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단멸론자들이 분탕질을 치는 요인은, 장조경(長爪經)과 디가나카경(M74)

담마다사 이병욱 2011. 12. 28. 19:55

 

 

 

 

단멸론자들이 분탕질을 치는 요인은, 장조경(長爪經) 디가나카경(M74)

 

 

 

 

단멸론자들의 단골 레파토리

 

불교인이면서도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 이를 일컬어 단멸론자들이라 한다. 이는 영속론과 더불어 부처님이 가장 경계하던 사항이다. 그런데 불교단멸론자들은 윤회나 삼세양중인과 또는 재생연결식 이야기만 나오면 이성을 잃는 것 같다.

 

그런 예를 댓글로 보았다. 올린 글(닥치고 믿어라? 이병철회장의 24가지 영적질문에 대한 답을 보면서)에 대한 댓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재생연결식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그게 그것인 것 같은데
12
연기를 3세양중인과로 해석하고 재생연결식을 통해 사후윤회한다는 것을
바로 지금 여기 현실에서 사실로 증명할 수 있나요?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맹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원가르침[근본불교]과는 전혀 다른
불멸 후 불교의 힌두화로 변질, 왜곡된 남방불교에 대한 맹신 때문에
사후윤회를 그렇게 믿는 것이 아닌지요?

붓다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가르침입니다.

 

(어느 네티즌)

 

 

댓글을 쓴 네티즌은 블로그가 비공개로 되어 있어서 어떤 사상을 가진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단멸론자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글에서 윤회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단멸론자들의 단골 레파토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남방이든 북방이든 모두 힌두교화 되었다는 것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내생은 없다

 

그렇다면 단멸론자들의 전형적인 주장은 어떤 것일까. 어느 인터넷 카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있다.

 

 

연기법의 진리에 의하면 몸과 정신은 무상한 연기적 존재라 몸이 사라지면 정신마저 사라지니 죽음이후에 대해서는 논할 가치조차 없는 것입니다.

 

(어느 단멸론자의 )

 

 

이말은 한마디로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내생은 없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단멸론적인 시각이다.

 

단멸론자들의 주장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일체의 느낌이 다 사라져 남음이 없다라고 주장한다. 육체의 죽음과 함께 정신 역시 죽기 때문에 업보윤회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라한이나 범부나 누구나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잘 살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윤회나 재생연결식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런 내용이 들어 있는 경은 모두 모아 쓰레기통에 버려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대체 단멸론자들은 어떤 경의 영향을 받았길래 단멸론자가 되었을까.

 

한역 아함경의 단 한구절에 의지하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경과 구절을 살펴 보았다. 그것은 의외로 몇 줄 되지 않는 내용이었다. 모두 한자어로 되어 있다. 단멸론자들이 부처님의 친설이라고 불리우는 니까야에 의지 하지 않고 한역 아함경에 의지하는 것은 단 한 구절 때문이라 보여진다. 그 한 구절은 무엇일까.

 

단멸론자가 의지하는 경에서 그 한 구절을 보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若彼終後於爾時一切永滅無餘 永滅

 

(한역잡아함경 969, 장조경, 붓다는 단멸론자?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일체의 느낌이 사라져서 남음이 없느니라.)

 

 

한역아함경 969경인 장조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것이 단멸론자들이 의지하고 있는 구절이다. 이 구절을 이유로 들어 업과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구절에 대한 단멸론자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만약 저 이 파괴되고 목숨을 마친 후라면 곧 이때 일체의 느낌은 영구히 멸하고, 남음이 없으므로 영구히 멸한다.

 

(단멸론자의 번역, 한역잡아함경 969, 장조경, 붓다는 단멸론자?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일체의 느낌이 사라져서 남음이 없느니라.)

 

 

죽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는 전형적인 단멸론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일반적인 한역은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일체느낌이 다 사라져서 남음이 없느니라

 

(일반적 한역, 한역잡아함경 969, 장조경, 붓다는 단멸론자?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일체의 느낌이 사라져서 남음이 없느니라.)

 

 

한역 역시 죽으면 남는 것이 없다고 한다. 이는 아라한에 해당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아라한은 살아서는 유여열반상태이지만 죽어서는 완전한 열반인 무여열반에 들기 때문이다.

 

어느 단멸론자의 분탕질

 

그런데 단멸론자들은 아라한 뿐만 아니라 누구나 죽으면 무여열반에 드는 것과 같은 단멸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생에서 많은 공덕을 쌓았건 악업을 많이 지었건간에 업보윤회는 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이와 같이 단멸론자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고 더 이상 내생은 없다라고 주장하는데, 어느 단멸론자는 자신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붓다이든 아라한이든 중생이든 그 어느 누구도 항상한다는 실체적 존재가 아니고 무상한 연기적 존재일 뿐이기에 인간사후에 힌두교적 사후윤회, 사후업보, 사후세계도 당연히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단멸론자의 글, 붓다는 단멸론자?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일체의 느낌이 사라져서 남음이 없느니라.)

 

 

 

사진 : http://mettarefuge.wordpress.com/2011/12/

 

 

 

불자라면 이 말을 과연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업보와 윤회를 부정하고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면 굳이 불교를 믿지 않아도 될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죽으면 모두 끝나는 것인데 수행이 무슨 필요가 있고, 무슨 도덕적인 삶이 가치가 있을까. 이는 단멸론에 바탕을 둔 허무주의일 뿐이다. .

 

이와 같은 허무주외와 단멸주의를 가진채 사람들이 사람들이 살아간다면 그들이 도덕적으로 어긋나는 행위를 서슴지 않게 하거나 쾌락을 즐기거나 심지어 악행을 해도 어느 누가 나서서 제지할 수 없을 것이다.

 

단멸론자들이 니까야가 아닌 한역경전에 목매달고 있는 이유는 단 한구절 若彼終後即於爾時一切永滅無餘 永滅이다. “()이 붕괴()하고, 정신()이 끝나면(), 남김없이(無餘) 모든 것이 끝난다(永滅)”이다. 그렇다면 니까야에서는 어떻게 표현되어 있을까.

 

니까야는 힌두이즘 이전에 성립되었다

 

일반적으로 한역경전 보다 니까야가 더 오래 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 빠알리 니까야는 부처님 멸후 1, 2, 3차 결집을 통하여 완성되었다. 빠알리니까야가 비록 고대인도에서 지방어로 쓰여진 것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대로 전승된 경전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부처님의 친설을 담고 있는 빠알리 경전은 스리랑카에서 기원전 80-94년 경에 전체적으로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는 힌두교가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전이다.

 

일반적으로 힌두이즘은 아소까 대왕으로 잘 알려진 마우리야 왕조의 붕괴 후에 시작 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불교에 억눌려 있던 브라만교가 환골탈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단멸론자들이 주장하는 힌두교 영향은 니까야에 없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니까야는 부차님의 가르침이 그대로 전승되어온 부처님의 친설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아함경(아가마)은 이와 다르다.

 

브라흐민(제관)의 언어 산스크리트어

 

빠알리니까야가 민중의 언어로 쓰여진 것에 반하여 아가마는 상류계층의 언어 즉 브라흐민(제관)의 언어로 쓰여진 것이다. 이는 아소까 대왕당시 기를 펴지 못하던 브라흐민들이 마우리야 왕조가 무너지자 다시 득세 하게 되었는데, 이후 브라흐민 왕조들이 세워 지면서 모든 문서가 그들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산스크리트어 쓰여진 모든 불교경전들은 브라만교의 후신이라고 볼 수 있는 힌두이즘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가마는 빠알리니까처럼 민중언어로 쓰여졌던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시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지게 되고, 이 아가마는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중국에 전해졌다. 그래서 한역된 것이 아함경이다. 이때가 4세기 말에서 5세기 전반까지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친설이 산스크리트어로 바뀌고 다시 언어체계가 완전히 다른 한자어로 번역되어 오늘날 까지 이르고 있다.

 

그런데 단멸론자들은 한역아함경의 한 구절에 집착하여 죽으면 끝이다, 더 이상 내생은 없다라는 단멸론을 주장하고 업과 윤회를 부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한역구절은 니까야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맛지마니까야의 디가나카경(Dighanakha sutta, M74)에서

 

다행스럽게도 요즘은 니까야 번역본을 볼 수 있어서 비교하기 좋다. 자료를 찾아 보니 한역 잡아함경에 실려있는 장조경(969)은 맛지마니까야의 디가나카경(Dighanakha sutta M74)’과 대응됨을  알 수 있었다.

 

경의 이름 디가나카는 유행승의 이름이다. 허무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디가나카는 사리뿟따의 조카라 한다. 사리뿟따가 막 교단에 들어 온지 2주가 되었을 때 디가나카가 부처님에게 질문하고 부처님이 답하는 형식으로 경은 구성되어 있다.

 

이 경에서 단멸론자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구절 若彼終後即於爾時一切永滅無餘 永滅,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일체의 느낌이 다 사라져서 남음이 없느니라.”의 내용이 있는지 찾아 보았다. 하지만 그 어떤 비슷한 내용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단지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지만 단멸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아주 다르다.

 

 

11. 악기베싸나여, 물질로 이루어지고, 네 가지 커다란 존재로 이루어지고, 부모에서 생겨나고, 밥과 죽으로 키워지는 이 몸은 무상하고, 떨어져 나가고, 닳아 없어지고, 부수어지고,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질병이고 종기이고 화살이고 재난이고 고통이고 적대적인 것이고 괴멸하는 것이고 헛된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관찰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몸을 무상하고 괴롭고 질병이고 종기이고 화살이고 재난이고 고통이고 적대적인 것이고 괴멸하는 것이고 헛된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관찰하면, 그는 몸에 있어서 몸에 대한 욕망, 몸에 대한 애착, 몸에 대한 종속에서 벗어납니다.

 

12. 악기베싸나여, 이러한 세 가지 느낌,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있습니다.

 

악기베싸나여, 즐거운 느낌을 경험할 때에, 그 때에는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지 않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지 않고, 그 때에는 즐거운 느낌만을 경험합니다.

 

악기베싸나여, 괴로운 느낌을 경험할 때에, 그 때에는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지 않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지 않고, 그 때에는 괴로운 느낌만을 경험합니다.

 

악기베싸나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할 때에, 그 때에는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지 않고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지 않고, 그 때에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만을 경험합니다.

 

 

13. 악기베싸나여, 즐거운 느낌도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이고 변화하는 것이고 쇠퇴하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이고 소멸하는 것입니다,

 

악기베싸나여, 괴로운 느낌도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이고 변화하는 것이고 쇠퇴하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이고 소멸하는 것입니다.

 

악기베싸나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이고 변화하는 것이고 쇠퇴하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이고 소멸하는 것입니다,

 

<디가나카의 경:Dighanakha sutta,  맛지마니까야 M74, 전재성박사역, 한역대응경전: 잡아함경 969. 장조경(長爪經)>

 

  디가나카의 경(Dighanakha sutta M74).docx  디가나카의 경(Dighanakha sutta M74).pdf

 

 

여기서 악기베사나는 유행승 디가나카의 종족이름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느낌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는 12연기에서 느낌에 대한 것과 같다.

 

그런 느낌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 이렇게 세가지가 있는데, 이는 십이연기를 접한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이와 같은 세가지 느낌에 대하여 부처님은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이고 변화하는 것이고 쇠퇴하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이고 소멸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연기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경의 어디에도 단멸론은 찾을 수 없다

 

경의 어디에도 한역에서 보는 것처럼  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일체느낌이 다 사라져서 남음이 없느니라.” 와 같은 단멸론적인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14. 악기베싸나여, 이와 같이 보아서 많이 배운 거룩한 제자는 즐거운 느낌을 싫어하여 떠나고, 괴로운 느낌을 싫어하여 떠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싫어하여 떠나고,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게 하고, 사라지게 하여 해탈합니다.

 

해탈되면 그에게해탈되었다.’는 앎이 일어나며, 나는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압니다.

 

<디가나카의 경:Dighanakha sutta,  맛지마니까야 M74, 전재성박사역, 한역대응경전: 잡아함경 969. 장조경(長爪經)>

 

 

이는 아라한의 열반을 말한다. 탐진치로 대표되는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여 다시는 나고 죽는 없을 짓지 않은 청정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아라한의 오도송이라 불리우는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함으로서 윤회를 종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청정범행을 닦은 아라한에게만 열반이 있을 뿐이지 일반 범부중생도 죽으면 육체는 물론 정신도 남김없이 사라진다는 단멸론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한역잡아함경 장조경(969)의 내용은

 

참고로 단멸론자가 인용한 한역잡아함경 장조경(969)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如是身色四大

聖弟子當觀無常觀生滅觀離欲觀滅盡觀捨

若聖弟子 觀無常 觀滅 觀離欲 觀滅盡 觀捨 住者

於彼身身欲 身念 身愛 身染 身著 永滅不住

 

 

(일반한역)

또 화종이여,  

이와 같은, 의 추한 네 가지 요소에 대하여 거룩한 제자는 무상한 것이라고 하고, 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관하며, 그에 대한 탐욕을 여의어야 한다고 관하고,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라고 관하며, 버려야 할 것이라고 관한다.

 

만일 거룩한 제자가 그것은 무상한 것이라고 관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관하며,

그에 대한 탐욕을 여의어야 한다고 관하고사라져 없어지는 것이라고 관하며, 버려야 할 것이라고 관하여 머무르면,

 

그는 저 에 대하여 몸이라는 욕심, 몸이라는 생각·, 몸이라는 애착·, 몸이라는 더러움·, 에 대한 집착이 아주 사라져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단멸론자번역)

만약 이 몸의 색(육체)이 추한 4대라면 색은 무상하다고 관하고, 색은 생멸한다고 관하고, 색에 대한 욕심의 버림을 관하고, 색에 대한 취착심의 멸진을 관하고,색에 대한 취착심의 버림을 관한다.

 

만약 성스러운 제자가 그의 몸에 대해 무상을 관하고, 생멸을 관하고, 이욕을 관하고, 멸진을 관하고, 버림을 관하며 머무는 자라면, 몸에 대한 욕심 몸에 대한 생각,몸에 대한 애착, 몸에 대한 염착,  몸에 대한 집착이 영구히 멸하여 머무르지 않는다.

 

 

 

彼於此三受。

覺苦覺樂覺不苦不樂。

彼受 若集 若滅 若味 若患 若出 如實知。如實知已。

即於彼受。觀察無常。觀生滅。觀離欲。觀滅盡。觀捨。

彼於分齊受覺如實知。
分齊受覺如實知。

若彼終後。

即於爾時一切永滅。無餘 永滅

 

 

(일반한역)

화종이여, 세 가지 느낌이 있다. 이른바 괴롭다는 느낌·즐겁다는 느낌·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이다. 이 세 가지 느낌은 무엇이 이 되며, 무엇이 발생이 되며,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변한 것인가? 즉 이 세 가지 느낌감촉이 인이 되고, 감촉이 발생이 되며, 감촉에서 생기고, 감촉이 변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감촉이 발생하면 느낌이 발생하고, 감촉이 사라지면 느낌도 곧 사라져서 지극히 고요하고 맑고 시원하게 되느니라.

 

그는 이 세 가지 느낌인 괴롭다는 느낌·즐겁다는 느낌·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에 대해서, 느낌발생·사라짐··근심, 그리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을 참답게 알고, 그것을 참답게 안 뒤에는 곧 그 느낌무상한 것이라고 관하고, 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관하며, 그에 대한 탐욕을 여의어야 한다고 관하고,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라고 관하며, 버려야 할 것이라고 관한다.

 

그리하여 그는 한계감각에 대해 사실 그대로 알고, 목숨한계감각에 대해 사실 그대로 알아서, 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일체느낌이 다 사라져서 남음이 없느니라

 

 

(단멸론자의 번역)

그는 이 삼수(三受)에서 괴로움을 느끼고, 즐거움을 느끼고괴롭지도 즐겁지도 않게 느낀다. 그가 저 느낌에 대해 만약 발생, 소멸, 맛들임, 근심, 벗어남을 여실히 안다면 이미 여실히 아는 것이다.즉 저 느낌에서 무상을 관찰하고, 생멸을 관찰하고, 이욕을 관찰하고, 멸진을 관찰하고, 버림을 관찰한 것이다.

 

그는 에 대해 느낌을 분별하여 여실히 알고, 목숨에 대해 느낌을 분별하여 여실히 안다. 만약 저 이 파괴되고 목숨을 마친 후라면 곧 이때 일체의 느낌은 영구히 멸하고, 남음이 없으므로 영구히 멸한다.

 

(출처: 붓다는 단멸론자?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일체의 느낌이 사라져 남음이 없느니라.)

 

 

이것이 단멸론자들이 사후윤회를 부정하고 업보를 부정하는 근거가 되는 경에 있어서 일부 구절이다. 특히 若彼終後。即於爾時一切永滅。無餘 永滅라 하여,  만약 저 이 파괴되고 목숨을 마친 후라면 곧 이때 일체의 느낌은 영구히 멸하고, 남음이 없으므로 영구히 멸한다.”는 이 구절을 인용함으로서 부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또 이에 대하여 [죽음 => ()() 소멸 => 고통 느낌(종식]”라는 등식을 만들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주장한다.

 

단멸론자들이 분탕질을 치게 하는 요인은

 

단멸론자들이 생겨난 요인은 명확하다. 한역경전에 오해를 살만한 내용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 한구절로 인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온갖 분탕질을 치고 다니게 만든 것도 한역경전에 실려 있는 애매모호하기 그지 없는 단어와 때문이다.

 

한역에서 若彼終後이라 하였을 때 이를 곧이 곧대로 해석하면 단멸론자들이 말하는 대로 만약 저 이 파괴되고 목숨을 마친 후라면으로 되어 남음이 없으므로 영구히 멸한다.”로 되어 단멸하게 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십이연기에 있어서 느낌에 대한 것이다. 십이연기 공식에서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나고 할 때 그 느낌이다. 그래서 갈애로 넘어가기 전에 느낌에서 알아차려야 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갈애로 넘어가면 이는 루비콘강을 건너는 것과 같기 때문에 업이 발생하여 생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면으로 보았을 때 부처님의 원음이 실린 경전을 접하는 것은 이시대의 행운이다.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 단멸론이나 영속론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2011-12-2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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