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가지 족쇄(結, samyojana)로 ‘깨달은 자’ 알아보기
로버트 버스웰 교수의 강의에서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알아 볼 수 있을까. 깨달음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불교TV사이트에서 로버트 버스웰 교수의 강의이다. 돈오와 점수에 대한 강의에서 지눌스님의 예를 들어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 전에 인도에서의 깨달음에 대한 것을 먼저 언급하였다. 일부 녹취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넓게 보면 도는 다양한 깨달음과 닦음의 순간들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단순한 방식은 몇 가지 기법을 통해 첫 깨달음을 경험토록 하는 것이다. 즉 깨달음 후 닦는 것이다.
이 길은 다양한 닦음수행으로 시작된다. 예를 들면, 계율에 따라 도덕적 규범을 준수하고 행동을 자제하면 명상적 집중상태 즉, 삼매를 기를 수 있고, 궁극적으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명징함도 기르게 된다. 이처럼 여러 가지 기법들이 있다. 불교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부분이다.
우리가 불교 관련 책을 통해 읽게 되는 많은 것들, 특히 니까야 또는 아함경 등 주류불교(Main stream Buddhism)경전은 결국 이러한 닦음을 위한 기본적인 기법들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기초적인 기법에 대한 것이다. 산스크리트어로 라우키카 바바나 마르가(laukika bhavana marga)이다. 기초수행 기법의 묶음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기법을 통한 닦음의 과정은 이해, 비전, 통찰의 경험인 첫 깨달음(Awakening)으로 향한다. 인도불교체계에서는 이를 ‘다르사나 마르가(darsana marga)’ 즉, 통찰의 길이라 한다. 즉, 현실이 어떠한지를 처음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이를 한자어로 ‘견도(見道)’라 한다. 영어로 ‘path of vision’ 이라 한다.
이경험을 바탕으로 초기불교 체계에서는 이를 “열반자체가 어떤 것인지 처음으로 깨닫는다”라고 설명한다. 처음으로 현실이 무엇인지, 순간순간 변하는 현상적인 경험세계 속에서 무엇이 진짜인지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열반으로 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 세 개가 있다고 하였다. 공해탈문, 무상해탈문, 무원해탈문이다. 세상에서 열반으로 향해 방향을 돌려 그 문을 통과하여 드디어 열반의 세계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최초로 비전, 니르바나, 즉 열반이라는 현실을 경험한다고 볼 수 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헛된 인식과 잘못된 오해가 사라지고 나면 진정한 현실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길이 열린다. 여기서부터 또 다른 새로운 닦음(Cultivation) 수행의 과정이 시작된다. 이를 산스크리트어로 바바나 마르가(bhavana marga, 修道)라 하고, 더 정확히 로카타라 바바나 마르가(lokattara bhavana marga)라 한다. 세속을 초월한 단계이다.
이 단계의 수행자는 확고하다. 이미 열반에 대한 통찰을 얻었고, 그 첫 깨달음을 맛 보았기 때문이다. 도가 언젠가 완성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현실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또 다른 수행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초월적인 ‘바바나 마르가’의 길이다.
이 단계가 완성되면 다음 깨달음의 단계로 오르게 된다. 궁극적 깨달음으로 수행도의 끝이다. 또 다른 깨달음이다. 이 궁극적인 단계에서 수행자는 깨달은 자로서 이해를 넘어 실천도 하게 된다. 즉 초기의 수 즉 닦음의 단계에서는 세상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세상에 대한 이해를 완성하고자 하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결국 깨달음 즉 현실이 진정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를 보고 열반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 때 수행자는 자기가 깨달았다는 사실을 알고 인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기긴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첫 번째 깨달음을 경험하여 열반이 진실로 무엇인지 알고, 통찰의 길(견도)에 입문하였다 할지라도 여전히 계속하여 닦음의 수행을 일정기간 동안 해야 한다. 그래야만 깨달음과 행동이 완벽하게 통합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새로운 이해를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과 행동을 완전하게 통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모두 거치면 깨달음을 얻었다는 자각을 하게 될 뿐만 아니라 완전한 깨달음을 구족한 사람으로서 이를 바탕으로 행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로버트 버스웰 교수, 제22회 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22, 불교tv 2011-11-08)
인도불교에서 깨달음은 ‘돈오점수’에 가깝다. 깨달은 다음에 반드시 출세간적 수행의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열반을 성취하였다고 해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닦음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탐진치의 소멸과정이나 다름 없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번뇌가 소멸되었을 때 깨달음이 실현되는 것으로 본다.
표를 만들어 보면
버스웰교수의 강의 내용을 기본으로 하여 10가지 족쇄 (結, saṃyojana)를 추가하여 표를 만들어 보았다.
구분 |
세간적 수행 (修) |
첫 번째 깨달음 (初悟) |
출세간적 수행 (修) |
깨달음의 완성 (證悟) |
영어 |
Cultivation |
Awakening(悟) |
Cultivation |
Realization-awakening |
산스크리트어 |
Laukika-bhavana-marga (worldly) |
Dharsana-marga (열반체험) |
Lokattara- bhavana-marga (supermunda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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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어 |
修 |
견도(見道) |
수도(修道) |
무학도(無學道) |
성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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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원 |
사다함/아나함 |
아라한 |
10가지 족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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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지는 것
1) 실체가 있다는 환상(有身見) 2) 모든 일에 대한 의심(疑) 3) 미신적 관습에 대한 집착(戒禁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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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어지는 것
4)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欲貪) 5) 마음의 분노(有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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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지는 것
1) 형상에 대한 욕망(色貪) 2) 무형상에 대한 욕망(無色貪) 3) 자만심(慢) 4) 자기정당화(悼擧) 5) 진리를 모르는 것(無明) |
선언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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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원 선언문
“무엇이든지 생긴 것은 소멸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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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한 선언문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
버스웰 교수는 크게 세간과 출세간으로 나누었다. 그런데 출세간의 시작은 처음 깨달았을 때 인 ‘초오(初悟)’ 인것을 알 수 있다. 초오과정을 거치게 되면 열반이 진실로 무엇인지 알게 되고 출세간적 수행의 길로 입문하게 되는데, 이것을 ‘견도(見道, Dharsana-marga)’라 한다.
이렇게 한 번 열반체험을 하게 되면 언젠가 도가 완성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초기경에서는 최대 일곱생 이내에 나고 죽는 일이 없는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되기 까지 두 단계를 거쳐야 되는데 그 과정이 사다함과 아나함이다. 이 과정은 탐욕과 성냄이 옅어지면서 소멸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수도(修道, Lokattara- bhavana-marga)’라 한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아라한 되었을 때 더 이상 이룰 것도 없고 배울것도 없기 때문에 ‘무학도(無學道)’라 한다.
이처럼 초기경전에 따르면 깨달음의 과정은 점차로 닦아 도와 과를 완성하는 ‘점수’인 것을 알 수 있다.
범부(뿌투쟈나, puthujjana)와 성자(아리야뿍갈라, ariya-puggala)
깨달은 자들은 어딘가 달라 보일 것임에 틀림없다. 보통사람들과 달리 깨달은 자만이 가지는 특징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위의 표에 있는 10가지 족쇄 중에 세 가지를 들어서 설명할 수 있다.
가장 먼저 그가 깨달았는지 깨닫지 못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을 타파하였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런 유신견은 모든 것에 실체가 있다는 환상을 말한다. 그래서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10가지 족쇄중에 가장 먼저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다름아닌 범부(뿌투쟈나, puthujjana)와 성자(아리야뿍갈라, ariya-puggala)를 가르는 기준이다. 그런 범부는 어떤 것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자의 흐름에 들지 않으면 모두 범부이다. 그런 범부는 인간 뿐만 아니라 천신도 해당된다. 그리고 아무리 학식이 도를 많이 닦아 득도 하였다고 할지라도 영혼이 있다는 등의 실체론을 주장하고 있다면 역시 범부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본다.
이렇게 유신견은 범부와 성자를 가르는 기준이 되기 때문에 깨달았는지 깨닫지 못했는지에 대한 첫번째 판단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범부와 성자를 구분할 수 있는 기본적인 판단수단, 유신견(有身見)
그렇다면 유신견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에 들어 있는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
유신견(有身見)’이라 번역한 사까야딧띠(sakkāya-diṭṭhi)는 sakkāya(존재의 무더기=오온)+diṭṭhi(견해)의 합성어이다. 사까야(sakkāya)는 다시 √sat(구분하다)+kāya(몸)로 분해된다.
PED에서 ‘the body in being, the existing body or group; as a technical term in Pāli psychology almost equal to individuality; identified with the five khandhas.'라고 설명되듯이, 존재를 이루는 몸, 존재하는 몸이나 무더기, 심리학의 전문용어로는 개인과 거의 같으며 오온(五蘊)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딧띠(diṭṭhi)는 어근 √dṛś(보다)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PED에서 ‘view, belief, dogma, theory, speculation, especially false theory, groundless or unfounded opinion.’이라고 설명되듯이 견해, 믿음, 사상, 교리, 주의, 추론, 그 중에서도 삿된 견해, 사실무근의 사론(邪論)을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로는 ‘삿된 견해’란 뜻의 밋짜딧띠(miccha-diṭṭhi)와 같은 말이다. 반면에 바르고, 참되고, 훌륭한 견해는 삼마딧띠(sammā-diṭṭhi)라고 하는데, 이 바른 견해는 도에 들어서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첫 번째 조건이다.
그래서 사까야딧띠(sakkāya-diṭṭhi)는 PED에서 ‘theory of soul, heresy of individuality, speculation as to the eternity or otherwise of one's own individuality.’라고 설명되듯이, 불멸하는 영혼이나 인격 주체와 같은 존재론적 실체가 있다고 믿는 그릇된 견해이다. 이러한 의미로 '자아에 대한 사견‘이라 번역되는 앗따딧띠(atthā-diṭṭhi)와 같은 말이다. 중국에서 유신견(有身見)이라고 번역했고, 영어권에서는 personality belief, wrong view of self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유신견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1) 오온(五蘊)이 바로 자아라는 생각,
(2) 오온 안에 자아가 들어 있다는 생각,
(3) 자아 안에 오온이 있다는 생각,
(4) 자아가 오온의 주관자란 생각이다.
빨리 경에 나오는 유신견의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성자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정통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바른 사람의 법에 정통하지 못하여 물질[色]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물질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물질이 자아 안에 있다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알아차린다. 느낌[受]을 … 인식[想]을 … 행[行]들을 … 아는 마음[識]을 자아라고 알아차린다. 아는 마음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아는 마음이 자아 안에 있다고, 아는 마음 안에 자아가 있다고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유신견이 있게 된다.”(M44)
이러한 유신견은 중생들을 윤회에 묶어두고 있는 10가지 족쇄(結, saṃyojana) 중 첫 번째로 성자(ariya-puggala)와 범부(puthujjana)를 판단하고 걸러내는 금강석이다. 왜냐하면 이 유신견을 타파하지 못하면 성자의 초보단계인 수다원도 될 수 없기 때문이고 유신견으로 대표되는 족쇄들이 풀리지 않으면 아무리 깊고 미묘한 천상에 태어나더라도 탐욕(lobha), 성냄(dosa), 어리석음(moha)의 불길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와 십이연기의 주해모음에서)
유신견은 범부와 성자를 구분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판단수단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아나 영혼, 또 그 변치 않는 근원적 존재가 있다라고 생각한다면 결코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한 그가 제 아무리 도력이 높은 수행자라도 성자의 초보 단계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세간적 수행(Laukika-bhavana-marga)’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이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대표되는 번뇌에 사로 잡힐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자비의 방편이라고?
두 번째로 그가 깨달았는지 깨닫지 못했는지에 대한 판단 기준으로서 화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화를 낸다는 것은 탐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본다. 특히 수행자가 자신의 분을 참지 못하여 화로서 발산한다면 수행자로서 자질이 있는지 또 수행의 결과에 대하여 의심하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그 어떤 경우에서든지 화를 내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수행자가 화를 내는 것에 대하여 ‘자비의 방편’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제자들의 잘못을 깨우쳐 주기 위하여 자비의 매를 든 것이라 한다.
부처님의 전생담에
하지만 다음의 부처님 전생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화를 낸다는 것이 자비의 방편이라는 말이 깨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정도론에 부처님의 전생담에 성냄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몇 편의 이야기가 있다.
목까지 묻혔을 때 에도
27. 예를 들면, 「실라와 자따까」에서 실라와 왕이 자신의 왕비에게 간통을 한 나쁜 대신이 적의 왕을 불러들여 3백 유순이나 되는 왕국을 점령할 때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 출동한 대신들에게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공동묘지에 땅을 파고 천명의 대신들과 함께 목까지 묻혔을 때 마음으로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시체를 뜯어먹기 위해 재칼들이 와서 땅을 파헤쳐 주어서 영웅적인 힘을 발휘하여 목숨을 구하여 야차의 신통으로 자기의 궁전에 들어갔을 때 자기의 침상에 적의 왕이 잠자고 있는 것을 보고도 화를 내지 않고 서로 맹세를 하여 친구로 여기면서 말했다.
“남자는 포부를 가져야 하고
현자는 싫증내지 않아야 한다.
나는 내가 원하던 대로 되었음을 보노라.”
손발을 자를 때 에도
28. 「칸띠와디 자따까」에서는 우치한 까시 왕이 ‘사문이여, 당신은 어떤 교리를 설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나는 인욕을 설합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왕이 가시 박힌 매로 채찍질하게 하고 손발을 자를 때에도 그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머리를 자를 때 에도
29. 이미 성년이 되어 출가한 자가 이와 같이 하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쭐라담마빨라 자따까」에서는 아직 자리에 누워 움직이지도 못할 때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전단향으로 목욕한
왕국의 계승자 담마빨라
그의 팔이 잘립니다.
왕이시여, 제 숨이 넘어갑니다.”
라고 그의 어머니가 탄식하는 와준에도 왕이었던 그의 부친 마하빠따빠는 마치 죽순을 자르듯이 그의 손발을 자르게 했지만 그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의 머리를 자르라고 명령했을 때 ‘지금이 마음을 잘 제어할 때다. 오, 담마빨라여. 지금 그대의 머리를 자르라고 명령한 아버지, 머리를 자르는 사람, 탄식하는 어머니, 그대 자신, 이 네 사람 모두에 대해서 평등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라고 굳게 결심한 뒤 조금도 화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독화살을 맞았을 때 에도
30. 인간의 모습으로 이와 같이 하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축생이었을 때에도 그와 같이 했다. 찻단따라고 이름하는 코끼리가 되어서 독이 묻은 화살이 배꼽을 찔렀을 때도 해로움을 가한 사냥꾼에 대해 마음에 화를 내지 않았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큰 화살에 찔렸을 때 코끼리는
마음속에 화내지 않고 사냥꾼에게 말했다
친구여, 무슨 목적으로, 무슨 이유로
나를 죽이려는가. 이것은 누구를 위함인가.”
이와 같이 말했을 때 ‘존경하는 분이여, 까시 나라의 왕후가 당신의 상아를 목적으로 저를 보냈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녀의 소원을 성취시켜주려고 여섯 색깔의 광채가 찬란하게 반짝이는 아름다운 상아를 뽑아주었다.
먹이가 될 때 에도
31. 큰 원숭이가 되었을 때 바위의 절벽으로부터 사람을 구해주었다. 그 사람이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서 돌을 들어 머리를 내리쳤다.
“마치 숲 속의 다른 짐승들처럼
이것도 사람들의 먹거리로다.
배고픈 자가 이 원숭이를 잡아먹은들 어떠리.
만족스럽게 [먹고 남은] 고기는
여행의 준비물로 가져가리라.
긴 여행을 마치도록 식량이 되겠구나.“
원숭이는 두 눈에 눈물이 가득한 채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존경하는 분이여, 당신은 나의 친구입니다.
당신이 이와 같이 해서는 안됩니다.
당신은 긴 수명을 가진 분이십니다.
다른 자를 막아주셔야 옳습니다.”
라고 말한 뒤 그 사람에 대해 마음속으로 화내지도 않고 자기의 고통도 고려하지 않은 채 오직 그 사람이 안전한 곳까지 이르도록 해 주었다.
장난감처럼 다룰 때에도
32. 부리닷따라는 용왕이 되어 포살의 계목을 준수하기 위해 개미굴의 꼭대기에 누워있을 때 겁의 종말을 예고하는 불과 같은 약을 온 몸에 뿌렸을 때에도, 상자에 넣어 인도 전역에서 장난감처럼 다룰 때에도, 그 바라문에 대해 조금도 화내는 마음을 갖지 않았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상자에 넣을 때에도
손을 눌러 짜부라뜨릴 때에도
계를 파하는 두려움 때문에
알람바나에게 화내지 않았다.”
뱀장수가 괴롭힐 때 에도
33. 짬뻬야라는 용왕이 되어 뱀장수가 괴롭힐 때에도 조금도 화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내가 법을 실천하고 포살을 준수할 때
뱀장수가 나를 잡아 왕실의 성문에서 가지고 놀았다.
푸른색, 노란색, 빨간색 등
그가 생각하는 색깔이 그 어떤 것이든
그의 생각에 따라 그가 원하는 대로 되어주었다.
육지를 바다로 변하게 하고
바다를 육지로 변하게 할 수도 있었다.
만약 내가 그에게 화를 내었다면
그는 그 순간에 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마음대로 했더라면
계를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파계한 자는 구경의 경지를 성취하지 못한다.”
코를 찢어 밧줄에 꿸 때 에도
34. 상카빨라라는 용왕이 되었을 때 날카로운 창으로 여덟 군데에 상처를 내 뒤 상처의 구멍에 가시 돋친 넝쿨을 쑤셔 넣고 튼튼한 밧줄로 코를 꿰어 16명의 마을 청년들이 장대에 메어 옮겨 다니면서 땅바닥에 몸을 내동댕이쳐 큰 고통을 겪게 했을 때에 화를 내어 흘깃 쳐다보기만 해도 마을 청년들을 모두 재로 만들어버릴 수 있었지만 눈을 뜨고 조금도 화난 모습을 짓지 않았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알라라여, 나는 14일과 15일에는
항상 포살을 준수한다.
그때 16명의 마을 청년들이
밧줄과 견고한 창을 가지고 왔다.
포악한 자들이 코를 찢어 밧줄에 꿰어
나를 잡아 낚아갔다.
이와 같은 극심한 고통을 겪을 때에도
포살을 놓치지 않았다.”
(청정도론, 제9장 거룩한 마음가짐, 자애수행, 27~34절)
부처님이 과거 전생에 왕 또는 동물로 살았을 때 이야기들이다. 이 때 부처님은 사지가 절단되거나 먹이가 되려 할 때 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죽어 가는 순간에 ‘마음챙김’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부처님이 전생에 담마빨라라는 이름으로 왕위를 계승한 왕자 이었을 때, 그의 머리를 자르라고 명령한 부왕과 이를 탄식하는 어머니, 그리고 명령을 받아 머리를 자르려는 사람, 또 자신을 포함한 모두에게 평등한 마음 을 내었다고 한다. 이는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사무량심(appamaññā) 즉, 자애(慈, mettā), 연민(悲, karuṇā), 더불어 기뻐함(喜, muditā), 평온(捨, upekkhā)을 말한다.
화를 낸다는 것은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알아차림을 유지하면서 거룩한 마음을 내는 것은 성냄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성냄이 소멸된 자리에 자애의 마음이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에 목이 잘리는 순간까지 화를 내지 않고 그 대신 자애와 연민, 그리고 평정심을 발산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화를 낸다는 것은 아직까지 탐진치 삼독중에 성냄이 제거 되지 않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성냄이 남아 있다면 그와 반대로 자애가 부족하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화를 잘 내는 자는 일반적으로 자비롭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제자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었다는 일화는 자비의 방편이라기 보다 아직 덜 깨쳤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연기적으로 이야기 하면
그가 깨달았는지 깨닫지 않았는지에 대하여 아는 세 번째의 방법은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영혼’이 있다거나 ‘상락아정’을 말한다면 깨닫지 못하는 것으로 본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대신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말하는 자는 깨달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연기법으로 대표된다. 즉 그가 연기적으로 이야기 하면 깨달은 자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열가지 족쇄 중에 가장 마지막에 있는 ‘무명’과도 관련이 있다. 무명이 타파 되면 아라한이 되어 깨달음이 실현되고 완성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무명이라고 하는가?
수행승 들이여 괴로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생성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것을,
수행승들이여, 무명이라고 부른다.”
무명은 한 마디로 사성제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사성제는 부처님이 위없는 바른 깨달음(무상정득각)으로 증득한 연기법에 대한 것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의 한 마디 설법에 성자가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많이 접한다. 이는 연기법을 들으면 인격적인 변화를 야기한다는 말과 같다. 부처님의 법문을 들음으로서 중생에서 성자로 계보가 바뀌는 것이다. 그런 대표적인 문구가 초전법륜경에서 보는 다음과 같은 말이다.
“무엇이든지 생긴 것은 소멸한다.”
이 문구는 부처님이 오비구 앞에서 처음으로 법의 바퀴를 굴렸을 때 그 중 ‘꼰단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면서 말한 것이다.
이렇게 최초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자가 나타났는데, 이에 대하여 초기경에서는 처음으로 법의 바퀴를 굴렸다고 하여 초전법륜이라 한다. 이와 같이 한 번 법의 바퀴가 구르기 시작하자 그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 날까지 법의 바퀴가 굴러 오게 된 것이다.
전달받아 들었어도 깨닫는 경우가
꼰단냐가 말한 것을 일반적으로 ‘수다원의 선언’ 또는 ‘수다원 오도송’이라 하는데, 이는 연기법에 대한 이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에게 직접듣지 않고 전달받아 들었어도 깨닫는 경우가 있다. 마하시사야도 법문집의 주해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다”
이 게송은 나중에 불교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넓게 유포된 게송이 되었으며 사리뿟따(Sāriputta)와 불법의 첫 만남과 동시에 그의 위대한 스승인 아라한 앗사지(Assaji)를 기억하게 하는 귀중한 게송이 되었다.
연기법(paṭicca-samuppāda)에 딱 들어맞는 게송이 없던 시기에 설해진 이 게송은 오늘의 철학적 사고로 음미해 보아도 초기 불교도들의 마음에 가히 혁명적인 영향을 끼쳤으리라 짐작된다.
부처님 당시 라자가하(Rājagaha)는 새로운 사조의 중심지로서 많은 철학유파가 번성하고 있었다. 그 중에 산자야라는 사상가가 이끄는 학파가 있어 250명의 추종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 중 우빠띠싸와 꼴리따는 뒤에 부처님께 귀의하여 2대 수제자가 되었으니 사리뿟따(Sāriputta)와 목갈라나(Moggalāna)가 바로 그들이다.
어느 날, 라자가하의 거리를 거닐고 있던 우빠띠싸는 한 사문의 엄숙한 용모와 고요하고도 위엄 있는 거동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 사문은 부처님의 최초의 다섯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아라한과를 성취한 앗사지였다. 우빠띠사는 이 거룩한 사문이 누구의 제자이며 어떤 가르침을 받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아라한이 탁발을 마칠 때까지 계속 따라갔다.
“벗이여, 당신의 모습은 우아하고, 당신의 눈빛은 맑게 빛납니다. 누가 당신을 출가하도록 설득했습니까? 당신의 스승은 누구시며, 어떤 가르침을 따르고 계십니까?”
하고 묻자, 아싸지 존자는 겸손하게 말했다.
“나는 교의와 계율을 길게 설명하지는 못하고 그 대의만 간략히 말해 줄 수가 있습니다.”
이에 우빠띠싸는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벗이여, 적든 많든 좋으실 대로 말해 주십시오. 제가 원하는 것도 그 대의입니다. 장황한 말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러자 아싸지는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포용하는 연기법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Ye dhammā hetuppabhavā tesam hetum tathāgato āha Tesam ca yo nirodho Evaṃ vādi mahā samano.
“원인에서 발생하는 그 모든 법들,
그들에 관해 여래께서는 그 원인을 밝혀주셨네.
또 그들의 소멸에 대해서도 설명하셨나니,
이것이 대 사문의 가르침이라네.”
(Vin.i.40)
우빠띠싸는 이 게송을 듣자마자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다’라는 것을 그 자리에서 깨닫고 수다원과를 성취했다.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와 십이연기의 주해모음에서)
앗사지(ssaji)비구
사진 : http://thisismyanmar.com/nibbana/21to25.htm
부처님 당시 교단이 막 성립하려는 시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후에 사리뿟따로 불리게 된 우빠디싸가 오비구중의 하나인 앗사지 비구가 마음챙김을 유지하며 경행하는 모습에 감동하여 스승이 누구냐고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가르침에 대하여 간단하게 큰 의미만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다. 그래서 가르쳐 준 것이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하기 마련이다”라는 말이다. 이 게송을 듣고 인격적인 변화를 일으켜 수다원과를 성취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게송을 기억하여 자신의 동료인 훗날 목갈라나라 불리우는 꼴리따에게 전해 주었더니 그 역시 수다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연기법은 듣는 이로 하여금 인격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는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성향에 기인할 것이다. 그것은 한량없는 과거생부터 닦음의 결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깨달은 자라면
이상 깨달은 자에 대하여 그가 어느 정도 깨달았는지에 대하여 아는 방법에 대하여 알아 보았다. 이런 판단의 기준은 열가지 족쇄에 대한 타파를 근거로 한다. 따라서 열가지 족쇄에 대한 내용에 견주어 판단해 보면 그가 깨달았는지, 깨달았다면 어느 단계에 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종종 깨달음에 대하여 누군가 ‘인가’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는 주관적인 판단에 대한 것이다. 열가지 족쇄에 대한 내용처럼 객관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인가는 스승이 제자가 깨달았음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테라와다 불교 전통에서는 인가 제도가 없다고 한다. 이는 깨달음은 있어도 깨달았다고 말하는 자가 없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데 인가된 자의 행위가 막행막식을 한다든가, 재산을 모은다든가, 불같이 화를 낸다고 하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또 무언가 변치 않는 영원한 것이 있어서 이와 합일 되는 것이 깨달음이라 하는가 하면, 그런 상태를 상락아정이라고 주장한다면 과연 진정한 깨달음이라 볼 수 있을까.
하지만 범부들도 깨달은 자에 대하여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열가지 족쇄에 대한 내용이다. 그 중 세 가지 예를 든 것이 ‘유신견’과 ‘성냄’과 ‘연기적으로 말하기’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깨달은 자라면 자아나 영혼, 진아가 있다는 이야기를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깨달은 자라면 결코 화를 내지 않아야 할 것이다. 화를 낸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거나 깨달음이 덜 완성되었다는 말과 같다. 마지막으로 깨달은 자는 연기적으로 말할 것이다.
연기적으로 말하는 것은 모든 현상을 조건발생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원인과 조건 없는 결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외도들이나 하는 것으로서 소위 득도하였다는 자가 이런 말을 한다면 그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표 하는 것과 다름없지 않을까.
2012-01-1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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