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론적 영원주의 극복을 위하여, 바까브라흐마경( 범천 바까경, S6.1.4)
테라와다불교의 게송중에 자야망갈라가타(Jayamangala-gatha)가 있다. 한역으로 ‘길상승리게(吉祥胜利偈) ’라고 하고 우리말로는 ‘승리와 행운의 노래’라고 한다. 영어로는 ‘Stanzas of Victory and Blessing’라 부른다.
자야망갈라가타 8번 게송
자야망갈라가타에는 여덟가지 부처님의 승리에 대한 이야기가 게송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마지막 게송이 ‘바까범천(Baka Brahma)’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게송은 다음과 같다.
청정하고 빛나고 위력 있는 범천 바까가
삿된 생각의 뱀에 손 물렸을 때,
성자들의 제왕 지혜의 의약으로 섭수하셨네.
이 위대한 힘으로 승리의 행운이 제게 임하길 바라옵니다.
(자야망갈라가타. 8번게송 브라흐마 바까-Brahma Baka, 전재성박사역)
독송용 자야망갈라가타(Jayamangala Gatha).doc 독송용 자야망갈라가타(Jayamangala Gatha.pdf
吉祥胜利偈 巴利文 黄慧音唱诵 Imee Ooi(黃慧音)창송
자야망갈라가타에 등장하는 여덟가지 이야기는 마라(Mara), 알라와까(Alavaka), 날라기리(Nalagiri), 앙굴리말라(Angulimala), 찐짜 마나위까(Cinca Manavika), 삿짜까(Saccaka), 난도빠난다(Nandopananda), 브라흐마 바까(Brahma Baka)를 소재로 하고 있다.
이중 브라흐마 바까 이야기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가지 이야기는 게송의 내용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브라흐마 바까이야기는 게송만으로 알기 어렵다. 대체 게송에서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함일까.
범천 바까의 삿된 생각
바까는 브라만교에서 말하는 ‘범천(梵天)’이다. 고대인도에 있어서 ‘브라흐마(Brahma)’는 범천으로 한역되고, 창조신을 말한다. 한편 이와 유사한 개념으로 ‘브라흐만(Brahman)’이 있는데, 이는 전지전능하고 초월적인 존재를 말한다. 또 ‘브라흐민(Brahmin)’이라는 말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재관을 말하며 동시에 경전에서 언급되는 사성계급중의 하나이다.
고대인도의 브라만교에서 범천은 이 세상을 만든 창조신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부처님은 범천이 창조신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윤회하는 중생임을 알려 주었다. 그런 것에 대한 가르침이 바까범천게송에서 “범천 바까가 삿된 생각의 뱀에 손 물렸을 때, 성자들의 제왕 지혜의 의약으로 섭수하셨네”로 표현 되어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떻게 바까의 잘못된 견해를 일깨워 주었을까.
바까범천이 삿된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너무 오래 살았기 때문이다. 너무 오래살다 보니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형성된 모든 것은 반드시 사라지고 만다. 어느 것 하나 제행무상의 법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바까범천의 잘못된 견해 즉 상견을 깨우쳐 주기 위하여 지혜의 방편을 사용하였다. 그것이 자야망갈라가타에 등장하는 여덟번째의 게송 바까범천이야기이다.
그런 바까범천이야기는 어느 경을 근거로 하고 있을까.
유신론적 영원주의를 극복하기 위하여
바까범천이야기는 고층에 속하는 초기경전인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다. 상윳따니까야의 56개 주제중에 여섯번째에 해당되는 브라흐마상윳따 (Brahmasaṃyutta)가 그것이다. 그런 브라흐마상윳따는 어떤 내용에 대한 것일까.
전재성박사의 상윳따니까야에서 해제글에 따르면 브라흐마 상윳따(범천상윳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제6쌍윳따「범천 쌍윳따」는 당시 인도의 최고신인 범천과 부처님의 대화를 다룬 것으로, 부처님이 당시에 지배적이었던 유신론적인 영원주의를 어떻게 극복했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경전이다.
특히 이 범천 쌍윳따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부처님께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후에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많은 사람에게 설할까 말까 망설이는 역사적인 장면이 연출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증득한 이 법은 심원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여 사념의 영역을 초월하고 극히 미묘하여 슬기로운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 감각적 쾌락의 경향을 즐기고 경향을 기뻐하고 경향에 만족해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도리, 즉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를 보기 어렵다... 내가 이 진리를 가르쳐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의 고통이 되고 나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그때 범천 싸함빠띠가 등장해서 진리를 설할 것을 권고한다. 그러나 그러한 청원 이전에 여기에 등장하는 싸함삐띠의 독백이 중요하다.
‘참으로 이렇게 오신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 머뭇거리며 진리를 설하지 않기로 마음을 기울이신다면 참으로 세계는 멸망한다. 참으로 세계는 파멸한다.’
이는 부처님께서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설하는 것이 다음 순간 세계를 파멸로부터 구원하는데 필수적인 것임을 자각하신 것을 드러낸다.
(전재성박사, 상윳따니까야 해제)
부처님이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고 난 후 법을 설할 것인지 말것인지 망설이고 있을 때 범천 ‘사함빠띠’가 나타나 법을 설해 주기를 간청하는 장면에 대한 것이다. 범천상윳따에 있어서 가장 유명하고 또한 불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범천상윳따에서 중요한 것은 전재성박사의 해제글에서 설명되어 있듯이 ‘영원주의의 극복’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고대인도 브라만교의 최고신인 범천과의 대화를 통하여 상견이라는 잘못된 견해를 가진 영원주의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다. 이에 관한 대표적인 경이 앞서 언급한 자야망갈라가타의 여덟번째 게송의 근거가 되는 바까브라흐마경(Bakabrahmasuttaṃ.)이다.
바까브라흐마경(Bakabrahmasuttaṃ, 범천 바까경, S6.1.4)
그런 바까브라흐마경은 어떤 것일까.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바까브라흐마경
(Bakabrahmasuttaṃ, 범천 바까, S6.1.4)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런데 그때 범천 바까에게 이와 같은 나쁜 견해가 생겼다.
'이것이야말로 항상하고 이것이야말로 견고하고 이것이야말로 영원하고 이것이야말로 완전하고 이것이야말로 불변의 법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늙지 않고 쇠퇴하지 않고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생겨나지 않는 까닭이다. 이것보다 높은 다른 벗어남은 없다.'
그때 세존께서 마음속으로 범천 바까의 생각을 알아채고 마치 힘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듯한 그 사이에 제따바나에서 모습을 감추고 하늘나라에 모습을 나타내셨다.
마침 범천 바까는 세존께서 멀리서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보고나서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바까] "존자여, 오십시오. 존자여, 잘 오셨습니다. 당신이 여기에 오시기를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존자여, 이것이야말로 항상하고 이것이야말로 견고하고 이것이야말로 영원하고 이것이야말로 완전하고 이것이야말로 불변의 법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늙지 않고 쇠퇴하지 않고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생겨나지 않는 까닭입니다. 이것보다 높은 다른 벗어남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말하자 세존께서는 범천 바까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만약 그대가 무상한 것을 실로 항상한다고 말한다면, 견고하지 않은 것을 실로 견고하다고 말한다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실로 영원하다고 말한다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실로 완전하다고 말한다면, 변하는 것을 실로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범천 바까여,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이다.
범천 바까여,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이다. 또한 그대가 늙고 쇠퇴하고 사라지고 생겨나는 것을 늙지 않고 쇠퇴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생겨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대가 다른 벗어남이 있는 것을 다른 보다 높은 벗어남이 없다고 말한다면 범천 바까여,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이다. 범천 바까여, 그대는 무명에 빠진 것이다."
[바까] "고따마여, 우리 72사람은 공덕을 쌓아 세상의 주재자가 되고 생사를 뛰어넘었습니다. 범천으로서 최상의 삶은 베다로 인한 것이니 우리에게 많은 사람이 기도합니다."
[세존] "그 수명은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지만 바까여, 그대는 길다고 생각하네.
범천이여, 그대의 수명은 나랍부다라고 나는 알고 있네."
[바까] "세존이시여, 나는 무한을 보는 자로서 태어남과 늙음의 슬픔을 넘어섰습니다. 나의 지난 계행과 덕행은 무엇인가 내가 알고 있는 그것을 말해보십시오."
[세존] "그대는 갈증에 신음하고 더위에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에게 물을 주었네.
그것이 그대의 옛 계행과 덕행이라고 잠에서 깨어난 나는 기억하네.
에니 강 언덕에서 습격당해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사람들을 풀어주었네.
그것이 그대의 옛 계행과 덕행이라고 잠에서 깨어난 나는 기억하네.
사악한 용왕이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갠지스 강 급류 속에서 사로잡은 배를
신통력으로 공략하여 놓아주었네. 그것이 그대의 옛 계행과 덕행이라고
잠에서 깨어난 나는 기억하네.
옛날 나는 그대의 제자로 깝빠라 불렸고 올바른 깨달음이 있다고 그대는 나를 인정했네.
그것이 그대의 옛 계행과 덕행이라고 잠에서 깨어난 나는 기억하네."
[바까] "틀림없이 당신의 나의 생애를 바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깨달은 님
참으로 당신의 광휘로운 위력이 그야말로 하늘나라를 밝히고 있습니다."
註.
- 범천 바까 : 맛지마 니까야에서도 범천 바까는 영원주의(常見)를 대표한다.
- 니랍부다 : nirabbuda. 인도인들이 좋아하는 환상적인 엄청난 숫자로, 천만의 9승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아무리 엄청난다 해도 그 수의 끝은 있게 마련이다.
(바까브라흐마경- Bakabrahmasuttaṃ, 상윳따니까야 S6.1.4, 전재성박사역)
바까범천의 패배(The defeat of Baka)
너무 오래 살아 자신의 전생을 잊어 버린 바까에게 부처님이 바까의 전생을 보여 주고 있다.
사진: http://www.photodharma.net/Malaysia/Wat-Olak-Madu-2/Wat-Olak-Madu-2.htm
바까범천은 너무 오래 살다 보니 자신의 전생을 잊어 버렸다. 그 결과 자신에게는 죽음이 없다는 불멸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런 바까의 잘못된 견해를 바로 잡아 주기 위하여 부처님은 바까의 거처에 가게 되는데 경에서는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듯한 그 사이에’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순식간에 당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자신의 전생이야기를 듣고
바까의 거처에 간 부처님은 바까의 전도된 인식을 지적한다. 무상한 것을 항상하다든가,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든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든가, 완전하지 않은 것을 완전하다든가,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뒤바뀐 생각을 말한다.
이와 같은 전도된 인식은 모두 ‘무명’에 기인한 것이라 말하고 바까의 전생에 대하여 이야기해 준다.
바까는 자신의 전생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견해가 잘못되었음을 시인한다. 이렇게 부처님은 모든 현상이 무상, 고, 무아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상, 락, 아, 정이라고 전도된 인식을 가지게 된 것이 무명에 기인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바로 연기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바까범천이 자신의 전생을 잊어 버리고 마치 영원불멸할 것처럼 살 것이라고 착각한 것은 수명이 ‘니랍부다’이기 때문이다. 이 니랍부다의 수명은 천만의 9승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토록 오랫동안 살지만 그 수명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수명이 다하면 아래세상으로 떨어져 끊임없이 윤회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대게 악처에 태어나게 된다고 한다. 과거생에 지은 선업공덕이 다하고 악업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윤회를 끝내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일이 윤회의 근본원인이 되는 무명을 타파하는 것이라 하였다. 왜냐하면 무명 뒤에 일어나는 상카라(행), 식등이 수반되어 결국 늙음과 죽음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명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아야 하는데, 이에 대한 대표적인 가르침이 연기법이고 이것은 사성제, 십이연기로 설명된다.
홀로 있기 심심해서 세상을
바까범천이야기는 부처님이 자신의 전생을 잊어 버리고 자신이 마치 창조주나 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존재에 대하여 잘못된 견해 즉, 삿된견해를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삿된 견해에 대한 이야기는 디가니까야의 브라흐마잘라경(Brahmajāla Sutta, 범망경)에서도 나온다. 그렇다면 세상은 어떻게 창조되었을까.
브라흐마잘라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그는 그곳에서 오랜 세월 홀로 살았기 때문에
싫증과 초조함이 생겨,
“오, 다른 중생이 여기에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갈망하였다.
(브라흐마잘라경-Brahmajāla Sutta-梵網經. 디가니까야 D1.2.4, 각묵스님역)
범망경(Brahmajala Sutta).docx 범망경_Brahmajala Sutta_.pdf
세상은 심심해서 창조하였다는 의미로 보여진다. 창조주가 혼자 있기 심심하고 무료하고 재미가 없어서 누군가 옆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독백하는 장면이다. 그러던 차에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자 다른 중생들이 수명이 다하고 공덕이 다해서
광음천의 무리에서 떨어져 범천의 궁전에 태어나 그 중생의 동료가 되었다.
(브라흐마잘라경-Brahmajāla Sutta-梵網經. 디가니까야 D1.2.4, 각묵스님역)
이렇게 하여 동료가 생기게 되었는데, 먼저 온 자는 자신이 이세상을 창조한 창조주일 것이라고 착각한다.
창조주의 착각
그에 대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자 그곳에 먼저 태어난 중생에게 이와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범천이요, 대범천이고, 지배자요, 지배되지 않는 자요,
전지자요, 전능자요, 최고자요, 조물주요, 창조자요, 최승자요,
서품을 주는 자요, 자재자요,
존재하는 것들과 존재하지 않는 것의 아버지다.
나야말로 이 중생들의 창조자이다.
(브라흐마잘라경-Brahmajāla Sutta-梵網經. 디가니까야 D1.2.5 , 각묵스님역)
이것이 창조주의 착각이다. 위에 세상에 있다가 공덕이 다하여 아래 세상에 먼저 온 것에 지나지 않는데, 그 다음 연속에서 새로운 존재가 나타나자 마치 자신이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된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피조물의 착각
이렇게 먼저 온 자가 창조주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나중에 온 자들 역시 착각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뒤에 그곳에 태어난 중생들에게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존자는 범천이요, 대범천이고, 지배자요, 지배되지 않는 자요, 전지자요, 전능자요,
최고자요, 조물주요, 창조자요, 최승자요, 서품을 주는 자요, 자재자요,
존재하는 것들과 존재하지 않는 것의 아버지다.
이 존귀하신 범천이야말로 우리들의 창조자이시다.
(브라흐마잘라경-Brahmajāla Sutta-梵網經. 디가니까야 D1.2.5, 각묵스님역)
나중에 온 자들은 먼저 온 자에 대하여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일 것이라고 착각하고, 자신들은 먼저 온 자의 피조물일 것이라고 역시 착각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가 형성된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는 창조주도 아니고 피조물도 아니다. 단지 무명을 원인으로 삼계를 윤회하는 중생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온 자들은 나중에 온 자들에게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원인이 없는 결과는 있을 수 없다. 만물이 존재하는 것은 모두 인과의 법칙에 따른 것이다. 이를 불교에서는 연기법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조건에 따라 법이 일어나고, 조건이 다하면 법이 사라지고, 조건에 따라 법이 상속된다. 이런 연기법은 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외도들이 있다. 만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들을 존재하게 하는 하나의 ‘제일의 원인’이 반드시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 원인을 거슬러 가다 보면 결국 ‘그분’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분은 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하여 외도들은 그분에 대하여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라는 바이블의 구절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이때 ‘스스로 있는 자’는 ‘자재천(自在天)’을 말한다.
그런데 자재천은 연기법칙에 따르면 있을 수 없는 ‘틀린 말’이다. 만일 자재천이 있다면 이는 원인을 가지지 않는 자이기 때문에 모든 곳, 모든 경우, 모든 사람에게 이것이 동일한 상태로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자재천은 원인 없이 성립되어 있기 때문에 정신과 물질의 원인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자재천 즉, 스스로 존재 하는 자는 연기의 법칙에 있어서 거짓이 되는 것이다.
“그게 바로 너이니라”
부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를 연기법으로 논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분 또는 그 한물건, 그놈을 찾기 위한 노력은 부단히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 그놈을 찾기 위하여 10년, 20년, 30년, 평생을 보내기도 하고, 그놈과 합일만 되면 깨닫는 것으로 본다. 심지어 어느 여성불교학자 H교수는 권하고 싶은 책으로 ‘우파니샤드’를 들고 있고, 거기에 나오는 문구 “그게 바로 너이니라”가 이유라 한다.
하지만 부처님은 우리가 창조주라 부르는 스스로 존재하는 그 분은 연기법을 모르기 때문에 삼계를 윤회할 수 밖에 없는 ‘중생’일 뿐이라고 경에서 말씀 하셨다. 단지 너무 오래 살아서 자신의 전생을 잊어 버리고 먼저 세상에 왔다는 이유로 자신을 창조주라고 착각하고 있고, 나중에 온 자들은 그를 역시 전지전능한 조물주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위대한 힘으로 승리의 행운이 제게 임하길
그런 잘못된 견해에 대하여 알려준 것에 대한 내용이 자야망갈라가타의 8번 게송 바까범천이야기이다.
Duggāhadiṭṭhi-bhujagena sudaṭṭha-hatthaṃ 둑가-하딧티 부자게나 수닷타 핫탕
Brahmaṃ visuddhi-jutimiddhi-bakābhidhānaṃ 브라흐망 위숫디 주띠밋디 바까-비다-낭
Ñāṇāgadena vidhinā jitavā munindo 냐냐가데나 위디나- 지따와-무닌도
Taṃ tejasā bhavatu te jayamaṅgalāni 땅 떼자사-바와뚜 떼 자야망갈라-니
청정하고 빛나고 위력 있는 범천 바까가
삿된 생각의 뱀에 손 물렸을 때,
성자들의 제왕 지혜의 의약으로 섭수하셨네.
이 위대한 힘으로 승리의 행운이 제게 임하길 바라옵니다.
(자야망갈라가타. 8번게송 브라흐마 바까-Brahma Baka, 전재성박사역)
이 게송은 한국에서는 소승불교라 부르고, 구미에서는 주류불교라고 부르는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 널리 유통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독립기념일과 같은 공식적인 행사는 물론, 결혼식과 같은 비공식적인 행사에서도 ‘축가’로서도 불리워진다. 그래서 이런 류의 게송을 빠알리어로 ‘빠릿따(paritta, 호주, 수호경)’이라 한다.
수호경으로서의 특징을 잘 드러나게 해 주는 것이 마지막 구절인 “이 위대한 힘으로 승리의 행운이 제게 임하길 바라옵니다.”이다. 부처님이 지혜로서 바까범천의 잘못을 지적하여 올바르게 인도하여 승리하였듯이 그런 부처님의 승리와 행운이 나에게도 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유신론적 영원주의 극복을 위하여
마치 주문처럼 보이기도 하는 게송이지만 대승불교권의 진언이나 다라니와 달리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에 대하여 찬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더구나 8번 게송의 경우 ‘상견(常見)’으로 대표되는 ‘유신론적 영원주의’의 극복에 대한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무상, 고, 무아에서 자유스러운 것이 없어서 상, 락, 아, 정으로 전도된 인식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는 연기법에 따른 무명타파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마치 심심해서 세상을 창조한 것처럼 보이는 창조주 바까범천이 사실 알고 보니 우리와 다름 없이 삼계를 윤회하는 ‘중생’에 지나지 않는 존재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제도해야 할 대상으로 본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스스로 원인 없이 존재한다는 ‘그분’ 또는 ‘그한물건’ ‘그놈’ 역시 연기적 존재로서 부처님의 가르침 즉, 사성제로서 제도해야 할 중생과 다름 없을 것이다.
2011-12-24
진흙속의연꽃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멸론자들이 분탕질을 치는 요인은, 장조경(長爪經)과 디가나카경(M74) (0) | 2011.12.28 |
---|---|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수바시따경(잘 설해진 말씀의 경, Sn3.3) (0) | 2011.12.25 |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 , 파다나경(정진의 경 Sn3.2) (0) | 2011.12.23 |
위대한 사람의 32가지 특징, 빱밧자경(Pabbajja sutta, 출가의 경, Sn3.1) (0) | 2011.12.21 |
죽어서 돌아온 사람들이 없기에, 재생연결식에 대한 붓다고사의 답변 (0) | 2011.1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