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우라가경(뱀의 경, Sn1.1)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 11. 12:03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우라가경(뱀의 경, Sn1.1)

 

 

 

 

우라가경

(Uraga Sutta- The Snake-뱀의 경, 숫따니빠따 Sn1.1)

 

 

 

1. [세존] "뱀의 독이 퍼질 때에 약초로 다스리듯, 이미 생겨난 분노를 극복하는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2. 연꽃의 그 꽃과 줄기를 모두 꺾듯이 탐욕을 남김없이 끊어버린 수행승은, 마치 뱀이 허물을 벗어 버리듯,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3. 흘러가는 급류를 말려버리듯 갈애를 남김없이 끊어버린 수행승은, 마치 뱀이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4. 커다란 거센 물결이 연약한 갈대 다리를 부수듯, 자만을 남김없이 끊어버린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을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5. 무화과 나무에서 꽃을 찾아도 얻지 못하듯, 존재들 가운데 어떠한 실체도 발견하지 못하는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6. 안으로 성냄도 없고, 밖으로는 세상의 존재와 비존재를 뛰어넘는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을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7. 모든 사유를 불살라 남김없이 안으로 잘 제거시킨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을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8. 치닫지도 않고 뒤쳐지지도 않아, 모든 희론을 뛰어넘는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을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9. 치닫지도 않고 뒤쳐지지도 않아, 세상에서 모든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아는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을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10. 치닫지도 않고 뒤쳐지지도 않아, 모든 것이 모든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고 욕망을 버린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을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11. 치닫지도 않고 뒤쳐지지도 않아 , 모든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고 탐욕을 버린 (*1)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2)

 

 

주해 (*1)

 

- 탐욕을 버린 -

 

다섯가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버린 것을 말한다.

즉 형상, 소리, 향기, 맛, 감촉에 대한 감각적 쾌락이다.

여기서 탐욕이란 이것들에 대한 탐욕이다.

 

존자 왕기사(Vangisa)는 존자 아난다에게 시로써 이야기 했다.

 

왕기사 :

" 나는 감각적 쾌락의 탐욕에 불탄다.

내마음은 불 태워지고 있다.

자 고따마의 제자여, 자비로써 탐욕의 불을 끄는 법을 말 해 주시오"

 

아난다 :

" 지각(知覺)의 전도에 의해서 그대의 마음이 불 타 버리네.

아름답고 감각적 쾌락을 수반하는 여인의 모습을 피하라.

모든 지어진 것을 남의 것으로, 자기 것이 아닌 괴로운 것으로 보아라.

자꾸만 타오르지 않도록 그대는 커다란 탐욕을 꺼야만 하네."

 

 

주해 (*2)

 

-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버린다.-

 

원래 강의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을 말한다.

이것들은 각각 열가지 장애 (5하분결과 5상분결)를 상징한다.

 

오하분결은 감각적 쾌락의 세계(욕계)에 속박하는 것이다.

유신견 , 의심, 계금취견,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성냄을 극복하는 것이

이세상을 버리는 것이다.

 

오상분결은 색계 무색계에 속박하는 것이다.

색계욕, 무색계욕, 자만하는 마음, 흥분과 회한, 무명을 극복하는 것이

곧 저세상을 버리는 것이다.

 

 

 

12. 치닫지도 않고 뒤쳐지지도 않아 , 모든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고 미움을 버린 (*3)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주해 (*3)

 

- 미움을 버린 -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 미움을 끊어 편안히 잠자고 미움을 끊어 슬프지 않네.

참으로 하늘 사람들이여,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미움을 죽이는 것을

성자는 가상히 여기니 그것을 죽이면 슬프지 않기 때문이네."

 

" 욕먹은 자를 다시 욕하고, 매맞은 자를 다시 때리면 즐거움이 생겨난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분노에 수반되는 쾌감 때문에 남을 미워하고 분노하고 성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 뿌리에는 독이 있다. 따라서 수행자는 미움을 버려야 한다.

 

 

13. 치닫지도 않고 뒤쳐지지도 않아, (*1) 모든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고 어리석음을 버린(*2) 수행자는,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주해 (*1)

 

- 치닫지도 않고 뒤쳐지지도 않아 -

 

붓다고싸는 '과거를 한탄하며 치닫고 미래를 기대하며 뒤쳐진다.' 라고 말하면서

중도(中道)에 의해서 견해와 갈애와 교만으로 이루어진 희론(戱論)을 뛰어 넘어야 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 말은 부처님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벗이여, 나는 참으로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고 거센 물결을 건넜다.

벗이여, 내가 머무를 때에는 가라앉으며 내가 애쓸 때에는 휘말려 드는 것이다."

 

희론은 전도되거나 어긋난 지각을 원인으로 하는 것으로

불에 닿으면 우리는 고통스럽지만 감관의 조건이 달라진

문둥병 환자에게는 즐겁게 느껴진다.

'문둥병 환자는 즐겁다'라고 전도된 지각을 얻는다.

희론은 잘못된 지각에 연유한다.

 

 

주해 (*2)

 

 - 어리석음을 버린 -

 

초기 불교에서 어리석음은 곧 무명(無明)을 말한다.

그것은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모르는 것을 의미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무명이라고 하는가?

수행승 들이여 괴로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생성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것을,

수행승들이여, 무명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해서 무지(無知)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조차 모른다.

그래서 그의 무지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무지에 대한 무지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무지에 대한 무지는 무지에 대한 무지에 대한 무지이다.

이러한 중층적인 무지의 구조 때문에 무명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14. 어떠한 잠재적인 경향(*1)도 지니지 않고,

악하고 불건전한 뿌리를 뽑아 버린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 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주해(*1)

 

- 잠재적인 경향 -

 

모든 번뇌는 잠재적인 경향이 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다.

 

"존귀한 여인이여, 즐거운 느낌에는 어떠한 잠재적인 경향이 따르고,

괴로운 느낌에는 어떠한 잠재적인 경향이 따르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는 어떠한 잠재적인 경향이 따릅니까?"

 

"벗이여 비사카여, 즐거운 느낌에는 탐욕의 잠재적인 경향이 따르고,

괴로운 느낌에는 분노의 잠재적 경향이 따르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는 무명의 잠재적 경향이 따릅니다."

 

번뇌는 세가지 수준으로 구분된다.

 

잠재적인 경향의 수준에서는 마음에 잠재적인 성향으로만 남아있다.

묶여 사로잡힘의 수준에서는 마음을 사로잡아 노예화 한다.

잘못을 범함의 수준에서는 악하고 불건전한 신체적 언어적 행위를 유발한다.

 

부처님은 장애가 능동적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그것을 출세간의 길을 통해 제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잠재적인 수준에서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15. 이 세상으로 되돌아 올 원인들이 되는, 어떠한 고뇌도 생겨나지 않게 하는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16. 존재에 속박되는 원인으로 작용하는 어떠한 욕망의 숲도 생겨나지 않게 하는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17. 다섯 가지 장애를(*1) 버리고, 동요 없이 의혹을 넘어 화살을 뽑아버린(*2) 수행자는,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주해 (*1)

 

- 다섯 가지 장애 -

 

불건전한 정신적인 상태로서

정신의 집중과 있는 그대로의 깨달음을 방해하는 만큼

장애라고 불리며 거기에는 다섯 가지의 장애가 있다.

 

1) 감각적 쾌락의 욕망, - 다섯 가지 색깔로 물든 물.

2) 분노(악의) - 부글부글 끓는 물.

3) 해태와 혼침 - 이끼가 낀 물.

4) 흥분과 회한 - 바람이 불어 파도치는 물.

5) 매사의 의심 - 흐린 흙탕물에 비유된다.

 

앞의 두가지 장애, 감각적 쾌락의 욕망과 분노는 가장 강력한 것으로 선정이나 삼매의 수행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인데, 그것들은 탐욕과 성냄을 수반하고 있다. 다른 세 가지 장애는 비교적 덜하지만 장애적 요소가 강한 것으로 어리석음을 수반하고 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두가지로 해석된다. 일반적으로 색깔, 소리, 냄새, , 감촉의 다섯 가지 감각의 장에서 일어나는 감각적 쾌락을 말하지만, 때로는 넓은 의미로 감각적인 쾌락뿐만 아니라 부, 권력, 지위, 명예 등에서 발생하는 욕망도 의미한다.

 

두 번째의 장애인 분노는 첫번째 장애와 다른 극단적인 형태의 성냄을 수반하는 것으로 자타에 대한 증오, 화냄, 원한, 혐오 등을 속성으로 한다.

 

세 번째 장애는 해태와 혼침이다. 해태는 정신적으로 아둔한 것을 의미하고 혼침은 마음이 무겁고 가라앉아 졸리는 것을 뜻한다.

 

네 번째 장애는 흥분과 회한인데 흥분은 마음의 흥분, 불안정을 의미하고, 회한은 걱정으로 과거에 대한 후회와 원하지 않았던 결과에 대한 근심을 뜻한다. 이것은 어리석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섯 번째 장애는 의심이다. 의심은 어리석음에 수반하는 상습적인 미결정과 미해결, 신뢰의 결여 등을 뜻한다.

 

 

주해 (*2)

 

- 화살을 뽑아버린 -

 

가시나 화살이 없는 것을 말한다.

탐욕의 화살, 성냄의 화살, 어리석음의 화살, 자만의 화살, 사견의 화살을 말한다.

그러나 경전에는 여러 가지 화살의 비유가 나온다.

 

“감각적 쾌락의 화살이 세상을 꿰뚫으며 욕망의 연기가 항상 휩싸네.

 

“태양의 후예로서 갈애의 화살을 부수어버린 이에게 예배를 드리네.

 

“수행승들이여, 여기 독화살은 이득과 환대와 명성을 의미한다.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은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병든 것이고 종기와 같고 화살과 같고 불행한 것이고

고통스러운 것이고 타자적인 것이고 괴멸적인 것이고

허무한 것이고 자기가 아닌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즐거운 느낌은 괴롭다고 보고,

괴로운 느낌은 화살이라고 보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다고 본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탐욕의 경향을 버린 ‘바른 관찰자’라고 불린다.

그는 갈애를 부수고 결박을 자르고

아만에 대한 바른 이해로 괴로움의 그침에 도달한다.”

 

 

뱀의 경이 끝났다.

 

 

(우라가경-Uraga Sutta- The Snake-뱀의 경, 숫따니빠따 Sn1.1, 전재성박사역)

 

  우라가경(뱀의 경-Sn1.1).docx 우라가경(뱀의 경-Sn1.1).pdf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

The monk who has cut off craving without leaving a trace, as if he had dried up a swift-flowing stream, sloughs off the near shore & far* — as a snake, its decrepit old skin.

출처: http://wisdomthroughmindfulness.blogspot.com/2010_04_01_archive.html

 

 

 

민중의 언어로

 

한글로 번역된 초기경전은 누구나 읽을 수 있다. 어렵고 학문적인 문체가 아니라 대화체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부담감 없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초기경의 특징이다. 이는 부처님이 부처님 당시 지배층의 언어인 범어로 설법하지 않고 민중의 언어인 마가다어로 설법하였기 때문이라 본다.

 

이처럼 민중어로 설해진 초기경은 인위적이지 않고 난해 하지 않아 순진하고 활달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고층에 속한 경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한데 숫따니빠따가 대표적이라 볼 수 있다.

 

단순하고 소박한

 

숫따니빠따는 초기경전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한다. 원형은 부처님 재세시까지 올라가는데 특히 외뿔소경과 마지막 두장(4, 5)의 경우 쿳다까니까야의 닛데사(의석)이라는 주석서가 있을 정도로 오래 된 것이라 한다.

 

이렇게 가장 고층의 경전으로서 중요성 때문일까 쿳다까빠타(소송경)와 상윳따니까야 등 다른 니까야에 숫따니빠따의 게송이 그대로 실린 경우가 많다. 그런 숫따니빠따의 게송을 보면 단순하고 소박하다.

 

이 세상과 저 세상

 

그런데 그런 표현속에서도 부처님의 핵심적인 가르침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우라가경(뱀의 경)에서도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볼 수 있다.

 

우라가경에 대한 전재성박사의 주석을 보면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다. 이 내용에 대하여 전박사는 열가지 족쇄(장애)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 열가지 장애에서 오하분결과 오상분결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오하분결의 경우 욕계에 속박되는 것이라 하였고, 오상분결에 대해서 색계와 무색계에 속박되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욕계에 대하여 이 세상이라 하였고, 색계와 무색계에 대하여 저 세상이라 하였다.

 

존재를 윤회 하게 하는 10가지 족쇄

 

이에 대한 표를 만들어 보았다.

 

 

 

 

존재를 윤회 하게 하는 10가지 족쇄(장애)

구분

수다원

sotāpanna

사다함

sakadāgāmi

아나함

anāgāmi

아라한

arahatta

10분결

 

 

 

 

 

 

10

가지

 

 

1.유신견

sakkāya-diṭṭhi

풀림

 

풀림

 

풀림

 

풀림

 

오하분결 (거친마음의 족쇄)

 

-욕계에 속박

 

이 세상

2. 회의적 의심

vicikicchā

풀림

 

풀림

 

풀림

 

풀림

 

3. 계금취견

Sīlabbata-parāmāsa

풀림

 

풀림

 

풀림

 

풀림

 

4. 감각적 욕망(탐심)

kāma-rāga

풀리지 않음

옅어짐

풀림

 

풀림

 

5. 적의(진심)

paigha

풀리지 않음

옅어짐

풀림

 

풀림

 

6. 색계 집착

rūpa-rāga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림

 

오상분결

(미세한 마음의 족쇄)

 

-색계와 무색계에 속박

 

저 세상

7. 무색계 집착

arūpa-rāga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림

 

8. 자만

māna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림

 

9. 들뜸

uddhacca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림

 

10. 무명(치심)

avijjā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리지 않음

풀림

 

탐진치(번뇌)

소멸안됨

소멸과정

소멸

 

삼분도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

 

수행의 시작

수행의 과정

수행의 완성

2012-01-11 진흙속의연꽃

 

 

표에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수다원의 경우 유신견의심계금취가 극복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견(正見)이란

 

여기서 유신견이라 함은 나 또는 자아, 영혼 등 변치 않고 고정된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견해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이를 삿된견해로 본다. 

 

의심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의심을 말하는데 특히 연기법에 대한 의심을 말한다.

 

계금취견은 잘못된 수행방법에 대한 것이다. 이는 정견이 서 있지 않으면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 때문에 결코 해탈과 열반에 이를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이 때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을 말한다.

 

이 정견에 관하여 우리나라 선사들은 본래면목을 아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본마음바탕, 참나를 찾는 것이 정견이라 하는데,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참나를 찾는 것은 계금취견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수다원의 오도송

 

이렇게 세 가지 족쇄 즉, 유신견, 의심, 계금취견에 대한 속박이 풀리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는데 여전히 탐진치는 남아 있다. 하지만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수다원의 경우 악처에 떨어질 정도로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에 얽매이지 않는 것으로 본다. 이런 단계에 대하여 견도라고도 한다.

 

이때 견은 팔정도에서의 정견으로서 곧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사성제를 이해한 단계를 말한다. 그래서 사성제에 대하여 이해하였을 때,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을 설하였을 때 꼰단냐가 이해 한 그 단계를 말한다.

 

이때 꼰단냐는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무엇이든지 생긴 것은 소멸한다.”

 

 

이것을 보통 수다원의 오도송이라 한다. 사성제에 대한 모종의 이해차원이다. 이렇게 사성제를 이해 한 후 탐진치를 소멸하는 수행에 들어가게 되는데, 바로 이 단계가 사다함과 아나함의 단계라 한다. 이 단계는 탐진치가 소멸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오도송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번뇌 다한 자는

 

하지만 아라한이 되어 탐진치로 대표되는 번뇌가 마침내 남김없이 소멸되었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완성한 것으로 보는데, 이때 번뇌가 다한 자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고 한다.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이 것을 일반적으로 아라한의 오도송이라 한다. 초기경에서 자주 보는 게송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도송은 두 번 있게 되는 셈이다. 사성제를 이해하였을 때 한 번,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하여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되어 더 이상 나고 죽는 일 없는 열반을 성취 하였을 때 한 번, 이렇게 두 번 오도송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명(無明)이란

 

아라한이 되면 가장 마지막으로 무명이 타파된다고 하는데, 이에 대하여 13번 게송에서 “~어리석음을 버린 수행자는이라고 하였다. 이 어리석음이 무명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박사의 주석을 보면 어리석음이라는 것이 곧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초기경에서도 실려 있다고 한다. 즉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무명이라고 하는가?

수행승 들이여 괴로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생성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것을,

수행승들이여,

무명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부처님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무명이라고 명확히 말씀 하신 것이다. 그런데 사성제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이다.

 

무지에 대한 무지

 

부처님이 사성제에 대하여 설하였지만 불교와 인연이 닿지 않아 사성제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아직 불교를 접하지 않았거나 유일신교 등 이교도들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성제가 거룩한 진리라는 것을 알 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무명이라는 것 자체도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그런 무지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무지에 대한 무지라고 전재성박사는 말한다. 이런 중층의 무지의 구조 때문에 무명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2012-01-1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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