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성스런 전도사 퇴치방법
불도(佛都) 부산
부산을 불도(佛都)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불교신자의 비율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2005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부산의 인구대비 불자비율은 39%에 달한다. 이는 부산인구 351만명 중 137만명이 불자라는 것이다. 이는 개신교의 36만명(10%)에 크게 비교된다. 그래서일까 교회가 그다지 많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역으로 서울과 수도권 도시들과 크게 비교된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눈에 밟히는 것은 구멍가게 보다 더 많다는 교회의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서울의 경우 인구 976만명중 불자는 고작 164만명에 지나지 않는다. 부산의 불자수와 비슷한 수치이다. 그러다 보니 비율도 매우 낮다. 서울 인구 대비 불자수는 16%에 지나지 않고, 반면 개신교의 경우 222만명으로서 22%에 달해서 불교 보다 훨씬 더 많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비율은 수도권 도시 역시 대동소이하다.
혜문스님의 전도사 퇴치방법
그래서일까 서울과 수도권에서 비기독교인을 상대로한 선교활동은 매우 극성스럽다. 교회가 있는 거리에는 선교를 목적으로 진을 치고 있기 때문에 걸어가기가 불편할 정도이다. 이뿐만아니다. 노방전도 또한 매우 극성스러운데, 그들은 주택가 사무실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전도활동에 열중한다.
그런 그들을 맞이하여 불자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묵묵히 참으며 무대응으로 일관해야 할까. 아니면 그들이 무례하게 굴었듯이 그들을 나무라야 할까.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말을 걸어 온다면 그에 대한 대답을 해주는 것이 예의일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일방적인 주장을 듣고 만 있을 것이 아니라 궁금한 사항에 대하여 질문도 해야 할 것이다.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혜문스님의 기독인들의 전도활동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하여 들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듯이 무례하고 공격적인 그들의 전도방식에 대하여 단호하게 대응하여 퇴치하는 방법이다. 그런 방법은 결코 신체나 언어폭력을 동반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논리적으로 따져 물어서 그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방법이다.
창조론의 오류
이런 방식은 부처님당시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부처님 당시에 창조론의 브라만교와 운명론, 우연론자들에 어떻게 대처하셨는지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당시의 모든 사상가와 철학자, 종교인들의 주의주장을 아주 심도있게 섭렵하시고 계셨다. 먼저 그들의 사상을 철저하게 배우고 따져 보았던 것이다. 그러자 곳곳에서 오류가 발견되어 그것을 진리라고 볼 수 없었고 또한 신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신에 대한 창조설부터 그들의 오류를 냉철하게 지적하였다. 먼저 신에 의하여 나의 인생이 주어졌다는 것을 따져 보면 다음과 같다.
신이 나를 지은 것이 사실이라면, 혹 내가 죄를 지었다면 나를 만든 신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지 왜 나에게 책임을 묻느냐는 것은 말이 안되는 논리이다. 자유의지를 주었다면 죄를 짓지 않도록 조치 했어야 하는 것이다.
왜 죄를 짓도록 하는 의지를 주어 놓고서 죄를 지었다고 나를 벌하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신의 피조물에게 벌하는 것이다. 이런 신의 존재는 정말 말도 안되는 ‘우스꽝스러운’ 신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사실이 과연 신이 할 수 있는 진실일까.
운명론의 오류
또한 유물론적 사고를 가진 운명론자들은 “내가 죄를 짓고 싶어서 지었느냐” “운명이 그렇게 되도록 흘러간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라고 지적을 하셨다. 죄를 짓도록 운명지어진 것인데 왜 나에게 죄를 물어서 벌할 수 있는가라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이렇게 운명론자에게 죄를 물을 수도 없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이냐에 대한 의문이다.
우연론의 오류
그리고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을 가지고 왜 나에게 죄를 물을 수 있느냐”라고 하면서, 죄의 문제를 우연에게 떠맡긴다면 그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을 하셨다.
궁국적인 죄의 소멸은
그래서 부처님은 각자 자신의 의지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의지로 지었던 죄의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잘라 말씀 하셨다.
그리고 그 죄를 신의 책임으로 돌리지도 말고, 운명이라고 핑계대지도 말고,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회피하지도 말며, 자신의 의지로 죄가 지어진 것임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과보로서 댓가를 달게 받고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여 앞으로는 절대 그런 죄를 짓지말라고 말씀을 하셨다. 이것이 궁국적인 죄의 소멸이라고 하셨다. 이런 가르침이 인간을 궁극적인 행복으로 이끄는 불교의 바른 가르침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모든 사상들의 오류를 지적하여 홀로 우뚝서서 당신의 사상을 펼치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을 주시하게 되었고, 드디어 불교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오류가 발견되지 않은 가르침
부처님 당시 위와 같은 사상은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고, 논의 될 수 있었던 모든 것이었다. 이 지구상에서 어떤 인간이 어떤 사유를 하더라도 위에서 언급된 범주에 속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경로를 통해서이든지 이와 같은 사상은 논의 되었고,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이들 사상을 논파 하였다.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후 2,600여년이 지났지만 부처님께서 주장하셨던 사상에서는 오류가 발견 되지 않았다. 그 모든 주장은 경전에 모두 실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극성스런 전도사나 기독인과 마주쳤을 때 이들을 어떻게 퇴치해야 할까. 그리고 삿된 견해를 믿는 그들을 어떻게 구원해야 할까 그 방법에 대하여 혜문스님의 법문을 녹취하여 참고 하였다.
창조의 재료는 누가 만들었을까
기독교의 창조론에 대하여 불자들은 “태초에 우주를 창조했다면 그 신은 무엇을 가지고 우주를 만들었느냐”고 물어야 한다. 우주를 만드는 재료를 누가 만들었기에 이 우주를 만들 수 있는 재료가 될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재료의 문제는 한없이 ‘소급’되기에 재료를 사용해서 우주를 만들었다는 그 주장자체가 거짓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만드는 그 신을 누가 만들었느냐”라고 물어야 한다. 그러면 전도사는 “그분은 스스로 있는 분”이라는 대답을 할 것이다. 이때 불자들은 어떻게 해야할까.
스스로 있다는 분은 누가 만들었을까
이때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당신이 말하는 그 스스로 있다는 분은 누가 만들었느냐”고 재차 물어야 한다. 그러면 계속 “그냥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때 “어떻게 누가 만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자기 스스로가 존재할 수 있느냐”고 물음을 한 번 더 한다. 전도사는 아마도 “신이니까 가능할 것”이라 대답을 할 것이다.
그래도 “스스로 있다고 하는 그 존재도 누군가가 만들지 않았겠느냐”고 계속 반복해서 물어 주다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정말 궁금하다는 모습을 보여 주기만 하면 된다.
“나는 도대체 그 스스로 있다는 존재를 누가 만들었는지 도통 알 수 없다”고 의문을 계속표시하고 조용히 돌아서면 된다. 이 때 답을 들을 필요가 없다. 답은 어차피 없는 것이고 뻔한 그들의 대답만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신은 본래 스스로 존재하고 어쩌고 하는 특질이 아니다. 신이라는 것은 고대 인도의 비슈와까르만(Visvakarman)이나 쁘라자빠띠(Prajapati)나 브라만처럼 100% ‘허구’의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들이 그렇게 실재한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 2+2는 5라고 믿는 것과 같다.
이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정말 믿지 못하겠다고 의문에 찬 모습으로 돌아서면, 그들도 따지는 사람앞에서는 강력하게 믿는 척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서는 “정말 누가 만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가 존재할 수 있지?” 하는 의문이 스스로 생기게 될 것이다. 스스로 자기들의 오류를 밖으로 말하지 못하고 있지만 스스로도 의심하게 되고 언젠가는 그 잘못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런 효과를 노려야 한다. 그들도 자신들이 믿는 신은 스스로 존재한다라고 교육을 받아서 그렇게 말은 하지만, 속으로는 확신이 없다는 것을 자신들 스스로도 잘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끝까지 따질 것이 아니라 이쯤 해서 접어 놓으면 아주 훌륭한 대응이 되는 것이다. 무지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논리에 한계가 오면 인정하기는 커녕 폭력적으로 방해하려고 쉽상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논리적인 것을 싸움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
‘죄’의 문제를 따져야 한다
다음으로 ‘죄’의 문제를 따져야 한다. “이 우주와 우리는 창조신으로 부터 지음을 받은 존재이고, 그 신의 의도대로 이 세상 모든 일이 흘러가니까 내가 지은 죄는 나의 책임이 아니라 당연히 나를 만든 신이 그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는 것이다.
나에게 죄를 짓도록 만들어 놓았으니 그 죄의 책임도 나를 만든 존재가 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내가 죄를 지었다면 짓고 싶어서 지은 것이 아니라 신으로 부터 부여받은 의지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의 책임을 나에게 물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 논리는 누가 생각해도 정당한 논리인데, 이 논리를 거부하면 그들은 정말로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사탄은 누가 만들었느냐”고 물어야 한다
요즘은 그들은 또 이렇게 주장을 한다. 사탄이 죄를 짓도록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는 참으로 모순되는 것이다. 이럴때는 태초에 없었던 사탄은 누가 만들었느냐고 물어야 한다. 당연히 창조신이 만들었을 것이니 그 또한 신의 책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탄에 의해 지어진 죄는 사탄에게 물어야지 왜 또 나한테 묻느냐고 따져야 한다.
그들의 논리는 진리가 아니다
아렇게 그들은 모순투성이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부처님의 말씀은 어느 것 하나 논리에 어긋나는 것이 없어서 보편성과 타당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논리는 모순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진리가 아니다”라고 결론을 낼 수 있는 것이다.
2011-11-0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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