시대회가 바로 은정불문화진흥원 주최로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는 청소년과 군부대의 장병을 대상으로 하여 매년 열리고 있는데, 올해의 경우 8 28일에 전국 13개 시도별로 설치된 시험장과 군법당에서 열린다고 한다. 초등학생의 경우 같은 날 오후 2시 동국대 체육관이라 한다.

 

어떻게 해서 총무원장이 되었을까

 

정대스님의 이력은 매우 화려 하다. 동국대 이사장을 지냈고, 총무원에서는 5국장과 5부장을 지낸 유일한 스님이라 한다. 또 서의현 스님당시 중앙종회 의장도 역임한 경력도 가지고 있어서 행정통의 스님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런스님은 어떻게 해서 총무원장에 오르게 되었을까. 인터넷검색으로 찾은 스님의 총무원장 선출 과정은 다음과 같다.

 

 

1998년 월하스님에 의한 정화개혁회의 사태가 진압되자, 쌍계사 조실 고산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추대됐다. 보림회의 영담 정인 이안스님은 그의 상좌다. 그러나 고산스님은 절차상의 문제로 10개월만에 총무원장직을 내놓았다. 고산스님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기에 재추대론이 대세를 이뤘다. 고산스님은 총무원장 자리가 별로 달갑지 않았다.

 

후보등록 마감 직전 지선스님이 출마를 선언하자 그는 출마를 포기했다. 대세는 지선스님으로 기우는 듯했다. 직지사단은 지선스님 지지를 선언했다. 개혁세력에게 직지사단은 기피대상이었다. 영담 학담스님과 선우도량쪽은실천승가회가 개혁세력의 등에 칼을 꽂았다며 분노했다.

 

후보등록 마감 직전 영담 명진 지홍스님 등은 이미 지선스님의 선거대책본부장직을 수락한 정대스님을 찾아갔다. 한때 자신을쇄신 대상으로 지목했던 이들의 읍소에 감동한 정대스님은 이들의 출마요청을 수락했다. 정대스님은 서의현 총무원장 체제 때 종회의장(93)을 하는 등 불투명한 처신으로 94년 개혁불사 때 지탄을 받았었다.

 

선거는 정대스님의 승리로 끝났다. 지홍스님은 조계사 주지(재산관리인)가 되었고, ‘파워맨영담스님은 불교신문 사장을 맡았다. 그후 영담스님은 직지사단의 아성이었던 동국대재단까지 접수했다.

 

(한겨레신문, 대한불교 조계종 파벌 탐구 ③보림회 , 2004, 7 14일자)

 

 

정대스님이 총무원장으로 되기 까지 영담스님의 역할이 컷음을 알 수 있다. 94년 개혁이후 종책모임을 중심으로 파벌이 형성되었는데, 막후에서 합종연횡한 영대총무원장체제가 탄생한 것이다.

 

정대스님에 대한 평가는

 

그렇다면 정대스님에 대한 평가는 어떠할까. 한겨레신문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있다.

 

 

따라서 그의 도덕적 잣대는 준엄한 편이 아니었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범어사 스님의 국고보조금 편취사건과 교단 고위공직자의 고급 유흥장 출입 논란에 대해 방치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종권 다툼으로 폭력의 도가니였던 조계종을 안정시키는데 그의 포용력과 정치력이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또 그는 조계종의 풀리지 않던 숙제였던 새 총무원 청사 준공과 중앙승가대학 이전 불사를 해냈다.

 

(한겨레신문, 조계종 총무원장 물러난 정대스님 안팎 평가는 )

 

 

스님에 대한평가는 크게 도덕적 잣대와 능력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총무원을 감시해온 참여불교재가연대는 정대스님에 대하여 98년사태로 부터 조계종을 안정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나, 교단의 자정문제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이는 그 때 당시 고위직급의 유흥업소 출입등에 관한 단호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말한다.

 

또 정대총무원장 시절 간부를 지냈던 간부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낮은 도덕성에 높은 양심의 소유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역대 총무원장 스님들은

 

그렇다면 과거 총무원장 스님들은 재임기간 중에 어떤 업적을 남겼을까. 이에 대하여 이학종기자가 불교평론에 발표한 논문을 참조 하였다. 먼저 이기자는 역대 총무원장의 명단을 나열 하였다.

 

 

 

대한불교조계종 역대 총무원장

법명

재임기간

출가

득도

1

석진

1962.04.11 ~ 62.12.30

확인불가

확인불가

2

법용

1962.12.30 ~ 66.04.12

1906

박초월화상을 은사로 득도

3

경산

1966.04.12 ~ 67.08.09

1936

해담스님을 은사로 득도

4

영암

1967.08.09 ~ 69.09.13

1924

청담스님을 은사로 득도

5

월산

1969.09.13 ~ 70.07.22

1943

금오스님을 은사로 득도

6

순호

1970.07.22 ~ 71.07.30

1926

영호스님을 은사로 득도

7

순호

1971.07.30 ~ 71.11.25

1926

영호스님을 은사로 득도

8

석주

1971.11.25 ~ 73.01.25

1928

남전스님을 은사로 득도

9

경산

1973.01.25 ~ 75.10.06

1936

해담스님을 은사로 득도

10

서암

1975.10.06 ~ 75.12.05

1935

화산스님을 은사로 득도

11

영암

1975.12.05 ~ 76.10.04

1924

청담스님을 은사로 득도

12

영해

1976.10.06 ~ 76.12.03

1930

법해스님을 은사로 득도

13

자운

1976.12.03 ~ 77.07.23

1928

경원스님을 은사로 득도

14

혜정

1977.07.23 ~ 78.01.07

1953

금오스님을 은사로 득도

15

석주

1978.01.07 ~ 78.02.03

1928

남전스님을 은사로 득도

16

월하

1978.02.03 ~ 80.04.26

1933

경암스님을 은사로 득도

17

월주

1980.04.26 ~ 80.11.08

1954

금오스님을 은사로 득도

권한대행

탄성

1980.11.08 ~ 81.01.16

1945

금오스님을 은사로 득도

18

성수

1981.01.16 ~ 81.06.10

1944

성암스님을 은사로 득도

19

초우

1981.06.10 ~ 82.01.07

1947

동운스님을 은사로 득도

20

법전

1982.01.07 ~ 82.04.06

1935

설제스님을 은사로 득도

21

진경

1982.04.06 ~ 83.09.03

1945

일현스님을 은사로 득도

22

서운

1983.09.08 ~ 84.01.23

1950

정원스님을 은사로 득도

23

석주

1984.01.23 ~ 84.08.01

1928

남전스님을 은사로 득도

24

녹원

1984.08.01 ~ 86.08.25

1941

탄옹스님을 은사로 득도

25

의현

1986.08.25 ~ 90.08.26

1952

선오스님을 은사로 득도

26

의현

1990.08.26 ~ 94.04.18

1952

선오스님을은사로 득도

27

탄성

1994.04.18 ~ 94.11.25

1945

금오스님을 은사로 득도

28

월주

1994.11.25 ~ 98.11.20

1954

금오스님을 은사로 득도

권한대행

도법

1998.11.20 ~ 98.12.29

1967

월주스님을 은사로 득도

29

고산

1998.12.29 ~ 99.10.18

1948

동산스님을 은사로 득도

권한대행

원택

1999.10.18 ~ 99.11.23

1972

성철스님을 은사로 득도

30

정대

1999.11.23 ~ 03.01.15

1963

영신스님을 은사로 득도

권한대행

선용

2003.01.15 ~ 03.02.24

1962

도원스님을 은사로 득도

31

법장

2003.02.24 ~ 05.09.11

1960

원담스님을 은사로 득도

권한대행

현고

2005.09.11 ~ 05.10.31

1971

구산스님을 은사로 득도

32

지관

2005.10.31 ~ 현재

1947

자운스님을 은사로 득도

(출처: 총무원장은 이런 인물이어야 한다 / 이학종)

 

 

 

33대 총무원이 구성되기 전의 논문이라 현 자승총무원장은 보이지 않는다. 리스트를 보면 총무원장이 실제로 불교계를 대표하는 권한을 행사한 시기는 일반적으로 제17(1980) 월주스님부터라고 본다.

 

그 이전의 경우 실질적으로 종정중심체제이었다. 그러다 총무원이 두개(조계사, 개운사)로 나누어져 길고 지리한 공법정공방을 벌이다 마침내 통합총무원으로 탄생되어, 모든 권한이 총무원장으로 집중된 시기가 1980년 월주스님부터라고 보는 것이다.

 

뚜렷한 업적을 남긴 총무원장은

 

이와 같이 32대에 걸쳐 수십명의 총무원장이 탄생하였는데, 그 중에 뚜렷한 업적을 남긴 총무원장에 대하여 이기자는 다음의 6명을 들고 있다.

 

 

 

주요 조계종 총무원장의 주요 업적들

법명

재임기간

재임 시 행적 중 본받을 만한 장점

녹원 스님

1984.08.01~86.08.25(24)

승가 위상 제고, 종단 안정 기여

의현 스님

1986.08.25 ~ 94.04.18

(25, 26)

화합 행보, 부지런함, 불교방송 불교텔레비전 등 대형불사 수행

월주 스님

1980.04.26 ~ 80.11.08(17)

1994.11.25 ~ 98.11.20(28)

신중한 발언, 깨달음의 사회화 등 대사회 활동 강화

정대 스님

1999.11.23 ~ 03.01.15(30)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지원 등 탁월한 정치력, 감각 있는 발언

법장 스님

2003.02.24 ~ 05.09.11(31)

광폭 활동, 낮은 문턱, 비구니 중용 등 시대적 요청에 능동적 적응

지관 스님

2005.10.31-2009(32)

종단 안정 기여, 뚝심 있는 행보, 멸빈자 사면 통한 화합 추구

석주 스님

1971.11.25 ~ 73.01.25(8)

1978.01.07 ~ 78.02.03(15)

1984.01.23 ~ 84.08.01(23)

공평무사, 종단 어려울 때마다 공심으로 종단 안정 기여

경산 스님

1973.01.25 ~ 75.10.06(9)

동국대 소유권 확보 등 탁월한 행정 능력, 자애로운 리더십

(출처: 총무원장은 이런 인물이어야 한다 / 이학종)




 

이 표에서 정대스님은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지원과  탁월한 정치력, 감각 있는 발언등이 본받을 만한 점으로 나온다.

 

최고의 히트작, 청소년교리경시대회

 

햇살이 작열하는 뜨거운 여름날 매번 가보는 삼막사에서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 하나의 공적비에서 모든 것이 적혀 있었는데, 유심히 읽어 보니 한 사람의 원력이 지금까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불교장학재단이다.

 

비록 속가의 어머니의 재산이었지만 재단을 만들어 불교발전에 도움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중 특히 청소년교리경시대회는 최고의 히트작이라 생각된다.

 

이제 3회를 맞이 하고 있는 교리경시대회는 응시자가 급증하는 추세에 있다고 한다. 올해의 경우 작년 보다 34%가 늘어난 8,000명 가량된다고 한다. 이는 청소년과 군 포교에 매우 긍정적 효과를 가져 오고 올 것이라 한다.

 

그와 같은 교리경진대회를 준비하기 위하여 수 많은 검색이 이루어 질 것이다. 그렇다면 본 블로그도 방문하게 될지 모른다. 그 동안 수 천건의 불교교리와 관련된 자료를 올려 놓았기 때문이다.

 

천지는 꿈꾸는 집이어니

 

삼막사는 관악산에 있는 중급정도 규모의 절이다. 이런 절에 명소가 많이 있지만 정대스님이 입적한 곳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공적비를 유심히 보면 입적할 당시의 상황이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입적하기 3일전에 지었다는 임종게가 바로 그것이다. 공적비에 적혀 있는 임종게는 다음과 같다.

 

 

來不入死關 (래불입사관)

去不出死關 (거불출사관)

天地是夢國 (천지시몽국)

但惺夢中人 (단성몽중인)

 

올 때도 죽음의 관문에 들어오지 않았고,

갈 때도 죽음의 관문을 벗어나지 않았도다.

천지는 꿈꾸는 집이어니,

우리모두 꿈속의 사람임을 깨달으라

 

(정대스님 임종게)

 

 

 

 

 

 

 

삼막사에서 바라본 서해

가까이 경인교대가 보이고, 너머에 안양시가 보이고, 그 너머에 인천 송도신도시가 아스라히 보인다.

 

 

 

2011-08-0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