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조선불교유신론의 내용은, 만해 한용운선사와 백담사

담마다사 이병욱 2011. 6. 13. 15:56

 

조선불교유신론의 내용은, 만해 한용운선사와 백담사

 

 

 

 

 

크르르릉~”소리에

 

크르르릉~” 숲속에서 들려 오는 소리이다. 그 녀석이 나오면 디카에 담으려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는데, 나타나지 않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연신 거친 소리를 내곤 한다.

 

일요일 백담사에 갔었다. 백담사를 이곳 저곳 촬영하던 중에 산령각으로 갔다, 그 곳 주위에 있는 꽃을 촬영하고 있는 도중에 시커먼 물체가 거친 숨소리와 함께 산령각뒤로 하며 잽싸게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산령각

산령각 뒤위 숲이 매우 울창하다

 

 

 

그리고 숲속에서 크르르릉~”하는데, 순간적으로 ‘멧돼지임을 알았다. 산령각 바로 아래쪽에서 기와불사를 담당하는 보살님께 물어보니 종종 멧돼지가 출몰한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

 

동쪽으로 가다보니

 

늘 바쁜생활이다. 월요일이 되었다싶은데 뒤돌아 보면 금요일이다. 일 때문에 바쁘기도 하지만 글쓰기때문에 바쁘기도 하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오전은 거의 글쓰기로 보내고, 오후부터 일을 하다시피 하다보니 늘 야간작업과 주말작업이 일상화 되었다. 그래서 어느 때는 차를 몰고 멀리 떠나기도 한다. 이번 일요일도 그랬다. 일단 동쪽으로 가기로 하였다. 목적지가 정해진 것은 아니다. 동쪽으로 가면 자연을 더 많이 접할 수 있을 것 같아 가는데 까지 가 보기로 하였다.

 

외곽순환고속도로를 타고 죽 달리다 보니 근래 개통된 서울-춘천간 고속도로가 보였다. 작년 춘천과 가까운 청평사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막혀서 혼쭐이 난 적이 있지만 세월이 지나다 보니 다 잊어 버리고 먼 옛날처럼 생각되었다.

 

고속도로에는 의외로 차가 적었다. 하지만 돌아올 때 쯤 되면 꽉 막히리라는 것 쯤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는 달릴만 하였다. 단지 핸들에 손만 얹어 넣고 주위의 경치를 구경하며 가면 되는 것이었다.

 

고속도로 덕분인지 춘천까지 금새 다다랗다. 그런데 조금만 더 가면 설악산 백담사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계속 달렸는데, 예전과 달리 구불구불하지 않고 직선이어서 시간이 그다지 많이 걸리지 않았다. 수 많은 다리와 터널을 거치기 때문에 거의 일직선이나 다름 없는데, 용대리 주차장에 도착하였을 때 출발지로 부터 3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용대리에서는 마을에서 운영하는 미니 버스를 타야한다. 9대가 쉴 틈이 없이 좁은 산길을 곡예운전하듯이 아슬아슬하게 빠른 속도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있다. 거의 8km에 달하는 산길을 올라 도착한 곳은 백담사의 바로 코앞에 있는 다리앞이다.

 

다리앞 주차장에는 봉정암순례를 마친 불자들이 버스를 타기 위하여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이곳 백담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백담사 주차장

마을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봉정암순례객과 등산객이 긴 줄을 서 있다.

 

 

 

 

 

백담사는 여러 번 와 보았다. 우리나라 국민치고 백담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설악산 안에 있기 때문이다. 대청봉에서 내설악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한 번즘 들리게 되는 곳이 백담사이다. 학교다닐 때 친구와 겁없이 23일간의 설악산 등반을 하였는데, 그 때 당시 거의 기진맥진해서 찾은 곳도 백담사이었다.

 

 

 

 

 

 

 

백담사 극락보전

백담사는 647년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목조아미타좌불

1748년 조성되었으며 보물1182호이다.

 

 

 

 

 

 

 

 

그후 백담사가 다시 한 번 유명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전두환 전대통령 때문이었다. 지금도 전대통령이 머물렀다는 조그마한 방이 공개 되어 있는데, 이 또한 백담사를 유명하게 만든 원인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전두환 전대통령이 머물던 곳

극락보전 바로 앞 매우 협소한 공간에 그 때 당시 사용되던 물품이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백담사가 유명한 이유는 만해 한용운선사 때문일 것이다. 만해스님이 이곳에 머물면서 불교유신론등을 집필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백담사는 온통 한용운스님에 대한 것으로 가득찬 듯하다. 만해스님의 동상이 있는가 하면, 만해시비, 만해기념관등이 있어서 만해스님을 추모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사 동상

불교승려이자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이다.

 

 

 

 

또 하나 관심있게 본 것은 시비에 관한 것이다. 만해스님이 독립운동가이자 불교개혁가인 동시에 유명한 시인이었기 때문에 만해스님이 지은 시비가 이곳 저곳에 있는데, 이와 더불어 타 시인들의 시비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작가의 시부터 옛적 시인에 이르기 까지 매우 다양한 시비를 볼 수 있는데, 백담사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이다. 그런 시인들의 시비와 시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만해스님 시비

님만님이 아니라 기른 것은 다 님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만해스님의 나룻배와 행인

 

나는 나룻배

당신은 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이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느면 나를 돌어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어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어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行人

 

 

 

 

 

 

 

 

찻집앞 조주스님시비

 

: 불도가 무엇입니까?

: 차나 한잔 들고가게!

 

 

 

 

 

 

 

 

고은 시비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이성선 시비

 

 

 

 

 

 

 

 

 

오세영 시비

 

 

 

 

 

 

 

 

 

김구용 시비

 

 

 

 

 

 

 

 

 

매월당 김시습시비

 

 

 

 

 

 

 

 

 

허웅당 보우시비

 

 

 

백담사는 전두환 전대통령의 칩거와 만해스님의 흔적을 특징으로 보여지는 듯하다. 대부분 설악산을 찾는 등산객과 봉정암 순례길의 불자들이 주로 찾는 백담사에서 불교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전대통령이 칩거한 방을 기웃거리며 기념사진도 찍지만, 불자들은 만해스님기념관을 둘러 보기도 한다. 그런 만해스님 기념관에는 만해스님의 모든 것이 다 있는데, 특히 오도송이 눈이 띄었다.

 

 

 

 

 

 

 

만해기념관

만해스님의 유품이 보관되어 있다

 

 

 

 

 

 

 

 

만해스님의 오도송

만해기념관에 있다.

1917년 오세암에서 참선도중 진리를 깨닫고 읊은 것이라 한다

 

 

 

 

1910년 탈고한 유신론은

 

지금도 백담사에는 멧돼지가 출몰한다. 그런데 100년전에는 어떠하였을까. 만해스님이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할 당시가 1909년인데, 그 때 당시 백담사에는 멧돼지 뿐만이 아니라 곰이나 호랑이가 출몰할 정도로 깊은 산속이었을것이다.

 

세상과 완전히 인연이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 백담사에서 1910년 탈고한 유신론은 어떤 것일까. 인터넷 검색으로 찾은 자료에 따르면 모두 1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서장에 관한 부분이 모두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훌륭하게 유신하는 자는 훌륭하게 파괴하는 자라 하였다. 그런데 아주 깨뜨려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낡은 습관을 새로운 세대에 맞도록 고치는 것이 바로 개혁임을 역설한 것이다.

 

그런 유신에 대한 용어는 폐습을 개혁하여 새롭게함이라고 정의 될 수 있다. 그래서 5장서 부터 16장까지 구체적인 내용에 대하여 설명하여 놓았는데, 인터넷자료를 참고 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조선불교유신론 주요내용

 

No

항목

주요내용

5

논승려지교육(論僧侶之敎育)

승려의 교육을 논하면서 폐쇄적인 독단주의를 배격하고 있다. 한국승려의 타락이 자유로운 탐구자세의 결핍, 안목의 왜소, 식견의 편협함에 있다고 본 그는 조선불교의 장래를 위하여 교육의 타당성을 주장, 승려교육제도를전문학의 기초학문인 보통학, ② 자연사범(自然師範) · 인사사범(人事師範)의 사범학, ③ 지식을 교환하고 학문을 교류함으로써 사리를 밝히는 외국유학 등을 제시하였다.

6

논참선(論參禪)

당시 승려들의 참선이 외형적으로는 매우 성황을 이루었으나 그 내실을 기하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 참선의 유신책으로 큰 규모의 선학관(禪學館)을 만들어 선의 이치에 밝은 몇 사람의 스승을 모시고 일정한 시험을 거친 뒤 승속(僧俗)을 가리지 않고 수용, 일정한 시간에 정진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였다. 또한, 일상생활과 자연 속에서의 참선을 말하고 있다.

7

논폐염불당(論廢念佛堂)

그 시대의 염불풍토를 비판하였다. 마음이 곧 부처이니 나에게 성불할만한 도가 있으면 스스로 성불하여 정토에 가게 될 것인데, 먼 다른 곳에 있는 부처에게 애걸하는 거짓염불을 폐지할 것과, 부처님의 마음을 염()하고 부처님의 말씀을 염하며 부처님의 행()을 염하기를 끊임없이 닦는 참다운 염불을 닦게 하겠다는 취지에서 염불당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8

논포교(論布敎)

당시의 조선불교가 낙후된 상태에 있다고 보았고, 그 원인을 세력의 부진과 포교의 부재에 두었다. 재래불교의 비포교성을 비판하고 불교의 생명을 영속시키는 포교의 필요가 급선무임을 강조하였다.

9

논사원위치(論寺院位置)

조선의 사원이 한결같이 산중에 있었다는 사실과 당시의 사원이 평화롭고 이상적인 승가 ( 僧伽 ) 본연의 화합중(和合衆)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채 갈등과 분열에 놓여 있음을 알고, 사원이 산중에 있기 때문에 진보사상 · 모험사상 · 구세사상 및 경쟁하는 사상이 없으며, 교육 · 포교 · 교섭 · 통신 · 단체활동 · 재정 등의 문제에 불리한 점이 많음을 지적, 불교의 구세적이요, 포교적인 사명을 위하여 도시로 나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0

논불교숭배지소회(論佛敎崇拜之塑繪)

사원 안에 봉안된 각종의 소상과 회화 〔 塑繪 〕 를 철거할 것을 주장하였다. 거짓 모습으로 된 대상을 만들어 중생들의 모범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소회가 발생한 원인인데, 당시 불교계에는 수많은 소회를 받들면서 복을 비는 폐단이 극도에 달하였기 때문에 소회를 간략하게 하여 혼란과 번잡함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고, 신앙과 예배의 대상으로서 석가모니 한 분만을 모셔놓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11

논불가지각양의식(論佛家之各樣儀式)

불교의 모든 의식절차를 남김없이 비난하고, 의식의 철저한 개혁과 폐지를 주장하였다. 전래하는 모든 의식절차가 번잡하고 다단하니 과감하게 간소화 해야 한다는 것으로, 예불은 하루 한 번씩 삼정례 ( 三頂禮 )만 하며 복을 빌어 망령되이 제사지내는 재공양(齋供養) 등은 모두 폐기해야 한다는 점 등을 주장하였다.

12

관어승려지가취여부자(關於僧侶之嫁娶與否者)

조선불교를 부흥시키는 중요하고 시급한 대책의 하나로 승려의 가취문제를 들고 있다. 혼인이 계율에 어긋나는 것이나, 이는 방편으로 계율을 설정하여 제한한 데 불과한 것일 뿐 승려가 독신생활을 계속하면, ① 윤리에 해롭고, ② 인구가 줄어 국가적으로 손실이며, ③ 포교에 해롭고, ④ 풍속에 해로우므로 반드시 승려의 혼인은 자유에 일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4

논사원주직선거법(論寺院住職選擧法)

그때까지의 사원 주지가 선거를 하지 않고 돌아가면서 한 번씩 맡는 윤번주지, 권리가 있는 자에게 의뢰하는 의뢰주지, 무력으로 얻는 무단주지의 세 가지 형태로 주지직을 맡아왔으나, 한 사찰의 성쇠가 주지에 달렸으니 선거법을 강구하여 주지를 뽑고, 또 월급을 주어 사원행정을 합리적으로 책임있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5

논승려지단체(論僧侶之團體)

조선승려의 대부분이 독선적 이기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서로의 단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탄하면서, 이들이 봉사의 정신으로 단결하여야만 불교유신은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16

논사원통할(論寺院統轄)

승려뿐만 아니라 사원도 사무절차나 의식에 통일성이 없기 때문에 사찰과 사람마다 차이가 심하여 불화가 생기고 뭉쳐지지 않으며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고 보았다. 조선불교를 살리기 위하여서는 조리있는 절차와 의식의 기준이 마련되고, 전 불교사원과 그 재산까지도 일률적으로 통괄하는 조직과 기구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출처 ;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docx 

 

 

내용을 보면 주로 스님들과 사찰의 개혁에 관한 것이다. 승려교육, 참선, 염불당 폐지, 포교의 강화, 불교의식의 간소화, 승려의 권익을 찾는 길, 승려의 혼인문제, 주지의 선거, 승려의 단결, 사원의 통괄 등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하여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신론은 현재진행형

 

이들 항목 중에 100년이 지난 오늘날 받아 들여지고 있는 것은 주지선거하나 정도라 생각되고, 승려의 혼인문제는 매우 비판 받았지만 오늘날 알게 모르게 은처를 두고 있다는 기사가 종종 불교관련인터넷사이트에서 거론 되는 것으로 보아 이 것 또한 만해스님의 의견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만해스님이 바라던 항목들은 1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이유로서 조선유신론과 유사한 유신론이 매번 나왔기 때문이다. 1964년 법정스님이 작성한 부처님전상서에서 부터 최근 미황사 금강스님의 ‘21세기 불교유신론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불교의 장래를 걱정하는 학자들 역시 한국불교의 미래에 대하여 쓴소리를 마다 하지 않은 것도 만해스님의 조선불교유신론이 지금 이시점까지 여전히 유효하다는 이야기와 같다. 그런 만해스님의 주장에서 지금 불교가 처한 현실을 짚어 보았을 때 그 때나 지금이나 가장 변함 없는 것이 있다면 8장의 ;포교의 부재; 9장의 ;사원의 위치;일 것이다.

 

하루빨리  도시로 나와야

 

한용운스님 당시 포교 수단은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방법이었다. 그 이전 부처님당시에는 직접포교가 대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자후를 토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리려 노력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정보통신과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은 인터넷으로 포교가 가능하다.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은 현실공간과 마찬가지로 생활화가 되었는데, 만일 만해스님이 지금 계시다면 틀림없이 온라인상의 포교에 대하여 말씀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인터넷 카페을 만들고, 블로그를 만들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것을 권장하는 것 뿐만아니라 요즘 뜨고 있는 트위터와 같은 소셜네트워크까지 적극적으로 활용하라고 주문 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100년전이나 지금이나 스님들은 산중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유신론에서 이부분에 대하여도 언급하였는데, 절이 산중에 있다 보니 불교가 위축되고 불교의 미래가 암담해질 것이기 때문에 하루빨리  도시로 나와야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처럼 100년전이나 지금이나 절은 산중에만 있는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 1세기전 만해스님이 우려하던 상황이 현실화 된 것이다. 도시는 십자가의 물결로 넘쳐나고, 교회천지가 되었다. 그 어디를 쳐다 보아도 불교는 사람사는 곳에 보기가 힘든 것이다.

 

더구나 정치, 경제, 문화등 사회전분야 걸쳐 기독교가 득세하게 되고,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 출세길이 막힌다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  그때 당시 전혀 바라지 않던 것들이 100년 후에 현실로 되어 기독교가 주류인 나라가 되어 버린 것이다.

 

만해스님의 100년후 예언

 

만해스님이 주장한 조선불교유신론은 100년전의 이야기이지만 한국불교가 해결해야할 과제로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런 유신론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의 하나를 보면 유신론의 논조가 극히 외형적이고 피상적인 승단의 병폐만을 지적하고 불교교리의 현대적해석에 대하여 등한시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서문에서도 확인 할 수 있듯이 만해스님이 언급한 불교는 대승불교에 입각한 진여불성사상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마음속에 갖추어진 진정한 자아를 찾아 가는 것과 천당이니 하는 따위를 받드는 소위 미신과 그 거리가 어떻다 하겠는가라고 비교하고, . “죽은 자를 모두 살려 놓는다는 따위는 암우하기 그지없는 밥통이나 하는 소리라고 하여 유일신교의 교리를 마음의 미신행위로 본 것이다.

 

그래서  불생 불멸의 경지를 영원한 참된 자아에서 구하는 것이 불교이고, 따라서 불교는 지혜의 종교이고 미신의 종교가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100년 흐른 후의 세상은 철학자들이 반드시 온 힘을 기울여 이에 항거함으로써, 소위 미신적인 종교가로 하여금 지금부터 1세기 안의 천지로부터 종적을 감추게 만들 것이 확실하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00년이 흐른 지금 우리나라는 스님의 바램과는 거꾸로 완전히 유일신교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렇듯 스님은 진여, 불성, 법성과 같은 대승의 논리로 유일신교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스님이 활동하던 당시에도 아함경과 같은 근본가르침을 전하는 경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님의 서문을 보면 사성제와 팔정도, 연기법과 같은 근본가르침에 대한 내용은 볼 수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시대의 불교는 선종위주의 불교이었기 때문에 진여 불성의 관점에서 파악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불교교리의 근대적해석이나 주석이 부족하였다고 비판 받는 요인중의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불교의 출현

 

스님이 유신론을 집필할 당시의 불교와 지금의 불교는 많이 차이가 있다. 이는 호랑이가 출몰하던 시절의 불교와 교통과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글로벌화한 세상에서 바라 보는 불교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모든 정보가 오픈되고 공유화 되는 시점에 있어서 가장 큰 차이라면 아마도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대한 관심과 열풍일 것이다. 이는 교학에만 그치지 않고 부처님당시의 수행방법 또한 매우 인기가 있어서 앞으로 한국불교의 대세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1700년 전통의 한국불교에 있어서 조선불교유신론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 전혀 새로운 불교가 출현으로 인하여 어쩌면 유신론은 수명이 다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만해스님의 유신론이 나온 이후 수 많은 스님들과 학자들의 후속유신론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그 때 뿐 만해스님 당시나 지금이나 그다지 큰 변동이 없다. 이럴 때 100년전과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 되고 있는 것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 담긴 불교의 등장이기 때문이다.

 

100년전에는 유일신교 극복을 위한 불교유신론을 주장하는 면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이제 또 하나의 불교의 출현으로 인하여 또 다른 상황을 맞게 된것이다.

 

바꿀것인가 깨버릴 것인가

 

본래 폐습을 개혁하여 새롭게 한다는 유신은 아주 깨뜨려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낡은 습관을 새로운 세대에 맞도록 고치는 것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아주 깨뜨려 버리고 새로 시작하지 않는한 낡은 습관을 고치기 어려울 것이다. 설사 땜질식처방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본체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앞으로도 계속 누군가 유신론을 주장할 것임에 틀림 없다.

 

이처럼 매번 유신론이 나오기 전에 한국불교가 발전하려면 두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기존의 것을 완전히 깨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따른 불교를 도입하여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완전히 깨고 다시시작하는 것은 불교유신이 아니라 불교혁명으로 볼 수 있다. 그렇게 하기위해서는 제도와 시스템을 혁명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하지만 기득권층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근본가르침에 충실한 불교로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유신이나 혁명도 필요없고, 더구나 기득권층의 반발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좋은 전통을 만들어가면 되는데, 이는 100년전 만해스님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일 것이다.

 

입자가속기와 진공묘유

 

한국불교가 위기라고 한다. 그런 직접적인 요인은 유일신종교 때문이다. 전에 보지 못하던 독선적교리와 배타적 구원관으로 무장한 유일신교에 대한 경계는 이미 100년 만해스님의 글에서 읽을 수 있었다.

 

글에서 스님은 유일신교가 미신임을 강조하며 “100년 이내에 모든 철학자들이 밝혀 줄 것이라고 말하고, 결국 유일신교는 지상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라 예언하였다. 결국 만해스님의 유신론은 유일신교 극복에 관한 것이기도 한데, 이를 대승불교의 진여, 불성을 통하여 설명하고자 했다.

 

이런 시도는 현재라고 해서 다르지 않아 보인다. 최근 불교TV사이트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선사로 추앙받는 ‘G선사가 불교TV정기법회에서 희망섞인 법문을 하였기 때문이다.

 

G선사는 불교의 공사상이 조만간 증명될 것이라고 하였다. 지금 전세계의 저명한 현대물리학자들이 입자가속기를 위하여 실험을 하고 있는데, 무에서 유가 나오는 실험현상이 성공하면, 반야심경의 색즉시공공즉시색그리고 공사상의 진공묘유가 맞는 것이 증명되어 불교사상이 크게 각광을 받게 될 것이라고 희망섞인 기대를 하는 것이었다.

 

진여불성에 기반을 둔 이들 두 분 주장의 공통점은 모두 외부에 기대를 거는 것이었다. 철학자나 과학자가 밝혀주면 불교가 유일신교 보다 더 수승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앞으로 100년 후 주류종교는

 

하지만 외부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이미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모두 있기 때문이다. 5부니까야의 주석서이자 수행지침서인 청정도론에 따르면 자재신이나 창조신등 절대자나 초월적 존재는 실재하지 않을 뿐 더러 실체도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초월적존재는 단지 이름이나 명칭으로만 존재할 뿐 인간이 필요에 따라 만들어 낸 개념뿐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한 내용은 논장인 아비담마나 경장인 니까야에서도 무수히 볼 수 있는 사항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따르면 두려울 것이 없다. 실재하지 않은 것은 모두 개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확산된다면 기독교에서 유턴하고 있는 세계사적 흐름과 함께 앞으로 100년 후우리나라의 주류 종교는 불교가 될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2011-06-13

진흙속의연꽃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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