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소 지으며 죽을 것이다!” 재생연결식과 윤회
올 것이 왔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12월 31일이다. 마치 마지막 죽음의식에 직면하는 듯한 느낌이다. 지나간 1년의 종착지가 바로 오늘같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모든 존재의 종착지는 결국 죽음으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무상함을 느낄때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무너지고 깨질때이다. 낙엽이 지고 날씨는 추울 때 누군가 몸마저 병들어 누워 있을 때 마치 이제까지 살아온 과정이 죽음과 마주한 순간을 위해서 있었던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사람의 목숨은
예측할 수 없으며 아무도 모른다.
이 세상의 삶은 짧고,
이 세상의 삶은 어렵고,
이 세상의 삶은 괴로움으로 묶여 있다. (574)
태어난 존재들은 죽는다.
죽음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늙으면,
아니면 다른 이유로 해서 누구든지 죽게 된다.
이것이 존재하는 것들의 길이다. (575)
(셀라경-Selasutta, 숫따니빠따 Sn4.7, 일아스님역)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마주 하게 되는 것은 결국 죽음이라는 것이다. 천년만년 살 것 같은 탄탄하고 탱탱한 몸매를 가진 젊음도 결국 몸의 모든 기능이 망가져 누워 있게 될 때 마주 하는 것은 마지막 죽음의식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생각
죽음에 직면한 자가 이 생에서 마지막 떠오르는 것은 어떤 것일까. 좋았던 것도있을 수 있고 차마 생각하기 조차 끔찍한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에 임박하여 마지막으로 떠 오로는 생각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는 것이라 한다. 자신이 삶의 과정에서 가장 인상깊게 지었던 업이나 업의 표상, 또는 태어날 곳의 표상이 떠오르기 때문이라 한다.
그렇다면 죽음의식 다음에 이어지는 의식은 어떤 것일까.
재생을 일으키는 마음
초기불교에서는 이생과 다음생을 연결하는 것을 ‘재생연결식’이라 말한다. 이는 업을 짓지 않아 더 이상 재생의식이 일어나지 않는 아라한의 경우 제외된다.
하지만 삶의 과정에서 무명과 갈애로 인하여 무수히 신구의 삼업을 지은 자들은 그 업의 힘 때문에 다음생이 시작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태어나고 싶지 않아도 지은 업 때문에 어떤 존재로든지 날 수 밖에 없는 것이 모든 존재들의 운명이다.
그런데 나는 곳이 선처일수도 있고 악처일 수도 있다. 이는 죽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죽음의식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좋은 표상이 일어나면 그 표상을 대상으로 마음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재생연결하는 식 즉, 재생연결식이다.
마음의 법칙 세 가지
이와 같은 재생연결식은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일종의 마음의 법칙에 따른다. 즉 마음이란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고, 한순간에 한가지 일을 할 수 밖에 없고, 그런 마음은 반드시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대명제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연기법에 대한 것이다.
연기법은 조건에 따라 법이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상속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마지막 죽음의식과 재생연결식의 관계 역시 철저하게 연기법적으로 설명된다. 죽음의식이 앞서 일어난 법이고 그 법이 남긴 조건에 따라 다음법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재생연결식인 것이다.
십이연기 정형구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생겨나며,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생겨나며,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성립한다.
(아하라경: Ahara Sutta, Nutriment, 자양분경, 전재성님역, 상윳따니까야 S12.2.1)
십이연기의 삼새양중인과표
자양분경이라고도 불리우는 아하라경에서 부처님은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라고 설명하였다. 이때 말하는 의식이 바로 재생연결식이다.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을 위해
이처럼 십이지연기는 삼세양중인과를 설명하기에 적합한데 이는 부처님이 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 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미 태어난 뭇삶의 섭생을 위하거나 혹은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을 위한 네 가지 자양분이 있다.
첫째 거칠거나 미세한 음식의 자양분, 둘째 접촉의 자양분, 셋째 의도의 자양분, 넷째 의식의 자양분이다.
그 네 가지 자양분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이들 네 가지 자양분은 이미 태어난 뭇삶의 섭생을 위하거나 혹은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을 위해 존재한다
(아하라경: Ahara Sutta, Nutriment, 자양분경, 전재성님역, 상윳따니까야 S12.2.1)
이에 대한 빠알리어는 다음과 같다.
Suttantapiṭake
Saṃyuttanikāyo
Dutiyobhāgo
Nidānavaggo
1.Abhisamayasaṃyuttaṃ
2. Āhāravaggo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 sambuddhassa
1. 2. 1.
Āhārasuttaṃ
11. Sāvatthiyaṃ -
Cattārome bhikkhave, āhārā bhūtānaṃ vā sattānaṃ ṭhitiyā sambhavesīnaṃ vā anuggahāya. Katame cattāro? Kabaliṅkāro1 āhāro oḷāriko vā sukhumo vā, phasso dutiyo, manosañcetanā tatiyā, viññāṇaṃ catutthaṃ. Ime kho bhikkhave, cattāro āhārā bhūtānaṃ vā sattānaṃ ṭhitiyā sambhavesīnaṃ vā anuggahāya.
부처님은 다시 태어남을 하게 하는 자양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음식, 접촉,의도, 의식 이렇게 네 가지의 자양분을 말한다.
재생연결의 마음(재생연결식)은 수태의식(결생식)
이렇게 아하라경(자양분경)에서 십이지연기가 삼세양중인과로 설명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註.
- 네가지 자양분 :
cattara ahara. 한역으로 四食이라고 하며, 그 네 가지 자양분은 1) 추박식(鹿搏食) 2) 세촉식(細觸食) 3) 의사식(意思食) 4) 식식(識食)이다.
여기서 추박식과 세촉식의 번역은 오류가 있다. 여기서 의식의 자양분, 즉 식식은 주석서에 따르면 cuticitta로서 죽을 때의 마음, 즉 수태의식(結生識)을 의미한다.
자양분이란 뜻은 원래 '나르는 것' 이란 의미인데, 일반적으로 자양분이나 음식으로 전용되었다. 여기서는 자양분의 의미가 취착(取著)을 뜻하는 upadana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upadana는 땔감을 의미하는데 ahara도 역시 불이나 등불의 자양분으로서 땔감을 뜻한다. '기름과 심지가 소모된다면 등불은 자양분이 없어 소멸될 것이다.' 이 경구에서 ahara가 갈애를 통해서 조건지어진다는 사실은 연기의 고리에서, 취착 즉 upadana가 갈애를 통해서 조건지어진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이 주석이 마지마니까야의 주석으로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명상수행의 바다-70p-])
(전재성박사, 아하라경: Ahara Sutta, Nutriment, 자양분경, 상윳따니까야 S12.2.1)
전재성박사의 주석에 따르면 네가지 자양분중의 식식(識食)은 빠알리어로 쭈띠찌따(cuticitta)라 하는데, 이는 죽음의식으로서 죽을때의 마음이고, 이 마음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의 마음(재생연결식)이 일어나기 때문에 수태의식(결생식)이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니까야의 주석서에 따른다고 하였다.
삼바웨시남 와 아눅가하야(sambhavesīnaṃ vā anuggahāya)
이와 같이 재생연결식으로서 식에 대한 언급이 경에서 보이는데 그문구가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을 위해”로 표현된다. 이 부분에 대한 빠알리어 해석을 보면다음과 같다.
빠알리어 문구:
sambhavesīnaṃ vā anuggahāya(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을 위해)
해석:
sambhavesīnaṃ-sambhavesin:
(m.求生者,one who is seeking birth) +īnaṃ(pl.dat위하여)
Anuggahāya:
(m.dat,섭수, 돕기, 지원하기 위하여,for help, for assistance)
(전재성박사, 아하라경: Ahara Sutta, Nutriment, 자양분경, 상윳따니까야 S12.2.1)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아하라경에 있어서 십이지연기는 삼세양중인과를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팍구나경(Moḷiyaphagguna1suttaṃ, S12.2.2)에서도
부처님은 연기법을 깨달았다. 그런 연기법은 십이연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성제의 경우 고와 멸이라는 2지 연기로 설명될 수 있고 삼세에 걸쳐 양중인과를 설명할 때는 십이지 연기로 설명된다. 그런데 부처님은 9지 연기도 설하셨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십이지 연기에서 무명과 행이 빠지고 식에서 출발하여 명색이 빠진 것이 9지연기이다. 이 9지 연기에 대한 것이 상윳따니까야에 실려있는 팍구나경(Moḷiyaphagguna1suttaṃ, S12.2.2)이다.
그런데 팍구나경에서 식에서 출발하여 명색이 빠진 9지 연기를 설하였다고는 하지만 명색이 빠진 것이 아닌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부분을 경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의식의 자양분은 미래에 다시 존재하고 태어나는 조건이다. 그것이 생겨날 때 여섯 감역이 생겨나고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난다."
빠알리어 :
Tatra kallaṃ veyyākaraṇaṃ, viññāṇāhāro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yā paccayo. Tasmiṃ bhūte sati saḷāyatanaṃ, saḷāyatanapaccayā phassoti.
(팍구나경: Moḷiyaphagguna1suttaṃ, 상윳따니까야 S12.2.2, 전재성박사역)
팍구나경(S12.2.2).docx 팍구나경(S12.2.2).pdf
팍구나경에서도 부처님은 재생연결식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의식의 자양분은 미래에 다시 존재하고 태어나게 하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뿌나바와비닙밧띠(punabhavabhinibbatti, 미래에 다시 태어날 것)
그런데 식에서 명색을 생략하고 곧바로 여섯감역(육입)으로 넘어간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빠알리어 뿌나바와비닙밧띠(punabhavabhinibbatti) 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아 놓았다.
- 의식의 자양분은 미래에 다시 생성되고... : 이 문장에 대한 한역은 정확히 일치하지만 한역경전의 난해성을 대표하는 문장을 구성하기도 한다.
'能招未來有 令相續生 有有故有六入處 六入處緣觸' 여기서 미래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란 단어인 punabhavabhinibbatti 란 말은 연기지분에서 namarupa(명색)을 대신한 것이 분명하다.
이 한문 부분에 대한 한글대장경(6. 420)의 번역은 너무 잘못된 것이다. '능히 미래의 존재를 불러 잇달아 나게 하고 존재가 있기 때문에 육입처가 있으며, 육입처는 부딪침을 인연한다.'
(전재성박사, 팍구나경: Moḷiyaphagguna1suttaṃ, 상윳따니까야 S12.2.2)
전재성박사는 팍구나경에서 명색이 빠진 9지연기를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10지 연기를 말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빠알리어 punabhavabhinibbatti가 명색( namarupa)을 대신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말은 punabhavabhinibbatti의 뜻이 ‘미래에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라 한다.
그리고 전재성 박사는 이 부분에 대한 한역 아함경(잡아함372경)의 번역이 ‘능히 미래의 존재를 불러 잇달아 나게 하고’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매우 잘 못된 번역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
이와 같이 십이지연기, 구지연기 또는 십지연기에 있어서도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명백히 재생연결식에 대하여 설명해 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불교인이면서도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그런 또 한가지 예로서 부처님은 팍구나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팍구나] “세존이시여, 누가 태어납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세존] “그와 같은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나는 ‘사람이 태어난다’고 말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사람이 태어난다’고 말했다면 ‘세존이시여, 누가 태어납니까’라는 질문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말하지 않은 나에게는 오로지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태어남이 생겨납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그것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이와 같다.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함께 생겨난다.
(팍구나경: Moḷiyaphagguna1suttaṃ, 상윳따니까야 S12.2.2, 전재성박사역)
부처님은 먼저 팍구나의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한다. “누가 태어났느냐”고 묻는 것은 잘못이고 “무엇 때문에 생겨납니까”라고 묻는 것이 올바르다고 가르쳐 준다.
이는 연기법적으로 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법적으로 태어남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것은 조건에 따른 법의 발생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반드시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와 같이 연기법적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윤회와 힌두이즘윤회
부처님이 설한 십이지연기는 삼세에 걸친 양중인과로 잘 설명된다. 그래서 마지막 죽음의 마음(cuti-citta)이 일아났다 멸하면서 이것을 조건으로 다음 생을 위한 재생연결식 (paṭisandhi-vinñāṇa)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윤회라 한다. 이런 윤회는 힌두이즘에서 말하는 윤회설과 엄격히 구별되는 것이다.
힌두이즘에서 말하는 윤회는 아뜨만의 전변을 뜻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육신을 버리고 새로운 육신으로 옮겨 가는 재육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생( rebirth) 이 아닌 환생(reincarnation)이라 한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른 윤회는 철저하게 연기법에 따른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윤회의 주체가 없는 연기적 흐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건에 따라 법이 일아나고 사라지고 상속하는 것을 윤회로 본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윤회는 두 가지가 있게 된다. 하나는 일생윤회이고 또 하나는 순간윤회이다.
일생윤회와 순간윤회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고, 한순간에 한가지 일 밖에 하지 못하고, 반드시 조건을 남기고 사라진다고 하였을 때 매 순간 여섯감각기관이 여섯감각대상과 부딕쳐 마음이 생멸한다면 이는 순간윤회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일생윤회는 몸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축적된 성향이 일생동안 지속되다가 마지막 죽음의식으로 끝나고 그의식을 조건으로 재생연결식이 생겨났을때를 말한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우리는 매 순간마다 윤회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매순간이 태어난 날이고 생일날이라 한다.
이는 철저하게 연기법에 따른 윤회를 말한다. 조건에 따라서 현상이 발생하고 조건에 따라 현상이 사라지면서 상속하는 것을 말하는데 순간윤회나 일생윤회나 연기법에 따른다는 것은 똑같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고통만 이야기 하였다면
부처님이 고통만을 이야기 하였다면 염세주의자로 몰렸을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부처님은 고통만 이야기한 무책한 염세주의자가 아니라 고통의 해결방법까지 제시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윤회에 대하여 말하였지만 그것으로 끝났다면 불교가 오늘날까지 전승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윤회를 끝내는 방법에 대해서도 설명하였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언제나 접할 수 있는 것이다.
팍구나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그러나 팍구나여,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의 (탐욕이)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감수가 소멸하며, 감수가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취착이 소멸하며, 취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고 죽음,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하는 것이다.
(팍구나경: Moḷiyaphagguna1suttaṃ, 상윳따니까야 S12.2.2, 전재성박사역)
이는 해탈과 열반의 길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 출발점은 느낌에서 시작 된다.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 갔을 때 이는 되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으로 본다.
흔히 루비콘강을 건너는 것으로 본다. 강을 건넜으면 그대로 돌진하는 것이다. 하지만 느낌에서 멈춘다면,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다면 더 이상 업을 짓지 않아 나고 죽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나는 미소 지으며 죽을 것이다!”
탐진치로 대표되는 번뇌를 소멸한 아라한은 업을 지은 것이 없어서 더 이상 재생연결식이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이는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나는데, 대상이 없으니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그런 아라한의 죽음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미소지으며 죽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미얀마의 모곡사야도 법문집에서 죽음에 임박하였을 때 다음과 같이 하라고 권고 하고 있다.
“이제 결심을 하고 선언 하십시오.
‘나는 미소 지으며 죽을 것이다!’“
(모곡사야도, 미소지으며 죽는 법)
미소_지으며_죽는_법(김춘란).hwp 미소_지으며_죽는_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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