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천주교의 ‘불교박해’사건을 아시나요, 이교도의 성지로 둔갑한 천진암

담마다사 이병욱 2011. 5. 3. 12:18

 

 

천주교의 불교박해사건을 아시나요, 이교도의 성지로 둔갑한 천진암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종교간화해와 협력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특히 천주교의 경우 추기경이 부처님오신날 축하 메세지를 발표하고, 초파일을 앞둔 시점에서 모주교단  일행은 모 사찰을 방문하여 종교평화와 생명, 환경등에 대하여 역설하였다고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에서 보도 하였다.

 

이처럼 겉으로 보기에 종교평화를 부르짓고 공생을 이야기하지만 종교적 이해문제에 관하여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현장을 수도권에 위치한 천진암에서 보았다.

 

천진암은 어떤 곳일까

 

신록이 시작 되는 일요일 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기분전환도 할겸 교외로 나갔다. 남한강이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를 목표로 가다가 도중에 방향을 바꾸었는데, 천진암 팻말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천진암에 한 번 가보기로 하였다.

 

경기도 광주시에 소재하고 있는 천진암은 일반적으로 천주교천진암성지로 불려지고 있다. 천진암은 불교사찰 이름인데 천주교성지라니 어떻게 된 일일까. 어떻게 하여 천주교성지가 된 것일까. 이제는 천진암이라는 말 보다 천주교천진암성지로 잘 알려져 있는 천진암은 어떤 곳일까 궁금하였다.

 

천진암터로 가는 길은 꽤 깊은 산속에 있었다. 골짜기를 따라 한 참 가야 나오는 심산유곡에 있는 절터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천진암은 없었다. 어떤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다만 천진암이라는 절 이름을 사용하여 천주교천진암성지로 불리우고 있을 뿐이다.

 

광대한 규모에 놀라고

 

천진암터에 도착하면 우선 광대한 규모의 놀라게 된다. 넓디넓은 주차장을 보면규모가 얼마나 클 것인지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주차된 차량은 별로 없다. 주차장이 텅 비어있을 정도로 드믄드믄 차가 있을 뿐이다. 아마도 오전이어서 그럴 것이다.

 

 

 

아래쪽이 주차장이다.

 

 

 

 

주차장을 지나면 입구가 나오는데 방명록에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게 되어 있다. 입구를 지나 가파른 포장도로를 올라가야 하는데, 오르는 도중 이국적인 장면이 눈에 띈다. 커다란 십자게 못이 박혀 있는 예수상인데, 고개를 오른쪽으로 떨구고 있는 모습이 가련해 보인다.

 

 

 

 

십지가와 예수상

 

 

 

예수상을 지나고 정상에 오르자 눈앞에 끝없는 초원이 펼쳐진다. 축구장 10개를 합한 것 보다 더 너른 광대한 대지이다.

 

 

 

 

 찬진암 대성당이 건립될 광활한 부지.

현재 네 개의 철제대문만이 사방에 설치되어 있다.

 

 

 

 

 

 

 

 

 

 

 

 

 

 

백년계획의 대성당 건축공사

 

드 넓은 초원위에 서보니 중간쯤에 인상적인 커다란 철제대문이 사방에 4개가 보인다. 아마도 공사를 하기 위한 터 닦기용 같다. 그런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조감도를 보니 마치 로마교황청에 있다는 성 베드로성당 만큼이나 큰 것 같다.

 

 

 

 

 

 

백년계획의 천진암대성당

 

 

 

그런데 이와 같은 큰 건물을 만들기 위해서 백년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몇년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백년 걸릴 것으로 생각하여 건립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건물을 건설하는 비용도 막대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모금함도 보이고, 심지어 신용카드로도 접수가 가능하다고 플레카드도 걸려있다. 또 커다란 돌덩이 하나에 얼마 하는 식의 금액도 적혀 있다. 이 건물이 완성된다면 아마도 동양최대의 성당이 될 것이다.

 

이처럼 너른 터와 거기에 짓게 될 건물의 대문만 본다면 더 이상 볼 것이 없다.다만 좌측 골짜기에 두 채의 커다란 건물이 있는데, 가까이 가보니 하나는 성모경당이라고 부르는 2층짜리 큰 건물이 있고,  좀 더 올라가면 천진암 박물관이라는 3층짜리 대리석 건물이 보인다. 오전이고 사람이 없어서 일까 문은 굳게 잠겨져 있고 한적하기만 하다.

 

 

 

 

천진암박물관

 

 

 

 

천주교창립조() 5인의 묘

 

다시 내려와 너른 터를 가로 질러 천주교창립조()’라 불리우는 5인의 묘역으로 향하였다. 아마도 이곳이 천주교 성지의 하이라이트가 될 것이다.

 

천주교에서 창립조라 불리우는 인물은 이벽,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정약종 다섯명이다. 이들 5인의 묘가 있는 곳은 공사장에서 우측 산길로 골짜기를 따라 20여분 가면 나온다.

 

 

 

 

묘역으로 올라가는 길에 보는 창립조에 대한 비석

 

 

 

 

그런데 가는 길에 천진암터를 발견하였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천진암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대신 천진암강학당지라는 비석만이 보인다.

 

 

 

 

천진암 강학지 터

이곳에 천진암이 있었고, 최근까지 영통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설명문에 따르면 1779년 이벽등이 이 곳 천진암에서 수년간 머물면서 천문, 지리, 의학, 서학등을 공부하였다고 하는데, 조선의 천주교역사는 이 강학에서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강학당지에서 조금만 더 가면 천주교창립조 5인의 묘역이 나온다.

 

 

 

 

천주교 창립조 5인의 묘역

이곳 역시 절터이었다고 한다.

 

 

 

5인의 묘는 이벽,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정약종인데, 이 묘역 터 역시 220년전에는 절터 이었다는 것이다. 설명문에는 이벽의 독서처지로 소개 되어 있는데, 이벽이 1784년 개인적으로 독서하며 학자들과 강학하였다고 소개 되어있다. 그래서 이 독서처야말로 한국천주교의 산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묘역아래의 약수터

절이 있었을 때도 약수터로 사용 되었을 것이다.

 

 

 

 

천진암성지에 천진암은 없다

 

하지만 지금의 5인의 묘역자리 역시 천진암이 있었던 곳이다. , 천진암에서 이벽등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정약종등에게 공부할 수 있도록 자리를 제공해 준 것이다. 그런데 이런 행위는 목숨을 거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실제로 천진암은 조선 말 가톨릭이 박해를 받을 당시 신자들을 숨겨 주었다가 스님들이 죽고 불태워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 어떤 설명문에도 천진암에서 이벽등 5인에게  자리를 제공하고 목숨을 걸고 보호해 주었다는 이야기는 찾을 수 없다.

 

대신 천진암의 흔적은 깨끗이 지워지고, 이곳이 한국천주교의 발상지이었다는 비석이 대신하고 있다. 더구나 절터가 있었던 또 다른 장소에서는 이벽,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정약종 5인의 묘가 조성되어 있어서 성역화 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천주교 창립조의 하나인 정약종의 묘

 

 

 

이처럼 천진암에서 스님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학습장소를 제공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진암과 관련된 이야기는 단 한 줄도 볼 수 없다. 또 천진암에 대한 그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천주교의 불교박해사건

 

절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사라진 절터에 5인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는 것을 보면 중남미에 있어서 천주교의 만행을 보는 것 같다.

 

스페인이 잉카제국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가톨릭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잉카제국의 신전을 모두 파괴 하였는데, 그 파괴된 자리에 성당을 지었다는 것은 다큐멘타리등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사항이다.

 

이처럼 서세동점의 제국주의 시대에 가톨릭은 전통문화를 철저하게 탄압하고 가톨릭으로 개종을 강요하고, 다시 일어설수 없도록 박해를 가하였는데, 그런 박해가 최근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다면 과연 믿을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실제로 천주교의 불교박해가 있었다. 그것도 먼 옛날이 아닌 90년대에 일어난 사건이다. 바로 천진암성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불교박해가 일어난 것이다. 이에 대한 생생한 기사가 있다.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인 미디어붓다의 이학종기자가 취재한 글이다. 이학종기자의 글(20 전, 천진암에 얽힌 씁쓸한 나의 취재 이야기)에 따르면, 90년도에 “한 사찰이 천주교 신부의 온갖 횡포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 부처님오신날 불자들이 절에 가는 것조차 방해를 한다”는 제보를 받고 천진암으로 달려가 취재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렇다면 그 때 당시 천진암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기사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제보를 받고 찾아간 곳은 천진암 성당지 내에 위치했던 대한불교법화종 소속 영통사라는 절이었다. 시골 할머니같던 이 절의 비구니 스님은 기자를 보자마자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계곡물에 손발을 씻으면, 한강상수원을 오염시켰다며 경찰서에 고발을 하고, 사람들이 절 인근에 버리고 간 소주병이며 음료수병을 주워 모아놓으면 쓰레기를 버렸다고 신고를 하고 한단다. 그러면 즉시 경찰서에서 순사들이 찾아와 자꾸 못살게 군다는 것이었다. 또 절에 오는 신도들이 절 아래 천진암 진입로 공사장을 통해서 올 수밖에 없는데, 그 사람들이 자꾸 통행을 방해해서 신도들 발길도 뜸해졌다는 것 등이었다.

(이학종기자, 20 전, 천진암에 얽힌 씁쓸한 나의 취재 이야기)

 

 

천진암에 얽힌 씁쓸한 나의 취재 이야기-이.docx

천진암에 얽힌 씁쓸한 나의 취재 이야기-이.pdf

 

 

 

천진암을 성역화하고 있는 B신부가 천진암터에 영통사라는 절을 지어 놓고 사는 비구니스님을 몰아내기 위하여 비열한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방해공작에 못이겨 비구니 스님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절을 옮길 수 밖에 없었는데, 영통사뿐만 아니라 옆에 있넌 화령암이라는 절도 옮길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이 1992년 서울신문에 종교간의 갈등이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 되었지만, 정작 종단에서는 개입하지 않았고 마치 남의 집 불구경하듯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고 한다.

 

대단한 천주교의 힘

 

이처럼 절을 옮겨 가게 하고, 도요지와 같은 문화유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근 일대를 밀어내어 오늘 날 보는 광대한 땅에서 동양최대의 성당을 100년에 걸쳐 짓겠다는 천주교의 힘은 대단한 것이다. 이는 천주교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마교황청을 중심으로 하여 전세계적으로 연계되어 있어서 가장 힘이 세고 가장 영향력이 있는 종교집단이라는 말과 같다.

 

천진암성역화작업은 마치 현대판 종교제국주의를 보는 것 같다. 과거 서세동점의 식민지 시절 중남미나 필리핀에서나 볼 수 있었던 가혹한 종교탄압이 9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있었다하니 천주교가 과연 종교화합과 공생을 말할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

 

은혜를 배신으로 갚고

 

천주교는 천주교인이 공불할 수 있도록 목숨을 걸고 장소를 제공한 천진암과 천진암의 스님들에 대한 흔적은 철저하게 지우고, 대신 그 자리에 천주교 성역화를 함으로서 은혜를 배신하는 행위를 하였다.

 

더구나 최근 천진암 절터에서 세워진 영통사와 화령암이라는 두 개의 절 마저 몰아내고 종교탄압을  하였다. 이처럼 배은으로 일관한 천주교에 대하여 어느 불교인은 자신의 칼럼에서 천주교가 양심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비석에 쓰여질 내용 정도는 남겨야 할 것으로 본다고 하였다.

 

 

 

한국 천주교가 박해받던 시절,
죽음을 무릅쓰고
우리 선조 교도들을 숨겨주고
강학 장소를 제공해주었던
천진암과 주어사 스님들,
한국 불교계의 용기 있는 행위에 감사드립니다.”

 

(향산거사, 종교 갈등과 한국 가톨릭의 역할- 천진암 성지 사업과 관련하여 -)

 

 

죽음을 무릎쓰고 천주교인을 숨교주고, 공부할 수 있도록 장소제공을 한 천진암과 스님들을 위하여 위와 같은 문구의 비석문정도는 남겨야 천주교가 종교평화와 상생을 말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천진암터에서 본 유일한 흔적

 

천진암터를 둘러 보면서 천진암의 흔적을 발견하려교 노력하였다. 하지만 모두 깨끗이 치워져 있어서 절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강학당지터에서 일군의 석판을 발견하였다. 돌이 매끈하고 이끼가 많이 끼지 않은 것으로 보아 90년대 초까지 이곳 천진암터에 자리 잡고 있었다던 영통사의 흔적이 아닐까 추측된다.

 

 

 

 

 

 

강학회터(천진암)에서 본 절터 유적

 

 

 

그런데 강학지 바로 아래에서 절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바위돌을 발견하였다.

 

 

 

 

 

 

강학회터(천진암) 아래에 절과 관련된 흔적

 

 

 

바위의 가운데에 동그랗게 인공의 흔적이 보였다. 하지만 두동강이가 난채 나뒹글고 있는데, 이 바위돌은 어떤 용도이었을까. 아무리 추측해 보아도 알 수 없지만 천진암과 관련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천진암복원불사

 

천진암은 이름만 남아 있는 절이다. 흔적은 남아 있지 않고 오로지 이름으로 만 존재하는 절인데, 그 마저 이교도의 성지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는 기구한 절이 되었다.

 

이제 천진암은 본래의 이름을 찾아야 한다. 더 이상 이교도의 성지이름으로 사용되는 것은 불교와 불교인의 수치이다. 따라서 은혜를 배신으로 갚은 배은의 천주교는 종교화합을 저해하고 자연파괴를 일삼는 성역화 작업은 즉각중단되어야 한다.

 

그리고 천진암의 본래의 이름을 찾을 수 있도록 천진암복원불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2011-05-0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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