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견제장치가 필요해, 신도조직없는 스님권력의 막행막식과 무애행
충격적 기사내용을 접하고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사이트에서 눈에 띄는 기사를 보았다. 명진스님이 조계종 집행부와 이명박정부를 강하게 비판하였다는 내용이다. 명진스님이 평화방송에 출연하여 조계종 집행부와 MB정권은 일란성 쌍동이와 같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는 명진스님의 한국일보와의 인터뷰 기사 내용중의 일부를 실었는데, 보통불자가 보기에는 매우 충격적인 내용이다.
“자승 총무원장과는 아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사이”라며 “예전에 함께 룸살롱에 갔던 것은 사실이다. 가지 않아야 할 곳에 가기는 했지만 중으로서 계율은 지켰다” 고 덧붙였다.
(“불교계 MB 하수인 됐다” 명진스님, 또다시 조계종 집행부- MB정부 비판, 불교포커스 2011-11-03)
지난 2001년 불교계를 떠들썩 하게 만든 이른바 ‘신밧드 룸살롱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해명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스님은 가지 않아야 할곳에 가기는 했지만, 수행자로서 계율은 지켰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아마도 ‘불음계’에 관한 내용일 것이다. 그렇다면 룸살롱사건은 어떻게 세간에 알려지게 된 것일까.
신밧드 룸살롱 사건
인터넷검색을 통하여 알게 된 사실은 2001년 7월 여성동아에서 보도한 기사때문이라 한다. 그런데 이 기사에 대한 소스 제공자는 불자이었다고 한다. 승복을 입은채 룸살롱에 들어온 스님들을 보고 어느 불교신자가 경악을 하여 올린 글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고 한다.
2001년이라면 아직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확산될 즈음이다. 하지만 디카등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이라서 이를 고발할 수 있는 현장목격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일부스님들의 유흥가 출입이 버젖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이런 일탈된 일부 승려들의 행태가 인터넷과 디카가 본격적으로 보급 되기 이전인 즉, 2000년 이전에는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요즘은 어림도 없을 것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휴대폰이나 디카로 촬영하여 인터넷에 올리면 금방이슈화 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일부 승려들의 탈선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감각적 욕망을 극복하지 못하고
승려들이 유흥업소를 출입한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감각적 욕망을 극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감각적 욕망을 빠알리어로 ‘까마(kāma)’라 하는데, 이에 대한 한역은 ‘음(淫)’이라 한다. 이는 ‘성행위’를 말한다. 그러나 까마는 매우 광범위한 의미로 쓰이고 있다. 가장 근원적인 다섯가지 욕망도 모두 까마로 보기 때문이다.
조준호교수의 글 ‘불교는 성적욕망을 어떻게 보는가(불교평론, 열린논단)’에 따르면, 까마는 1차적으로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의 같은 다섯 감각기관과 그 감각대상이 인연하여 일어나는 ‘쾌락추구’의 욕망을 말한다.
이런 이유로 해서 까마를 ‘감각적 욕망’으로 해석하는데, 이와 같은 욕망은 근본적으로 식욕, 성욕, 안락욕, 재물욕, 명예욕과 같은 ‘오욕락’과 동의어라 볼 수 있다.
앞서 기사에서 언급된 ‘가지 말아야 할 곳’ 즉, 룰살롱에서 술을 마셨다면 이는 승려와 불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오계중의 하나인 ‘불음주계’를 어긴 것이다. 그러나 “중으로서 계율을 지켰다”라고 하였다. 이는 이미 유흥업소 출입하여 불음주계를 어긴 것은 맞지만 ‘불음계’만은 지켜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백유경에서
하지만 유흥업소에 출입하였다는 자체가 벌써 계를 어긴 것인데, 더구나 술까지 마셨다면 그 이상 발전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다. 조준호교수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백유경에 있는 내용이라 한다.
한 출가자가 탁발의 시간을 아끼고 수행할 요량으로 우유를 구하기 위해 염소를 기르고, 다시 염소를 지킬 개를 구하고, 계속해서 염소를 놓아 키울 땅을 구하고, 급기야는 살림이 늘어나자 이를 맡길 아내를 구하게 되면서 결국 수행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준호교수, 불교는 성적욕망을 어떻게 보는가(불교평론, 열린논단))
[열린논단] 불교는 성적욕망을 어떻게 보는.docx [열린논단] 불교는 성적욕망을 어떻게 보는.pdf
이는 소유에 관한 문제이다. 1차적인 소유가 어떻게 2차적인 소유와 집착으로 끊임없이 확대재생산 되어나가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승려의 룸살롱 출입이 결국 불음계를 지켜 내지 못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이면에는 불음주계를 지키지 않은 것에서 부터 시작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룸살롱에 제정신으로 갔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스님들 견제장치가 필요해
이처럼 수행자가 계를 지키지 못하였을 때 그 파장은 더욱 더 증폭되어 결국 불교와 불자들이 피해를 받게끔 되어 있다. 그렇다면 불자들은 이와 같이 일탈된 행동을 하는 승려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철저하게 감시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어 더 큰 피해를 주기 전에 불자들이 인터넷에 고발하여 다시는 계를 지키지 않는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사는 어느 스님은 불자들에게 “스님들이 카지노 출입하는 것을 보면 이를 디카로 찍어 인터넷에 공개하도록 하라”고 장려 하였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는 일부 계를 지키지 않는 승려들을 감시하기 위한 견제장치라 볼 수 있다.
스님 마음대로
한국불교에는 스님들에 대한 견제장치가 별도로 있는 것 간지 않다. 그래서일까 모든 결정을 스님 마음대로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사찰건립에 관한 것도 포함 될 수 있다.
이웃블로거 중에 건축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법우님이 있는데, 그 법우님은 사찰건축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는 것 같다.
글에서 법우님은 스님들이 사찰을 건립할 때 ‘기와집’을 선호 하고 있는데, 이는 신도들을 배려하지 않고 스님위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기와집을 고집하는 이유는 신도들이 사찰에 깊숙히 개입하는 것을 싫어하는 경향도 없지 않아 있다고 한다. 또 절을 건립할 때 도시보다 산중에 짓는 것도 신도들을 위한 배려가 없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절을 짓는데 있어서 전통방식대로 지으면 평당 건축비가 2000만원 가까이 들어 간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식 건축방식으로 절을 지으면 평당 4~5백만원으로서 무려 4~5배나 절약되고, 신도들을 위한 공간도 충분히 배려 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의 스님들은 이런 신도들을 위한 주차공간이나 커뮤니티공간에 대한 배려 없이 전통방식의 기와집을 짓기 때문에 스님위주로 본다는 것이다. 이처럼 스님위주의 건축방식은 교회와 매우 대조된다고 한다.
절에 신도들의 공간이 없다
교회의 경우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이 주자창이고 또 신자들을 위한 커뮤니티 공간이 가장 먼저 배려된다고 한다. 이렇게 모든 것을 신자위주로 하다 보니 신도조직이 잘 되어 있어 지역에 대한 봉사활동등 모든 것이 신도위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불교의 현실은 매우 척박하다.
절이 스님위주의 수행공간이자 동시에 생활공간이다 보니 신도들의 공간이 없는것이다. 그러다 보니 신도들끼리 차 한잔 마실 수 있는 공간도 없는 곳이 허다하다는 것이다. 또 신도회도 유명무실하여 생겼다가 금새 없어지곤 하는데, 이는 스님들이 모든 권한을 가지고 절의 살림을 꾸려 나가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스님위주로 사찰이 운영되다 보니 모든 결정권한을 스님이 가지고 있는데, 때에 따라 수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어느 절의 경우 신도들의 보시금을 투자하여 모두 날리는 경우도 있고, 시주금을 개인적인 용도로 활용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이 모두가 스님들에 대한 견제장치가 없어서 일 것이다.
신도들과 소통하려 하지 않아
김나미 작가의 ‘신앙지옥 불신천국’에 따르면 교회에는 일종의 견제수단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목사가 함부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강한 ‘신도조직’ 때문이라 한다. 즉 견제수단이 되는 장로, 집사의 눈이 있어서 목사가 놀고 먹는 ‘무위도식형’이 없다고 한다. 이처럼 신도조직이 있으면 스님들이 함부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불교에서 신도조직이 되어 있는 사찰은 그다지 많지 않고, 설령 조직이 되어 있을지라도 스님을 견제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것은 아니다. 더구나 스님들이 신도회를 만드는 것을 싫어하거나 있는 조직도 돌보지 않아 스스로 와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신도회가 사찰에 관여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사찰의 건축물 하나만 보아도 우리나라 스님들이 얼마나 신도들과 소통하지 않으려는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신도들과 소통하려 하지 않고 모든 권한을 가져서 스님들이 수행과 포교에 몰두하지 않고 그 외 것들에 눈을 돌렸을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한국불교의 위상추락과 불자들의 이탈로 이어진다.
불교사회연구소가 남녀 1,512명을 면접 조사한 결과
최근 불교관련인터넷사이트에서 흥미로운 통계를 발견하였다. 제목은 “불교의 생활화? 조사해보니 ‘꽝’이었다”인데, 이는 불교가 생활이나 수행면에서 기독교에 모든 면에서 열세라는 것이다. 특히 수행적 측면에서 열세라는 것은 매우 충격적이다.
불교사회연구소가 16세에서 69세의 남녀 1512명을 면접 조사한 결과를 보면, 수행의 종교임을 표방하고 있는 불교가 수행면에 있어서 기독교 보다 못 하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평소 명상수행 정도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도 불교는 전체의 5.5%만이 열심히 한다고 응답했고, 외려 가톨릭은 16.3%, 개신교는 32.4%가 열심히 명상수행을 한다고 답했다.
(이학종기자, 불교의 생활화? 조사해보니 ‘꽝’이었다, 미디어붓다 2011-11-02)
이는 스님들이 아닌 일반재가불자에 대한 것이다. 기사에서 불자들은 전체의 5.5%만이 ‘열심히’ 명상수행을 하는데, 이는 동일항목의 가톨릭의 16%, 개신교의 32%에 비교하여 크게 뒤진다는 것이다.
주1회이상 종교행사참여가 고작 1.9%
기사에 따르면 이 뿐만이 아니다. 여러 항목에 있어서 유일신교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열세인데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구 분 |
불교 |
가톨릭 |
개신교 |
주1회 이상 종교행사참여 |
1.9% |
52.9% |
74.5% |
열심히 수행한다 |
6.9% |
22% |
41.3% |
명상수행을 열심히 한다 |
5.5% |
16.3% |
32.4% |
계율을 지킨다 |
18.8% |
39.5% |
52.6% |
종교관련 서적을 자주 읽는다 |
8.9% |
26.2% |
35.4% |
봉사활동을 열심히 한다 |
5.3% |
11.6% |
29.6% |
전법(선교)을 열심히 한다 |
0.8% |
4.7% |
21.5% |
신앙심이 높다 |
13.0% |
35.0% |
39.4% |
종교에 대한 소속감이 강하다 |
16.3% |
37.2% |
56.9% |
종교활동으로 어려움 극복경험이 있다 |
39.1% |
33.7% |
18.2% |
신앙생활에 만족한다 |
38.5% |
53.5% |
58.0% |
출처 : 불교의 생활화? 조사해보니 ‘꽝’이었다, 미디어붓다 2011-11-02
불교의 생활화- 조사해보니 꽝 이었다.docx 불교의 생활화- 조사해보니 꽝 이었다.pdf
‘종교활동으로 어려움 극복경험이 있다’라는 한가지 항목 외에 모두 열세이다. 특히 ‘주1회이상 종교행사참여’의 경우 고작 1.9%에 지나지 않는데, 모든 문제의 발생이 여기에 있다고 여겨진다. 이는 절이 도심에 있지 않고 거의 대부분 산중에 있기 때문이다.
절이 산중에 있다는 것은
절이 산중에 있다는 것은 스님들이 국민들은 물론 불자들과도 ‘소통을 거부’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그러다 보니 타종교에 비교하여 비교대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참여 횟수가 적다. 그에 따라 수행은 물론 계율, 봉사활동, 소속감, 신앙심등 전분야에 걸쳐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설령 절이 도심에 있더라도 갈 만한 곳이 별로 없다. 대부분의 절이 각종기도와 천도재등으로 마치 신도들의 ‘단물’을 빨아먹는 식의 기복과 방편으로 일관하다보니, 정법은 실종되고 수행은 꿈도 꿀 수 없어서 절에 가지 않은 불자들이 많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통계로 보는 불교의 현실은 암담하다. 이런 현실에 대하여 기사에서는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된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주된 세가지는 ‘생활불교’ ‘정법불교’ ‘수행불교’이다. 이 세 가지가 실현되지 않는다면 불교의 위상은 점차적으로 낮아질 것이라 한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스님들의 계행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한번 방송이나 신문등 메이져 메스컴에 스님들에 관한 부정적인 기사가 뜨면 불교의 위상추락은 물론 불자들에게까지 심각하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소불위의 스님권력을 견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통제받지 않는 스님권력
대부분의 사찰에서 신도조직이 없기 때문에 스님들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스님들이 게으름을 피워도 누가 말해 주지 않는다면 계속 게으름을 피게 될 것이다.
신선이나 살 것 같은 수려한 산을 배경을 가진 유서깊은 사찰에서 살며 하는 일 없이 등 따숩고 배부르게 즐기기만 하는 ‘무위도식형’, 오로지 자기밖에 모르는 ‘아상충만형’, 권위를 몸에 두른 ‘권위지향형’ 스님들이 수행과 포교를 등한시 한다면 이는 직무태만이다.
이렇게 온갖 좋다는 것은 다 누리고 사는 일부 스님들 중에 유흥가를 출입하여 불교위상을 추락시키고 불자들에게 근심걱정을 끼쳐 주었다면 이는 부처님과 불자들에 대한 배신행위와 같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불자들은 그런 스님들을 모시고 살고 있다. 이른바 신밧드 룸살롱 사건의 4인방 중의 하나가 한국불교를 대표하고 있는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언론에서 떠들기 전에
우리나라에서 스님들은 삼보중의 하나로서 귀의 대상으로 여긴다. 귀의 대상이란 믿고 의지하는 곳이고, 피난처이다. 그런 스님들중의 일부가 막행막식과 무애행으로 문제를 일으켜 불교의 발전을 저해하고 불자들에게 염려를 끼친다면 불자들이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감시하여야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국불교에서 스님을 견제할 만한 수단은 보이지 않는다. 신도조직이 있다고 하지만 타종교처럼 강력한 견제수단도 아니고, 더구나 신도가 조직화 되는 것을 싫어 하는 스님들의 속성때문에 신도조직이 있다고 하더라도 유명무실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견제수단이 없다보니 스님들이 승복을 입으채로 룸살롱 출입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일부스님들의 일탈된 행위에 대하여 메이져 언론에서 떠들기 전에 네티즌들이 먼저 고발해야 한다. 외부적으로 알려지기 전에 내부적으로 견제하는 것이다.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불교관련 NGO이고, 인터넷신문매체이고 또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불자들일 것이다.
Kāsāvakaṇṭhā bahavo 까사와깐타 바하오
pāpadhammā asaññatā 빠빠담마 아산냐따
pāpā pāpehi kammehi 빠빠 빠뻬히 깜메히
nirayaṃ te upapajjare. 니라양 떼 우빠빳자레
노란 가사를 목에 닿도록 입고 있었지만
많은 남자들이 지옥에 태어났다.
나쁜 기질을 가져
자기의 행동과 언어를 다스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Seyyo ayogulo bhutto 세이요 아요굴로 붙또
tatto aggisikhūpamo 땉또 악기시쿠빠모
yañce bhuñjeyya dussīlo 얀쩨 분제이야 두씰로
ratṭḥapiṇḍamasaññato. 랏타삔다마산냐또.
차라리 달구어진 쇳덩이를 삼킬지언정
계행이 없어 신구의를 다스리지 못한 자가
어찌 신심 있는 신자의 공양을 받을 수 있으랴?
(법구경 307-308, 거해스님역)
2011-11-0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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