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일선 포교현장이 혼란스럽습니다”종교평화선언에 대한 어느 포교사의 외침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 2. 11:09

 

 

 

일선 포교현장이 혼란스럽습니다종교평화선언에 대한  어느 포교사의 외침

 

 

 

 

내우외환(內憂外患)

 

현재 한국불교가 겪고 있는 문제점은 무엇일까. 장로정권이 들어섬으로서 종교편향으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일까. 아니면 훼불이나 땅밝기와 같은 유일신교도들의 직접적인 공격으로 인한 우려일까. 이는 엄밀히 따지면 외부적 요인이다. 외적인 요인으로 인한 외환(外患)인 것이다.

 

그런데 최근 내적인 요인으로 인한 내우(內憂)가 있다. 그것은 종교평화실천을 위한 불교인선언(21세기 아쇼카선언)’으로 인한 정체성갈등이다. 이렇게 내우외환이 겹친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매스컴을 탄 내분보도

 

한국불교를 대표한다는 조계종에서 종교평화선언(21세기 아쇼카선언) 초안을 발표한 이래 불교계는 내분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불교계 내부에서만 논의 되고 갈등양상으로 번진 것이 이제 본격적으로 매스컴을 타게 된 것이다.

 

최근 일간지 종교전문기자가 불교계의 내분양상을 세상에 공표 하였다. 그 내용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조계종 ‘자성과 쇄신 결사 추진본부’ 본부장인 도법 스님이 법전 종정이 ‘종교평화선언’을 유보시킨 것과 관련한 공개적인 항의성 글을 발표한 데 이어 전 실천불교승가회 대표인 서울 북한산 금선사 주지 법안 스님이 항의 글을 발표했다.


 법안 스님도 도법 스님처럼 ‘종정 예경실장께 보내는 공개서한’의 형식을 빌었다. 종정을 보좌하는 예경실장은 해인사 주지 선각 스님이다.

 

(조현 한겨레 신문 종교전문기자, 법안스님, 종정예경실장에게 항의성 , 2012—01-01)

 

 

종교평화선언(21세기 아쇼카선언)이 종정스님의 지시로 유보 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총무원측의 법안스님은 해인사측의 예경실장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종정스님을 보필하고 있는 예결실장이 서류를 거짓으로 꾸며 선언을 무산시킨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내용이 불교계 내부에서 해결되지 않고 매스컴을 탄다는 것은 한국불교의 망신이다.

 

조계종 종헌종지를 보면

 

하지만 이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한국불교의 정체성갈등이다. 이번 종교평화선언(21세기 아쇼카선언)으로 인하여 한국불교의 정체성문제가 고스란히 노출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은 어떤 단체일일까.

 

 조계종 종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 장 종명 및 종지
 
1 조 본종은 대한불교조계종이라 칭한다.
본종은 신라 도의국사가 창수한 가지산문에서 기원하여 고려 보조   국사의 중천을 거쳐 태고보우국사의 제종포섭으로서 조계종이라 공칭하여 이후 그 종맥이 면면 불절한 것이다.
 
2 조 본종은 석가세존의 자각각타 각행원만한 근본교리를 봉체하며 직지인심 견성성불 전법도생함을 종지로 한다.
 
3 조 본종의 소이경전은 금강경전등법어로 한다. 기타 경전의 연구와 염불 지주 등은 제한치 아니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종헌)

 

대한불교조계종 종헌.docx  대한불교조계종 종헌.pdf

 

 

종헌은 일종의 헌법과도 같다. 그래서 종헌이라 한다. 그런 종헌의 종지를 보면 제2조에 석가세존의 자각각타 각행원만한 근본교리를 봉체하며~”라고 되어 있다.

 

봉체라는 단어가 국어사전에 나오지 않으나 받든다라는 뜻으로 본다면 조계종 종헌에서 종지는 문구에서 보는 것과 같이 근본교리를 받드는 것이 가장 먼저 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이어지는 직지인심, 견성성불로 대표 되는 선종의 가르침 보다 우선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무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년 조계종 화쟁위원회에서는 종지를 무시한 종교평화선언를 위한 불교인선언(21세기 아쇼카선언) 초안을 일방적으로 전격적으로 언론에 발표해 버렸다.

 

문제되는 문구는

 

그 내용 중의 일부 문구는 불교인이라면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극심한 논란을 야기 시키고 한국불교의 정체성갈등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그 문제되는 문구는 다음과 같다.

 

 

(1) 열린 진리관
 
불교는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으며 불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진리에 대한 표현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열린 진리관은 이웃종교를 대하는 기본 원칙이며 대화와 소통을 위한 출발입니다.
 
진리란 특정 종교나 믿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진리는 모두에게, 모든 믿음에 다 열려 있습니다.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 축약본) - 21세기 아쇼카 선언-, 조계종 화쟁위원회(위원장 도법) 2011-08-23>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docx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pdf

 

 

문제가 되는 문구는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 이다.

 

수정문구를 보면

 

이와 같은 문구가 논란이 되자 화쟁위는 문구를 다음과 같이 수정하였다.

 

 

첫째,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오직 불교를 통해서만 평화와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진리는 모두에게, 모든 믿음에 열려 있습니다. 열린 진리관은 이웃 종교와 대화하고 소통하기 위한 출발입니다.
(수정 선언문)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수정본.docx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수정본.pdf

 

 

하지만 이 수정선언문은 발표 되지 못하였다. 종정스님이 더 검토하라고 지시하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안이나 수정본이나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수정본에서 오직 불교를 통해서만 평화와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겠습니다.”의 문구와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의 문구는 같은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문구를 보는 두그룹의 시각

 

위 문구를 보는 시각은 두 그룹으로 갈린다. 조계종 종지에 있는 문구가 이를 잘 표현한다.

 

조계종 종지에 있는 석가세존의 자각각타 각행원만한 근본교리를 봉체하며라는 문구를 따른다면 선언문의 열린진리관은 수용할 수 없다고 보는 그룹이 있는가 하면,  종지의 직지인심 견성성불 전법도생함을 종지로 한다.”라는 문구에 따르면 수용가능한 것으로 보는 그룹으로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종지하나만 놓고 선언문을 보았을 때 한국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정체성에 대한 갈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따르는 그룹에서는 선언문의 폐기나 열린진리관에 대한 삭제를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주장에 대하여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에대하여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댓글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는데

 

최근 불학연구소장으로 새로 취임한 허정스님의 글이 불교닷컴에 실렸다. 이병철회장의 영적질문 24가지에 대한 불교적 답을 내 놓은 것에 대한 글이다. 그런데 이글을 놓고 댓글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 중에 서광스님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아쇼카선언과 관련한 이번의 논쟁에서...
마성스님이나,원불사단현같은 근본주의 성향인 분들은 빠져주시길 바란다.
이분들은...기독교근본주의자나,이슬람근본주의자들처럼..불교근본주의자들로서..문제의 사안을 흐리게하여..옆길로 접어들게 한다.
크게는 20여개부파...작게는 200여개분파로 갈려 헤매기만하던 시절..초기불교의 얕은 시각으로 문제를 보는 우를 범하기 때문이다.

 

(서광스님, 근본주의자들은 논쟁에서 빠지시라...)

 

 

서광스님은 불교근본주의자들은 이번 선언문과 관련된 논쟁에서 빠져 달라고 말하고 있다. 그 주된이유는 아마도 불교근본주의자들을 기독교근본주의자나 이슬람원리주의자와 같이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집단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피장파장...오십보백보라고

 

서광스님은 비구니스님으로 외국에 유학하여 공부하였고 특히 불교심리학분야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다. 그런 스님이 아쇼카선언문의 문제를 제기한 스님이나 재가불자에 대하여 근본주의자로 매도하는 것이 매우 놀랍다.

 

스님은 또 다음과 같은 댓글을 남겼다.

 

 

불성은 연기로서의 중도이다.
중도란 비유비무이다.
따라서 불교학자 버스웰교수가 말한 선불교의 불성이란 비유비무의 중도불성이다.
이러한 불성은...유와 무의 양변을 떠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신성.궁극적 존재,일자...등등은 모두 유에 치우친 것이다.
..양변의 미망...망상인 것이다.

이렇게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로서의 불성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신성과는 천지의 다름이 있다.
그럼에도..이를 간과하여 마치 같은양 오해하는 아래...원불사단현이나,연꽃등은...따지고 보면...기독교에도 진리가 있다고 하는 자들과 마찬가지이다.
피장파장...오십보백보로서...무지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고도...진정한 부처님제자라고 할수 있을까..?

 

(서광스님, 오십보백보....)

 

 

불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런 불성은 비유비무의 중도불성이라 한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존재는 유에 치우친 것이라 하는데,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로서의 불성과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불교와 기독교가 같은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한마디로 스스로 무식을 폭로하는 것과 같다는 뉘앙스의 글로 보인다.  

 

스님의 저서를 보면

 

하지만 스님의 저서를 보면 이와 다르다. 스님은 자신의 저서에 다음과 같이 말 하였기 때문이다.

 

 

같은 개가 짓는 소리를 한국사람은 ‘멍멍’으로 듣고, 미국사람은 ‘워프’로 듣는다. 하나의 진리를 두고 기독교는 ‘여호와’라 하고, 이슬람은 ‘알라’라 한다. 또 불교는 ‘부처’라 한다.

 

또 동일한 눈을 가리키면서 한국사람은 ‘눈’이라 하고, 미국사람은 ‘스노우’라고 한다. 이름이 다르다고 진실로 뜻이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 눈이나 개는 신, 알라, 부처와 같은 심상과는 달리 실제로 마음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에 서로 이름이 달라도 같은 대상을 뜻한다는 사실을 쉽게 알고 받아 들인다.

(서광스님, 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대승기신론, 불광출판사)

 

 

스님은 대승기신론 當知無明能生一切染法以一切染法皆是不覺相故(당지무능생일체염법이일체법개시불각상고)’의 구절을 설명하면서 개짓는 소리와 눈()의 비유를 들었다.

 

그래서 하나의 진리를 두고 기독교는 ‘여호와’라 하고, 이슬람은 ‘알라’라 한다. 또 불교는 ‘부처’라 한다고 하였다.

 

이때 하나의 진리는 무엇일까. 바로 아쇼카 선언문에 등장하는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와 같은 내용이 아닐까.

 

불교인선언을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

 

종교평화실천을 위한 불교인선언(21세기 아쇼카선언)이 불발된 것에 대하여 아쉬워 하는 사람들은 조계종 화쟁위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불교포커스 기사에 따르면 기독교계통의 KCRP종교간대화위원장 이정배 교수가 다음과 같이 토로 하였기 때문이다.

 

 

 

KCRP 종교간대화위원장으로서 종교평화선언의 준비 단계부터 발표식 무산까지를 지켜본 이 교수는 불교계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 교수는조계종에서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선언을 준비한다는 얘기를 듣고 KCRP 사회통합위원회 차원에서도 함께 발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불교계에서 먼저종교평화선언을 잘 정리하면 7개 종교가 각자 그 정신을 담은 선언을 하려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종교평화선언문에 대한 찬반 논란이 거세게 일고 결국 조계종 종정스님의 유보 지시로 예정됐던 선언 발표식이 연기되는 과정을 지켜보며불교계에 걸었던 기대가 허망하게 무너졌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종교평화선언 무산, 불교 배타주의 보였다” KCRP종교간대화위원장 이정배 교수 지적, 불교포커스 2011-12-28)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선언을 애타게 기다리던 곳은 기독교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번 선언이 무산 된 것에 대하여 불교의 배타주의를 보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런 KCRP는 기독교를 대표하는 단체는 아니다.

 

어느 기독교인은 댓글에서

 

이처럼 21세기 아쇼카 선언은 불교계 내부에서 보다 유일신교에서 더 바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일까 불학연구소장의 글에 대한 댓글에서 어느 기독교인인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였다.

 

 

신은없다고 2600년전에 부터 말했다고요?
그럼 석가의 가르침을 잘못 배웠군요?
석가도 생로병사에 대해 알고자 했고 깨달음을 얻기위해 왕자의 신분까지도 버리고 수행
길을 떠나지 않아나요?
석가는(
何時耶蘇來 吾道無油之燈)라 했습니다.
이말은 언제든지 예수가 오면 자기의 가르침은 바람앞에 등불이라고 말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중생들이 '극락왕생'하기를 바라는것이 맞겠지요
성경 시편434절에 보면 극락의 하나님께 나아가 찬양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결국 석가의 가르침도 예수님을 통한 도의 깨달음에 비하면 자기의 가르침은 바람 앞에
등불이라고 예언 했는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그 예언후 500여년이 지나 석가의 예언은 성취도니것입니다.
결국석가의 가르침도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왕생도 말씀을 통해서 얻는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신은 2600년전에 없었다는 것은 개인의 생각이라고 말해야지 불교의 전체적인 답변이라고
받아들이면 석가의 그 예언 마저 부정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철스님의 마지막 고백을 다시금 되돌아 봐야 합니다.
그것은 진실된 고백이였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느 기독교인, 석가는 예수의 가르침을 받으라 예언 했는데...)

 

 

글을 보면 유일신교를 믿는 자인지 불자인지 알 수 있다. 불자들은 부처님이라고 하는데 반하여 유일신교를 믿는 자들은 석가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제 기독교인들까지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의 쟁점 기사에 대한 댓글을 올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기독교인들이 그만치 이번 선언을 관심있게 지켜 보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런데 댓글을 보면 과거 성철스님의 발언을 인용하여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종교평화선언문이 발표된다면 기독교인들에게 어떻게 이용될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계종 개혁의 총사령탑이라고 볼 수 있는 조계종 자성과 쇄신 결사 추진본부장이자 동시에 화쟁위원장인 도법스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아쇼카 선언문을 추진하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천명하고 있다종정스님 지시공방에 대한 진위여부로 인하여 종단내 내분양상이 비치든 말든 어떤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루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당혹해 하는 일선 포교사

 

이러한 불교계내의 정체성갈등과 내분에 대하여 일선 포교현장에 있는 이들은 매우 당혹해 하는 것 같다. 댓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기 때문이다.

 

 

이 논란은 종교평화선언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도법 스님이 계획한 일정대로 진행되지 않자 공개편지를 보냈고
재차 법안 스님이 편지를 공개했다.
자칫 교리 자랑 논쟁으로 확대하면 결론도 안 날 것이고 별 쓸모가 없다.
논점을 좁혀서 종교평화선언문 중 구체적으로 어떤 문장이
부처님 가르침을 훼손하는지, 전법의지를 훼손하는지
어떤 대안이 있는지 촛점을 맞춰야 한다.
가능하면 문제가 되는 문장을 지적하고 대체하는 문장으로 완성시킨다면 좋겠다.

그리고 안타까운 점은 많은 불자들이 혼란을 겪고 있는 사안에 대하여
더 이상 침묵하지 말고 포교원장,포교연구실장,불학연구소장 등은
보다 분명한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혀주기 바란다.^^

 

(어느 포교사, 일선 포교현장이 혼란스럽습니다.)

 

 

 

 

 

 

육군훈련소 법당 호국 연무사에서 수계법회 모습

사진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95733

 

  

 

선언문의 취지에 대하여 공감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훼손하는 부분이 없는지 살펴서 하루 빨리 논란을 마무리해 달라는 일선 포교사의 간곡한 부탁이다. 그래서 이 선언문과 관련이 있는 포교원장, 포교연구실장,불학연구소장 등이 나서서 입장을 밝혀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가르침에 의지하라

 

새해 1 1일 낮시간에 EBS에서 방영한 법정스님의 의자를 보았다.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 중에 하나 남는 말중의 하나가 중들을 믿지 마세요”라는 것이었다.

 

부모형제까지 버리고 출가한 스님들을 믿었다가 언제 또 다시 훌쩍 떠나버릴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가르침에 의지하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앗따디빠경

(Attadīpa sutta , 자신을 섬으로의 경- S21. 1. 5.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 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않으며,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않는 자는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은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에서 발생하는가' 라고 이치에 맞게 관찰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은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에서 발생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거룩한 이를 보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물질이 나이고 나의 것이 물질이고 나 가운데 물질이 있고 물질 가운데 내가 있다고 여기지만, 그에게 그 물질은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 물질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거룩한 이를 보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감수가 나이고 나의 것이 감수이고 나 가운데 감수가 있고 감수 가운데 내가 있다고 여기지만, 그에게 그 감수는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 감수가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거룩한 이를 보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지각이 나이고 나의 것이 지각이고 나 가운데 지각이 있고 지각 가운데 내가 있다고 여기지만, 그에게 그 지각은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 지각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거룩한 이를 보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형성이 나이고 나의 것이 형성이고 나 가운데 형성이 있고 형성 가운데 내가 있다고 여기지만, 그에게 그 형성은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 형성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거룩한 이를 보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의식이 나이고 나의 것이 의식이고 나 가운데 의식이 있고 의식 가운데 내가 있다고 여기지만, 그에게 그 의식은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 의식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무상하고 변괴하고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을 알고 과거의 물질이나 현재의 물질이나 모든 물질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이다라고 여실하게 올바른 지혜로서 보면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끊어진다. 그것들을 끊어버리면 두렵지 않고 두렵지 않으면 지복을 얻게 된다. 수행승이 지복을 얻으면 '오로지 열반으로 향한 이' 라고 불린다.

 

수행승들이여, 감수는 무상하고 변괴하고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을 알고 과거의 감수나 현재의 감수나 모든 감수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이다라고 여실하게 올바른 지혜로서 보면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끊어진다. 그것들을 끊어버리면 두렵지 않고 두렵지 않으면 지복을 얻게 된다. 수행승이 지복을 얻으면 '오로지 열반으로 향한 이' 라고 불린다.

 

수행승들이여, 지각은 무상하고 변괴하고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을 알고 과거의 지각이나 현재의 지각이나 모든 지각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이다라고 여실하게 올바른 지혜로서 보면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끊어진다. 그것들을 끊어버리면 두렵지 않고 두렵지 않으면 지복을 얻게 된다. 수행승이 지복을 얻으면 '오로지 열반으로 향한 이' 라고 불린다.

 

수행승들이여, 형성은 무상하고 변괴하고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을 알고 과거의 형성이나 현재의 형성이나 모든 형성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이다라고 여실하게 올바른 지혜로서 보면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끊어진다. 그것들을 끊어버리면 두렵지 않고 두렵지 않으면 지복을 얻게 된다. 수행승이 지복을 얻으면 '오로지 열반으로 향한 이' 라고 불린다.

 

수행승들이여, 의식은 무상하고 변괴하고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을 알고 과거의 의식이나 현재의 의식이나 모든 의식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이다라고 여실하게 올바른 지혜로서 보면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끊어진다. 그것들을 끊어버리면 두렵지 않고 두렵지 않으면 지복을 얻게 된다. 수행승이 지복을 얻으면 '오로지 열반으로 향한 이' 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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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을 섬으로 : attadipa. 이 용어는 북방불교에서는 '자신을 등불로 하는' 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자신을 섬으로 하는' 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윤회의 바다에서 난파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곳이라는 의미에서 보다 타당하다. attasarana.

 

 

(앗따디빠경-Attadīpa sutta-자신을 섬으로의 경, 상윳따니까야 S21. 1. 5. 1, 전재성박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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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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